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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
    설교/창세기 2019.09.08 14:15

    2019년 창세기 제 24 강 / 2019.9.8. / 이창무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

     

    말씀 / 창세기 39:1-41:57
    요절 / 창세기 39:2,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인류역사에서 노예생활을 했던 사람들이나 감옥생활을 했던 사람들의 삶을 보면 그들 대부분이 절망감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들은 주어진 일만 대충대충 하면서 남은 인생을 허비했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은 감옥이라는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미래를 준비했습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이 주옥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서 기록되었습니까? 모두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쓴 서신들입니다. 그래서 이 네 서신서를 옥중서신이라고 부릅니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는 천로역정도 존 번연이 감옥에서 썼습니다. 넬슨 만델라는 인종차별 철폐를 외치다가 백인정권에 의해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1964년부터 1982년까지 투옥되었습니다. 옥중에서 투쟁을 벌여 수감자들을 위한 도서관을 만들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교육 이수과정까지 만들었습니다. 석방된 후에는 인종차별 철폐를 위하여 투쟁하다가 1993년도에 노벨평화상을 탔습니다. 그 다음 해에는 남아공 첫 흑인대통령에 선출되었습니다. 오늘 말씀 속 요셉의 인생을 살펴보면 이런 사람들과 비슷합니다. 요셉은 노예와 죄수의 신분이라는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며 맡은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준비했습니다. 요셉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 또한 요셉처럼 현재의 어려움을 이기고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9장 1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요셉은 야곱의 집에서 채색옷 입고 자란 귀한 아들이었습니다(37:3).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애굽에 노예로 팔려왔습니다. 이제 요셉의 몸에는 채색옷 대신 다 헤어진 작업복이 걸쳐져 있었습니다. 요셉은 하루 종일 뼈 빠지게 일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헛간에 짐승처럼 던져져 쪽잠을 청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얼마나 서럽고,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보통 사람이라면 이럴 때 인격과 삶이 망가질 대로 망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형들을 원망하고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다가 결국 자기 인생을 내려놓고 막 나가는 폐인이 되기 쉬웠습니다. 그런데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보디발의 입장에서 특별할 것 없는 히브리 소년 하나를 종으로 샀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종이 집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좋은 일만 생겼습니다. 요셉이 하는 모든 일이 성공적이었고 좋은 결과를 거두었습니다. 보디발은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셉, 쟤만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니까. 요셉은 우리 집안에 굴러들어온 복덩이야, 복덩이!" 요셉의 형통함은 보디발이 볼 때 사람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었습니다. 요셉이 섬기는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의 원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3). 마침내 요셉은 보디발의 인정을 받아 집안의 모든 제반 사항을 다 맡아서 관리하는 가정총무가 되었습니다(4).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초고속 승진이었습니다. 현재 요셉 옆에는 누구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가족도 후견인도 스폰서도 없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의로운 오른 손으로 그를 굳게 붙들어 주시기 때문에 요셉은 능히 형통케 될 수 있었습니다.

    만사형통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모든 일이 뜻대로 잘 된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만사형통 하게 된 사람을 꼽을 때 항상 빠지지 않는 사람이 바로 요셉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요셉이 형통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는지 알고싶어 합니다. 많은 이들이 요셉의 성실함, 충성스러움을 그 비결로 꼽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심부름을 할 때 요셉이 얼마나 성실했습니까? 형들을 찾아 굳이 먼 길을 가지 않아도 되었는데 끝까지 책임을 다 했습니다(37:17). 분명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도 열심히 맡은 일을 해내고 궂은 일, 힘든 일을 가리지 않고 충성스럽게 일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형통한 사람이 되고 주인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1절부터 6절까지 본문 중에 요셉의 성실한 모습이 묘사된 부분이 있습니까? 당연히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요셉이 어떻게 충성스럽게 주인을 섬겼는지, 일처리를 얼마나 지혜롭게 했는지 등등에 관한 그런 설명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은 무엇을 강조하고 있을까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21)"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23)" 이 말씀들이 가리키는 바가 무엇입니까? 요셉이 형통하게 된 것은 그가 똑똑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인자를 더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 하신 일이었습니다. 