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창세기

노아와 맺은 언약

이창무 2019. 5. 5.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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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창세기 제 7 강

 

노아와 맺은 언약

 

● 말씀 / 창세기 7:1-9:17
● 요절 / 창세기 9: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노아 하면 연관 검색어로 홍수 또는 방주를 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노아 인생의 절정은 홍수나 방주가 아닙니다. 바로 무지개입니다.

19세기 영국의 계관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무지개’라는 시가 있습니다. "저 하늘 무지개를 보면 / 내 가슴은 뛰노라 /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 어른인 지금도 그러하고 / 늙어서도 그러하리 /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으리! /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 내 하루하루가 / 자연의 숭고함 속에 있기를” 이 시에서 무지개는 동심의 표상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 무지개가 엉뚱하게도 동성애자들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동성애자 집회에는 온통 무지개 깃발이 나부낍니다. 무지개의 일곱 가지 색깔이 성적 취향의 다양성을 대변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지개의 진정한 의미는 그런 곳에 있지 않습니다. 무지개는 그 무엇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언약의 징표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무지개 언약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7장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이제 칠 일 후면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릴 대홍수가 닥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가족만은 방주에 넣어 살리고자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노아의 의로움을 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6장 12절에 보면 하나님이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저지르는 참혹하고 더러운 죄악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마음은 심히 괴로우셨습니다. 더 이상 이 세상을 쳐다보고 싶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 세상을 주목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 의로운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노아에게서 의로움을 발견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과 순종하는 삶을 보셨습니다. 이 노아를 홍수로부터 구원하시어 인류의 씨를 남겨두고자 하셨습니다. 또 노아를 통해 짐승들의 씨까지 보존하도록 하셨습니다.

노아가 아무리 의롭게 살았다 한들 하나님이 보지 않으셨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믿음과 순종의 삶을 별로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고 순종하는 자의 의로운 삶을 주목하고 계십니다. 때가 되면 그 삶이 헛되지 않도록 반드시 보상해 주십니다.

 

5절을 보십시오.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는 역시 말씀 준행 요회답게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다 준행했습니다. 방주 안에 노아와 그의 가족과 암수 한 쌍의 짐승들이 탑승을 완료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직접 방주의 문을 닫으셨습니다(16).

드디어 노아가 600세 되던 해 2월 17일에 대홍수가 시작되었습니다(11).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록된 것을 보면 아마도 노아가 홍수 일지를 썼던 것 같습니다. 이때 40일 동안 내린 비가 모든 것을 다 삼켜버렸습니다. 홍수가 진행된 과정을 보면 창세기 1장에 기록된 천지 창조의 과정이 반대 방향으로 일어났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둘째 날에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홍수가 나자 궁창 아래의 물과 위의 물이 다시 하나로 합쳐졌습니다.

셋째 날에는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여 뭍이 드러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날에는 모든 육지가 수면 아래로 잠기고 말았습니다. 땅에 물이 불어 가장 높은 산보다 7 미터 정도 더 올라왔습니다. 가인이 세운 에녹성도 물에 잠기고, 그 동안 인류가 이룩했던 모든 문명이 다 사라졌습니다.

다섯째 날에 창조하신 새들, 여섯째 날에 창조하신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들이 다 죽었습니다. 하늘을 날던 새들도 다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소와 양과 나귀도 죽었습니다. 도마뱀도 죽고 이구아나도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어주셨던 사람도 다 죽었습니다. 근육질을 자랑하던 네피림들이 열심히 헤엄을 쳐봤지만 아무 소용없었습니다. 다 가라앉아 버렸습니다. 미모와 몸매를 뽐내던 여인들도 퉁퉁 부은 시체가 되어 둥둥 떠다녔습니다. ‘하나님을 믿느니 내 주먹을 믿겠다’고 하며 노아를 비웃고 조롱하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방주를 두드리며 살려달라고 소리쳤지만 한 번 닫힌 방주의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대재난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들이 누구입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 노아와 방주에 함께 있던 자들입니다. 오직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했던 한 사람 그리고 그와 함께 했던 자들만이 살아남았습니다.

