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창세기 제 13 강
아브라함을 동역자로 삼으신 하나님
● 말씀 / 창세기 18:1-19:38
● 요절 / 창세기 18:18,19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한층 성숙해진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오랫동안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자식 문제에 매여 늘 조급했습니다. 그의 관심은 대를 이을 상속자를 얻는 것에만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고 책망하셨습니다(17:1).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을 ‘고상한 아버지’란 뜻의 아브람에서 ‘여러 민족의 아버지’란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17:5). 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영접하고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쉽게 바뀔까요? 아브라함은 정말 다른 사람이 되고 달라진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예, 아브라함은 달라졌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키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소망을 영접한 이후부터 진짜 달라졌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아브라함은 자기 문제에만 매여 있지 않고 지나가는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합니다.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 멸망 앞에 선 소돔 사람들을 위해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우리도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동역자 수준에 이르도록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나그네를 환대한 아브라함
18장 1절을 보십시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어지는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으로 변장하여 두 천사와 함께 마므레 상수리 수풀가에 거하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장막 문에 앉아서 부채질을 하다가 사람 셋이 맞은편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보자마자 용수철처럼 튀어나가 몸을 땅에 굽혀 영접했습니다(2).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으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 쉬소서(3,4)” 아브라함은 무더위에 지친 나그네들에게 꿀맛 같은 휴식을 제공해주었습니다. 떡을 조금 가져올 테니 마음을 상쾌하게 한 후에 가도록 권유했습니다(5). 그런데 조금 가져온다는 말은 페이크였습니다. 사라에게 부탁해 고운 가루 세 스아로 떡을 만들게 했습니다(6). 고운 가루 세 스아면 150인분의 떡을 만들 수 있는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또 아브라함이 직접 잡은 송아지 고기로 만든 안심 스테이크에 엉긴 젖 곧 치즈와 1등급 우유를 곁들여 내놓았습니다(7,8).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은 세 나그네가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최고급 와인과 함께 최고의 오찬을 즐길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온 마음과 정성을 쏟아서 나그네를 대접했습니다.
혹시 아브라함이 눈치코치로 세 나그네가 여호와의 종인 것을 알고 섬긴 것일까요?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히브리서 13장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인 줄 전혀 모르고 나그네를 대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평소에도 지나가는 사람을 이처럼 풍성하게 대접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아브라함이 그럴 수 있었을까요? 아브라함의 인생 문제는 아들 문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빨리 주시지 않자 원망도 하고 불평도 했습니다. 하갈을 통해 아들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가정이 깨질 뻔한 위기를 겪었습니다. 이스마엘을 얻은 후에는 거기에 푹 빠져 13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언약을 잊고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우주만큼 큰 자기 문제 해결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했습니다. 지나가는 나그네를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있을 리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17:4)” 아브라함이 이 말씀을 깊이 영접하고 할례를 행한 후부터 달라졌습니다. 비로소 자기 문제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집 앞을 지나가던 나그네를 보자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자신도 한 때 가나안 땅에 들어 온 나그네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얼마나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렵고 피곤했는가가 떠올랐습니다. 그러자 나그네에게 기쁨을 주고 위로를 주고 사랑을 주고 싶어졌습니다. 성도 이름도 모르는 나그네들을 아들 이스마엘을 돌보듯이 섬겨주었습니다. 나그네들에게 아브라함의 집은 마치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와 같았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는 새로운 이름에 걸맞은 새로운 삶의 열매를 맺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변화를 확인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요? 매우 흡족하시고 뿌듯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가정을 기꺼이 축복해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 동안 아들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지만 이번에는 내년 이맘때에 사라를 통해 주시겠다며 시기까지 특정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드디어 언약이 성취가 임박해졌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장막 문 뒤에서 이 말을 듣고 속으로 웃었습니다(12).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13, 14)” 전에는 아브라함이 웃어서 혼이 났는데 이번에는 사라가 웃다가 책망을 들었습니다. 책망을 들은 사라가 덜컥 겁이 나서 부인했습니다.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15a)” 하나님도 끝까지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15b)” 이렇게 사라와 하나님이 서로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 짓게 만듭니다. 모두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태어날 아들의 이름도 웃음이라는 뜻의 이삭으로 짓도록 하셨습니다.
