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창세기

아브람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

이창무 2019. 5. 26.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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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을 축복하는 멜기세덱

2019년 창세기 제 10 강

아브람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

● 말씀 / 창세기 13:1-14:24
● 요절 / 창세기 14: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잘 나가던 시기를 전성기라고 부릅니다. 요즘에는 리즈 시절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브람의 인생 가운데 가장 반짝이는 리즈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선택권을 기꺼이 양보합니다. 롯이 포로가 되었을 때 두려움이 없이 전쟁에 뛰어 듭니다. 소돔 왕이 제안한 재물을 단칼에 거절합니다. 너무 훌륭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의 포인트가 아브람의 인격, 용기, 지혜를 배우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은 제목처럼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또한 하나님에 의해 언약이 성취되어가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도 아브람처럼 부르심에 합당한 삶, 믿음의 승리를 체험하는 삶을 살게 하여주시길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애굽을 떠나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을 쳤던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곳은 아브람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첫 제단을 쌓았던 그곳입니다. 신앙의 첫걸음을 떼었던 바로 그 장소에서 아브람은 새 출발을 다짐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때 아브람에게 새로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롯의 목자와 아브람의 목자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습니다. 원인은 아브람과 롯의 불어난 재산 때문이었습니다. 가진 것이 별로 없던 시절에 그들은 ‘우리가 남이가? 내 양이 네 양이고 네 양이 내 양 아이가?’하던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 양이 네 양 때문에 쫄쫄 굶는다 아이가? 이제 우린 남이다’하면서 종종 주먹다짐까지 벌였습니다. 근처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함께 예배드리던 사람들이 돌아서서는 싸우는 모습이 이방인들 앞에서 은혜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자 했습니까? 8, 9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니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둘이 억지로 함께 있어봐야 서로 상처만 더 깊어질 것이 뻔했습니다. 그럴 바에야 지금 헤어지는 편이 나았습니다. 각자 자기가 살 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아브람은 롯에게 우선권을 주었습니다.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는 당시 기준으로도 지금 기준으로도 굉장히 파격적인 제안이었습니다. 아브람은 롯의 삼촌입니다. 롯은 그 동안 아브람에게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이럴 때는 아브람이 “내가 좌하면 너는 우해. 내가 우하면 너는 좌하는 거야. 알겠지?”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게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람은 롯에게 선택권을 양보했습니다. 옆에서 듣다가 화들짝 놀란 사래가 아브람의 옆구리를 찌르며 속삭였습니다. “당신 도대체 왜 이래요? 미쳤어요?” 정말 아브람은 왜 이렇게 했을까요?

 

첫째로 아브람은 설령 손해를 좀 보더라도 사람을 잃지 않고자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질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관계성이 파괴되는 현상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크지도 않은 돈 때문에 다투다가 사이좋던 사람들이 일평생 원수가 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롯을 보낼 때 롯이 상처를 받고 나가지 않길 바랐습니다. 원만한 관계 속에서 보내어 롯의 마음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 과정 중에 일시적으로 물질의 손해를 입어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아브람이 어떻게 이처럼 이익보다 관계를 더 중시하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을까요? 앞선 12장에서 아브람은 자기 멋대로 애굽에 내려갔다가 큰 곤욕을 치른 바 있습니다. 곤욕도 곤욕이지만 이 사건으로 하나님을 뵈올 면목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겨우 곤경을 벗어났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긋나자 심령이 답답하고 괴로워 견딜 수 없었습니다. 돌아온 아브람은 처음 제단 쌓았던 곳에 다시 나아가 하나님께 예배하며 깨어진 관계성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화평을 누리며 아브람은 사람의 행복은 물질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성 속에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손해를 좀 보더라도 롯과 화평한 관계성을 유지하는 쪽을 선택하고자 했습니다.

 

