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봄 바이블 카페 말씀 / 이창무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3:8-10
1988년, 제가 처음 대학교에 입학했던 날이 떠오릅니다. 캠퍼스는 낯설고도 찬란했습니다. 수백 명의 청춘들이 오가는 중앙광장, 형형색색의 동아리 홍보물들, 어딘가 익숙해지지 않은 교실, 빠르게 지나가는 낯선 얼굴들… 그 모든 풍경 속에서 저도 어느새, 새로운 시작 앞에 벅찬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벅참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 한편에 이상한 감정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음에도 이유 없는 외로움이 엄습했고, 웃고 이야기하며 어울리고 있음에도 내 마음이 어디에도 닿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구는 많았지만, ‘진짜 나’를 이해하는 이는 없다는 허전함이 몰려왔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그러한 감정을 경험한 적이 있으신가요?
오늘날의 청년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더 많은 자유와 선택지를 누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내면은 오히려 더 복잡하고, 더 외롭고, 더 불안해 보입니다. “잘 지내요.”라는 짧은 인사 속에 불안과 공허함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내가 이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지금 내 선택이 내 인생을 망치게 되는 건 아닐까?”, “나만 이렇게 뒤처진 것은 아닐까?”, “나는 정말 괜찮은 사람일까?”라는 질문들이 우리 마음을 자꾸만 흔듭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 사회 전체 인구의 80%가 “불안하다” 또는 “매우 불안하다”고 응답했습니다. 특히 1986년에서 2001년 사이에 태어난 청년들은 ‘구조적 위기’, ‘낮은 자존감’, ‘약화된 회복력’이라는 삼중고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조사에서는 청년의 64%가 “나는 불안하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제 불안은 더 이상 개인의 약점이 아니라,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우리가 짊어진 ‘공통의 짐’이 되었습니다.
서울시가 2022년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청년 5,500명 중 약 9%가 사회적 고립이나 은둔 상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점점 세상과의 연결을 끊고, 집 안에 자신을 가두며, 깊은 고통 속에 조용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경제적 부담, 인간관계의 단절, 감정적 멍울들이 그들을 삶의 자리에서 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삶의 경계 밖으로 밀려난 이들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내면 한 자락을 비추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창세기 3장의 한 구절 앞에 서게 됩니다. 에덴의 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던지신 그 질문—“네가 어디 있느냐?”—는 단지 과거의 한 장면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 물음은 지금도 살아 있어 오늘 우리의 존재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옵니다. 그 질문 안에는 우리의 불안의 뿌리, 외로움의 시작, 그리고 우리를 다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 속 창세기 3장의 이야기를 함께 열어보려 합니다. 그 이야기는 생각보다 우리 자신의 이야기와 많이 닮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본론 1 – 숨은 사람들
이제 창세기 3장의 장면을 함께 펼쳐봅니다. 우리는 한때 완전했던, 아름다운 관계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 어떤 두려움이나 불안을 알지 못한 채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하며 거닐었습니다. 그들은 바람이 불어오는 에덴의 숲길을 자유롭게 걸었고, 감추거나 숨길 것이 없는 투명한 관계 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들은 하나님의 단 하나의 경계를 넘어섰습니다. 바로 선악과의 사건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규칙 위반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와의 신뢰가 붕괴된 순간이었고, 깊은 관계에 대한 배신이었습니다. 하나님 대신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려는 마음이 자리잡았고, 순종은 거부로, 신뢰는 의심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결과는 곧바로 드러납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다름 아닌 ‘숨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 3:8)
하나님의 목소리는 이전과 같았을지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두려움의 소리로 들렸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던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그토록 친밀하던 그 목소리를 피해, 나무들 사이 어딘가로 몸을 감추었던 것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눈을 마주치며 거닐던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그 시선을 피하고 자신을 숨기기에 바빴습니다. 죄가 들어오자 두려움이 찾아왔고, 수치가 그들을 덮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는 것조차 외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아담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이 짧은 고백 속에는 인간 존재의 심연이 담겨 있습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 외로움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요? 바로 이 장면이 그 출발점입니다. 죄로 인해 깨어진 관계, 그로 인한 두려움, 그리고 그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숨김’—이것이 외로움과 불안의 기원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아담과 하와를 향해, 하나님은 먼저 찾아오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이 물음은 단순히 그들의 위치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하신 질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물음은 존재를 향한 물음이며, 마음의 상태를 향한 물음입니다. “너, 지금 어떤 상태니?”, “네 마음은 지금 어디쯤 와 있니?”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담아, 나에게 나오지 않겠느냐?”는 하나님의 절절한 초대입니다.
