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창세기

꿈꾸는 요셉

이창무 2019. 9. 1.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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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창세기 제 23 강 / 2019.9.1. / 이창무

꿈꾸는 요셉


말씀 / 창세기 37:1-36
요절 / 창세기 37: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우리는 그동안 야곱의 인생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앞으로 5 주에 걸쳐 요셉의 인생 여정을 따라가 보고자 합니다. 요셉의 인생은 그가 입었던 옷으로 요약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아들로 지냈던 요셉은 ‘채색옷’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형들의 시기심으로 인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갑니다. 그래서 요셉은 ‘노예의 옷’을 입게 됩니다. 보디발의 집에 팔린 요셉은 그곳에서 인정을 받아 ‘가정 총무의 옷’을 입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고 ‘죄수의 옷’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마침내 ‘총리의 옷’을 입게 됩니다. 옷의 변천사만 봐도 요셉의 인생이 얼마나 드라마틱합니까?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어떻게 하나하나 성취되어 가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첫 단계로 요셉의 꿈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울러 위기 가운데 숨겨진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가나안 땅에 거주할 때였습니다. 이때 가족사의 중심인물이 되는 사람은 바로 야곱의 11번째 아들인 요셉입니다(2). 요셉의 친 엄마 라헬은 둘째 아들 베냐민을 낳다가 일찍 죽었습니다(35:18). 그래서 요셉은 엄마의 사랑을 모르고 컸습니다. 열 명이나 되는 이복형들 대부분 거친 불량배들이었습니다. 이런 가정 형편 속에서 요셉은 십칠 세의 소년이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비행 청소년으로 성장해 있을 가능성이 아주 높았습니다. 그러나 2절 하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형들이 아버지 몰래 술 담배 하고 여자 만날 때 요셉은 그들의 악행에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알렸습니다. 요셉은 왜 이렇게 했을까요? 형들이 미워서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형들을 바른 길로 돌이키고자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거짓에 익숙한 야곱의 혈통 중에서 요셉은 DNA가 달랐습니다. 요셉에게는 아직 세상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함, 죄를 싫어하는 의로운 심정이 있었습니다. 요셉이 어떻게 이런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를 3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야곱은 사랑하는 여인 라헬의 자식이요 노년에 얻은 아들인 요셉에게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다른 자식들은 길거리에서 파는 옷을 사서 입혔습니다. 동생들은 형들이 입던 옷을 물려받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요셉에게는 귀족 자제들이나 입는 채색 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앞서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나타났을 때, 야곱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가족들을 재배치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이때 야곱은 라헬과 요셉을 진영의 제일 뒤편에 두도록 했습니다(33:1,2). 요셉을 향한 야곱의 각별한 애정을 충분히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런 야곱의 특별한 사랑 때문에 요셉은 일찍 어머니를 잃은 슬픔 속에서도 내면이 삐뚤어지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곧고 진실한 건강한 청년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레아의 아들들은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자랐습니다. 어머니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주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이 점점 커져갔습니다(35:22). 빌하와 실바의 자식들은 그들의 어머니가 라헬과 레아의 여종들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열등감이 시달렸습니다. 그들은 레아의 아들들처럼 감히 대놓고 반항하지조차 못했습니다. 그 대신 몰래 비행을 저지르며 소극적인 반항을 했습니다. 이처럼 요셉의 형들이 엇나가게 된 것은 아버지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야곱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 자신이 아버지 이삭의 형 에서를 향한 노골적인 편애를 당해보고선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역시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인가 봅니다. 
