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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원 역사에 요셉을 쓰신 하나님
    설교/창세기 2019.09.15 12:46

    2019년 창세기 제 25 강(2019. 9. 15., 이창무)

    구원 역사에 요셉을 쓰신 하나님

    말씀 / 창세기 42:1-45:28
    요절 / 창세기 45:7,8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창세기 마지막 부분을 이끌어가는 두 주인공이 누구일까요? 바로 요셉과 유다입니다. 요셉은 젊은 시절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반면 유다는 젊은 시절 나쁜 짓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이 두 사람은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속에서는 이 둘의 이중주가 아름답게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를 연주하고, 유다는 아버지와 형제를 위한 희생의 사랑을 연주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그 안에서 풍성한 은혜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주 말씀인 41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해 준 대로 7년 풍년 뒤 대흉년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각국 백성들이 애굽에 식량을 구하러 왔습니다. 야곱의 집에도 역시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아들들은 아무 대책이 없이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보다 못한 야곱이 나섰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42:1)?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2)." 단, 야곱은 베냐민만큼은 집에 두고 너희들끼리 가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른 아들들에게는 재난이 미쳐도 괜찮습니까? 현재 베냐민의 나이가 25살인데, 제 앞가림은 충분히 할 나이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왜 이렇게 베냐민에게 집착할까요? 라헬도 잃고 요셉도 잃은 야곱에게 이제 베냐민 밖에는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베냐민을 제외한 열 명의 아들이 애굽으로 내려와 총리가 된 요셉 앞에 섰습니다. 그들은 요셉을 보고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셉이 애굽식으로 옷을 입고 애굽식 헤어스타일과 화장을 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노예로 팔아버린 동생이 대제국의 총리가 되어 있을 줄은 꿈에라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은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그 순간 요셉의 마음속에 무슨 생각이 떠올랐습니까? 복수할 절호의 찬스라는 생각일까요? 이때 요셉은 열일곱 살 때 꾸었던 꿈을 떠올렸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마음 속 깊이 계속 간직해 왔던 꿈이 요셉의 눈앞에서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 꿈은 정말 하나님이 주신 꿈이었습니다. 결코 개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꿈이 이루어졌으니 다 끝난 것 아닐까요? 끝이 아니라 이제부터가 시작이었습니다. 야곱의 가족 안에서 갈등과 상처의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화 '기생충'에서 송강호가 한 유명한 한 대사가 있습니다.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요셉에게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준비해 둔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 첫 단계로 갑자기 요셉은 형들을 정탐꾼으로 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상인들을 포섭해서 이웃 나라를 정탐하도록 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말이 총리로서 전혀 뜬금없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형들은 결백을 호소했습니다. "우리들은 열두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막내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어떤 정신 나간 아버지가 열 명의 아들을 동시에 정탐꾼으로 보내는 위험한 짓을 하겠습니까?" 그러자 요셉이 대답했습니다. "너희 막내아우를 여기 데려와 너희 진실함을 입증해 봐라. 그렇지 않다면 평생 감옥에서 썩게 될 것이다." 일단 요셉은 형들이 삼일 간 단기 감옥체험을 해보도록 했습니다. 그 후 시므온 한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식량을 싣고 갔다가 막내와 함께 돌아오도록 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형들의 반응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요셉은 꿈을 떠올렸지만 형들은 자신들의 범죄를 떠올렸습니다. 이것을 보면 지난 긴긴 세월 동안 형들의 마음속에 죄책감이 떠나지 않고 무겁게 영혼을 짓눌러 왔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요셉을 노예로 팔았을 때 그들의 모습은 죄책감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구덩이 던져 넣고서는 태연히 도시락을 까먹었습니다. 야곱 앞에 천연덕스럽게 피 묻은 요셉의 옷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들은 죄의식으로 고통 받고 있었습니다. 요셉을 잃은 후 딴사람이 된 것처럼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야곱의 모습을 볼 때마다 더욱 괴로웠습니다. 구덩이 속에서 요셉이 애절하게 '나 좀 살려줘. 나 좀 꺼내줘!' 외치는 악몽을 꾸고 잠에서 깬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후회스러웠지만 이미 저지른 일을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천벌이로구나 하는 생각에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형들의 발거음이 무거웠습니다. 그 발걸음을 더 무겁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자루 속에서 곡식을 산 돈이 그대로 발견되었습니다. 요셉이 넣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형들로서는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칫 도둑으로 몰릴까 두려워 떨며 서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놀랍게도 이것이 형들의 입에서 하나님이란 단어가 처음으로 나온 장면입니다. 