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이창무 2020. 11. 15.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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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35 강 / 이창무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말씀 / 마태복음 23:1-12
요절 / 마태복음 23: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마태복음 23장은 전체 28장 가운데 참 유별난 장입니다. 마태복음만이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서도 이런 대목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특히 저주의 선포가 눈길을 끕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13)” 이런 구절이 무려 일곱 번이나 반복됩니다. 형식만 놓고 보면 5장에 나오는 ‘팔복’의 선포와 구조가 비슷합니다. 하지만 내용면에서 보면 23장의 표현이 훨씬 더 강합니다. 심지어 33절에서 예수님은 거의 막말에 가까운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예수님이 정말 이 말씀을 하셨을까 싶을 정도의 말씀이 23장 전체를 뒤덮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에서 만나는 예수님은 웬만해서는 다른 이들을 비판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보다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든 자를 치유하시고 제자를 양성하는 일에 몰두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여기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콕 집어서 그들이 모욕감을 느낄 정도로 강하게 비판하셨을까요?

1절을 보면 정작 이 말씀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말씀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의 의도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향한 비판과 책망에만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 대상은 옛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새롭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질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달리 강하게 비판하신 까닭은 교회 역시 얼마든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빠졌던 것과 똑 같은 함정과 오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복해서 화를 선포하심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길로 가지 않도록 경계하셨습니다. 섬김의 길, 낮아짐의 길을 끝까지 따르도록 강하게 드라이브를 거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초대 교회는 바리새인이 주도권을 잡은 유대교 안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이 있었기에 교회는 처음부터 외식과 영적 무지에 빠져 버린 유대교와 결별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지적하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들은 말만 하고 실천이 없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2,3)” 여기서 모세의 자리는 회당 앞 쪽에 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사람이 앉는 의자를 말합니다. 이 자리는 가르침의 권위를 나타내는 자리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율법 선생으로서 율법을 가르치고 전수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상당히 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말만 하고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칭 율법 전문가들이 지닌 한계였습니다. 율법을 말로 설명하기는 쉽지만 그대로 살기는 정말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든 가르치는 사람들에게서 거의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제가 잘 아는 한 초등학교 선생님이 있습니다. 평소에 학생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고 다그치고 잔소리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방학이 되면 선생님도 연수를 받는 학생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정말 안 하려고 합니다. 끝까지 과제 제출을 미루고 시험 앞두고 벼락치기를 합니다. 성경 선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설명해 주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양에 가르쳐 준 대로 내 삶을 살아내는 일은 별개의 일입니다. 오죽하면 ‘입만 천국에 가겠다’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이런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내가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이렇게 말하면 될까요? 아니면 삶을 가급적 노출시키지 말고 신비주의 전략을 취해야 할까요? 하지만 남편과 아내와 자녀들은 삶의 모습을 다 알고 있습니다. 삶이 뒤따르지 않는 가르침은 언젠가는 한계에 봉착해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둘째로 그들은 무거운 짐을 남에게만 맡기고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4)” 여기서 무거운 짐은 율법의 짐만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세부 규칙들인 장로들의 유전을 가리킵니다. 장로들의 유전은 한 번 만들어지면 잘 없어지질 않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가지수가 많아지고 더 디테일한 부분까지 규정하게 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런 세부 규칙들을 다 지켜 행하도록 백성들에게 요구했습니다. “안식일에는 5킬로미터 이상 걷지 마라” “정결 예식 때 쓰는 주전자의 물은 반드시 45도 각도로 따르도록 해라” “일주일에 이틀 이상은 금식을 해라” 듣기도 해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게 했으면 그 짐을 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첫 사회 생활했던 LG에서 직속 상사였던 한 차장님이 생각납니다. 이 차장님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손가락 하나만 까닥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부하 직원들을 손짓으로 불러서 계속 일을 시키셨습니다. 방금 일을 주고 그 위에 또 다른 일을 계속 얹어 주었습니다. 쌓이는 업무에 시달리다 보면 어깨가 저절로 축 늘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생에서 짐을 전혀 지지 않고 산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일정 부분 짐을 지고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목자라면 양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과도한 짐을 지고 있지는 않는지 살피고 그 짐을 함께 나누어 지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아래 사람에게 무거운 짐을 맡기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짐 때문에 그가 얼마나 눌리고 힘들지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셋째로 그들은 자신을 남에게 돋보이게 하는 일에만 매달렸습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5-7)” 예수님은 그들이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몇 가지를 제시하셨습니다. 경문 띠는 성구를 넣은 상자를 고정하는 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기억하고 가까이 하라는 취지에서 유대인들은 경문을 이마에 붙이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평범한 크기로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았습니다. 점점 상자를 크게 크게 만들어서 내가 얼마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인지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옷술은 옷 자락 끝 네 귀퉁이에 매다는 꼬인 실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스스로 인식하게 하는 표지 역할을 하도록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기왕 다는 것 확실하게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술을 길게 길게 늘어뜨렸습니다. 너무 길어져서 옷술을 밟아서 넘어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기 위해 몸부림을 쳤습니다. 또한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들에게 랍비라고 불리는 걸 좋아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높임 받고 세움 받고 대접 받기를 좋아했습니다. 여기에 왜 그들이 실패했는가 하는 근본 이유가 드러납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려고 애쓰다 보면 주위 사람들로부터 “믿음이 좋은 사람이다” “경건한 사람이다” 이런 소리를 듣게 됩니다. 당연한 일이고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자칫 거꾸로 이런 소리를 듣는 것 자체가 신앙 생활의 목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뭔가 퍼포먼스를 하게 되고 오버를 하게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렇게 사람의 인정과 칭찬에게 매이게 되면 신앙 생활이 참 피곤합니다. 자꾸 사람들 눈치를 보게 됩니다. 항상 긴장하며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속이고 사람들을 속이고 자기 자신마저 속이는 일이기에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자연스럽지 못하고 어딘가 어색해 보입니다. 속마음을 감추어야 하기 때문에 사람과의 피상적인 관계만 맺을 뿐 깊은 사귐을 가질 수 없습니다. 겉만 그럴 듯해 보일 뿐 속은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내면은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을 하나도 누리지 못하고 점점 메말라가게 됩니다.