한 사람의 인격과 정서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사랑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사랑을 많이 받으면 정서가 안정되고 자존감이 강해집니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도전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시련 속에서도 내면이 삐뚤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정서가 불안하고 자존감이 없습니다. 그래서 작은 시련에도 흔들리고 주저앉아버립니다. 자신의 인생을 소중이 여기지 않고 함부로 살면서 낭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권위에 대한 반항심이 많아서 사회생활을 잘 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누군가의 전폭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받고 자랐습니까? 아니면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습니까? 우리 중에는 요셉처럼 부모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분도 있을 것입니다. 반면 요셉의 형들처럼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성장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은 다 비뚤어져야 합니까? 인격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될 가능성은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육신의 아버지만 계신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사람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습니다. 속담에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편애하지 않는다는 말인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은 없지만, 분명히 더 예쁜 손가락이 있습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사랑만 바라보고 있으면 우리는 비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늘의 아버지가 계십니다. 하늘의 아버지는 우리 각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어느 정도로 사랑하십니까? 나를 위해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요3:16).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이 사랑은 사람에게 사랑 받지 못한 상처를 충분히 다 덮고도 남습니다. 제 아버지는 너무 바쁘시고 과묵하신 나머지 자식들에게 사랑 표현을 거의 하신 적이 없습니다. 감정적인 어머니는 동네에 다 들릴 정도의 큰 목소리로 세 아들들을 쥐 잡듯이 잡으실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 내면에 상처가 많았습니다. 모든 권위에 비판적이고 반항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제 내면을 녹였습니다. 상처가 아물고 반항심이 수그러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다면 아마도 저는 제 자녀들에게도 똑 같은 상처를 주는 아버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사람으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았든 못 받았든, 우리는 내면이 삐뚤어지지 않고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가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점점 더 깊이 깨달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엡3:18,19). 그 사랑 안에서 참된 만족과 행복을 누리며 예수님과 같은 아름다운 성품을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특별한 사랑을 전폭적으로 받은 사람이 치러야할 대가는 없을까요? 4절을 보십시오.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형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고자질하고 혼자 채색 옷 입고 다니고 아버지의 사랑 독차지하는 요셉이 너무 미웠습니다. 그래서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다는 말은 원어로 보면 '샬롬(안녕)?'이라고 다정한 인사말조차 건넬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형들이 요셉을 더욱 더 미워하게 만든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어느 날 요셉이 꿈을 꾸고 형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님들, 내 꿈 얘기 들어보세요.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7).” 형들은 그 꿈을 바로 해석했습니다. “뭐라고!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8)!”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한 형들에게 요셉은 이런 꿈 이야기를 하면 안 되었습니다. 더 미움을 받을 것이 뻔했습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형들에게 꿈을 곧이곧대로 다 이야기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요셉은 한 번 더 꿈을 꾸고 또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형님들, 내 꿈 이야기 또 들어보소.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9).” 이 말을 듣고 형들의 뚜껑이 열리고 분노 게이지가 급상승했습니다. 이번에는 야곱마저도 요셉을 꾸짖었습니다(10). 아무리 예뻐도 집 안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요셉을 형들 앞에서 책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형들은 요셉의 꿈을 버르장머리 없는 동생의 교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 기분 나쁘고 요셉을 더 미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달랐습니다. 요셉의 꿈을 마음속에 간직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렴풋하게나마 요셉이 꾼 꿈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꿈이라는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요셉의 꿈을 어떻게 이해야할까요? 형들의 해석처럼 왕이 되어서 형들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고 다스리게 될 것을 예언하는 꿈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은 결코 이기적인 지배자가 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지도자가 됩니다(40:8, 41:16). 가족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가운데 있을 때 양식을 제공하는 사람이 됩니다(42-44장). 형들이 죄의식으로 아파할 때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품어주는 사람이 됩니다(45장). 그는 누구보다 많이 고생하고 슬픔을 많이 겪지만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가족들의 모든 슬픔과 미움, 쓴 뿌리를 혼자 짊어지고 갑니다. 이로써 마침내 가족들 간에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영접하는 대화합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처럼 앞으로 요셉은 구원자의 길을 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요셉에게 미리 꿈을 통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요셉의 곡식 단이 일어나는 것은 가족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요셉이 분연히 일어나서 그들을 절망으로부터 구출한다는 의미입니다. 가족들이 요셉에게 절하는 것은 굴복해서 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호의에 감사해서 절하는 것입니다. 형들은 꿈의 진정한 의미도 잘 모른 채 무조건 요셉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이때 요셉의 나이 17살이라고 했습니다. 17살이면 우리로 치면 고등학교 2학년 정도의 나이입니다. 이 시기는 중2병에 걸려서 마구 날뛰던 철부지 시절은 지난 나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충분히 성숙해질 수 있는 나이도 아닙니다. 이때는 아직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남아 있습니다. 동시에 이해가 부족해서 이리저리 실수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이 시기는 무엇보다 꿈을 꾸어야 할 시기입니다. 인생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고 방향을 설정해야 할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꿈이 없다는 청소년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되고 싶은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나이는 젊지만 꿈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김동인의 무지개라는 소설에 무지개를 잡으려는 한 소년이 나옵니다. 산 넘고 물 건너 무지개를 쫓아다니던 끝에 무지개는 결코 잡을 수 없는 것이라는 현실 앞에 꿈을 포기합니다. 그 순간 갑자기 소년의 머리가 백발이 되고 얼굴이 쭈글쭈글한 노인으로 변합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노인이 아니라 꿈을 포기한 사람이 노인입니다. 잠언 29:18절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들이 방자히 행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묵시’는 vision을 가리킵니다. 꿈과 비전이 없는 백성은 먹고 자고 감정을 따라 즐기는 삶이 전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방자하게 되어서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셉의 형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아무런 꿈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니 막 닥치는 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주셨고, 우리도 꿈꾸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꿈을 주시되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쓰임 받는 사람이 되는 원대한 꿈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간직한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들로 시기와 질투, 미움의 쳇바퀴 속에서 지지고 볶는 세상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용서와 구원을 전파하게 하십니다. 우리 UBF 선배들은 1960년대 가난한 조국의 현실 앞에서도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말씀하신 예수님께 순종해 세계를 먹이는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을 꿈꾸었습니다(출19:6). 하나님은 오늘날 UBF가 세계 선교에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심으로 그 꿈을 성취하여 주셨습니다. 저는 이번에 유럽 수양회에 참석해서 그 현장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아시아, 아프리카, 미국, 중남미, 유럽 등 전 세계로부터 국적과 인종이 다양한 사람들이 천여 명이 넘게 한 자리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제 꿈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꾸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었지만 잊어버린 사람은 다시 한 번 더 그 꿈을 꿀 때입니다. 이 나라와 캠퍼스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찾아오는 꿈을 꿉시다. 모든 민족과 족속과 방언들 가운데 복음을 전파되어 죽어가던 영혼들이 살아나는 꿈을 꿉시다.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거룩한 꿈을 간직하게 하시고 그 꿈 때문에 언제까지나 순수하고 열정이 넘치는 청년들로 살게 하시기 기도합니다.