몰론 이 말이 요셉이 놀기만 했는데 하나님께서 다 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은 이 모든 일의 주체가 요셉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내 인생의 주인이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모든 일이 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여깁니다. 내가 잘 하면 내가 열심히만 하면 만사형통하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해서 실제로 성공하고 원하던 바를 어느 정도 성취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입니다. 인생 살다보면 성실하게 열심히 했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저도 벤처 회사 창립 멤버로 참여했을 때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매일 퇴근 시간이 빨라야 밤 열 시였습니다. 그 덕에 Storage Area Network Management Software 국내 최초 개발자라는 타이틀도 얻었습니다. 이렇게만 하면 우리 회사가 삼년 안에 코스닥에 상장될 줄 알았습니다. 스톡옵션으로 받은 주식을 팔아서 부자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삼년이 지난 후 제 고민은 '다음 달에 과연 월급을 받을 수 있을까'였습니다. 이대로 인생에서 실패하고 루저가 될 것 같아 불안했습니다. 만약 제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이때 저는 멘탈이 바닥까지 붕괴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순간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셨습니다. 저는 말씀 안에서 내 인생이 하나님의 것이며 그분의 선하신 손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에 대하여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것,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내 삶을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얼마든지 회사를 코스닥에 상장도 시켜주시고 주식으로 대박 나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대로 일을 이루어가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이 제가 기대하고 원했던 결과는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돌이켜 보니 그 시점에 제게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제 소원대로 되었다면 교만과 세상 정욕의 노예가 되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이 보디발 집이 잘 되어 복이 넘치길 원했을까요? 가정 총무 자리를 원했을까요? 그보다는 자유의 몸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기를 학수고대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원하는 형통과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이 다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에서 형통이 무엇인지를 정해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형통을 원하지만 사실 형통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형통이 무엇인지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과 선하신 뜻대로 일을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이것이 진정한 형통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하신 계획이 아름답게 드러날 그 날까지 하나님을 믿고 기다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모든 것을 주님께 의지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6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습니다. 아마도 어머니 라헬을 닮아서 미남이었던 것 같습니다(29:17). 또 다른 노예들과 달리 어딘지 모르게 귀공자 느낌이 났습니다. 그만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푹 빠져버렸습니다. 그녀는 서서히 유혹의 손길을 뻗어 왔습니다. 7절에 보면 맨 처음에 눈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신호를 보냈습니다. 요셉이 전혀 눈길을 주지 않자 노골적으로 찾아와서 동침하기를 청했습니다. 10절에 보면 날마다 요셉에게 청했다고 했습니다. 12절에 보면 요셉의 옷을 잡고 끈질기게 늘어졌습니다. 요셉은 지금 피가 펄펄 끓는 청년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온갖 아양을 떨며 유혹해 왔을 때 얼마가 극복하기 힘들었겠습니까? 만약에 여기서 이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졌다면 요셉의 인생은 끝장나는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성결한 그릇으로 쓰임 받을 수 없었습니다(딤후2:21). 그런데 요셉은 유혹을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요셉은 유혹에 대해서 철저하게 거절로 일관했습니다. “No. 안 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말로 거절하고(8), 다음에는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10). 나중에는 여인의 손을 뿌리치고 겉옷까지 버려두고 도망갔습니다(12). 요셉은 왜 보디발 여사의 요구를 거절했을까요? 요셉이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랬을까요? 일차적으로 만약 보디발 여사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은혜를 베푼 주인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요셉이 거절한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께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9)” 유혹에 넘어가 죄를 선택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을 깨는 일입니다. 보디발 여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스터 요셉, 괜찮아.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잖아” 그러나 요셉은 말했습니다. “아무도 없다니요? 하나님이 보고 계시잖습니까?” 요셉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을 끝까지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요셉이 유혹을 이겼기 때문에 하나님이 큰 상급을 주셨습니까? 아니었습니다. 보디발 여사가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남편에게 거짓말을 해서 요셉을 감옥에 집어넣어 버렸습니다(20). 세상에 이게 무슨 날벼락입니까? 분명히 믿음의 중심을 지키고 유혹을 이겨냈는데 결과는 ‘강간미수범’라는 지저분한 죄목과 함께 감옥행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벌써 두 번째입니다. 