이전까지 형들에게서 딱히 하나님을 의식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느새 그들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인정하고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요셉의 훈련이 형들의 양심이 서서히 일깨우고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형들과 요셉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괴로움을 당했던 자가 괴로움을 주는 자가 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혔던 자가 감옥에 가두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애굽 총리가 요셉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형들은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웠을까요? 아니, 알았으면 더 두려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요셉이 형들을 왜 이렇게 막 대하는 것일까요? 요셉은 지금 형들에게 복수하는 것일까요? 그 답은 요셉이 형들에게 한 말 속에 힌트가 있습니다.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16)” 요셉은 형들이 자신의 진실함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을 언급하면서 ‘시험하다’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요셉의 동기는 복수가 아니라 시험입니다. 왜 요셉은 형들을 시험하는 것일까요? 형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도록 도와주기 위해서입니다. 또 형들의 양심을 깨우기 위해서입니다. 궁극적으로 형들이 진정으로 뉘우치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형들의 회개는 야곱의 가족이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습니다. 만약 요셉이 이렇게 시험하는 과정 없이 형들을 보자마자 바로 용서하고 받아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형들 입장에서 요셉이 정말 자신을 용서했는지 확신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도 형들이 자신에게 했던 일을 정말 뉘우치고 있는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결국 이들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려면 먼저 형들이 자기를 돌아보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죄를 다루고 계심을 깨닫게 단계가 필요했습니다.

    죄로 인해 깨어진 관계는 그냥 덮어버린다고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회개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 후에 용서가 이루어질 때 그 관계가 온전히 회복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킬 때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안 좋은 일이 항상 내 죄의 결과는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징계하신다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입니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나의 죄를 돌아보면서 회개할 부분이 있는지 점검하는 것은 우리 영혼에 유익합니다. 절대 손해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잘못을 저지르고 실수하고 죄를 범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죄에서 돌이키지 않고 계속 그 가운데 머무르고자 합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께서 죄를 깨닫고 돌이킬 기회를 주셨을 때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회개는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죄 문제가 해결하지 않고,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3:19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회개하면 마음이 새롭게 되고 유쾌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세밀한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돌아보며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집으로 돌아 온 형들은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다 보고하고 아버지를 설득했습니다. "시므온을 살리고 우리 가족이 살려면 이 길 밖에 없어요. 베냐민을 데려가게 해 주세요. 아버지!" 야곱이 말했습니다. "어림없는 소리!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그것만큼은 절대 안 된다." 야곱은 여전히 아들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가져간 돈이 그대로 인 것을 보면 돈을 받고 시므온을 팔아넘긴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습니다. 하지만 기근은 계속 되고 애굽에서 가져 온 식량은 점점 바닥을 드러내었습니다. 이때 유다가 나섰습니다. 베냐민을 위해서 스스로 담보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야곱은 베냐민을 데려가도록 허락했습니다. 또 애굽 총리에게 줄 각종 선물과 갑절의 돈까지 쥐어주며 아들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해 주었습니다. 43장 14절을 보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놀라운 말입니다. 이 말이 정말 야곱의 입에서 나온 말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야곱이란 이름은 움켜쥐는 자라는 뜻입니다. 가장 먼저 형의 발목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러나 동생으로 태어났습니다. 그 다음 장자권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러나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 다음 라헬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러나 라헬을 길 위에서 잃었습니다. 그 다음 요셉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채색 옷만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움켜쥔 것은 베냐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야곱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마지막으로 움켜쥐었던 것마저 다 내려놓았습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의탁하고자 했습니다. 이 장면에서 이렇게 말하고 싶어집니다. “형들이 달라졌어요. 그런데 아버지도 달라졌어요.” 그러면 요셉도 달라졌을까요? 그렇습니다. 고지식하고 꾸밈이 없던 요셉이 능청스러운 연기도 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애굽에 내려온 형제들을 요셉은 집으로 초대해 성대한 잔치를 벌였습니다. 요셉의 기억 속의 베냐민의 마지막 모습은 코흘리개 꼬마였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베냐민을 보자 요셉의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격해졌습니다. 한참 눈물을 쏟은 후에야 겨우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옥에 갇혀 있던 시므온을 포함해서 형들을 나이 순서대로 자리에 앉혔습니다. 형들은 애굽 총리가 우리들 순서를 어찌 아는가 싶어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셉은 베냐민에게만 음식을 다섯 배나 주었습니다. 