설교/마태복음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창무 2020. 10. 18.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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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32 강 / 이창무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말씀 / 마태복음 21:33-46
요절 / 마태복음 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가을이 왔습니다. 뇌성마비 시인 김준엽 시인의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시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놓아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우리 인생이 다 끝난 후 결산의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으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33)"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여우가 들어와서 포도나무를 짓밟지 않도록 산울타리를 둘렀습니다. 포도주를 쉽게 제조할 수 있도록 즙 짜는 틀도 만들었습니다. 포도 서리하러 오는 도둑들을 감시할 수 있도록 망대를 세웠습니다. 주인은 포도원에 필요한 일체의 시설을 완벽하게 구비했습니다. 길거리에 나가보니 코로나로 인해 직장을 잃고 빈둥거리며 손가락만 빨고 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이를 본 주인은 그들을 다 농부로 고용했습니다. 농부들은 풀옵션 최신식 포도원에서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크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게다가 주인은 농부들을 믿고 포도원 운영을 그들에게 다 맡기고 먼 타국으로 장기출장을 떠났습니다. 거의 무제한의 재량권이 주어졌습니다. 다만 주인과 약속한 한 가지만 잘 지키면 되었습니다. 그 약속이 무엇일까요? 열매 거둘 때가 가까워지자 포도원 주인은 농부들과 약속했던 세를 받고자 종들을 보냈습니다. 이 세는 포도원 주인과 농부들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표지입니다. 포도원이 자기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임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주인이 농부들에게 세를 바치도록 것은 이것으로 부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농부들과 관계의 끈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주인은 농부들이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열매를 바치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35,36)" 농부들의 반응은 기대와 정반대였습니다. 약속했던 세를 바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만약 제가 주인이었다면 당장 동대문 경찰서에 연락해 전경 한 부대를 끌고 가서 모조리 잡아 족쳤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너그러운 주인은 또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경력 30년 이상의 노련한 종들을 모아서 팀으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직업은 포도원 주인의 종이었습니다. 도대체 농부들이 왜 이런 못된 짓을 벌이는 것입니까? 
첫째는 은혜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농부들은 처음에는 주인이 일할 수 있는 모든 환경과 기회를 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점점 자신들이 받은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은혜를 망각하니 감사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둘째는 포도원의 모든 소출이 자신들의 땀의 대가라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열매를 맺기까지 농부들의 여러 수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전부 다 자신들의 공로이겠습니까? 포도밭과 산울타리와 즙 짜는 틀과 망대는 누가 주었습니까? 주인이 그들에게 환경과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셋째는 자신들이 포도원을 차지할 수 있다는 환각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농부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타국으로 떠난 뒤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주인의 섬세한 배려였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주인의 배려를 주인에 대한 멸시로 되갚았습니다. 이런 물렁물렁한 주인이라면 자기들이 얼마든지 포도원을 빼앗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농부들의 문제는 망각, 착각, 환각, 이렇게 삼각에 빠진 것이었습니다.

이 포도원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농부들은 종교지도자들을, 종들은 선지자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그들에게 극상품의 포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삶의 터전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 큰 은혜는 아무리 감사를 표현해도 부족했습니다. 이제 백성들이 해야 할 것은 오직 한 가지,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섬기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다 잊어버렸습니다. 물질과 쾌락을 추구하는 탐욕스러운 자들로 변해갔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길 거절했습니다. 스스로 왕이 되어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끊임없이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하나님의 자비하신 손길을 뿌리치고 도리어 선지자들을 때리고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 속에는 지나온 이스라엘의 역사가 축약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비유는 우리로 하여금 창세기 2장과 3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이 준비된 에덴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거기에 아담을 두시고 그 땅을 관리하고 경작하도록 하셨습니다. 아담은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임의로 먹으며 무한대의 자유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도록 하셨습니다. 이 선악과는 아담에게 너는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 네 위에 너의 창조주이시며 주인이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지였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어느새 감사를 잊어버리고 불평이 생겼습니다. 그 나무를 보자 꼭 따먹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마침내 자기가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며 반역을 저질렀습니다. 그 이후로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어떻게 해서는 하나님을 밀어내고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성향이 깊숙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생명과 물질과 시간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습니다. 당신 머리 위에 당신의 참된 주인이 계시다고 말해주면 온 몸으로 거부합니다. 그 진실을 일깨워 주는 사람을 도리어 미워합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류는 포도원 비유의 배은망덕한 농부들이고, 하나님께 반역했던 아담의 후예들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갈등과 다툼이 바로 본래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사유화하려는 탐욕에서 비롯됩니다. 제가 아는 한 회사에서 연구소장이 회사를 집어 삼키려는 야심을 품었습니다. 온갖 권모술수를 부린 끝에 마침내 사장을 쫓아내고 자기가 사장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실력 있는 직원들이 다 떠나고 고객들도 떨어져 나가 버렸습니다. 결국 회사를 폐업하게 되었고 그 사람은 사장은커녕 연구소장 자리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갈등과 분열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부분 본래 하나님의 소유인 교회를 특정인이 사유화하려고 시도하다가 사단이 벌어지는 경우입니다. 나의 생명, 나의 가족, 나의 직업, 나의 소유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아무 자격 없는 우리를 다만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해 주셨고 목자의 사명까지도 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어떻게 감히 딴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포도원을 주시고 그 속에서 일하며 열매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시간이 흘러도 이 감사를 놓치지 않고 꼭 붙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은 이 심각한 사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습니까?