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양과 염소의 비유

이창무 2020. 12. 13.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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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38 강 / 이창무

양과 염소의 비유

말씀 / 마태복음 25:31-46
요절 / 마태복음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단편 중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 마틴은 아내와 자녀를 먼저 보내고 외로운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마을 노인의 격려를 듣고 성경을 읽던 중 ‘내일 거리를 내다보아라. 내가 너에게 가겠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다음 날 마틴은 늙은 청소부와 함께 차를 마시고, 아기를 안은 젊은 여인에게 식사를 대접했고, 할머니와 소년이 다투는 것을 화해시켰지만 정작 오겠다던 예수님은 만나지 못합니다. 잠들기 전 성경을 편 마틴의 눈에 예수님이 나타납니다. 마틴은 ‘오늘 왜 안 오셨어요?’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낮에 만났던 청소부와 여인과 소년의 모습이 눈 앞에 나타나며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마틴, 내가 세 번이나 너를 찾아갔는데 아직도 나를 못 알아 보겠느냐?” 그때 마틴이 펼쳐 둔 성경에 오늘 말씀의 요절인 마태복음 25장 40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재림하신 후에나 만나게 될 수 있을까요? 아니요. 어쩌면 예수님은 이미 수 없이 우리를 찾아오셨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우리에게 알아차릴 눈이 없었는지 모릅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31)” 예수님께서 처음 세상에 오실 때는 어떤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연약한 한 아기의 모습으로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 없는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종이 되어 섬기는 인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우리의 구원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요? 재림하실 예수님은 초림 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오십니다. 큰 나팔소리와 함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것입니다. 이 보좌는 임금의 보좌이며 동시에 심판하는 재판장의 보좌입니다. 심판의 대상은 모든 민족입니다. 그들을 자기 앞에 모으시고 각 사람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 하실 것입니다(32). 여기서 말씀의 제목인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왔습니다. 양은 한 곳으로 몰려드는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서로 부딪치거나 걸려 넘어지는 일들이 자주 생기기 마련입니다. 반면 염소는 누가 가까이 있는 것을 싫어해 밀쳐냅니다. 그래서 목자는 양떼들 사이 사이에 염소를 섞어 흩어지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양과 염소를 각각 분리해 양은 밖에 두고 염소는 안으로 들였습니다. 왜냐하면 양은 서늘한 곳을 좋아하는 반면 염소는 추위에 약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사람을 양과 염소로 나눈 후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오른쪽은 영광스럽고 존귀한 자리를, 왼쪽은 저주와 수치의 자리를 뜻합니다. 그래서 당시 공회에서 판결할 때 무죄인 사람은 오른쪽에, 유죄인 사람은 왼편에 세웠다고 합니다. 재림하신 예수님도 재판장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누가 의인인지, 누가 악인인지 판결을 내리실 것입니다. 양 아니면 염소, 오른쪽 아니면 왼쪽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이 판결은 온 우주의 최고 법정에서 존엄하신 재판장이 내린 최후의 판결이기 때문에 번복될 수 없고 재심의 여지도 없습니다.

최근에 법무장관과 검찰총장 간의 대립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양측은 저마다 다 자신이 정의의 편에 서 있고 상대방이 불법과 편법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 입장에서 서로 조금도 물러설 뜻이 없어 보입니다. 양쪽의 지지자들이 아무리 우리가 옳다고 목소리를 높여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 이 싸움의 승패는 ‘법원에서 누구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갈리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 내 생각이 맞고 내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똑 같은 것을 놓고 어떤 사람은 검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희다고 합니다. 이 둘 중에 누가 맞는지 끝까지 따져서 결론을 내보자 하는 것이 모더니즘입니다. 아무리 따져도 결론이 안 나고 싸움만 커졌습니다. 그래서 너도 맞고 나도 맞고 모두가 다 맞은 것으로 하자는 것이 포스트 모더니즘입니다. 우리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참과 거짓의 경계가 애매모호하고 의와 불의를 상대적으로 생각합니다. 어디가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모르겠고 양과 염소가 마구 뒤섞여 있습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판결을 내려줄 재판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의로우신 재판장이 세상에 오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재판장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누구도 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 사람의 인생 전체를 종합적으로 보시고 판결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판결은 지극히 공정하고 오류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단호하고 명확할 것입니다. 이 판결에 따라 양이냐 염소냐 오른쪽이냐 왼쪽이냐 영생이냐 영벌이냐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됩니다. 재판에서 중요한 것은 재판장이 판결을 내리는 기준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열심히 산다고 전부가 아닙니다. 열심히 산 것이 의로움을 보증하지 않습니다. 판결 기준도 모르고 엉뚱한 곳에 노력을 기울여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시험을 잘 보려면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정말 인생을 잘 살고 싶다면 재판장이신 예수님의 판결 기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예수님의 판결 기준이 무엇일까요?

