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임금의 아들의 혼인 잔치

이창무 2020. 10. 25.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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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33 강 / 이창무

임금의 아들의 혼인 잔치

말씀 / 마태복음 22:1-14
요절 / 마태복음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최근 결혼식에 다녀오신 적이 있는 목자님에 따르면 결혼식이 끝나자 혼주가 하객들에게 도시락을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기념 사진도 모두가 마스크를 쓴 책 촬영을 했다고 합니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예전처럼 혼인 잔치를 성대하게 열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일생에 한 번 밖에 없는 결혼식인데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임금의 아들의 결혼식이 나옵니다. 이 결혼식도 하마터면 다 망칠 뻔한 위기를 맞이합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임금은 이 위기를 어떻게 수습했을까요?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2)" 예수님께서 천국을 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 비유하셨습니다. 세상에는 돌 잔치, 생일 잔치, 칠순 잔치, 종강 파티 등등 많은 잔치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단연 최고의 잔치는 혼인 잔치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일주일 동안이나 결혼식을 했습니다. 함께 모여 준비한 음식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즐거워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혼인잔치가 이 정도로 성대했다면 임금의 아들의 혼인 잔치는 어떻겠습니까? 4절에 보면 임금은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했습니다. 임금은 기호에 따라 즐길 수 있도록 소, 양, 닭, 오리 등 다양한 고기 요리를 부족함 없이 준비했습니다. 어디 고기 뿐이겠습니까? 검은 진주라고 불리는 철갑상어 알 캐비어, 땅 속의 다이아몬드 트러플 버섯,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라는 푸아그라, 상어 지느러미로 만든 샥스핀, 바다 제비가 지은 집으로 만든 제비집 요리 등도 있었습니다. 중간 중간에 특별 공연이 빠질 수 없었습니다. 젊은이들을 위해 빌보드 1위 방탄소년단, 유튜브 최고 조회수를 자랑하는 블랙 핑크가 초대되었습니다. 아울러 중장년층을 위해 장안의 가장 핫한 가수 나훈아 씨가 나와 ‘테스형’을 부를 예정이었습니다. 이 황태자의 혼인잔치에 초청을 받았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만사를 제쳐 놓고 달려가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이 초청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큰 영광이고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잔치에 비유합니다. 선지자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메시야의 잔치가 열릴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에도 어린 양의 혼인잔치가 등장합니다. 마지막 날에 신부인 교회가 신랑인 예수님을 만나 거룩한 혼인예식을 거행하게 될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죽었다고 여겼던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자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왜 하나님 나라를 잔치에 비유했을까요? 우리 인생에서 잔치는 풍요로움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는 순간입니다. 잔치는 기쁨과 평화와 안식이 가득한 순간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천국에는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습니다(계21:4). 황금과 보석이 길에 깔리고 수정 같이 많은 생명의 강이 흐릅니다.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열매가 달마다 열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구원의 잔치, 생명의 잔치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은혜가 넘치는 기쁨과 평화의 나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3)" 여기서 그 청한 사람들이란 원문에는 현재완료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과거에 이미 초청을 받았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당시 풍습으로는 결혼식 일 년 전부터 초청장을 사람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결혼식이 임박했을 때 종들은 초청했던 사람들을 직접 에스코트해 왔습니다. 그런데 일찍이 청함을 받았던 그 사람들이 오기를 싫어하였습니다. 고의적으로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당시 초청을 거절하는 것은 호스트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더구나 임금의 초청을 거절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보통 임금이라면 초청을 거절한 사람을 당장 잡아서 옥에 가두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임금은 달랐습니다. 넓은 아량과 인내심이 있었습니다. 혹시나 처음 보냈던 종들이 경험이 없어 실수를 했을까 하여 이번에는 경험 많고 노련한 유윤희, 이안나, 명사라, 문수정, 진기도 이렇게 더오팀(더불어 오로지팀)을 보내어 다시 한번 더 초청했습니다.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잔치에 오소서(4b)" 사실 임금은 아쉬울 것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람들을 강제로 끌고 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인격적인 분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진정으로 황태자의 결혼을 축하하는 마음으로 잔치에 참석하여 즐길 수 있도록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초청하였습니다.