요셉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나 이번에도 요셉은 자포자기하거나 막가는 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에 대해서 신실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대가로 요셉은 어둡고 침침한 지하 감옥에까지 내려가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선택을 하나님이 깊이 인정하셨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21,2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며 요셉을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요셉은 감옥 총무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가는 곳마다 총무입니다. 총무가 요셉의 천직인가 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고자 할 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 신실하다고 해서 그 즉시 보상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장에 좋은 결과를 거두고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셉의 경우처럼 오히려 결과가 좋지 않고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하나님께 신실할 필요가 있을까요? 차라리 죄의 유혹을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고 즐기며 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하지만 조금만 더 멀리 더 나중을 생각한다면 무엇이 정말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죄를 선택할 경우 당장의 만족과 유익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 감당해야 할 죄의 결과가 어떻습니까? 죄는 항상 우리 인생을 더 복잡하고 어렵게 만듭니다. 죄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만족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죄는 우리에게 잠시 동안의 달콤함을 주고 난 후 인생을 무너뜨리고 결국 쓰디 쓴 죄의 열매를 맛보게 합니다. 사람과 관계성을 좋게 하기 위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실패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과 관계성을 지키기 위해서 눈앞에 보이는 손해와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이 둘 중에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나의 유익과 만족을 위해 죄를 선택할 때 하나님은 더 이상 나와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을 선택할 때 비록 손해와 아픔이 따른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으로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고난이 하나님이 없는 풍요보다 훨씬 더 났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이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헤아려 주시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께 보여드린 작은 신실함에 대해 크게 되갚아 주실 것입니다. 그때를 믿음으로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신실함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하든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함으로 죄의 유혹을 거절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택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0장을 보십시오. 어느 날 애굽 왕의 두 관원장이 왕에게 죄를 범하여 요셉이 있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왕에게 드린 잔에 파리가 빠졌고, 떡 굽는 관원장이 드린 떡에 모래가 섞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친위대장은 이 두 사람을 요셉이 섬기도록 맡겼습니다(4). 감옥에 보낼 때 언제고 그래도 믿을 사람은 요셉 밖에 없었나 봅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두 사람을 일대일 양으로 얻었습니다. 하루는 두 사람의 안색이 안 좋았습니다. “어찌하여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 빛이 있나이까(7)?” 요셉은 감옥에서 죄수들의 얼굴빛까지 살피며 섬기는 선한 목자였습니다.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이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포도나무 세 가지에 싹이 나고 꽃이 피어 포도송이가 열렸는데 그 포도를 짠 즙을 바로에게 드리는 꿈이었습니다(10,11). 요셉은 꿈을 듣고 바로 해석을 했습니다.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전직을 회복할 것입니다(13).”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 앞에 설 때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말해서 자신을 감옥에서 건져 달라는 부탁을 잊지 않았습니다(14). 떡 굽는 관원장이 그 해석을 듣고 기대 가운데 자기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도 꿈에 보니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는데 새들이 그것을 먹더라(16,17).” 이번에 요셉은 “사흘 후 당신의 머리가 나무에 달려 새들이 뜯어 먹을 것”이라는 충격적인 해석을 해 주었습니다(19). 요셉은 예나 지금이나 고지식하게 있는 그대로 말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사흘 후 바로의 생일잔치가 있었습니다(20). 그 날 요셉의 해석대로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고 떡 굽는 관원장은 죽었습니다(21,22).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의 주선으로 석방되기를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그런데 술 맡은 관원장이 감옥에서 나가자 요셉을 까맣게 잊었습니다(23). 요셉은 또다시 잊힌 자가 되어 기약 없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만일 이때 술 관원장이 요셉을 잊지 않아 요셉이 나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기껏해야 보디발 가정 총무로 복직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좀 더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이 쓰신 드라마의 각본이었습니다. 사람은 잊을지언정 하나님은 요셉을 잊지 않고 계셨습니다.

