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창세기

열두 지파를 위한 야곱의 축복

이창무 2019. 10. 6.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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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창세기 제 27 강 / 2019.10.6. / 이창무

열두 지파를 위한 야곱의 축복

말씀 / 창세기 49:1-50:26
요절 / 창세기 49:28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창세기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심히 좋았다’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죄로 인해 망가진 세상을 회복해 나가시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혼자 하지 않고 소수의 사람과 언약을 맺어 이루어가셨습니다. 저주 받은 세상에서 아브라함을 택해 축복의 언약을 주셨고 그 복이 이삭을 거쳐 야곱에 이르고 야곱의 열두 아들이 애굽에서 번성함으로 언약이 성취되어 가게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창세기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마지막 두 장으로서 열두 아들에게 주어진 야곱의 축복 그리고 야곱과 요셉의 죽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이 두 가지 사건은 서로 연관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미래에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대로 이루실 일에 대한 소망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조상들처럼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의 언약을 믿으며 참된 소망을 붙들고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9장 1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임종을 앞둔 야곱은 열두 아들들을 불러서 한 사람씩 축복했습니다. 야곱의 축복은 자식들이 잘 되기만을 바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기원한 일반적인 축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서 열두 아들들이 후일에 당할 일을 말한 예언적 축복입니다. 그들 중에서도 르우벤, 시므온과 레위, 유다, 요셉에 대해서 자세하게 언급합니다. 열두 아들들 중에서 왜 이 다섯 명을 큰 비중으로 다루었을까요? 왜냐하면 이들이 ‘누가 형제들을 이끌 장자 곧 지도자가 될 것이냐’하는 문제와 연관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야곱의 축복을 통해 성경적 지도자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도자다운 지도자가 되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첫째, 지도자는 정욕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르우벤은 야곱의 첫 번째 아들로서 열한 형제의 우두머리가 될 자격과 조건을 타고났습니다. 하지만 르우벤은 자신이 받은 특별한 지위와 탁월한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고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4절을 보십시오.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여기서 물의 끓음이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정욕의 충동을 뜻합니다. 르우벤은 정욕의 충동을 억제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여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습니다(35:22). 이 죄 때문에 르우벤은 탁월한 지위와 능력을 소유했었지만 결국 탁월하지 못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특별한 지위와 탁월한 능력! 지도자로서 이 얼마나 큰 자산입니까? 그러나 죄를 짓게 되면 다 소용없습니다. 죄는 하나님께 받은 직분과 능력을 빼앗아갑니다. 흔히 말하듯이 한 방에 훅 가게 만듭니다. 삼손의 힘은 머리카락에 있었습니다(삿14~16장). 머리카락 자체가 힘이 있다기보다는 그가 하나님께 헌신된 나실인이라는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블레셋 여인 들릴라와 사랑에 빠져서 머리카락이 잘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모든 힘을 잃었습니다. 두 눈이 뽑힌 채 놋줄에 묶여 맷돌을 돌리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다윗은 어떻습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이런 그도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을 한 후에 힘을 잃었습니다(삼하11,12장). 그 일로 인해서 자신과 자녀들과 나라에 끊임없이 재앙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최근에 충격적인 소식 한 가지를 접했습니다. 한국 교계에 기독교 세계관 운동, 기독교 윤리 운동을 주도하던 청어람 아카데미의 대표가 수년간 간음을 저질러 왔다는 뉴스였습니다. 이 사실이 드러나 그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붙들려서 한때 귀하게 쓰임 받던 사람이 죄에 넘어져서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게 된 사례는 수없이 많습니다. 아무리 월등하고 탁월한 능력을 받아도 끓어오르는 정욕을 억제하지 못한다면 공동체의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들에게 큰 상처와 실망을 주고 공동체를 혼란에 빠뜨립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정욕이 끓도록 방치하지 않는 절제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죄짓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지도자는 분노와 혈기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르우벤이 장자의 지위를 잃게 되면 그 다음 순서는 누구입니까? 바로 서열 2, 3위였던 시므온과 레위였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장자의 지위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5절을 보십시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 성에서 잔혹한 칼부림을 일으켰던 장본인들이었습니다(34:25). 여동생 디나가 강간당한 일을 보복하려고 세겜 성에 거주하던 모든 남자들을 다 학살했습니다. 그들은 분노로 사람을 죽이고 혈기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는 자들이었습니다(6).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가 분노와 혈기로 저지른 일에 대해 이렇게 저주를 선포합니다.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7)” 이 예언대로 시므온 지파는 그 세력이 점점 약해지다가 나중에는 유다 지파에 흡수되었습니다. 또 레위 지파는 약속의 땅에 들어갔지만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지 못하고 열두 지파 중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 마음에 미움과 분노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담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분노와 혈기의 사람은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합당하지 않습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은 더더욱 안 됩니다. 