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37)" 포도원 주인은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내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종들이 갔기 때문에 농부들이 무시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아들만큼은 존대하리라 기대했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인이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주인이 너무 낙관적이고 순진해서 바보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합리성과 현실을 따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돌처럼 딱딱한 굳어진 농부들의 마음을 어떻게 다시 돌이킬 수 있을까?’ 오직 이 생각뿐이었습니다. 주인은 그들을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에 이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에 눈 먼 주인은 마침내 자기 아들을 반역한 농부들에게 보내었습니다. 이에 대해 농부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38,39)” 이 장면에서 우리는 한 번 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농부들이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해도 너무하는 것 아닙니까? 농부들이 이렇게 한 것 역시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좋은 포도원을 통째로 꿀꺽 집어삼키고 있다는 탐욕에 눈이 멀었습니다. 과연 욕심대로 포도원은 농부들의 차지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 대답은 다름 아닌 종교 지도자들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41)” 농부들이 포도원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 했던 시도는 다 헛된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는 특권도 잃어버리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만약 농부들이 아들을 존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본문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복음 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이 보낸 자기 아들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역한 세상을 얼마든지 다 쓸어 엎어버릴 수 있으셨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죄인들을 당장 심판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자비하신 하나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끝까지 인생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마침내 외아들을 이 죄 많은 세상에 보내셔서 그를 믿음으로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길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단지 멸망을 면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로마서 8장 16,17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양자로 입양해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그에게 유업으로 주십니다. 농부들이 아들을 영접했다면 틀림없이 주인은 그 농부들을 양자로 삼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포도원을 유산으로 나누어 주었을 것입니다. 주인의 아들을 영접하기만 했다면 바라던 대로 포도원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은 왜 이렇게 어리석었을까요? 이 농부들처럼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존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싫어하고 미워했습니다. 내가 주인이 되는 것을 가로 막는 방해물 정도로 여겼습니다. 마침내 성문 밖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한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기원후 70년 로마 장군 디도에 의해 예루살렘과 성전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스토리는 이렇게 처절한 비극으로 끝나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42)” 우리 시대 건설업, 건축업을 하시는 분들을 향해 흔히 노가다 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이렇게 비하의 의미가 좀 섞여 있습니다만 고대 시대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건축을 하려면 수학과 공학의 원리를 알아야 했기 때문에 당대에 엘리트 지식인 대우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건축자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버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머릿돌은 건물을 세울 때 출발점이자 기준이 되는 돌입니다. 즉 예수님을 기초로 해서 새로운 집이 지어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버림받은 돌이 머릿돌이 되다니 참 기이한 일이고 놀라운 일입니다. 이 말씀은 실제로 현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버림 받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지만 그후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셔서 구약 시대 이스라엘을 대신할 새 이스라엘,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탄생시키셨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신약 시대의 교회입니다. 

교회의 역할과 사명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43)” 41절에 이어 43절에도 열매가 특별히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 받은 특권만을 누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마치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처럼 잎만 무성했지 열매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수없이 돌이킬 기회를 주셨지만 그들은 끝끝내 거부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특권과 영광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제 새 이스라엘인 교회가 옛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특권과 사명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말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면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가 무엇일까요? 오늘 비유에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있습니다. 포도원 농부들도 열심히 농사를 지어 열매를 맺기는 맺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열매를 열매로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인정하시는 열매는 보이는 열매 그 자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나는 청지기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열매를 맺게 해 주신 하나님의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경외하며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맺어야 할 진정한 열매입니다. 드디어 오늘부터 대면 예배를 다시 드리기 시작합니다. 코로나 상황이 심각하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사태를 진정시켜 주신 덕분에 이렇게 함께 모여 예배하게 되어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걱정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혹시 우리가 두 달 간 온라인 예배가 주었던 편리함에 너무 젖어버리게 되지는 않았을까요? 막상 현장 예배를 드리려고 하니 귀찮고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나요? 혹시 우리가 마음이 해이해지고 둔하게 되었다면 오늘 예배를 계기로 새로워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전에 와서 제사하라는 말씀을 거역하고 끈질기게 산당 제사를 고집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과오를 우리가 반복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고백, 경배와 찬양을 드림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요 우리는 그 분의 백성임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주님이 주신 은혜에 대해 감사의 열매를 드리는 자리입니다. 이제 2주 앞으로 다가온 가을 수양회를 준비하면서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로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는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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