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창세기

애굽에서 번성한 이스라엘

이창무 2019. 9. 29.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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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창세기 제 26 강 / 2019.9.29. / 이창무

애굽에서 번성한 이스라엘

말씀 / 창세기 46:1-48:22
요절 / 창세기 47:27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요셉의 이야기는 너무 아름답고 드라마틱합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마지막 주인공이 요셉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요셉 이야기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신 언약 속에 들어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요셉이 아니라 여전히 야곱이 주인공입니다. 요셉을 통해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야곱의 말년의 모습은 언약을 믿고 사는 인생이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지 보여줍니다. 이 시간 언약을 성취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성도의 삶에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사는 사람을 섬세하게 인도하십니다. 지난 시간에 배운 것처럼 야곱은 아들 요셉이 애굽에서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45:26). 요셉이 직접 보낸 애굽산(産) 벤츠 수레까지 왔습니다(45:27). 이쯤 되면 다른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무조건 빨리 들어가서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만나야 합니다(45:28). 그런데 야곱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46장 1절을 보십시오. 야곱은 먼저 브엘세바에 이르러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야곱이 왜 이곳에서 제사를 드렸을까요? 이는 자신이 애굽으로 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하나님께 묻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 기근이 너무 심각합니다. 가기는 가야할 것 같은데 주님의 뜻이 아니라면 가지 않겠습니다. 저를 인도해 주소서." 이때 하나님은 무슨 말씀을 해 주셨습니까? 3,4 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하셨습니다. 애굽에서 그들이 큰 민족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때가 되면 그 곳에서 빠져 나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오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안심하며 브엘세바를 떠났습니다(5,6). 야곱의 모든 가족 칠십 명이 가나안 땅에서 얻은 모든 소유를 이끌로 애굽으로 갔습니다. 레아 자손 33명, 실바 자손 16명, 라헬 자손 14명, 빌하 자손 7명 총 칠십 명이었습니다(8-25).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큰 민족을 이루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은 이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냥 막연히 가나안 땅에 계속 있다 보면 언젠가 큰 민족이 되겠지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가나안 땅은 어떤 곳입니까? 도시 국가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전쟁이 잦은 땅이었습니다. 게다가 기근이 잦아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이런 곳에서 한 부족이 큰 민족으로까지 성장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반면 애굽은 어떻습니까? 애굽은 정치가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비옥하고 넓은 땅이 있었습니다. 야곱의 가족 칠십 명이 큰 민족으로 성장하기에 충분한 여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후 400년 동안 이스라엘이 태아라면 애굽은 양분을 공급하는 엄마의 태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나라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애굽을 마치 인큐베이터와 같이 사용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며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가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나라로 성장하기 위해 무엇이 있어야 했을까요? 무엇보다 그들에겐 먹을 것을 공급 받을 수 있고 외부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땅이 필요했습니다. 과연 애굽에 그만한 땅이 있었을까요? 28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요셉에게 유다를 미리 보내 고센 땅으로 인도하게 했습니다. 그곳에서 드디어 요셉이 아버지를 다시 만났습니다(29). 아들은 열일곱 살 때 하루아침에 노예가 된 후 22년 동안 아버지를 보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짐승에게 찢겨 죽은 줄만 알고 22년 동안 가슴 찢어지는 고통 속에 살았습니다. 눈물 없이는 둘의 상봉 장면을 지켜볼 수 없었습니다. 그 후 요셉은 형들 중 다섯 명을 바로에게 보내 자신들의 직업이 목자임을 밝히고 고센 땅에 살도록 허락을 받게 했습니다. 요셉은 전통적인 농업 국가였던 애굽 사람들이 목축업을 가증히 여긴다고 했습니다(34). 이왕 애굽에 가서 살 거라면 목축업을 하지 말고 농업으로 전업하면 좋지 않을까요? 총리 가족인데 좀 고상한 직업을 가지면 폼 나잖아요? 그런데 요셉은 왜 야곱의 아들들이 목축업을 하며 고센에 정착하도록 했을까요?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농업보다 목축에 유리한 고센 땅은 비어있어서 일단 그들이 큰 민족을 이루기에 적합했습니다. 또 북쪽에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젠가 애굽을 빠져나가야 할 때 빨리 나갈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야곱의 가족이 화려한 애굽 문명에 동화되지 않고 구별되어 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소수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수의 애굽 사람들과 같은 직업을 갖고 섞여 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100년도 안 되어 애굽에 흡수 통합될 가능성이 컸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고센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그러면 바로는 그들의 요청에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는 요셉을 절대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이 땅을 선뜻 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축을 야곱의 아들들에게 관리하도록 맡겼습니다(47:6).