아담은 숨고, 하나님을 피하고, 자신의 두려움과 수치를 스스로 덮으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아담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분은 조용히 다가와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부르심은 정죄의 음성이 아니라, 회복을 향한 사랑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숨어 있는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는 지금 어디 있느냐?”
본론 2 – 오늘 우리의 이야기
아담과 하와가 나무 뒤에 몸을 숨기던 장면은, 수천 년 전 에덴에서 벌어진 고대의 한 순간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숨고 있는가. 이 질문은 단지 성경의 기록을 되새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일상과 마음을 비추기 위한 거울과도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눈에 보이는 타이틀 뒤에 자신을 숨깁니다. 더 높은 학점, 더 멋진 이력과 스펙, 더 많은 인정과 성과. 그렇게 해야만 ‘괜찮은 사람’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끝없이 달리고 또 달립니다. 그러나 잠시라도 그 속도가 느려지면, 마음 한편에서 낮고 조용한 속삭임이 들려옵니다. “나… 망한 거 아닐까?” 확신보다 의심이, 평안보다 불안이 더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입니다.
또 다른 이들은 관계 속에 자신을 감춥니다. 늘 사람들과 어울리며, 인스타그램에는 밝은 웃음의 사진들이 넘쳐납니다. 그러나 정작 정말 힘들 때, 전화 걸 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을 때, 마음 한가운데 고요한 외로움이 스며듭니다.
어떤 이들은 바쁜 일상 속에 자신을 밀어 넣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과제, 아르바이트, 자격증 준비, 봉사활동 등으로 하루를 꽉 채우며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멈추면’ 마주해야 할 공허함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 공허함은, 조용히 다가와 말 없이 마음을 잠식해 갑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숨는 방식’이 있습니다. 짧고 밝은 인사 한마디로 위장하는 것입니다. “응, 잘 지내.” “난 괜찮아.” 그러나 그 인사 뒤에는 점점 지쳐가는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 일 없는 척, 그렇게 괜찮은 사람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지만, 속으로는 메말라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 모든 모습은 놀랍게도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경험했던 감정과 닮아 있습니다. 실패할까 두려운 마음, 버려질까 봐 움츠러드는 수치심, 누구에게도 진심을 보이지 못하는 외로움. 그들이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렸듯, 우리 역시 스펙으로, 인간관계로, 바쁜 일정으로, 그리고 ‘괜찮은 척’이라는 가면으로 내면의 고통을 숨깁니다.
그러나 그렇게 감추고 숨는다고 해서, 과연 우리의 공허함은 채워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은 곳에서 더 아픈 비명 소리가 들려옵니다. 창세기 3장은 단절과 외로움이 단지 심리적 현상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자리에서—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그 지점에서 비롯된 것임을 분명히 말합니다.
이 문제는 단순한 위로나 다짐, 혹은 자기계발적인 노력으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회복은 관계의 회복에서 시작됩니다. 곧,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과 다시 연결되는 데서 출발합니다. 더 이상 숨지 않고, 그분 앞으로 나아가는 것—바로 거기에서 진정한 회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부르심 앞에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숨지 말고, 주님의 품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본론 3 – 복음이 열어 주는 길
앞서 우리는 ‘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자신의 내면을 비추어 보았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 속에는,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수많은 불안과 외로움의 그림자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가장 중요한 질문 하나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떻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3장에 울려 퍼졌던 이 음성은 결코 심판의 포효가 아닙니다. 이는 상한 마음을 어루만지는 사랑의 속삭임이었으며, 지금도 동일하게 우리를 향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시간의 강을 건너,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드러났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한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었던 두려움과 수치, 외로움의 무게를 기꺼이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는, 바로 그 희생을 통해 다시 회복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숨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찾아오셨으며, 우리를 다시 품기 위해 값을 치르셨습니다. 이것이 곧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뿌리내리고 있던 불안과 외로움은 서서히 깨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다시 연결될 때, 불안은 힘을 잃고 물러갑니다. 우리는 더 이상 내 힘만으로 버티는 외로운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진리를 믿을 때, 두려움은 더 이상 나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43장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말합니다. “더 잘해야 해.” “더 멋져야 해.” “더 완벽해야 해.” 그러나 복음은 전혀 다른 목소리로 우리를 부릅니다. “너는 이미 사랑받고 있다.” “너는 이미 존귀한 존재다.” “네가 실패해도 나는 결코 너를 버리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이 이름은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가장 귀한 정체성입니다.