폭력적 행동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언어폭력도 심각합니다. 제가 한때 다녔던 회사의 사장님은 평소에는 지적이고 신사적인 분이셨습니다. 그러다가 열 받는 일이 생기면 갑자기 사람이 돌변했습니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면박을 주고 직원들의 인격을 모독했습니다. 그 후에 항상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래도 뒤끝이 전혀 없는 사람이야.” 어느 날 저는 사장님 면전에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사장님은 자기 마음에 뒤끝이 남기지 않는 대신, 사장님 외 모든 사람의 마음에 뒤끝을 남긴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 날은 제가 회사를 퇴직하던 날이었습니다. 모세가 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못 들어갔습니까? 신경질을 내면서 지팡이를 내리쳤기 때문입니다(민20:11). 겨우 그만한 일로 하나님이 너무 하셨나요? 너무하신 것이 아닙니다. 지도자의 분노와 혈기가 공동체 전체를 혼란과 고통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중대하게 보신 것입니다. 한 번 폭발한 분노와 혈기가 이제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단숨에 허물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노와 혈기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셋째, 지도자는 진실한 회개를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서 절하리로다” 유다에게 임한 축복은 언약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유다 지파에서 왕들이 줄줄이 나오게 됩니다. 통치자가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른다’는 말씀은 유다 지파를 통해 메시아가 오신다는 예언입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의 후일은 암담한데 비해 유다의 후일은 이처럼 승리와 영광으로 가득합니다. 사실 유다는 젊은 시절 나쁜 짓을 많이 했습니다. 요셉을 노예로 파는 범죄에 앞장섰고, 언약 공동체를 떠나 불신자와 결혼했습니다. 창녀로 변장한 며느리와 동침하여 쌍둥이 아들을 낳는 수치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르우벤, 시므온과 레위보다 더 나은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유다는 저주가 아닌 축복을 받습니까? 이는 유다가가 진실한 회개를 했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회개를 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마음에 대못을 박았던 그가 베냐민을 아끼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슬퍼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형제를 시기했던 그가 베냐민 대신 노예로 살겠다고 자청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유다의 회개는 공동체를 위한 자기희생이라는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한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고 그를 언약 백성의 지도자로 세워주셨습니다. 11절은 이런 지도자로 인해 공동체에 임하게 될 행복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그의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이는 장차 메시아의 통치를 받는 백성이 누리게 될 풍요와 기쁨, 평화와 번영을 노래한 것입니다. 진실하게 회개했을 때 유다는 메시아의 통치를 나타내는 그림자가 되었습니다.

유다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흠 없이 사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죄를 지었을 때 애통히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웁니다. 진실한 회개는 과거에 지은 죄 문제에 대한 해결책인 동시에 미래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누구나 외면하고 싶은 과거가 있습니다. 잊고 싶은 흑(黑)역사 때문에 내 미래는 끝장이 난 것 같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우리에게 다만 예수님께 나와서 회개했는가를 물으십니다. 그리고 회개하면 예수님의 피로 깨끗하게 씻어 주십니다. 더 이상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의 포도주처럼 공동체를 풍요롭게 하는 지도자가 되는 축복을 주십니다. 흠이 없는 사람보다 오히려 진실한 회개를 아는 사람이 더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감히 자기 의를 내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에 넘어지는 연약한 자를 이해하고 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알기에 사람들을 그 은혜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좋은 예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모질게 박해하던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메섹 길 위에서 그를 만나주시고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이후로 바울은 죄인 중의 괴수였던 자신을 용서하시고 살리신 주의 은혜에 감사해서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고 헌신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넷째, 지도자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의지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성경은 인생을 나무에 종종 비유하곤 합니다. 문제는 인생이란 나무를 어디에 심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나무가 본래 아무리 품종이 좋아도 사막에 심어 놓으면 금방 말라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쓰레기더미 옆에 심어 놓으면 각종 오염수 때문에 병들어서 병든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맑은 샘 곁에 심은 나무는 항상 신선한 물을 공급받기 때문에 가지가 무성하게 됩니다. 그 무성한 가지는 주렁주렁 탐스런 열매를 맺어서 주인을 즐겁게 합니다. 어떤 나무는 가지를 쭉쭉 뻗어서 담 넘어 이웃에게까지 열매를 공급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합니다. 요셉의 인생은 샘 곁에 무성한 가지처럼 축복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11번째 아들이었지만 야곱 가족들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죄수에서 애굽 백성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요셉이란 무성한 가지에 신선한 물을 공급한 맑은 샘이 무엇이었습니까? 24,25절을 보십시오.