요즘 학생들은 기말고사 기간입니다. 몇 주 후면 나올 학점을 보면 한 학기 동안의 학업 성취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탁월한 학점을 받으면 장학생이 될 수도 있고 표창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믿음이 얼마만큼 성장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역시 시험을 봐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출제하신 기말고사 문제는 '나그네 앞에서 아브라함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이었습니다. 나그네는 고아와 과부와 함께 구약 성경에 나오는 3대 약자 중 하나입니다. 한 번 보고 말 사람이기에 사람들이 무시하기 쉽습니다. 내 코가 석 자인데 다른 사람에게까지 관심을 기울이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있을 때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자기 문제에만 얽매이지 않습니다. 사람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마음에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나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을 기쁜 마음으로 영접하게 됩니다. 겸손하고 너그럽게, 관대하고 풍성하게 섬기게 됩니다. 손님을 잘 대접하여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기쁨과 행복이 됩니다.
저는 작년에 나그네처럼 여러 센터를 다니며 순회 교육을 받았습니다. 모든 곳에서 뜨거운 환대를 받았지만 그 중에서 춘천 센터가 기억에 가장 오래 남습니다. 새벽에 사모님들이 나오셔서 순회 목자들의 아침을 차려 주셨습니다. 점심에는 평신도 목자님들이 회사 근처 식당으로 초청하셔서 대접해 주셨습니다. 센터에서 자겠다는데 굳이 시청 옆에 있는 비즈니스 모텔에 방을 잡아 주셨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센터 동역자들이 거의 다 모여서 일일이 악수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춘천 목자님들의 단순하고 절대적이고 순수한 믿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나도 이렇게 손님을 영접하고 따뜻하게 환대해야겠다고 다짐을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믿음을 인정받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나그네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우리를 찾아오실지 모릅니다. 그 모습은 안암 1부를 방문하신 선교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문제 많은 어린 양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곤란에 처한 동역자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속 사람을 보내시는 것은 우리에게 부담을 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을 인증하시고 이를 바탕으로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섬김으로 다른 사람을 웃음 짓게 만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셔서 우리로 웃음 짓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만나는 사람들을 잘 대접하여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복된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 소돔을 위해 중보 기도한 아브라함
16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 세 나그네는 소돔을 향해 일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먼 곳까지 배웅을 나갔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17)?”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일을 하실 때 아브라함과 의논하여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친구요 동역자로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가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문제에 얽매여 있을 때는 오직 그와 관련된 말씀만 귀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이 다른 말씀을 하셨다 해도 아브라함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좀처럼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는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함께 의논하고 함께 고민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이 무엇입니까? 18절과 19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아브라함이 강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입니다. 당시 남쪽에는 애굽이라는 초강대국이 있었습니다. 북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그돌라오멜 동맹과 같은 강력한 도시 국가 연합체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강대한 나라가 된다는 것이 이런 나라들과 견줄만한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춘 나라가 된다는 뜻일까요? 사실 이런 나라들은 주변 나라들을 침략하고 무자비하게 착취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큰 고통을 주었습니다. 이들이 만든 세계 질서 속에서 정의는 실종되고 오직 힘의 논리만이 지배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세우실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천하 만민에게 복을 주는 나라입니다. 남을 이용해서 나만 행복해지는 나라가 아니라 사랑으로 섬기며 모두가 행복해지는 나라입니다. 또한 그 나라는 의와 공도를 행하는 나라입니다. 약자도 기를 펴고 살 수 있는 나라, 누구나 불합리한 차별을 받지 않고 공평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나라입니다. 인간이 세운 세상 나라들은 죄의 욕망에 충실합니다. 권력과 물질과 쾌락을 얻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불의와 불공평이 가득하고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원리가 지배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 가운데 아브라함을 통해서 의롭고 공평한 나라를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이 나라가 곧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이며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 의와 공평의 나라가 어떻게 실현이 됩니까? 하나님은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식과 권속에게 하나님의 도를 가르쳐 지키게 할 때 의와 공도를 따르는 강대한 나라가 세워집니다. 