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제부터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자칫하면 바로의 소유에 손실을 끼친 대역 죄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의 가족들은 애굽의 고센 땅에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순종과 요셉의 지혜가 만나서 이루어진 결과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사건 배후에는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언약을 성취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계획안에는 이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원대한 계획부터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님이 다 이루어가셨습니다. 야곱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까? 애굽의 고센이라는 땅, 목축하기에 좋지만 목축을 싫어하는 애굽 사람들, 반면 조상 때부터 다 목축을 해왔던 이스라엘 자손들, 때마침 애굽에 찾아온 7년의 풍년과 흉년, 그로 인해 총리가 된 요셉, 그 일이 있기까지 술관원과 떡관원이 요셉과 함께 감옥에 있었고,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모함했고, 형들이 요셉을 시기해서 팔았습니다. 하나하나 생각해보면 끝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던 약속이 지금 이렇게 이루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얽혀있고 다양한 사건들을 있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하심을 사람의 머리로 다 헤아릴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바울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자주 미래를 계획하느라 지금 벌어지는 실제적인 일들을 깜박합니다. 작고 세세한 일들을 신경 쓰고 챙기다가 큰일을 놓쳐버리곤 합니다. 계획은 세우지만 실천하지 못합니다. 때로 계획 자체를 이랬다저랬다 바꾸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정말 놀랍도록 큰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동시에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 일어나는 지극히 작은 일 하나까지 모두 주관하고 계십니다. 또한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 삶을 하나하나 인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그 섬세한 손길을 생각할 때 우리는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 크신 하나님 앞에 한 없이 작은 나를 발견하고 엎드리게 됩니다. 야곱과 요셉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삶에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시고 내 삶에 역사하고 계십니다. 때로 우리 눈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것이 손해 보는 것만 같고, 어려운 일만 더 생기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약속을 기다리기보다 그냥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때에라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역사하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계획은 이루어지고 하나님은 약속은 성취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때가 이를 때까지 기다릴 뿐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한걸음, 한걸음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내 삶을 맡길 뿐입니다. 그때그때 말씀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방향에 순종할 뿐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가장 완전한 길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사는 사람을 축복을 나누어 주는 존재로 사용하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아버지 야곱을 바로에게 소개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했습니다(7,10). 이 일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일입니까? 야곱은 이름 없는 한 지역에 촌부에 불과합니다. 야곱의 가족들은 흉년에 먹을 것이 없어서 피신 온 이민자들이요, 요셉 덕을 보기 위해 시골에서 올라온 촌사람들 같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바로는 세계의 통치자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전혀 기가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바로를 축복했습니다. 야곱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이는 야곱이 애굽에 들어갈 때 처음부터 목자요, 하나님의 종이요, 축복의 통로라는 분명한 정체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기습 축복에 당황한 바로가 질문했습니다. “네 나이가 얼마냐(8)” 설마 바로가 이렇게 반말을 했겠습니까? “올해 어르신 연세가 얼마나 되십니까?” 이런 번역이 더 좋을 같습니다. 아무튼 바로의 질문에 대해서 야곱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9)” 나이만 대답해 주면 되는데 왜 갑자기 야곱은 인생 소감까지 발표했을까요? 왜냐하면 이 메시지가 야곱이 바로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 바로는 세계 최고의 통치자였었습니다. 부와 명예, 권세와 쾌락 등등, 바로는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다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영원토록 지속하기 위해서 피라미드를 만들었습니다. 수명도 영원토록 연장시키기 위해 미라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세상영광을 영원히 지속할 수 있습니까? 시체가 썩지 않는다고 생명을 영원히 지속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 화려했던 애굽의 문명은 지금 덩그러니 사막 한 가운데 유물로만 남아 있습니다. 바로의 미라들은 대영박물관과 루브르 박물관에 흉한 몰골로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체험에 기초해서 세상영광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알았기 때문에 분명히 말해준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종이자 인생 선배로서 한 마디만 해 주겠소. 피라미드를 쌓고, 미라를 만들어도 다 소용없다오.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여인숙이요, 나그네 길이기에 세상 욕심에 너무 연연하지 마시오." 세상에 그 누가 감히 바로를 향해 이런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겠습니까? 인생에서 산전수전 공중전 게릴라전까지 다 겪고 영적 비밀을 깨달은 야곱이기에 확신 있게 이 메시지를 바로에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야곱은 높은 지위도 없고, 가진 재산도 없었지만 하늘의 복을 받은 자로서 바로를 축복했습니다. “주님! 바로 형제님에게 하늘의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이 분이 세상 것에 연연하지 않고 하늘의 것을 소망하게 하옵소서!”