 

재난이 닥쳤을 때 누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얼핏 생각하면 강한 자만이 살아남고 약한 자는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현실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강한 사람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교만입니다. 강한 사람은 자신감이 넘칩니다. 자신감이 지나치면 오만이 됩니다. 위험이 닥쳐온다고 경고를 해도 무시하게 됩니다.

그 시대에 노아보다 강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노아보다 권력이 있는 사람, 더 부자인 사람, 더 똑똑한 사람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홍수 앞에서는 이 모든 것이 다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반면 노아는 당대 최고의 부자도 아니었고 권력자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고자 몸부림을 쳤을 뿐입니다. 겸손하게 하나님만 의지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단순하게 순종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노아를 말씀 준행 밖에 모르는 고지식한 사람으로 치부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홍수와 함께 다 사라졌고, 노아만 살아남았습니다.

 

제가 최근에 읽은 책 중에 ‘기독교의 발흥’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로마 시대에 창궐했던 전염병이 기독교의 발흥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전염병 때문에 로마 제국 내 인구의 1/3 내지 1/4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독 기독교인의 생존율이 아주 높았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시 사람들은 전염병에 걸린 사람이 발생하면 죽을 때까지 내버려두었습니다.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극진히 간호를 해주었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이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저 말씀에 순종했을 뿐인데 이런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거대한 재난은 사람의 한계를 깨닫게 해 줍니다. 하나님 앞에서 빳빳이 세웠던 머리를 숙이게 합니다.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 누구인지 드러내줍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이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누가 강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사람입니다. 한 달 후에 학사 수양회가 있습니다. 불신 세상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 온 우리 학사 목자님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노아입니다. 계속해서 우리가 우직하게 믿음과 순종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노아는 이렇게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살아남았다고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24절을 보면 물이 백오십 일을 땅에 넘쳤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방주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노아와 가족들은 매일 많은 동물에게 밥 주고 똥 치우고 섬기는 엄청난 수고를 했을 것입니다. 동물들이 조용히 있었을까요? 어딜 가나 꼭 문제아가 있습니다. 싸우기 좋아하는 애들이 있습니다. 노아는 동물들을 섬기느라 스트레스가 많았을 것입니다.

한편 방주는 망망한 바다 위에 떠 있었습니다. 목적지가 어딘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물에 뒤덮인 지구, water world 에 방주 하나가 외롭게 떠 있었습니다. 홍수에서 살아남았다고 구원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상태로 계속 있다가 방주 안에서 다 죽을 수 있습니다. 구원은 방주에서 나와야 완성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8장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노아를 구하시고자 바람이 불어 물이 줄어들게 하셨습니다. 물이 땅에서 물러가기 시작해 그해 칠월 십칠일에 방주가 해발 4,956m 되는 아라랏 산에 머물렀습니다(4). 물이 점점 줄어들어 10월 1일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5). 사십일이 지나 노아가 방주의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 놓았습니다. 이어 비둘기를 세 번 내놓았는데 매번 비둘기들이 땅에 접촉할 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세 번째 비둘기를 내보냈을 때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는 땅이 온전히 말라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내 노아도 방주의 뚜껑을 제치고 보았는데 사면에 물이 걷힌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가 이월 이십칠일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그 가족들, 그리고 모든 동물들도 다 방주에서 나오라 하셨습니다(16). 홍수가 시작된 지 1년 10일 만이었습니다. 밖을 보니 천지가 새로워졌습니다. 사람들도 다 없어지고 그 많던 물도 없어졌습니다. 들에는 초목이 새롭게 번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그들은 감격적으로 마른 땅에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습니다.