요셉에게는 아름다운 꿈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꿈 때문에 요셉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큰일을 겪게 됩니다. 어떤 일이었을까요? 12절을 보십시오. 어느 날 야곱이 요셉에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세겜에서 양을 치고 있는 형들이 잘 있는지 보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13). 요셉은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세겜까지 갔지만 형들을 만나지 못합니다(17). 여기서 요셉은 얼마든지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충성스러운 성품의 소유자인 요셉은 포기를 몰랐습니다. 형들이 도단에 있다는 말을 듣고서 신이 나서 단숨에 달려갔습니다. 그런 요셉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형들의 따뜻한 환대가 아니었습니다. 18-20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형들은 이번 기회에 꼴도 보기 싫은 요셉을 아예 제거해 버리고자 결심을 했습니다. 이들은 지금 존속살인과 시체은닉이라는 끔찍한 범행을 모의하고 있습니다.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 계획된 범죄입니다. 그들은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요셉의 꿈도 함께 묻어버리고자 했습니다. 이쯤 되면 단순히 시기와 미움의 문제를 너머서 하나님께 대한 노골적인 반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꿈을 사람이 묻을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르우벤이 장남으로서 책임감이 들었는지 죽이는 것을 반대하고 나섰습니다(21). 넷째 유다가 마침 지나가는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자고 제안을 합니다(26,27). 이로써 요셉은 은 이십에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형들에 의해서 구덩이에 던져지고 옷이 벗겨지고 노예로 팔려가는 요셉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42:21절에 보면 나중에 형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요셉이 형들에게 애걸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애걸했을까요? “형들, 제발 날 버리지 마세요, 제가 채색옷 안 입을께요. 꿈 이야기 안 할께요. 제발 날 죽이지 마세요, 시키는 일은 다 할께요. 저 아버지 보고 싶어요. 동생 베냐민이 보고 싶어요.” 눈물로 하소연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형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을 구덩이에 던지고 요셉이 가져온 도시락만 까먹고 있었습니다(25). 이 얼마나 잔인하고 매정합니까? 지금 그들은 요셉을 마치 죽어 마땅한 죄인처럼 취급하고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도대체 요셉이 무엇을 그렇게 잘못 했습니까? 형들의 악을 아버지에게 고발한 것이 잘못인가요? 아니면 형들이 악을 행한 것이 잘못인가요? 차별된 사랑을 받은 아들이 잘못인가요? 아니면 차별된 사랑을 주는 아버지가 잘못인가요? 요셉이 하나님께 선택을 받은 것이 잘못인가요? 아니면 요셉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것을 시기하는 것이 잘못인가요? 물론 요셉이 아직 어려서 미숙하고 지혜롭지 못했던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죽어야 할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형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대신에 편리하게도 모든 원망을 요셉에게 다 돌려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을 인정하는 대신에 자신들이 원하는 죄악을 선택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재미있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누가 진짜 악한 짐승인가요? 늑대일까요? 사실 요셉의 생명을 빼앗는 악한 짐승은 요셉의 형들입니다. 어쩌다 요셉의 형들이 악한 짐승이 되었습니까? 시기와 미움의 죄를 회개하기는커녕 계속 키워왔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마음에 있는 시기와 미움을 다스리지 않으면 무서운 열매를 낳습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도 요셉의 경우와 같습니다. 가인은 아벨에 대한 시기와 미움을 다스리지 않았고 결국 동생을 죽였습니다(4장). 사울 왕은 다윗에 대한 시기와 미움에 사로잡혀서 어떻게 해서든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도리어 자기 자신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대상10장). 다른 사람을 향한 시기와 그로 인해 생기는 미움은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사람과 사람을 나뉘게 하며, 공동체를 분열시킵니다. 누군가에 대해서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 미움은 순식간에 커져버리고, 눈덩이처럼 불어나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것, 무엇이든 다 나쁘게 보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다 트집을 잡고, 시비를 걸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야기가 아닙니다. 가인이나 사울이나 요셉의 형들이 특별한 사람이라서 이런 일을 벌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얼마든지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정작 잘못은 내가 저질러 놓고 사소한 트집을 잡아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도 얼마든지 악한 짐승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다 같을 수 없습니다. 다양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다양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 다 다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시기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의 죄성은 나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 나에게 없는 것을 누리고 있는 사람을 주목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괜히 그 사람이 밉고, 싫어 보이고, 하는 것이 다 마음에 안 듭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비교하고 시기하는 마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키우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입니다. 