그런데 축복의 주인공은 야곱만이 아니었습니다. 요셉도 애굽과 바로에게 축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13-26절을 보십시오. 요셉은 백성들의 돈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양식을 공급했습니다. 돈이 다 떨어지자 가축을 내고 곡식을 사게 했고, 다음에는 몸과 토지를 바로에게 팔아 곡식으로 바꾸게 했습니다. 이로써 애굽 모든 것이 바로의 소유가 되게 했습니다. 요셉은 토지법을 세워 소출의 1/5를 바로에게 바치고 4/5를 백성이 소유하게 했습니다. 이는 소작농이 30-50 퍼센트를 가졌던 당시 상황을 생각할 때 백성에 대한 은혜와 긍휼의 법입니다. 이렇게 요셉은 바로에게 충성했고, 애굽 백성을 기근에서 구원했습니다. 요셉이 이렇게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는 동안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하나님은 오래 전에 야곱에게 생육 번성하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보다 더 오래 전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12:2). 또한 천하 만민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22:18). 그 약속이 야곱의 가족을 통해 이렇게 성취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요셉을 자신들의 생명을 구해준 이 곧 구원자로 부른 것은 매우 특별한 일입니다(25). 요셉의 지혜로운 통치가 야곱의 가족들에게 안전과 번성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애굽의 백성들을 기근으로부터 구했기 때문입니다. 또 앞서 본대로 야곱은 바로를 축복해 주었습니다. 야곱의 파란만장했던 전 인생의 엑기스가 담긴 귀중한 지혜와 깨달음을 바로에게 전달해 주었습니다. 바로가 이 말을 얼마나 귀담아 들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만약 마음에 깊이 새겼다면 바로의 인생에 피가 되고 살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여러 생명을 구원하시고 복 주시기 위해 미리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준비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택하시고 사람을 부르시고 사람을 양육하셨습니다. 요셉은 45장 5절에서 이렇게 고백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물론 하나님은 요셉을 통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애굽의 백성들을 구할 수 있었고, 야곱을 통하지 않고도 바로를 축복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항상 사람을 택하시고 그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늘의 축복을 세상에 내려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사는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택하셔서 세상을 축복하는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니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리고 이 은혜는 기근을 맞이한 세상을 촉촉하게 적시는 단비가 됩니다. 우리는 대학이나 대학원에 들어가기도 하고 군대에 가기도 하고 직장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무슨 목적을 가지고 들어갑니까? 솔직히 내가 잘 되기 위해서 갑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서 세상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그것이 전부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곳에 들어가는 중요한 목적은 그곳을 축복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복이 되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에는 기근이 있습니다. 세상은 사랑에 목말라 있고 희망을 잃어버렸고 위로를 필요로 합니다. 인생 문제를 안고 씨름하고, 진리의 말씀이 없어 이리 저리 방황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기근에서 건져낼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일차적으로 캠퍼스 청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가족들 그리고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먹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있는 그 곳에서 사랑을 주고 소망을 주고 위로를 주는 사람이 되길 소원합니다. 우리로 인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기근에서 구원 얻는 생명의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의 산 소망을 주십니다. 47장 28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애굽 땅에 17년을 거주하여 147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요셉을 불러 당부했습니다. 3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매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야곱은 애굽에 와서 17년을 살았습니다. 그 17년 동안 얼마나 많은 풍요를 누렸겠습니까? 만약에 야곱이 변화되지 않았다면 일찍부터 묫자리를 보고 다니며 최고의 명당자리를 미리 예약해 두었을 것입니다. 죽은 후에 작은 피라미드라도 하나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시신을 저 가나안 땅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해 달라 부탁했습니다. 이를 볼 때 야곱은 풍요로운 애굽문화에 전혀 연연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마지막 소망은 조상들의 묘역에 묻혀 믿음의 역사를 계승하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들과 함께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유언을 마친 야곱은 몸이 쇠해 일어날 힘조차 없었지만 이제까지 언약을 따라 인도하신 하나님께 예배 드렸습니다(31).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습은 그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삶을 살았음을 잘 보여줍니다.