강대한 나라는 돈이나 무력으로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지는 나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동역자 삼으신 후 첫 번째 안건으로 상의하신 문제가 무엇입니까? 20, 21절을 보면 소돔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죄악이 심히 무거웠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소돔 성을 현지 조사하여 사실 관계를 확인한 후 그들의 악을 심판할 계획이 있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참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참에 그 못된 인간들의 씨를 말려 주십시오.’라고 했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아브라함은 의인 오십 명을 위해 소돔을 멸하시면 안 된다고 하나님께 담대하게 청원했습니다(24). 아울러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고도 했습니다(25). 아브라함이 왜 이렇게 정의에 깊은 관심이 생겼을까요? 바로 앞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의와 공도를 행하는 나라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깊이 영접한 후 아브라함은 공평과 정의가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임을 알았습니다. 모든 일을 정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정의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을 그냥 심판하시면 될 것을 왜 굳이 그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알리셨을까요? 하나님은 비록 그들의 죄악이 아무리 무겁다 해도 소돔을 심판하시는 것이 기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꼬투리라도 있으면 그들을 용서해 주길 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심판의 말씀 사이사이 행간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이 긍휼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그 마음을 알았기에 아브라함은 과감하게 의인의 기준을 사십 오명, 사십 명, 삼십 명, 이십 명, 십 명으로 줄여가며 소돔 성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28~32).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의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얼핏 보면 하나님의 계획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처럼 보여서 화를 내실만도 하신데 전혀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이제는 아브라함을 동역자요 친구로 대우하시기 때문입니다. 오십 명에서 시작하여 열 명까지 내리는 아브라함의 끈질긴 기도를 귀찮아하지 않으셨습니다. 기꺼이 다 받아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성품에 부합하는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소돔은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덕분에 희망의 불씨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다고 하셨는데 그 일은 이렇게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청와대에서 매일 대통령과 독대하여 대통령과 고민을 함께 나누고 국정 전반을 함께 논의한다면 얼마나 큰 영광이겠습니까? 하물며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에 관해 듣기도 하고 의견을 낼 수도 있다면 얼마나 더 큰 영광이겠습니까? 오늘 말씀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만 천기를 누설하시고 함께 의논하기 원하셨습니다. 어느덧 아브라함은 쉽게 자기 문제에 빠져 허우적대던 어린 양에서 하늘의 천상회의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핵심참모가 되었습니다. 부족한 사람을 택하여 키우신 후에 함께 일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 방법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촌구석에 물고기 잡던 평범한 어부들을 부르시고 3년 동안 양육하셨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제자들을 동참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15절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친구에게는 마음속에 비밀까지 다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기밀 사항까지 공유할 수 있는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나갈 동역자로 삼으시고 구속 역사를 계승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는 주로 자기 문제에만 매여 살아왔습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일들을 펼쳐 나가고 계신지 잘 몰랐습니다. 공평과 정의를 깊이 고민해 보지 않았습니다.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 흥하든지 망하든지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이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친구요 동역자로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대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자발적으로 그 일에 동참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무슨 거창한 일을 잔뜩 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아브라함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중보기도였습니다. 예수님도 앞서 언급한 15절 뒤에 곧바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중보기도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중보기도에 하나님은 감동을 받으십니다. 그 어떤 기도보다 기쁘게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친구, 하나님의 동역자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에 합치되는 중보기도로 천하 만민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I. 세상을 사랑했던 롯