    41장을 보십시오. 드디어 하나님의 때가 되었습니다. 2년 후 어느 날 바로가 기묘하고 그로테스크한 꿈을 두 개 겹쳐서 꾸었습니다. 나일 강가에 있던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흉하고 비쩍 마른 일곱 암소에게 잡아먹혔습니다(2-4).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가늘고 마른 일곱 이삭에게 삼켜졌습니다(5-7). 애굽의 어떤 지혜자도 꿈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8). 그제야 술 맡은 관원장이 길고 긴 망각의 강, 레테의 강에서 헤엄쳐 나왔습니다. 감옥에서 자신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을 명쾌하게 해석해 준 요셉을 천거했습니다(12). 요셉은 드디어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수염을 깎고 옷을 갈아입고 왕 앞에 섰습니다(14). “듣자하니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15)” 요셉은 대답했습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16).” 요셉은 바로의 꿈을 정확하게 해석했습니다. 온 애굽 땅 일곱 해 큰 풍년이 있고 후에 그 풍년을 다 잊을 만한 일곱 해 흉년이 있을 것을 예고했습니다(29,30). 요셉은 꿈 해석에 그치지 않고 흉년을 대비할 방법까지 제안했습니다.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해 애굽 땅을 다스리게 하고 풍년에 땅의 오분 일을 거두어 흉년에 대비하시면 망하지 아니하시리다(33-36).” 그때 바로가 무릎을 탁 치며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38)!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39)” 바로는 요셉을 청문회도 거치지 않고 애굽 온 땅의 총리로 세웠습니다. 인생 역전이 일어났습니다. 기약 없이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가 하루아침에 애굽 온 땅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총리가 되어 무엇을 했습니까? 자기에게 상처 준 사람들을 찾아 손을 좀 봐줬습니까? 그는 애굽 전역을 순찰하며 풍년의 소출을 저장하기 시작했습니다(48). 흉년을 대비하는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했습니다. 요셉은 노예일 때 노예로 충성했고 죄수일 때 죄수로 충성했으며 총리가 되자 총리의 일에 충성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꿈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셉의 생애에서 등장하는 꿈들은 모두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두 관원장의 꿈도 그렇고 바로의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꿈의 의미를 알게 되면 다가올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막상 꿈을 꾼 당사자들은 그 의미를 몰라 안절부절못합니다. 이때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40:8)"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41:25)" 해석이 하나님께 있다는 말은 그 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미래를 아시고 미래를 결정하시기 때문입니다. 꿈보다 해몽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이야기로 표현하면 꿈도 해몽도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요셉에게는 꿈을 해석하는 능력을 허락하셔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미리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모든 일들이 요셉이 해석한 대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꿈에 대해서 더욱 확신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원장의 꿈에 대해서 더 나아가 바로의 꿈에 대해서까지 자신이 해석하겠다고 장담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 스스로가 꿈을 믿지 않고 있었다면 다른 사람의 꿈을 해석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지금까지 그 모든 시련과 어려움을 끝까지 견뎌낼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꿈의 의미를 알았고 또한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바로의 말처럼 요셉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요셉처럼 할 수 있을까요? 우리도 어떤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신실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요셉에게 있었던 그런 꿈이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만 보여주신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내게 직접 말씀하시거나 내 미래를 꿈으로 보여주시지 않으시나요? 그런 특별한 계시가 있다면 그것을 붙잡고 나도 요셉 못지않게 확신으로 살 수 있을 텐데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그런 것이 있으면 다를까요? 요셉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님이 요셉에게 보여주신 꿈이 정말 특별한 일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의 아버지, 할아버지, 그의 조상은 어땠습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직접 말씀을 하셨고 천사를 보내기도 하셨고 환상을 보여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어떻습니까?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하나님은 요셉에게 단 한 번도 직접 말씀해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알려주신 것은 열일곱 살에 꾸었던 꿈이 전부입니다. 요셉의 입장에서 충분히 불평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아버지에게 하셨던 것처럼, 왜 나에게는 직접 말씀하지 않습니까? 정말 어려운 순간에 용기가 필요할 때, 믿음이 흔들릴 때, 왜 침묵하십니까?” 이렇게 투정부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럴 때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이미 내가 너에게 꿈을 보여주지 않았느냐? 나는 너에게 이미 약속했단다. 너에게 필요한 것은 나를 신뢰하고 약속이 이루어질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이란다.”

    우리에게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뭔가 대단한 것을 바라고 원하지만, 정말 대단하고 위대하고 특별한 것, 그 완전한 것은 이미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성경을 통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함으로 인내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편 105편 17절부터 19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그가 누구인지 7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7)” 하나님이 요셉을 앞서 보내셨고, 그래서 요셉은 감옥에서 매여 있는 몸이 되었습니다. 언제까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성취될 때까지 그 약속의 말씀이 요셉을 단련했습니다. 이 시편의 저자는 요셉의 꿈을 말씀으로 치환시켜서 표현했습니다. 요셉에게 꿈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도 같았고, 그 말씀이 응할 때까지, 그 꿈이 성취될 때까지 하나님은 요셉을 단련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만나는 어려운 일들, 힘든 일들, 이해할 수 없는 일들, 그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단련합니다. 말씀이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갑니다. 말씀이 성취될 때까지, 더 주님을 닮아가도록 하나님의 손길로 우리를 빚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과정 중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요셉처럼 꽉 막힌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일을 기대하며 인내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단련하시며 영광스러운 미래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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