청함 받은 자들은 왕의 거듭된 초청에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5)" 그들은 왕의 초대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자기 밭과 자기 사업에만 있었습니다. 그들은 왕의 초청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는 양반이었습니다.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6)" 그 남은 자들은 백수건달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최근 결혼하여 신혼 특별 휴가를 받은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자기 아내를 기쁘게 하는 일에만 관심이 가 있었습니다. 임금의 종들이 밤낮으로 카톡 메시지를 보내고 심방하여 초청을 하자 짜증이 났고 곧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종들을 잡아서 때리고 심지어 죽여버렸습니다. 이는 임금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고 반역이었습니다. 임금은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랐습니다.

이 비유에서 임금은 하나님을, 아들은 예수님을, 청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종들은 선지자들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세상 수많은 나라와 민족들 중에서 천국 잔치에 가장 먼저 초청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국 잔치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참석하기를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배척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급기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까지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거절한 것입니다. 그 결과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라는 특별한 지위를 상실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그분의 이름을 짓밟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말하면 이 비유는 남의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그들의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과연 우리 안에는 임금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과 흡사한 모습이 없을까요? 그들은 천국으로의 초청에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이 관심을 기울인 것은 자기 사업과 자기 가족, 이 두 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나쁜 일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사업을 책임감 가지고 잘 운영해 나가는 일은 꼭 필요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자기 가족을 잘 챙기고 돌보는 일은 선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신앙 생활을 한다고 회사 일을 소홀히 해서야 되겠습니까? 사명을 감당한다고 가정을 내팽개치고 나 몰라라 한다면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일상 생활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비유를 통해 깨닫는 분명한 사실은 일상의 과잉은 오히려 일상을 파괴한다는 역설입니다. 일상의 과잉은 현대인의 특징이자 특히 한국인의 특징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다들 참 바쁘게 살아갑니다. 한국에 온 외국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 친구들은 참 대단해요. 밤 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나서 또 새벽까지 놀아요.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보면 나보다 먼저 와 있어요. 도대체 잠은 언제 자요?” 일하느라 바쁘고 노느라고 또 바쁩니다. 캠퍼스에 전도를 나가면 늘 듣는 말이 있습니다. “바빠서 그냥 갈게요. 할 일이 많아요.” 전도자를 여러 번 만났던 사람은 대놓고 짜증을 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냥 조용히 캠퍼스 폴리스에게 신고를 하기도 합니다. 공부 계획, 연애 계획, 자기 계획이 다 있어서 천국 잔치, 구원과 영생의 잔치에 들어갈 일생 일대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버립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또한 하나님은 하늘의 복과 기쁨을 더욱 풍성히 나누어 주고자 우리를 천국 잔치로 계속 부르고 계십니다. 계시록 3장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은 계속해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며 나와 교제하며 은혜의 잔치를 함께 누리자고 말씀하십니다. 이 초청의 음성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저 지금 바빠요. 지금 하고 있는 일 빨리 끝내고 드라마 봐야 한다구요. 나중에 제가 한가하거나 심심할 때나 오세요.” 혹시 이렇게 반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왜 사람들은 자꾸 일상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치는 어리석음에 빠지는 것일까요? 적어도 남들만큼 살아야 하고 뒤쳐져서는 안 된다는 조바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잠시라도 자기 밭과 자기 사업을 그냥 두면 남들이 나를 제치고 앞서 나갈까 불안해집니다. 한 끼를 먹어도 맛집에서 먹어야 하고, 놀아도 남들보다 더 재미있게 놀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리고 열심히 바쁘게 살았다, 무언가를 성취했다는 자기 만족감으로 위안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기 만족감은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는 희락과 화평과는 아주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사람은 결국 허무에 빠지고 맙니다. 공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또 다시 자기 삶을 과도하게 불태웁니다. 아무리 그렇게 발버둥쳐도 허무를 극복하지 못합니다. 결국 내게 의미를 주고 만족을 준다고 여겼던 것들마저 어느 순간 다 지겹다고 느껴지게 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동남아에서 원숭이를 잡을 때 이렇게 잡는다고 합니다. 원숭이들이 잘 다니는 길목에 호리병 모양의 병들을 고정해 놓고 그 안에 쌀을 넣어 놓습니다. 원숭이들이 나와서 손을 그 안에 넣어 쌀을 손에 쥐고 빼내려 하지만 주먹을 쥐고 있기 때문에 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와서 원숭이들을 잡아간다고 합니다. 쌀보다 자기 생명이 훨씬 더 중요한데, 쌀은 다음에도 얻을 수 있는데, 한 줌 쌀을 포기하지 못해 원숭이는 결국 잡혀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원숭이보다 더 똑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이 비즈니스도 중요하고 마이 패밀리도 중요하고 다 좋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것은 아닙니다. 좋은 것 때문에 최고의 것을 놓쳐 버린다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최고의 것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최고의 기쁨은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 나라 잔치로 초대해 주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밭에 가야 한다는 이유로, 내 사업을 하러 가야 한다는 핑계로 하나님 나라로 초대를 거절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날마다 은혜의 잔치로 나아가 천국의 기쁨과 풍성함을 누리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초청을 받은 자들이 초청을 거부함으로 혼인잔치는 쫄딱 망하고 말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임금은 다시 종을 불러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8,9)" 네거리에는 별별 사람들이 다 있었습니다. 신사 숙녀만이 아니라 할 일 없는 사람들,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사람, 부랑자들, 어중이떠중이들도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감히 황태자의 혼인잔치에 들어올 자격이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10절에 보면 종들은 명령을 따라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잘 생긴 사람이나 못 생긴 사람이나 가리지 않고 아무나 다 데리고 왔습니다. 이로서 임금의 아들의 혼인잔치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신약의 교회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은 단일 혈통, 단일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교회는 오대양 육대주 전 세계에서 인간 조건에 관계없이 다양한 인종과 계급에서 초청을 받은 사람들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천국잔치 초청에 응했다 할지라도 잔치에 참석하려면 딱 한 가지 조건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복을 입는 것입니다. 홍콩 루이스 선교사님이 과거 B.C 시절 나이트클럽에 들어가려다가 대충 입은 옷 때문에 물을 흐린다며 입장을 거부당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훤칠하고 잘 생긴 사람도 예복을 입지 않으면 클럽에서 쫓겨납니다. 하물며 황태자의 혼인잔치에 참석하려면 반드시 예복을 입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11). 임금은 그에게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물었습니다(12). 그 사람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종들이 갈아입을 예복을 예식장 입구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빠짐없이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임금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것이며 황태자의 혼인잔치를 가볍게 여긴 것입니다. 그는 결국 사환들에 의해 손발이 묶인 채 바깥 어두움으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습니다(13).