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여기서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 ‘목자’는 모두 다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요셉이 무성한 가지처럼 생명력이 강하고 형통한 인생을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샘이 가지에게 물을 공급하듯이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필요한 지혜와 능력을 공급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7장부터 50장까지 나오는 요셉의 말을 살펴보면 늘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요셉은 항상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하나님 편에서 말합니다. 이는 요셉이 모든 선한 것들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했음을 잘 보여줍니다. 요셉의 삶은 시편 73편 28절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사람은 자신이 가까이 하고 의지하는 것을 감출 수 없습니다. 술을 가까이 하여 주(酒)가 내 안에 내가 주(酒)안에 거하는 사람은 가까이 가면 항상 술 냄새가 납니다. 담배를 의지해서 사는 사람 가까이 가면 담배 냄새가 진동합니다. 항상 원망 불평이 충만해서 입만 벌렸다하면 가시 돋친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주변 사람들 모두가 그 가시에 찔려 힘들어 하게 됩니다. 요셉은 환경적으로 보면 누구보다 쓴 뿌리를 품고 가시 돋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생명수의 샘이 되시는 하나님과 가까이했을 때 운명이 바뀌어 섭리가 되었습니다. 저주가 바뀌어 찬양이 되었습니다. 미움이 바뀌어 용서와 사랑이 되었습니다. 이로서 그는 모든 담을 뛰어 넘었습니다. 형들에 대한 복수심의 담, 애굽 사람들에 대한 미움의 담을 뛰어 넘었습니다. 그리고 풍성한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자기 한 사람도 가누기 힘든 판에 자기를 뛰어 넘어 모든 사람들을 돌아보고 풍요롭게 하는 위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뜨거운 여름 날 넓은 그늘을 드리우는 거목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서늘한 그늘을 찾아 그 나무를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 나무에 맺힌 신선한 열매를 먹으며 굶주림과 갈증을 해소하게 됩니다. 그런 나무 같은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입니다. 나의 그늘은 얼마나 넓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내 나무에는 얼마나 많은 열매가 맺혀 있습니까? 우리가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으려면 샘 곁에 있어야 합니다. 말씀의 샘, 은혜의 샘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은혜와 사랑, 지혜와 총명으로 충만해 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명의 샘되신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의지함으로 무성한 가지처럼 뻗어나는 축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야곱이 나머지 일곱 아들을 어떻게 축복했습니까? 13절부터 27절까지를 보십시오. 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합니다. 잇사갈은 쉴 곳을 좋아하다가 압제를 당합니다. 단은 독사와 같이 기습 공격의 달인이 됩니다. 갓은 군대의 추격을 받다가 전세를 뒤바꾸는 역전의 명수가 됩니다. 아셀은 기름진 땅에서 거주하게 됩니다.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처럼 자유분방한 지파가 됩니다. 막내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와 같은 용맹한 지파가 됩니다. 그러면 열두 아들에 대한 야곱의 축복은 어떻게 마무리되었을까요? 28절을 보십시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유다와 요셉에게는 확실히 축복이 대용량으로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다른 형제들은 그에 한참 미치지 못합니다. 특히 르우벤, 시므온, 레위에게 준 말씀은 축복이 아니라 사실상 저주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축복이라고 할까요? 표면적으로 볼 때 저주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너 자신의 약점을 알고 항상 주의하고 깨어있으라는 경고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똑같은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분발을 촉구하는 것이기에 이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는 자에게는 결국 축복이 됩니다. 만약 진짜 저주를 내리려 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아예 열두 지파에서 제외시켜 버렸을 것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은 모두 하나님께 선택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 자체가 이미 큰 은혜요 축복입니다. 하지만 이런 은혜와 축복 안에서 각 사람이 하나님께 받는 축복의 분량은 다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분량이란 각 사람의 삶이 만든 그릇을 뜻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욕의 충동대로 살았고 어떤 사람은 분노와 혈기로 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형제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고 어떤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선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살았습니다. 삶은 정직합니다. 각자의 삶이 각자의 그릇을 만듭니다. 그 그릇은 하나님의 축복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릇에 넘치도록 담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스스로 감당하지 못해서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도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르우벤처럼 살면서 유다에게 임한 축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소망한다면 먼저 축복에 합당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현재 우리 각 사람의 그릇의 크기를 재어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외심을 갖고 현재 나의 삶을 점검하고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듣고서 '나는 원래 그릇이 작아서 축복을 적게 받을 수밖에 없겠구나' 하면서 절망하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기는 틀렸고 겨우 믿음의 중심만 지키는 걸로 하나님이 예정하셨나보다’라고 운명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현재 주어진 축복의 분량이 적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설사 저주를 받았다고 해도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서는 얼마든지 저주도 축복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좋은 사례가 바로 레위 지파입니다. 