 

7장에서는 창조의 역사가 거꾸로 되돌려졌다면, 8장에서는 재창조의 역사가 펼쳐집니다. 이와 같은 새로운 반전의 역사가 시작되는 지점인 8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150일 동안 노아 일행을 깜빡 잊고 계셨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셨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홍수 이후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이룰 주역들이 바로 방주 안에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잊어버릴 수 있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한시도 그들을 잊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다만 사람이 보기에는 잊으신 것처럼 보일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아무런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신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물이 빠질 날을 매일 목이 빠져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오늘도 넘실거리는 물은 줄어들 기미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까지만 기다리면 된다는 말씀이라도 해주시면 좋을 텐데 아무 말씀조차 없으셨습니다. 이럴 때 노아는 하나님이 과연 우리를 기억하고 계실까 고민에 빠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바람이 불어오더니 물이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야 노아는 하나님이 나를 잊지 않으시고 줄곧 기억하고 계셨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애굽의 압제 하에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무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2장 25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습니다. 곧 이어 모세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무엘서 1장에서 한나는 아들이 없는 문제로 마음이 괴로워서 하나님께 나를 기억해 달라고 서원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한나를 기억하셨고 그러자 한나가 임신했습니다. 세상을 휩쓴 홍수는 이 땅에 사람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지워버리려 했습니다. 노아마저 잊힌 존재가 될 뻔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잊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종종 부르는 ‘내 이름 아시죠 (He Knows My Name)’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토미 워커가 작사 작곡한 이 노래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그가 필리핀에 있는 어떤 고아원에 갔을 때 한 아이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 아이는 토미를 볼 때마다 자신의 이름을 아는지 물었다고 합니다. 그는 아이가 왜 계속 똑같은 질문을 하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고아로 자란 그 아이는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기를 원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토미는 자신의 방황하던 과거를 떠올렸습니다. 한때 그는 오랜 무명 가수의 시기를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도 자기를 기억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크게 좌절하고 낙담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는 하나님께서 너의 이름을 손바닥에 새겨 넣으셨다는 이사야서 49장 16절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아신다는 사실, 그것도 결코 잊을 수 없도록 손바닥에 그 이름을 새겨 놓으셨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러웠습니다. 이 말씀이 그가 다시 일어날 힘을 주었습니다. 이후 이 고백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는데 그것이 바로 ‘내 이름 아시죠’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망망대해에서 표류하고 있는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이 과연 나를 기억하고 계실까 묻게 됩니다. 혼자인 것 같아 외롭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택하신 자녀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생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 때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고 계십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역사하셔서 구원하시고 새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면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20절을 보십시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노아는 황폐해진 땅에서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아갈까’부터 염려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가장 먼저 제단을 쌓고 정결한 짐승을 취하여 번제로 드렸습니다. 홍수에서 생명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가 드린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셨습니다(21a).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입니다(21b). 흔히들 순진무구한 어린 시절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어린 아이들이 그렇게 순진무구할까요? 당장 저만 해도 어릴 때 어머니 지갑에서 돈을 몰래 꺼내 쓴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거짓말한 것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실은 부모가 되어 자녀를 키우다 보면 더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아이들이 하도 말썽을 일으키는 바람에 요즘 음식점이나 카페 중에 ‘No Kids’ 존을 선언한 곳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이렇게 어려서부터 악한데 다 커서는 오죽하겠습니까? 인간을 때리고 가둔다고 새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벌을 받고 교도소에 가면 새 사람이 되어서 나오는 것 아니라 대부분 더 정교하고 악랄한 범죄자가 되어서 나옵니다. 혼쭐이 나면 잠시 동안은 정신을 차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시간이 더 흐르고 나면 곧 제자리로 돌아가고 맙니다. 사람이 교육을 받고 인격을 도야하고 훈련을 받으면 달라지긴 합니다. 하지만 겉은 달라졌을지언정 여전히 속에서는 죄의 소욕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고 외쳤습니다. 사람을 알면 알수록 이 말은 정말 진실이구나 하는 점을 깨닫습니다. 아니, 다른 사람을 볼 필요도 없이 나 자신을 정직하게 대면해 보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진실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4)’는 바울의 탄식은 우리의 탄식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죄성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징계를 받아도 별 소용이 없습니다. 또 반복해서 죄를 범합니다.