19장 1절을 보십시오. 저녁때에 두 천사가 소돔 땅에 이르렀습니다.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자신의 집으로 초청했습니다(2). 롯은 손님들을 위해 식탁을 베풀었습니다(3). 그러나 아브라함처럼 풍성하지는 못했습니다. 롯의 아내와 딸들은 얼굴도 내밀지 않았습니다. 두 천사가 식사를 마치고 눕기 전에 노소를 막론하고 성 사람들이 몰려와 집을 포위했습니다(4). 그들은 롯에게 집에 온 사람들과 상관하려 하니 끌어내라고 했습니다(5). 상관한다는 말은 성관계를 맺겠다는 말입니다.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이를 볼 때 소돔 사람들이 얼마나 타락했는가를 단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롯은 무리들의 요구를 듣고서 정혼한 두 딸을 대신 내놓겠다고 제안했습니다(8). 아비로서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롯이 상대적으로 의롭기는 하지만 그 역시 소돔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아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천사들은 몰려온 무리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롯을 보호했습니다(11). 곧 심판이 있을 터이니 그에게 속한 사람들을 속히 성 밖으로 피신시키도록 했습니다(12). 롯은 딸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14a). 그러나 그들은 장인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14b). 롯의 사위들은 구원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버렸습니다. 롯과 그의 가족들은 천사의 말을 따라 소돔을 떠났습니다(15). 하지만 롯은 소돔에서 떠나는 것을 자꾸 지체했습니다(16a). 할 수 없이 천사들이 끌고 나가야 했습니다(16b). 곧이어 하늘로부터 유황과 불이 소돔과 고모라 성 위에 쏟아졌습니다(24). 롯의 집을 에워쌌던 무리들이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비웃던 롯의 사위들도 다 죽었습니다. 화려했던 향락의 도시 소돔 성은 재만 남기고 불타 없어졌습니다(25).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가 무색하게 의인 열 명이 없어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여 롯과 그의 가족을 건져내셨습니다. 이때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천사의 경고를 받고도 뒤를 돌아보아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26). 롯이 왜 지체했을까요? 롯의 아내는 왜 뒤를 돌아보았습니까? 소돔 성에 대한 미련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롯의 딸들은 어떻습니까? 정혼한 남편들이 죽자 아버지 롯에게 술을 먹여 근친상간을 하여 자식을 낳았습니다(31~35). 딸들도 정상이 아니었습니다.그 후손들이 모압과 압몬 족속입니다(37,38). 이후 이들은 옆구리에 박힌 가시처럼 항상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고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롯의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롯은 아브라함과 같은 시기에 신앙생활을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삶의 궤적은 사뭇 달랐습니다. 아브라함은 고비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음으로 붙들었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천하 만민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나라, 의와 공도를 행하는 강대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반면 롯은 자기 유익과 자기 생각을 따라 살았습니다. 롯은 소돔의 편한 삶을 동경해 들어갔다가 그돌라오멜에게 사로잡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고였습니다. 그러나 롯은 이를 무시했고 결국 소돔이 멸망할 때 모든 소유를 잃었습니다. 심지어 아내까지 잃었습니다. 이후 롯은 자기를 아버지라고 불러야 할지,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는 아이들을 지켜봐야하는 비극 속에서 여생을 보내야 했습니다.
성경 인물 중에서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는 신앙의 대표격인 사람이 바로 롯입니다. 오늘날에도 롯의 길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소개서 종교 란에 기독교라고 쓰면서, 동시에 주량은 소주 두병반이라고 적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눈에 초점이 흐려지면서 깊은 묵상에 빠져들지만, 드라마나 스포츠 경기를 볼 때는 눈빛이 초롱초롱해집니다. 절박한 문제가 생기거나 아쉬울 때만 기도합니다. 어떤 것을 결정할 때 말씀의 원리보다는 실용적인 기준을 따릅니다. 어떨 때는 믿는 사람처럼 보이다가 어떨 때보면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롯의 길을 따르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사랑은 없습니다. 그 사랑은 현재 삶을 죄악으로 오염시키고 미래를 어둡게 할 뿐입니다. 세상을 사랑한다고 해서 세상은 그를 사랑해주지 않습니다. 돌보지도 않으며 책임지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은 양다리 걸친 신자를 ‘날라리 신자’라고 조롱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최악의 짝사랑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2장 15절부터 17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은 롯이 거주했던 소돔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고(故)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1980년대 중반 미국을 바라보며 이렇게까지 탄식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미국을 심판하시지 않는다면 소돔과 고모라에게 사과하셔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다가올 심판을 경고하기 위해 천사가 방문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경고의 말씀이 이미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세상을 사랑했던 롯의 길을 가야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행한 아브라함의 길을 가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가야할 길은 명확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길, 믿음의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우리 후손들에게 여호와의 도를 힘써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와 또 우리 후손들은 강대한 나라, 천하 만민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나라, 의와 공도를 행하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세상을 사랑했던 롯의 길을 따라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셨습니다(롬8:32). 마땅히 우리가 사랑해야 할 그 한 분, 하나님만 사랑하는 우리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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