출애굽기 32,33장에는 금송아지 사건이 나옵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불안해진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우상 앞에서 춤을 추고 난리굿을 벌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크게 진노하셨습니다. 이때 모세는 누구든지 여호와 편에 있는 자는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 때 레위 지파가 나섰습니다. 분명하게 하나님 편에 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심판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레위 지파는 비록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지 못하고 열두 지파 중에 흩어져 살았지만,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섬기는 영광스러운 직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의 기업이 되셔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해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옷을 입는 대제사장은 대대로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들에게서만 나왔습니다. 우리가 쓰는 그릇은 한 번 만들어지면 영원토록 고정불변입니다. 그러나 사람이란 그릇은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그릇이었던 커지기도 합니다. 반대로 큰 그릇이었는데 나중에 작은 그릇이 되기도 합니다. 현재 내 그릇이 너무 작아서 걱정이십니까? 분노와 혈기가 많습니까? 너무 연약하고 소심합니까? 모난 성격이라 사람들과 자꾸 부딪쳐 괴롭습니까? 이런 모습을 가지고서 과연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을까요? 괜찮습니다. 이런 모습을 가지고서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면 많은 축복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면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영광스럽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 그늘에서 쉬어갈 수 있는 영적인 거목들로 성장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9-33절에 보면 야곱은 자신을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했습니다. 그는 살아서도 언약 백성과 함께 있고 죽어서도 언약 백성과 함께 있기 원했습니다. 이제 야곱은 모든 사명을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므로 조상들에게 돌아갔습니다. 그 후 형들에게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이제까지는 아버지가 살아 계셔서 요셉이 복수하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요셉이 자신들이 행한 악을 다 갚을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보내 아버지가 요셉에게 형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유언하셨다고 전하게 했습니다.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50:18)” 요셉이 그 말을 듣고 울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책감을 안고 두려움 속에 사는 형들이 불쌍하고 마음 아팠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17년 전에 했던 똑같은 말로 형들을 위로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20,21)” 이후 요셉은 애굽에서 백십 세까지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는 장차 후손들이 애굽 땅에서 나갈 때 자신의 해골을 메고 약속의 땅에 올라가 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는 죽어 뼈가 되어서라도 약속의 땅에 가기 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창세기 후반부의 주인공인 야곱이 죽었고 요셉도 죽었습니다. 야곱의 소원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생전에 이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죽고 나서 그의 시신만이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요셉의 소원은 형들과 완전하게 화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형들은 세월이 지나도 요셉의 용서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두 조상 모두 후손들에게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이라는 숙제를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어찌 보면 이들의 인생은 미완성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난여름 제가 그리스에 갔을 때 광주센터 김느헤미야 목자님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투어 중인 버스 안에서 느헤미야 목자님이 갑자기 마이크를 잡더니 노래 한 곡을 부르시겠다고 했습니다. 제목은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곡이었습니다.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마는 편지/그래도 우리는 곱게 써가야 해/사랑은 미완성 부르다 멎는 노래/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불러야 해” 목자님은 최근 내가 해 놓은 일이 뭔가 생각하니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이 곡을 만나서 큰 위로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본래 미완성이고 쓰다가 마는 편지요 부르다 멎는 노래입니다. 야곱이 각 아들을 그들의 분량대로 축복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시간 안에서 이루어야 할 분량이 있습니다. 그래서 쓰다가 말 편지라도 곱게 써가야 하고 부르다 멎을 노래라도 아름답게 불러야 합니다. 그러면 남은 부분은 누가 써내려 갑니까? 아직 부르지 못한 노래는 누가 불러줍니까? 하나님께서 언약 안에서 새로운 믿음의 사람들을 세우셔서 그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완성을 향해 나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언젠가 반드시 언약의 성취를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펼쳐질 영원한 하늘나라를 기다리며 삽니다. 우리가 그렇게 믿음으로 약속을 바라보고 주어진 상황 속에서 주님을 신뢰하며 산다면, 미완성의 인생일지라도 충분히 의미 있지 않을까요? 그 때를 기다리며 하루하루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산다면, 우리의 인생이 좀 더 풍성해지지 않을까요? 우리가 내게 주어진 하루를 내가 조금 더 성숙하는 기회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살다가 야곱처럼 요셉처럼 아름답게 인생을 마무리하는 복된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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