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착하고 충성된 종

이창무 2020. 12. 6. 16:55
반응형

2020년 마태복음 제37강 / 이창무

착하고 충성된 종

말씀 / 마태복음 25:1-30
요절 / 마태복음 25:21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핸드폰 배터리를 언제 충전하시나요? 충전 시기에 따라 성격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계속 충전하는 사람은 남을 행복하게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80% 때 충전하는 사람은 상황 분석력이 뛰어난 사람이고, 50% 때 충전하는 사람은 엉뚱하지만 의리가 있는 편이고, 20% 때 충전하는 사람은 공감 능력이 좋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방전된 후에 충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감정의 기복이 있는 이중성격의 소유자라고 합니다. 언제 충전하든 필요할 때 핸드폰을 쓰려면 배터리가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시든 준비된 사람이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로 이를 명확하게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천국을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유하셨습니다(1). 당시 유대인들의 결혼식은 신랑이 초저녁에 신부의 집을 방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때 신부의 들러리들이 등을 들고 신랑을 맞이한 후 신부가 있는 곳으로 안내를 합니다. 그리고 신랑은 신부와 함께 신랑의 집으로 이동합니다. 이때 신부의 들러리들이 등을 들고 두 사람의 앞 길을 밝혀 줍니다. 신랑의 집에 도착하면 그제서야 일주일 간 계속되는 결혼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그 시대 결혼식에서는 신부 들러리들이 이처럼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비유 속에서 신부의 들러리를 맡은 열 처녀는 미련한 처녀 다섯과 슬기로운 처녀 다섯으로 나뉘어 가졌습니다(2). 미련함과 슬기로움을 나누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습니다(3,4). 미련한 다섯 처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기본적으로 등 안에도 기름이 있지 않아? 이 정도 기름이면 충분하겠지. 뭐.” 반면에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신랑이 예상보다 늦게 오면 어떻게 하지? 신랑이 언제 오든 맞이할 수 있도록 따로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자.”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어떤 결과를 낳게 되었을까요? 초저녁이 지나 밤중이 되었지만 신랑은 오지 않았습니다. 들러리들은 꾸벅꾸벅 졸다가 결국 잠들고 말았습니다(5). 졸음 앞에 장사 있습니까? 미련한 처녀나 슬기로운 처녀나 다 잠들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소리가 났습니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열 처녀들은 벌떡 일어나 등을 준비했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의 등불은 꺼지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그들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누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기름을 나누면 모두가 부족해지기 때문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부리나케 기름을 사러 갔다 왔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사이 신랑이 도착했고 문은 닫히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문을 두드리며 애타게 호소했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이에 대해 안에서 이런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12)”

이 비유에서 신랑은 재림하실 예수님을, 신부의 들러리들은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게 됩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아무 준비도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한 때 예수님이 곧 오실 것이라는 열렬한 기대와 희망을 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자기 생각만큼 그렇게 빨리 오시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때부터 정반대로 태도 전환을 합니다. 예수님이 아주아주 늦게 오시거나 어쩌면 아예 안 오실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적어도 내가 죽기 전에 주님이 오실 일은 결코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놓아 버립니다. 이들은 종말 신앙, 재림 신앙을 마치 한 물 간 유행처럼 취급하면서 자신들을 지혜롭다고 여깁니다. 이들에게는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식은 지 오래입니다. 한 때 활활 타올랐던 신앙의 등불은 기름이 없어 곧 꺼질 듯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럴 때 주님이 재림하시면 어떻게 됩니까?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때서야 황급히 기름을 준비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부모님이나 동역자에게 빌릴 수도 없습니다. 각자의 등불은 각자의 기름으로만 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지 않은 이들이야말로 미련한 자들입니다. 