사람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대신 우리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을 위해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받아주셨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 나는 사랑할 만한 구석을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죄인 중의 괴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시고, 내게 측량할 수 없는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미움을 받아야 마땅한 나를 하나님은 사랑으로 품어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받은 자로서 나 역시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고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중에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게 절하게 된 이유가 기근에서 구원해 준 것이 고마워서 때문만은 아닙니다. 요셉이 보여준 놀라운 용서 앞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기하고 미워하는 것은 쉬운 일이고, 지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이 어려운 일이고,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기와 미운 감정이 생길 수 있지만 더 키워서는 안 되겠습니다. 용서와 사랑과 섬김을 키우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요셉의 채색옷은 염소의 피가 적셔진 상태로 야곱에게 보내졌습니다. 형들은 요셉의 죽음을 직접 말하기보다 조작된 증거를 들이밀고서아버지가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유도했습니다.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32)!” 야곱은 요셉의 옷을 보고 자신의 옷을 찢으며 애통했습니다(34). 야곱은 다른 아들들의 위로를 받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뒤를 따라가겠다고 말하며 죽은 아들을 위해 슬피 울었습니다(35). 야곱의 아픔과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요?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내가 왜 그 일을 시켰을까? 세겜으로 보내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얼마나 가슴을 치며 후회하고 괴로워했을까요? 이미 마음이 무너진 야곱에게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묘하게 반복되는 야곱의 인생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였던 것처럼 야곱의 아들도 아버지를 속입니다(27장). 옛적에 야곱이 염소를 가지고 아버지를 속였던 것처럼, 지금 야곱의 아들도 염소를 가지고 아버지를 속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아버지에게 했던 것처럼 아들에게 같은 일을 당합니다. 자신이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두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요셉이 겪는 일들을 보면 마치 우리 인생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요셉은 아버지가 맡기신 일을 성실하게 수행한 결과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갑니다.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꿈을 이야기한 것뿐이고, 자신이 본 것을 사실대로 말한 것뿐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고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요? 요셉에게는 너무도 가혹한 일입니다. 요셉은 왜 이런 일이 자신에게 벌어졌는지, 왜 이런 어려움이 찾아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형들은 계획대로 요셉을 없애는데 성공합니다. 요셉이 말했던 꿈도 모두 끝장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역시 개꿈이었다면서 의기양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요셉의 꿈은 파괴되었고 산산이 부서져버린 것일까요? 만약 요셉의 꿈이 요셉 자신의 것이라면, 꿈의 성취가 요셉에게 달려있다면, 요셉의 꿈은 끝난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 꿈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누구의 어떤 방해가 있다 하더라도 그 꿈은 결국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실 형들은 요셉의 꿈을 막은 것이 아니라 꿈의 성취를 앞당기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요셉의 꿈을 좌절시키기 위해 동생을 애굽에 팔았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 일을 요셉을 애굽의 총리를 끌어올리는데 사용하셨습니다. 훗날 요셉이 이것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 분이십니다. 얼마든지 악을 선으로 바꿀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잊지 않고 그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내 삶에 벌어지는 이해되지 않는 일들과 계속되는 시련 속에서도 견딜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시기, 미움, 다른 사람들로부터 오는 핍박, 아무리 많은 반대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은 결국 완벽하게 성취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온전하신 뜻을 위해, 모든 것을 합당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왜 일어났는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다 알지 못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습니다. 나는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입니다. 믿음으로 오늘 내게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갈 뿐입니다. 계속해서 내가 뿌려야 할 복음의 씨앗을 뿌릴 것입니다. 내가 해야 할 사랑의 수고를 감당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면 언젠가 결국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이 되어야 오늘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의 의미가 다 밝혀질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고 하나님이 만들어가고 계시는 인생의 큰 그림 속에 나에게 맡겨진 어느 한 부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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