지금까지 말씀을 드린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문제를 한 단어로 축약하면 무엇일까요? 바로 외식 곧 위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이 위선에 빠질 위험성이 그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도 우리도 똑같은 함정에 얼마든지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8절에서부터 주어를 바꾸어 ‘너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8-10)” 랍비는 선생님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선생님이라고 칭함 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선생님은 하나님 한 분 뿐이기 때문이다. 또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밖에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혈육의 아버지가 아니라 스승을 가리킵니다. 마지막으로 지도자라는 말을 듣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지도자는 그리스도 뿐이기 때문입니다. 랍비, 아버지, 지도자는 모두 다른 이들보다 위에 있는 이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왜 위선에 빠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위선이란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려면 겉과 속이 달라야 합니다. 실제로는 선생 능력이 없는데도 일단 선생 노릇을 해야 하니 위선적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는 아버지다운 내면성은 갖추지 못했지만 아버지 역할을 해야 하니 위선적이 됩니다. 실제로는 지도자의 내공이 없는데도 일단 지도자가 되었으니 위선적으로라도 지도자 노릇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음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높은 자리에 오를 만한 능력과 내공을 갖춘 사람에게는 이런 말이 해당되지 않겠네요?”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근본적으로 그럴 능력과 내공이 없습니다. 누가 선생이 될 수 있습니까? 누가 아버지가 될 수 있습니까? 누가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 자신에게 묻고 스스로가 답해야 할 질문입니다. “나는 목자가 될 자격이 있고 성경 선생 할 능력이 있는가?” 정말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 질문이 저에게서 떠나지 않습니다. 항상 답은 같습니다. 저는 목자가 될 자격과 능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하나님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설령 아는 것이 조금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깨닫고 공감하도록 설명할 자신이 없습니다. 제 자녀들에게 너희 아빠 어떠시냐고 물어보시면 틀림없이 별 거 없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행하지 못하면 말이라도 적게 해야 할 텐데 이미 너무 많은 말을 해버렸습니다. 제가 전한 메시지의 무게가 저를 짓눌러서 숨을 쉬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늘 말씀에서 선생이 될 생각을 말라고, 아버지가 될 생각을 말라고, 지도자가 될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알고 보면 높아지는 것을 그렇게 좋아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능력도 자격도 내공도 다 안 되면서 분에 넘치는 지위를 차지하게 되면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위선은 영혼을 궁핍하게 하고 병들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3장에서 일곱 번이나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이런 의문은 남습니다. “아무도 자격이 없으면 누가 성경을 가르치고 누가 메시지를 전하고 누가 요회 목자를 합니까? 난 능력도 안 되고 자격이 없다고 아무도 안 하려고 하면 더 큰 문제 아닙니까?” 전적으로 옳은 말입니다. 누군가 하기는 해야 합니다. 선생도 필요하고 아버지도 필요하고 지도자도 필요합니다. 자격이 없으니 못 하겠다며 꽁무니를 빼는 것만이 정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다 아시면서도 다만 은혜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자격이 없어도 선생이 되어야 하고 내공이 없어도 아버지가 되어야 하고 능력이 없어도 지도자가 되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마치 공중에 매달려 외줄 타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면 무책임의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릅니다. 왼쪽으로 기울어지면 위선의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릅니다. 항상 중심을 잡으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때 우리가 중심을 잡을 수 있게 해 주는 장대 역할을 하는 주의 말씀이 무엇일까요?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1,12)” 자기를 스스로 높이려는 사람은 점점 더 위선으로 떨어집니다. 자신의 지위를 잃을까 노심초사하게 됩니다. 경문 띠를 넓히고 옷술을 길게 하는 일에 마음을 쏟게 됩니다. 하나님과 멀어지고 불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을 낮추는 사람, 겸손하게 섬기려고 하는 일에 집중하면 영혼이 풍성해집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생생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심으로써 가장 높은 자리에 이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 예수님이 내게 주신 은혜를 누리고 체험하게 되면 자리의 높고 낮음이,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이 사소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비로서 사람들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며 하나님 앞에 살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이 일이 단번에 완벽하게 되는 일은 아닙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내 안에서 크고 작은 위선을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내면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완전히 다 몰아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방향은 분명합니다.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사는 경험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저절로 자신을 낮추게 될 것입니다. 그 낮은 자리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만나고 진정으로 높아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목자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목자는 아닙니다. 목자는 선한 목자,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 선생임을 자부하지만 성경 선생은 아닙니다. 성경 선생은 각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셔서 말씀을 친히 깨닫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목자의 직분, 성경 선생의 직분을 감당하면서 자기를 낮추심으로 높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연합을 이루어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일생 위선의 죄와 싸우며 사람 앞이 아니라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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