최후 심판 날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34)” 요즘 같은 세상에서 서울에서 아파트 한 채라도 상속을 받으면 대박 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세로부터 그들을 위해 맞춤형으로 예비하신 나라를 상속받게 되다니 참 놀랍습니다. 오른편에 있는 자들이 이런 큰 복을 받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5,36)” 이에 의인들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이럴 줄 알았습니다. 다 예상했던 바입니다.” 이렇게 말했나요? 아닙니다. 그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했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37-39)” 이 말이 자신들이 누군가를 돌본 적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주님을 직접적으로 섬긴 기억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너무 의외라는 반응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답변하셨습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 여기서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고 계심을 분명히 나타내셨습니다. 마치 작은 자 한 사람을 자신 몸의 일부분인 것처럼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여기가 처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18:5). 또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예수님은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여기서도 예수님은 박해 받는 교회를 자신과 동일시하셨습니다. 왜 이처럼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와 자신을 동일시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처음 오실 때 지극히 작은 자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태어나실 때부터 사람들에게 이리 저리 치여 결국 마구간 구유 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갈릴리 나사렛 출신 촌 사람이라고 무시당하고 가방 끈이 짧다고 인정받지 못하는 수모를 겪으셨습니다. 마침내 억울하게 고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본래 지극히 크신 분이 이렇게 스스로 지극히 작은 자가 되어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을 돌보고 섬기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나병환자, 중풍병자, 귀신 들린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어디 계십니까?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고생은 다 끝났고 더 이상 고통도 눈물도 없는 곳에서 마음 편히 계신 줄로 여기기 쉽습니다. 주님은 하늘에 계시기에 이 땅의 성도들이 아무리 주리고 목마른 상태에 있어도 그것은 우리 문제일 뿐 주님과는 상관이 없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이 땅의 지극히 작은 자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주릴 때 주님도 배고픔을 느끼십니다. 그들이 목마를 때 주님도 목마름을 느끼십니다. 그들이 병에 걸려 신음할 때 주님도 고통을 느끼십니다. 그때 누군가 그들에게 다가가 먹이고 목을 축이게 하고 옷 입히고 영접해 준다면 그때 주님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무척 고맙게 여기실 것입니다. 매우 기특하게 보실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킬까요? 
첫째는 교회 공동체 안에 어려움에 처한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물질이 없어 가난한 사람들,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들, 병든 사람들, 옥에 갇힌 신자들입니다. 이들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곁에 있는 곳조차 부담스럽게 여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무시하고 따돌립니다. 반면에 부자들은 어디를 가나 환영을 받습니다. 학식이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존경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환영하고 잘 대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인정하시고 칭찬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지극히 작은 자들을 돌본 사람들입니다. 재판장이신 예수님의 판결 기준이 무엇입니까? 작은 자들,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관심을 가지고 돌봐 주었느냐 그렇지 않느냐 입니다.
둘째는 주와 복음을 위하여 스스로 지극히 작은 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선교사와 복음 전도자와 사역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얼마든지 세상에서 큰 자가 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스스로 작은 자가 되기로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사립 명문 휘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나서 에콰도르 아우카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러 갔던 짐 엘리엇 선교사, 미시시피에서 공주처럼 살 수 있었지만 한국 대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단칸방에서 김치를 드셨던 사라 베리 선교사님, 모스크바, 오뎃사, 인도네시아 등등 세계 각 지역에 나가 계신 우리 선교사님들, 동역자들도 없이 외로이 고군분투하고 계시는 개척 센터의 스텝 목자님들이 바로 작은 자들입니다. 그들의 고통은 곧 주님의 고통이요 그들이 흘리는 눈물은 주님이 흘리는 눈물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작은 자들을 향한 베풂과 나눔과 섬김을 냉수 한 그릇까지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다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오시는 날 반드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이 일을 행한 자들을 축복하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해 들이실 것입니다. 그런데 자칫 이 말씀을 행위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뜻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알다시피 구원은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습니다. 그와 동시에 믿음은 반드시 행함의 열매를 맺습니다. 신자의 선한 행실은 참된 믿음을 가졌다는 외적인 증표입니다. 