48장을 보십시오. 야곱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요셉이 두 아들과 함께 찾아왔습니다(1). 야곱이 마지막 힘을 내 침상에 앉아 요셉을 맞았습니다(2).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 삼아 축복하고자 했습니다(9). 어떤 말로 축복했습니까?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들로 내 이름과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며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15,16).” 그런데 요셉이 보니 아버지가 손을 어긋나게 하여 둘째 아들을 오른 손으로 축복하는 게 아닙니까(14)? 오른 손을 첫째 아들에게 옮기려 했습니다. 그러자 야곱이 말했습니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19).” 요셉이 영적 통찰력이 뛰어나다 하지만 야곱보다 한수 아래였습니다. 야곱은 눈이 어두웠지만 하나님이 장차 이루실 미래 일을 보는 통찰력이 있었습니다. 후에 에브라임은 야곱의 축복대로 후에 북이스라엘의 중심 지파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다(21).” 죽음 앞에서 야곱은 하나님이 장차 이루실 언약의 성취를 바라보았습니다. 인간이 죽음으로 이 땅 순례를 마치고 떠나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서운한 일입니까? 그런데 야곱은 슬픔과 서운함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마음에 희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일들을 소망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과거 자기 집을 세우기 위해 분투했습니다. 늘 망하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잃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고 하나님의 집을 튼튼히 세우고자 후손들을 축복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도 산 소망이 넘쳤습니다.

야곱의 마지막 모습은 그의 믿음을 잘 보여줍니다. 야곱은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장사되기를 원했습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애굽은 임시 처소였습니다. 그가 잠들기 원했던 땅은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야곱은 임시로 거하는 곳이 어디인지, 궁극적으로 자신이 바라봐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믿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믿음은 다른 것에 눈을 돌리지 않고 참된 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보이지는 않는 것을 향해 시선을 고정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살지만 이 땅만 바라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요즘에는 캠핑을 좋아하고 즐겨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편하고 좋은 집을 나두고 괜히 사서 고생하면서 뭐가 그리 즐거울까요? 포병으로 근무하며 수없이 천막을 치고 접어봤던 저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마 집에서 느낄 수 없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좀 다르게 생각하면, 집이 있기 때문에 캠핑이 즐거운 것입니다. 편하고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집이 없다면 어떨까요? 365일을 캠핑하며 지내야 한다면 어떨까요? 즐거울까요? 이 땅에서 우리의 삶도 그러합니다. 우리에게는 진짜 집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그곳에 우리 주님이 계시고, 우리가 누릴 영원한 안식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는 우리가 임시로 머무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여기가 아닌 정말 좋은 곳, 이곳과는 차원이 다른 곳, 참된 만족이 있는 곳, 우리에게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사는 동안 불편함이 있고, 어려움이 있더라도 우리는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여기는 잠깐 있다가 갈 곳입니다. 그러니 여기가 전부인 것처럼 너무 이곳에 매달리며 살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사연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네덜란드 출신의 한 선교사가 아프리카에서 40년 동안 사역한 후에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연락하여 자신이 도착하게 될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었습니다. 마침내 그가 탄 배가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항구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고, ‘환영합니다.’라고 쓰인 커다란 현수막도 보였습니다. 그의 마음은 자랑스러움으로 뿌듯해졌습니다. 그러나 배에서 내리자마자 그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알고 보니 항구에 모인 사람들은 배를 함께 타고 온 유명한 영화배우를 환영하러 나온 것입니다. 그는 섭섭한 마음이 들어 하나님께 이렇게 하소연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40년 동안 헌신한 대가가 고작 이것입니까?” 그때 그의 마음속에서 이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얘야, 넌 아직 고향에 도착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너의 본향에 도착했을 때에는 천군천사들이 열렬히 환영할 것이란다.” 그렇습니다. 이 땅 어느 곳도 우리의 본향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원한 본향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면 천군천사의 환영을 받으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토록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할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참된 소망입니다. 이런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에 코 박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가지고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아갑니다. 나그네처럼 산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세상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욕심을 내려놓는다는 말입니다. 야곱은 과거 장자의 권리에 집착하고 라헬에게 집착하고 요셉에게 집착하고 베냐민에 집착했었습니다. 그러나 붙들고 움켜쥔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험악한 일들을 겪으며 하나 둘 씩 다 내려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부터 야곱이 무슨 일을 했습니까? 사람들을 축복하기 시작합니다. 바로를 축복하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고, 열두 아들들을 축복했습니다.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산다는 것은 움켜쥔 손을 펴서 나눠주고 축복하는 인생을 산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할 때 알 수 없는 기쁨이 샘솟고 인생이 행복해집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가지고 선한 일을 하기에 힘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디에 있든지, 어디를 가든지 주위 사람들에게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는 아름답고 복된 인생을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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