둘째로 아브람은 믿음에서 나온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2장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아브람은 이 약속을 믿고 곳곳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런 아브람에게 이 땅은 어차피 아브람의 후손이 다 차지할 땅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람은 하나님이 언약하신 대로 내 삶을 인도하고 계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에서의 사건을 통해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아브람은 여유가 있었습니다. 여유가 있으니까 롯에게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아브람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아무리 사랑하는 조카 롯이라도 이런 통 큰 양보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애굽에 거할 때 약속에 대한 불신이 아브람에게서 두려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두려움은 그를 오그라들게 만들었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회복된 약속에 대한 신뢰가 아브람을 아량을 베풀 줄 아는 관대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혹시 우리 중에 현재 갈등 가운데 있는 분이 계십니까? 지금은 그렇지 않더라도 누구나 갈등을 겪어본 적이 있고 앞으로도 겪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부부 간의 갈등일 수 있고, 자녀와의 갈등일 수도 있습니다. 친척이나 친구와의 갈등을 경험하기도 하고, 직장에서 주변 사람들과 갈등에 빠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교회 안에서 동역자들끼리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누구 말이 맞는지 끝장 토론을 해야 할까요? 말로 안 되면 화장실로 끌고 가야 할까요? 아니면 그냥 무시해 버릴까요? 오늘 아브람은 우리에게 갈등을 해결하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너그럽게 대하는 것입니다. 일단 양보하고 필요하면 손해까지 기꺼이 감수하고자 하면 갈등은 해결됩니다. 옆 차선에서 차가 깜빡이도 안 넣고 끼어들려고 합니까? 그냥 들어오도록 하면 됩니다. 축구하다가 판정 문제로 언성이 높아졌습니까? 그냥 상대방의 주장대로 해 주면 됩니다. 사람의 생명이 걸린 문제가 아니라면 갈등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나고 나면 별 일도 아닐 문제 가지고 으르렁거리고 다투어도 될 만큼 우리 인생이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브람처럼 축복의 통로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복을 나누어 주고 사람을 사랑하고 살리는 일에 쓸 시간이 부족합니다. 가까운 사람들과 싸우는데 인생을 허비할 수 없습니다. 손해를 좀 보더라도 사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내 몫은 하나님이 친히 챙겨주실 텐데 양보하면 어떻습니까? 갈등 상황은 언제 어디서든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하나님이 주실 복을 믿고 기꺼이 아량을 베풀 줄 아는 관대한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차라리 져주고 그 대신 사람을 얻는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아브람의 너그러운 제안을 들은 롯은 어떤 선택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제가 삼촌 곁에 있어야지 어딜 가겠습니까?’라고 했습니까? 아니면 ‘무슨 말씀이세요? 삼촌이 먼저 선택하셔야죠.’라고 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롯은 아브람의 양보를 넙죽 받아먹었습니다. 눈을 들어 어디가 좋은지 찾았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상대적으로 물이 넉넉한 요단강 주변 지역이 보였습니다. 그곳이 마치 꽃이 만발한 에덴동산처럼, 나일 강이 흐르는 풍요로운 애굽 땅처럼 보였습니다. 저기로 가면 다시는 기근 때문에 애굽에 갈 일은 없을 것 같았습니다. 롯은 그 동안 돌봐줘서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없이 요단 지역을 향해 떠났습니다. 이후로도 계속 좀 더 안락한 곳, 좀 더 윤택한 곳을 찾다보니 결국에는 장막생활을 버리고 E-편한 소돔성 안에 들어가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돔은 어떤 곳입니까? 13절은 말합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롯은 이 영적 현실이 전혀 눈에 보이질 않았던 모양입니다. 왜 입니까? 소돔이 주는 풍요와 쾌락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4절은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때 아브람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롯이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나?’하며 섭섭했을 것입니다. 막상 좋은 땅을 놓치고 나니 손해의식도 들었습니다. 그 동안 롯은 아브람에게 아들 같은 존재였는데 갑자기 안 보이니 마음이 허전했습니다. 울적한 아브람을 누가 위로해 줄 수 있을까요? 역시 하나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람을 무엇으로 위로하셨습니까? 하나님은 당장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위로하지 않으셨습니다. 약속의 말씀으로 아브람을 위로하셨습니다. 먼저 눈을 들어 동서남북으로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람이 일어나 밟는 모든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처음 나온 것이 아니라 이미 12장에 나온 약속을 구체화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은 한 가지 약속을 더 추가하셨습니다. 자손을 땅의 티끌 같이 많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앞에서 롯은 자기 스스로 눈을 들어서 요단 지역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땅을 탐욕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또 자기 스스로 일어나 소돔 땅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눈을 들었습니다. 약속하신 땅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친히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롯의 중심에는 늘 자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람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은 장막을 헤브론으로 옮겼습니다. 최근 고고학 발굴에 따르면 헤브론은 아브람 시대 가나안의 수도였다고 합니다. 아브람이 그곳에서 제단을 쌓은 것은 가나안의 중심부를 접수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의 표시였습니다. 이처럼 롯은 풍요로운 땅을 얻었고, 아브람은 약속을 얻었습니다. 둘 중에 누가 더 지혜로운 선택을 했을까요? 이 지점에서는 아브람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고 롯이 알짜배기를 다 차지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론을 내리기엔 너무 이릅니다. 결론은 다음 장부터 펼쳐지는 아브람과 롯이 보여주는 인생 행보를 끝까지 따라가 본 이후에 내려도 늦지 않습니다. 미리 스포일을 하자면 이후 롯은 전쟁 포로가 되기도 하고 멸망 일보 직전에 이르기도 합니다. 아내를 잃고 근친상간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전쟁 영웅이 되기도 하고 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치에 서기도 합니다. 약속의 아들을 얻고 결국 그 후손이 가나안 땅을 모두 차지하게 됩니다.