또한 외로움은 공동체 안에서 치유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혼자 걷는 길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복음은 비교가 아닌 환영으로, 경쟁이 아닌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주는 새로운 공동체를 세워 가십니다. 서로 기대고, 함께 울고, 함께 웃는 그 삶이야말로 하나님이 설계하신 삶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들이 서로와도 화해하며 살아가는 곳, 그곳이 바로 복음이 빚어내는 새로운 세상입니다.
이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시간입니다. “세한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 부르심 앞에 더 이상 숨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멈추지 않고 당신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 그 사랑의 부르심에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적용 – 작은 걸음부터 시작하기
지금까지 우리는 숨었던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 그 속에 비추어진 우리의 모습, 그리고 그런 우리를 다시 부르시는 복음의 초대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앞에 남은 질문은 단 하나입니다. 이 복음을 어떻게 나의 삶 가까이 데려올 수 있을까?
그 시작은 결코 거창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작지만 의미 있는 한 걸음이면 충분합니다. 이 시간, 여러분께 세 가지의 작은 실천을 제안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께 드리는 솔직한 기도, 단 10분.
하루 중 단 10분을 정하여 그 시간을 하나님께 드려 보십시오. 화려한 언변이나 ‘정답 같은’ 기도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렇게 시작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요즘 제 마음이 많이 복잡합니다.”
“외롭고, 때로는 많이 지칩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 잠시 머물고 싶습니다.”
이와 같이 솔직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 것, 바로 그것이 숨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입니다.
둘째, 믿을 수 있는 한 사람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 보기.
내 주변에 있는 믿을 만한 한 사람에게 조심스럽게 마음을 내어 놓는 것은 어떨까요?
“요즘 조금 힘들어요.”
“혼자 있는 시간이 괜히 무겁게 느껴집니다.”
이 한마디가 우리 안에 자리 잡은 고립을 깨뜨리는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아직은 낯설고 두려울 수도 있지만, 공동체 안으로 조심스레 발을 들여놓는 것도 좋은 시작이 될 것입니다. 함께 걷는 여정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회복을 배우게 됩니다.
셋째, 나를 향한 하나님의 시선을 기억하기.
세상은 끊임없이 말합니다. “더 잘해야 한다.” “더 멋져야 한다.” “그래야 인정받는다.” 하지만 복음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다.”
“너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이 말씀을 매일 마음에 새기고, 스스로에게 복음을 들려주는 연습을 해 보십시오. 이 반복되는 내면의 훈련이 우리를 다시금 하나님의 사랑 위에 굳건히 세울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작은 실천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큰 믿음도, 거룩한 결단도 결국 아주 작은 걸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그 첫 걸음을 하나님께 내디뎌 보시지 않겠습니까?
결론 – 숨지 않고, 다시 걸어가기
우리 모두는 인생의 어느 순간, 숨고 싶었던 사람들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수치심 때문에, 혹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외로움 때문에.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찼던 감정들이 우리를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어둠 속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 한순간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음성은 오늘도 여전히, 변함없이 우리를 향해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 부르심은 책망이 아니며, 정죄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초대입니다.
살다 보면 문득 길을 잃은 듯한 순간이 찾아옵니다. 주변은 어지럽고, 마음은 공허하며, 앞이 보이지 않아 두려움에 휩싸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일수록 우리는 오늘 들은 이 말씀을 마음 깊이 간직해야 합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고 계신다.”
“숨지 않아도 된다. 나는 다시 걸을 수 있다.”
우리가 걸어가는 이 인생의 길 위에,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하시며 동행하십니다. 그분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그 사랑의 부르심 앞에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조용히 이렇게 대답해 보십시오.
“하나님,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전해진 이 말씀을 주제로 하여 제가 직접 만든 노래 한 곡을 함께 듣고, 마지막으로 기도함으로써 이 시간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설교 > 창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두 지파를 위한 야곱의 축복 (0) | 2019.10.06 |
---|---|
애굽에서 번성한 이스라엘 (1) | 2019.09.29 |
구원 역사에 요셉을 쓰신 하나님 (0) | 2019.09.15 |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 (0) | 2019.09.08 |
꿈꾸는 요셉 (0) | 2019.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