우리는 아무 자격이 없는 죄인인 나를 대신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음을 믿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구원 얻은 사람은 그 마음에 주님의 은혜와 긍휼에 대한 감동이 있습니다. 과거 이기적이고 심령이 메말랐던 사람도 이웃에 대한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샘솟습니다. 그 마음 때문에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도저히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돌보는 수고를 감당하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선행이라는 자각도 없이 그런 삶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후 심판 때 오른 편에 서게 될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지극히 작은 자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으로 어려움에 처한 동역자들과 선교사님들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면 다음으로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임금은 어떤 선포를 했습니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41)” 그들은 앞서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에 들어가게 될 복 받을 자들과 대비가 됩니다. 그들은 왜 이런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42,43)” 이에 대해 왼편에 있는 자들이 반발했습니다. “주여 도대체 우리가 언제 그랬습니까? 한 번도 우리 앞에 나타나신 적도 없으면서 왜 그런 말을 하십니까?”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어떤 답변을 주십니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45)” 이번에도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와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아니한 것은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못을 박으셨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이 지옥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어제 교도소에 출소한 조두순 같은 사람은 반드시 지옥 갈 사람으로 여깁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반의 진실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왼편 사람들이 왜 저주를 받아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까? 어떤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를 가리켜 법에서는 부작위의 죄라 부른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 형법에서도 처벌 대상이 됩니다. 예를 들어 의사가 환자를 보고도 정당한 사유 없이 진료를 거부하면 1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는 부작위의 죄는 작위적인 죄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죄로 간주됩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지 말라고 한 것을 한 것이나 하라는 것을 하지 않은 것은 다 똑 같은 죄입니다. 둘 다 하나님의 계명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누가 복음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졌습니다. 이때 부자는 나사로를 그대로 방치해서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죽은 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반면 부자는 죽은 뒤 음부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부자는 크게 후회했지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린 뒤였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돌보는 것이 신자의 의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가급적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인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신자라면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던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를 싸매 주고 주막에 데려가 지극정성으로 간호하고 돈을 주면서 돌봐 주도록 부탁했던 사마리아 사람처럼 행해야 마땅합니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46)” 24장부터 시작된 재림과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로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 삶은 계속 엎치락뒤치락 합니다.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을 때도 있고, 별로 또는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 삶에 참 중요한 부분들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것도 아니고 영원한 것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최후의 심판에서 재판장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느냐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양일까요? 염소일까요? 오른편에 서게 될까요? 왼편에 서게 될까요? 복을 받아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게 될까요? 저주를 받아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될까요? 누가 영생 또는 영벌에 들어가게 될 것인지는 신비에 속해 있습니다. 우리들의 상식과 통념이 정반대로 뒤집어 지는 경우가 얼마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준 한 가지를 명백하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대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대하는 것입니다. 작은 자와의 관계가 곧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받은 달란트로 장사하는 것은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제 곧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은 지극히 작은 한 아기의 모습으로 비천한 구유에 오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 성탄절이 작은 자와 함께 하는 성탄절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선교사님, 동역자들과 양들, 그리고 우리 주변의 이웃을 적극적으로 돌아보고 섬기는 성탄절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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