 

70년 한국 광고계의 최고 명 카피로 꼽히는 멘트가 하나 있습니다. 1981년 금성 하이테크 TV 광고 때부터 사용되었던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라는 카피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점심에 무엇을 먹을까?’에서부터 시작해서 ‘장래 어떤 직업을 가질까?’, ‘어떤 사람과 결혼해야 할까?’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10년 또는 평생, 아니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선택의 순간 그 사람의 가치관이 드러납니다. 어떤 사람은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쫓아가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쫓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욕망에 충실한 선택을 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선택을 합니다. 단기적으로 보면 전자가 잘 되는 것 같고, 후자는 맨날 손해를 보는 것 같습니다. 앞사람은 처세가 뛰어나다는 인정을 받고, 뒷사람은 바보라고 무시를 당합니다. 독일 뮌헨의 곽베드로 선교사님의 전 직장은 요즘 다들 입사하기를 선망하는 SK 텔레콤이었습니다. 게다가 선교사님은 이 회사가 한국이동통신이었던 시절부터 근무하셨던 왕고참 직원이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독일 선교사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아마 주위에서 왜 그런 바보 같은 선택을 했느냐는 소리를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짐 엘리엇이 남긴 한 마디를 알고 있습니다.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절대 바보가 아니다.” SK 텔레콤에서 가입자의 돈을 끌어 모으는 통로가 되는 것과 독일 지성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 둘 중 어느 쪽이 더 가치 있는 일입니까? 베드로 선교사님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상급을 받으실 것이기에 가장 지혜로운 선택을 하신 분이십니다. 잠언 16장 25절은 ‘어떤 길은 사람의 보이게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5장 7절에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유익에 기초해서 선택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선택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좀 손해를 보고 고생하더라도 영적인 것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4장 1, 2절을 보십시오. 당시에 가나안 북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던 네 나라 왕들과 가나안 남쪽에 있던 다섯 나라 왕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전쟁의 원인은 가나안 왕들이 12년 동안 그돌라오멜에게 조공을 바치다가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그돌라오멜 왕은 대노했습니다. “이것들이 간땡이가 부었구나! 내 저것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말리라.” 마침내 소돔 왕 베라를 중심으로 한 가나안 동맹군과 그돌라오멜 동맹군 사이에 싯딤 골짜기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결과는 그돌라오멜 동맹군의 일방적인 승리였습니다. 그돌라오멜의 동맹군은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식량을 약탈하고 사람들까지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 와중에 소돔에 거하던 롯도 사로잡히고 전 재산을 다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아브람은 전쟁에서 도망쳐온 사람을 통해 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브람은 이때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롯을 구출하기 위해서 맞서야 할 상대는 동네 깡패들이 아니었습니다. 상대는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는 도시국가 연합군이었습니다. 아브람이 그들과 싸운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아브람이 롯을 위해 뭔가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아브람을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롯은 자기 욕심 때문에 소돔까지 내려왔다가 이런 일을 당했습니다. 잘못된 선택에 따른 응분의 보응을 받는 것으로 여기며 못들은 척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롯을 구하기 위해 집에서 훈련한 318명의 장정들을 이끌고 전쟁터로 달려갔습니다. 318명으로 그돌라오멜 동맹군과 정면 승부한다는 것은 무리수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야간 기습 공격을 시도했습니다. 동시에 편대를 나누어 교란 작전을 펼쳤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시리아의 다메섹 근처까지 추격해 가서 롯과 부녀자들과 재물을 구출해 내었습니다.

 