천국 잔치에서 입어야 할 예복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타락하기 전에 사람은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 이후 타락한 인간은 자신을 가려 줄 옷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옷이 없으면 무엇으로 내 연약함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옷이 없으면 무엇으로 내 허물과 죄를 덮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옷에는 두 가지 종류의 옷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스스로 지어 입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옷입니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옷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옷은 하나님께서 입혀 주시는 피 흘려 만든 가죽옷입니다. 이 옷은 내가 짓지 않은 옷입니다. 이 옷은 하나님께서 친히 재단하시고 바느질하신 옷입니다. 이 옷은 어린 양의 보배로운 피를 흘려 만들어 진 옷입니다. 이 옷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리스도는 구원의 옷, 의의 옷입니다. 우리는 의롭지 않지만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옷을 보시고 우리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그리고 천국 잔치에 들어오게 하시고 그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게 하십니다. 이사야서 61장 10절은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예수님께서는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14)" 오늘날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국 잔치에 초청을 받습니까? 그러나 택함을 입은 사람 즉 천국 잔치를 누리는 사람은 항상 소수입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베푸신 천국에 대한 간절한 열망과 소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동안 자기가 입었던 죄악의 옷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사람입니다. 다음 주 우리는 가을 수양회를 갖습니다. 이번 수양회가 코로나로 지친 우리들에게 힘과 위로와 방향이 되는 천국 잔치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초청에 기꺼이 응답하고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음으로 하늘의 풍성한 복을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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