둘째는 언제든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13)” 이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예상보다 빨리 오실 수도 있고 늦게 오실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든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깨어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늘 초긴장 사태로 지내라는 뜻은 아닙니다. 비유 속에서 보면 미련한 처녀나 슬기로운 처녀나 다 졸다가 잠을 잤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바짝 긴장해서 달릴 때도 있지만, 때로는 한숨 돌리고 쉬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라는 신자의 삶은 한판 승부를 승패를 결정짓는 단기전이 아니라 오래 버텨야 하는 장기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깨어 있는 것은 늘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기름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기름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께서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미련한 다섯 처녀에게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라고 말씀하신 것에 실마리가 있습니다. 주님은 반대로 슬기로운 다섯 처녀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잘 아노라” 그러므로 기름을 준비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성을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를 향한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도 놀라운가를 알고 감사로 그 마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 다시 오실 예수님을 하루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져가는 것입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이런 노래에 마음을 담아 부르게 됩니다. 이처럼 기름이 넉넉히 준비된 사람은 신앙의 등불이 꺼지지 않고 언제나 밝게 빛나게 됩니다. 이들은 주님이 내일 당장 오시든 30년 후에 오시든 언제든 주님을 두 팔 벌려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한 이들이야말로 진정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기름을 채워 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유튜브에서 이것 저것 설교 영상을 찾아 보면 엥꼬 났던 심령을 만땅으로 채울 수 있을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은 유튜브에는 가짜 휘발유, 저질 휘발유도 널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칫 하면 자극적인 설교나 충격 영상에 중독이 되어 영적 건강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기름을 채우는 길은 사실 단순하고 평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믿을 수 있는 길입니다. 바로 날마다의 말씀 묵상과 기도입니다. 우리가 흔히 개인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물론 개인 신앙에 힘쓰지 않는다고 해서 당장 무슨 표시가 나지는 않습니다. 등 안에 있던 기름으로 한 동안 불을 켤 수 있듯이 한 동안 버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바닥이 드러나게 됩니다. 개인 신앙 생활을 통해 주님과의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성을 꾸준히 형성시키지 못한 사람은 언젠가는 신앙의 등불을 켤 기름이 떨어지는 날이 옵니다.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주님을 향한 사랑과 사모하는 마음이 동이 나고 심령이 메마르고 딱딱하게 되는 때가 됩니다. 그리고 곧 엔진이 멈추고 맙니다. 신앙 생활, 목자 생활, 제자도, 이 모든 것을 감당할 힘이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자동차에 빨간 경고가 들어오기 전에 주유를 해야 하듯이, 우리는 신앙 생활에 빨간 불이 들어오기 전에 말씀 묵상과 기도 생활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를 무시하면 미련한 사람이고 이를 실천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새로 시작합시다. 오늘부터 다시 말씀을 붙들고 다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우리 심령을 충만하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오래 버틸 수 있는 충분한 기름을 예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천국을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기는 것에 비유하셨습니다(14). 그런데 종들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왜 똑같이 주지 않고 차등을 두느냐고 항변을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각자의 능력이 다르고 거기에 합당하게 준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오히려 더 공정한 것입니다. 또 한 달란트 하니까 얼마 안 되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은 굉장히 큰 금액입니다. 한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 곧 노동자의 20년치 연봉에 해당합니다. 현재 금액으로 환산하면 최소 6억원 정도 됩니다. 주인은 이런 거액을 왜 종들에게 맡겼을까요? 이를 밑천으로 장사하여 주인에게 유익을 남기라는 뜻입니다. 첫째 종과 두번째 종은 이 주인의 뜻대로 열심히 장사를 해서 각각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세번째 종은 달랐습니다. 한 달란트를 그냥 땅에 파묻어 감추어 두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주인은 종들과 결산을 했습니다. 이때 첫번째 종과 두번째 종은 환한 얼굴로 결산하러 들어왔습니다. 마치 이날만 기다려 왔다는 듯이 의기양양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인이여 보소서 내가 이렇게 많이 남겼나이다” 주인은 그들을 어떻게 칭찬했습니까? “너희가 날 부자로 만들어 주어서 너무 기분이 좋다” 이렇게 칭찬했나요?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21,23)” 주인은 얼마를 남겼느냐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종들의 충성에 주목하고 이를 기뻐하고 칭찬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이나 두 달란트를 남긴 종이나 똑같이 칭찬했습니다. 문제는 세번째 종이었습니다. 그는 들어올 때부터 돌아온 주인이 전혀 반갑지 않다는 듯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24,25)” 그의 말 속에 주인에 대한 유감이 있음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도대체 주인이 뭘 잘못 했길래 그는 이렇게 주인을 삐딱하게 보고 있을까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주인이 다른 종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주고 자기는 고작 한 달란트만 주었다며 자존심이 확 상했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나를 제대로 대우해 주지 않는 못된 주인으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주인을 위해 열심히 장사하기 싫었습니다. 은행 맡겨 주인의 재산에 이자가 늘어나는 것도 싫었습니다. 더 싫은 것은 장사했다가 망하는 것입니다. 이 종은 그러게 되면 주인에게 혼날 것 같아 두렵다는 투로 말했지만 이는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혹시 장사하다 망해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는 커녕 한 달란트를 감당할 수준조차 안 된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날까 두려웠습니다. 