전에 기근을 피해 애굽에 내려갔을 때 아브람의 모습이 어떠했었습니까? 그때 아브람은 아내를 누이라 속이면서까지 자기 목숨 지키기에 급급한 사람이었습니다. 겁에 질린 졸보 이미지였습니다. 그런데 본문 속의 아브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롯을 구하기 위해 생명을 걸고 적진 한 가운데 뛰어드는 영웅의 이미지입니다. 이 순간 이런 말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아브람이 달라졌어요.” 두려움 많던 아브람이 어떻게 이렇게 담대한 사람으로 변화했을까요? 아브람은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길에 애굽에서 있던 일을 하나씩 복기해 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애굽 땅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천하제일의 권력자인 바로를 덜덜 떨게 만드는 권능의 하나님이셨습니다. 한 번 부르신 사람은 반드시 지켜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아브람은 단순히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와 비례해서 아브람의 믿음도 함께 커져갔습니다. 아브람은 부끄러운 실수를 덮으려고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실수를 통해 깨닫고 배웠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약점인 두려움을 극복할 정도로 믿음이 성장했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실수를 많이 합니다. 저마다 다 자기만의 약점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애써 외면하고 덮으려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들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닙니다. 실수하고 허물이 드러나는 바로 그 순간이 내가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수할 때 이를 만회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약할 때 강함이 되어 주십니다. 엎치락뒤치락 여러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함께 자라게 됩니다. 믿음이 계속 성장하다보면 어느새 예전의 연약함을 찾아볼 수 없는 새사람으로 변화되어 있습니다. 이때 주위 사람들에게서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우리 누구누구가 달라졌어요.’ 자기도 자신에게 놀라게 됩니다. 우리 UBF 목자님들이나 선교사님들을 보면 아브람 같은 담대한 믿음의 용사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도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다 올챙이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건들을 통해 나의 하나님을 찾았고, 넘어졌다 일어나는 과정을 통해 믿음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정말 슬퍼해야 할 것은 실수하는 것이 아니라 실수를 통해 배우지 않고 성장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실수와 약점을 디딤돌 삼아 배우고 성장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인생 역전의 승리를 주실 줄 믿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전쟁에서 승리하고 빼앗겼던 모든 것을 되찾은 아브람이 귀환했습니다. 소돔 왕이 왕의 골짜기라는 곳까지 나와서 아브람을 영접했습니다. 18절에 보면 소돔 왕뿐만 아니라 살렘 왕 멜기세덱도 영접을 나왔습니다. 멜기세덱은 왕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멜기세덱은 전쟁으로 지친 아브람을 위해 떡과 포도주로 만찬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을 축복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람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높이며 찬송했습니다. 이에 대해 아브람은 자신의 전리품 중 십분의 일을 드렸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멜기세덱의 찬송처럼 이 승리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신 승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한 것입니다. 승리의 순간에 아브람은 자신을 높이기 쉬웠습니다. '봤어? 봤냐고? 내가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롯을 구해 왔다니까' 하면서 얼마든지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멜기세덱을 보내셔서 아브람이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도우셨습니다. 아브람이 겸손하게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주신 진짜 축복입니다.

 

진짜가 있으면 가짜도 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소돔 왕은 패전한 주제에 자존심은 있어서 선심 쓰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아브람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아브람은 실 한 오라기나 끈 한 가닥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다만 비용은 정산하고 아브람과 함께 했던 동맹의 몫만 챙겨 주겠다고 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아브람이 자신이 노획한 전리품을 갖는 것은 지극히 합법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다 너 가지라는데도 아브람이 왜 거절했을까요? 23절에 나오는 아브람의 말 속에 답이 있습니다.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하게 하고 복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람이 받는 모든 축복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드러나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여기서 이 전리품을 받게 되면 나중에 아브람이 잘 된 것은 다 소돔 왕 덕분이라는 소문이 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가야할 영광을 소돔 왕이 중간에 가로채 가는 셈이 됩니다. 아브람은 이런 가능성까지 면밀히 고려해 아예 재물을 다 포기하겠다고 했습니다. 승리를 하고 나면 몸에서 엔도르핀이 분비됩니다. 흥분 상태가 되어 정신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승리의 때에 분별력을 잃지 않았습니다.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 축복에 속지 않았습니다. 이 승리는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승리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브람처럼 진짜 축복과 가짜 축복을 분별할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일이 잘 풀리고 성공했을 때 더욱 필요합니다. 당장은 축복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를 함정에 빠트리는 올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진짜 축복과 가짜 축복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 축복이 나를 겸손하게 하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면 진짜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한다면 가짜 축복입니다. 만약 그 축복이 나를 감사의 자리로 이끈다면 진짜 축복입니다. 그러나 나를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만든다면 가짜 축복입니다. 만약 그 축복이 성경적 원리에 위배되지 않는 방법으로 얻은 것이라면 진짜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신앙 양심을 거스르는 일이라면 가짜 축복입니다. 우리가 사모할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진짜 축복입니다. 가짜 축복은 단호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미련을 주지 말고 쳐다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이 주는 가짜 축복의 한계와 위험성을 알고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며 소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강명식이라는 CCM 가수가 부른 ‘승리’라는 곡이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가사로 시작합니다. “승리가 무엇일 줄 아는가 / 더 좋고 편한 가능성의 유혹을 절연히 잘라버리고 / 오직 주님만 따라 가는 것이 바로 승리라네” 오늘 말씀에서 아브람이 그돌라오멜 동맹군을 무찌른 것만이 승리가 아닙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 롯처럼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세상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 것이 아브람의 승리입니다. 이득 대신 약속을 쫓은 믿음의 승리입니다. 아브람의 모든 승리 안에는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주신 은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은혜를 주셔서 아브람처럼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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