형들은 전과 달리 전혀 시기하지 않고 즐겁게 식사를 마쳤습니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웠습니다. 그런데 식량을 사서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형들을 요셉의 청지기가 따라왔습니다. 그들을 멈춰 세운 이유는 은잔 하나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형들은 정색을 했습니다. 누구든 은잔이 나오면 죽여도 좋고 우리를 다 노예로 삼아도 좋다며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막내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왔습니다. 꼼짝없이 다 노예가 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관대하게도 베냐민만 종이 되고 나머지는 다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형들은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만약 ‘우리는 살았으니 다행이다. 베냐민! Bye. Bye.’ 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됩니까? 형들은 전혀 변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진심으로 베냐민을 구해내기 위해 최선을 다 한다면 그들은 확실히 변한 것입니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유다가 또 나섰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베냐민 없이 살 수 없다며 총리의 선처를 호소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44:33)" 유다는 과거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하는 요셉이 미워서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동생 베냐민을 위해 자신이 노예가 되겠다고 청원했습니다. 그는 베냐민을 시기하지 않았고, 도둑질을 하여 형들에게 고통을 주었다고 정죄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베냐민을 무사히 돌려보내 아버지를 살리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자신의 전 삶을 노예로 희생하고자 했습니다. 유다가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희생과 사랑의 사람이 되었는지 놀랍습니다. 그는 일찍이 형제를 떠나 불신자와 결혼했습니다. 두 아들이 죽는 고통을 겪었고 며느리와 사이에 아들을 낳는 추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수치와 절망과 고통으로 얼룩졌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요셉을 잃고 일생 슬퍼하는 아버지를 곁에서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고난을 통해 유다 마음에 역사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요셉을 노예로 판 죄에 대한 깊은 뉘우침과 그런 죄를 반복해 아버지 마음에 못을 박는 일을 결코 하지 않고자 결심했습니다. 그는 형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그리스도의 그림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요셉의 시험을 통해 형들은 동생에게 지은 죄를 회개했으며 자신들이 변화되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변화의 정점이 유다의 자기희생입니다. 야곱의 가정은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같은 죄악으로 인해 크게 상처를 입었고 깨어졌었습니다. 그 모든 고통과 아픔을 딛고 병든 가정이 치유되고 회복하게 된 계기가 바로 한 사람의 자기희생이었습니다. 이처럼 한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은 서로를 향한 희생의 사랑입니다. 희생이 없는 곳, 사랑의 수고가 없는 곳에서는 어떠한 만족도 없습니다. 가정이든 교회이든 사회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내가 속한 곳에서 뭔가 긍정적인 유익을 얻고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희생으로부터 얻은 결과입니다. 내가 희생하지 않았고 해서 거저 주어지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가 희생하고 있기 때문에 그 혜택을 내가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희생이 없다면 어떨까요? 아버지가 가정을 뒤로 미뤄두고 자기를 위해서만 산다면 어떨까요? 그 피해는 가족 모두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그래도 별 문제가 없다면 누군가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희생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또 어머니의 희생이 없이 평안하고 건강한 가정의 모습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뭔가 유익을 얻고 있다면 누군가가 수고하고 희생한 결과입니다. 문중호 목자님과 기도 사모님, 경옥 사모님의 수고와 희생이 없다면 수요 어린이 예배가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진다니엘 목자님이 오랫동안 한결같이 자리를 지키지 않았다면 과연 영어 예배가 존속될 수 있었겠습니까? 장선영 사모님의 희생과 수고가 없이 우리가 어떻게 아름다운 특송이나 특주를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이런 사례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언급할 수조차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고 영생을 누리게 된 것도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과거 하나님과 원수였던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미움, 다툼, 시기, 차별 등으로 생긴 모든 장벽을 허물고 사랑 안에서 하나 됨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희생의 삶을 살고자 결단한 것 아니겠습니까? 나의 삶의 목표와 방향을 나의 유익과 만족에만 맞추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을 때 원망과 미움, 분열과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목표는 나의 유익이 아닙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 공동체의 유익과 만족이 내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유익이 나를 포함해서 공동체에 속한 모두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공동체에는 죄악이 감히 틈타지 못하게 됩니다.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고 친밀함과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유다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고 본을 보이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우리가 이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희생을 통해 공동체를 세우며 건강한 관계를 맺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5장을 보십시오. 요셉은 유다의 말을 듣고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습니다. 