그는 실패가 두려워 차라리 아무 것도 안 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에 대해 주인은 무슨 말을 했습니까?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26)” 이렇게 말한 후 주인은 그에게 있던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 버렸습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종들은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달란트는 각 사람의 능력과 은사에 따라 주신 사명과 역할을 가리킵니다. 장사해서 유익을 남긴다는 것은 맡은 바 사명과 역할을 감당하는 것을 통해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은 능력이 많고 주어진 은사가 크기 때문에 큰 역할과 사명을 맡기십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그보다는 작은 역할과 사명을 맡기십니다. 이것이 부당한 일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한 달란트를 감당할 능력 밖에 안 되는 사람에게 다섯 달란트를 맡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신도 감당을 못해서 불행해지고 또 주위 사람들까지 피해를 입기 때문에 모두가 불행해지는 비극을 초래합니다. 내가 몇 달란트를 받았느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님께서 기회를 주셨다는 점입니다. 처음에 한 달란트만 받았다 해도 그 일에 충성하여 열매를 맺으면 그 다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라” 그렇게 점점 더 역량을 키워가면 되지 한 달란트 받은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만약 그것이 꼭 문제가 되어야 한다면 비유 속 두 달란트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왜 나는 다섯 달란트가 아니하며 얼마든지 불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고 충성했고 주님께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동일한 칭찬과 상급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그 사람에게 알맞게 열매 맺을 수 있는 기회, 칭찬과 상급을 받을 수 있는 기회, 인생을 가장 보람 있게 가치 있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 없습니다. 이 기회를 주셨다는 것 자체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고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귀하게 여기고 감사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그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충성이란 주어진 환경과 기회의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한때 반짝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은 모습으로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만 열심히 하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드려서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주신 사명과 역할에 충성한 사람은 주님이 오시는 그 날이 점점 더 기다려 집니다. 왜냐하면 그 날에 결산이 있기 때문입니다. 충성하지 않은 사람은 결산의 날이 두렵고 부담스럽겠지만 충성한 종에게는 기대감을 가슴 설레는 날이 될 것입니다. 이방인의 사도라는 주님이 주신 사명과 역할에 일생 충성했던 사도 바울은 죽음을 앞두고 디모데에게 이런 심정을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나타나는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라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7,8)” 바울은 자신 뿐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주시는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현재 맡은 바 사명과 역할에 끝까지 충성하다면 우리도 장차 주님께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쓰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도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주님, 보소서! 제가 주님 주신 것으로 열심히 장사하여 이렇게 남겼나이다” 이렇게 보고드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 받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님께 칭찬 받는 충성된 종의 길을 가로 막는 내면의 암초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비유 속에서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이 잘 드러내 주고 있는 자기 사랑이 그것입니다. 자기 사랑을 나르시시즘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이것을 일종의 병으로 간주했는데, 최근에는 그렇게 분류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있고 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흔한 증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볼 때는 여전히 심각한 병입니다. 이 자기 사랑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 충성하지 못합니다. 자기 사랑 때문에 주님께서 내게 주신 달란트에 불만이 쌓입니다. 주님과의 관계성에 금이 가고 삐딱한 시선을 갖게 됩니다. ‘나를 이 따위로 대우하는데 누구 좋으라고 열심히 하고 충성할 필요가 있어?’ 하면서 태업에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가급적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 숨은 반역을 저지릅니다. 남는 시간에 왜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가를 설명해 줄 수 있는 그럴듯한 변명을 찾기에 골몰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말라. 이런 선조들의 지혜가 있지 않습니까?” 자신을 불충을 가리기 위한 이런 말들을 늘어 놓지만 결국 다 핑계에 불과합니다. 그런 점에서 두번째 달란트 비유는 첫번째 열 처녀 비유와 맥이 닿아 있습니다. 누가 장사할 수 있습니까? 기름을 준비한 사람입니다. 누가 주님 맡기신 일에 끝까지 충성할 수 있습니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 만날 날을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기름이 다 떨어진 사람, 주님을 향한 사랑이 식고 은혜가 메마른 사람은 충성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주님 맡기신 일에 충성하는 사람에게는 기름이 채워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님을 더 많이 생각하고 주님이 오실 날이 기다려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기름을 채움으로 장사하고 장사함으로 기름이 채워지는 선순환의 역사가 풍성하게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살다가 주님 오시는 그 날 내 사모하는 주님을 만나고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기쁨,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축복을 다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반응형

'설교 > 마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언약의 피  (0) 2020.12.27
양과 염소의 비유  (0) 2020.12.13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0) 2020.11.29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0) 2020.11.15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0) 2020.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