전에 울었을 때는 자기 신분을 감추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형들이 마지막 테스트를 통과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3)?" 형들은 너무 놀라 기절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내 요셉의 보복이 두려워졌습니다. 요셉은 이런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5-8절을 보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과 시기심 때문에 17세에 애굽에 노예로 팔려서 30세가 될 때까지 노예생활과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사람이 요셉 같은 일을 당하고 나면 복수심을 품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원한도 복수할 마음도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나 섭섭함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요셉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자신의 인생이 형들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과 시기심 때문에 애굽에 노예로 팔려왔지만, 그 역사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가족들과 애굽 백성들을 기근에서 구원하시려고 요셉을 애굽에 보내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70명의 야곱의 가족들이 고센 땅에 정착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신 것입니다. 요셉은 이렇게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섭리 편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았습니다. 요셉의 말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항상 하나님 편에서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41:16)” 아들들 이름을 지을 때도 므낫세(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 버리게 하셨다), 에브라임(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항상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시각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품을 수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랑하였습니다. “아버지를 비롯해서 온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오십시오. 제가 봉향하리이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놀라운 사랑입니까?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이 예수님의 놀라운 십자가 사랑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가 녹아지고 운명이 변하여 섭리가 되었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소망이 되었습니다. 요셉의 용서와 사랑은 바로 예수님의 그 십자가 사랑의 그림자입니다.

    조지. R. R. 마틴이 쓴 '얼음과 불의 노래'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 속에 북부의 왕인 스타크 가문이 나옵니다. 요셉처럼 고지식하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라이벌 라니스터 가문의 음모와 모략에 휩싸여 아버지와 어머니, 장남이 모두 목숨을 잃습니다. 어린 막내딸 아리아 스타크는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이후로 죽을 고생을 하고 이곳저곳을 떠돕니다. 그런데 아리아는 날마다 잠이 들기 전에 무언가를 중얼거립니다. 무엇을 중얼거릴까요? 바로 자기가 복수해야 할 사람들의 목록입니다. 결국 최고의 암살자가 된 아리아는 그 목록에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씩 처단해 나가고 있습니다. 아직 소설이 완결되지 않고 계속 나오는 중이기 때문에 복수에 성공할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소설 속에서 아리아가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은 복수심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복수는 나의 힘’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수심은 사람에게 강한 동기와 의욕을 불러일으킵니다. 악으로 깡으로 버틸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러나 복수심에 사로잡힌 사람이 깨닫지 못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복수심은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망가뜨린 사실입니다. 복수심은 상대방을 파괴하기에 앞서 자기 인격을 파괴합니다. 상대방의 삶을 망치기 전에 내 삶을 망쳐버립니다.

    그러나 복수심보다 더 큰 힘이 있습니다. 바로 용서의 힘입니다. 용서는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용서는 어떤 시련 속에서도 나의 내면의 건강함과 온전함을 지켜주는 힘이 있습니다. 용서는 파괴된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용서는 분열된 공동체를 다시 하나 되게 만듭니다. 용서는 죄인을 돌이키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용서가 너무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요셉의 큰 용서는 둘째 치고 일상의 작은 용서마저 쉽지 않습니다. 동역자의 사소한 말 한 미디에 전투 의지를 불태우곤 합니다. 상대방의 작은 잘못 하나에 분노해서 비상 상태가 선포되곤 합니다. 받은 상처를 차곡차곡 적립해 두었다가 이벤트처럼 한 방에 터트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고받아야 할 것은 상처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복수가 아니라 용서입니다. 왜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람의 악한 일마저도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과 계획 아래에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버리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용서하고 나머지는 모두 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편에서 바라보는 것은 그냥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도 자꾸 내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연습과 훈련이 필요합니다.우리가 소감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인생을 재해석하는 연습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요셉처럼 용서할 수 없는 사람까지 용서하고 품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인생, 멋진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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