이 한심하고 답답한 인간이란 존재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영화 어벤져스의 타노스처럼 핑거스냅 한 방으로 인간들을 다 없애버려야 하나요?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가면 주기적으로 세상을 홍수로 쓸어버리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이것은 너무 마음이 아픈 일이라 하나님도 감당하기 힘드셨습니다. 사람이 바뀌질 않으니 대신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죄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끌어안으셨습니다. 다만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22). 하나님은 왜 계절이라는 자연 법칙을 보존하시겠다고 약속하셨을까요? 이는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세상이 되도록 하셔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극도의 불안이나 두려움에 빠지지 않고 미래를 대비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만약 매년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가지 않고, 어떤 해는 가을, 봄, 여름, 겨울, 어떤 해는 겨울, 여름, 겨울, 가을 이런 식으로 중구난방으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이 한 해를 계획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농사를 지을 수 없어서 온 인류는 극심한 식량난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계절이 질서 있게 순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섭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자체가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이 은총이 모든 인류에게 두루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은 얼마나 인자하고도 자비로운 분이십니까?

 

9장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이 명령은 창세기 1장에서 사람을 지으신 후 주신 명령입니다(1:28).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하나님이 처음 사람에게 주신 축복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다른 점은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씀이 없고 대신 동물들이 인간을 무서워하는 새 질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더불어 육식이 시작되었습니다(3).

홍수 이후 세워진 세상의 질서가 창조 시의 질서와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죄와 그로 인해 파괴된 자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상황이 더 악화되지 않도록 두 가지 당부를 하셨습니다. 첫째, 생명의 근원인 피를 먹지 말도록 명령하셨습니다(4). 둘째,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피를 흘리지 못하도록 살인을 엄격하게 금하셨습니다(6). 첫 사람 아담은 죄가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후 사람은 범죄하고 타락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처럼 다시 한 번 인류를 향해 동일하게 축복하시고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후손들과 언약을 맺고자 하십니다. 그 언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앞선 6장 18절에서도 하나님은 노아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너는 방주를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라. 그러면 너의 생명을 보존하리라’이었습니다. 이 언약과 9장의 언약과 큰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6장의 언약에는 방주를 만들라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노아가 이 조건대로 방주를 만들어야만 생명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9장의 언약에는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앞으로 똑바로 잘 하면 봐주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다시는 땅을 멸할 홍수를 일으키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든지 관계없이 하나님이 하신 약속에 스스로 매이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만약 이 언약에 조건이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람들은 계속 불안에 떨며 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죄를 짓지 않고 완전히 의롭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잘 하다가도 언제든 삐끗해서 엇나갈 수도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면 죄를 범할 때마다 또 다시 홍수가 임하지 않을까 염려가 될 것입니다. 한 번 홍수를 경험해 그 무서움을 알기에 더욱 두려울 것입니다. 어느 날 하늘에 먹구름만 보여도 가슴이 콩닥콩닥할 것입니다. 정말 비라도 내리면 모두 패닉에 빠졌을 것입니다. 이 두려움과 불안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사람 안에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언약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이 언약 덕분에 안심할 수 있습니다.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복음입니다. 불안과 염려, 죄의식과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을 주는 기쁜 소식입니다.

결혼 언약에는 반지나 시계라는 증표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노아와 그 후손과 맺은 언약의 증표가 무엇입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무지개를 언제 볼 수 있습니까? 비가 그친 후입니다. 비가 계속 더 내리지 않고 그치면 사람들은 내릴 만큼 내렸으니 그쳤나 보다 하면서 덤덤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노아는 달랐습니다. 비가 내리다가 그쳤다는 것은 저절로 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시는 땅을 멸할 홍수가 있지 아니하리라는 언약을 하나님이 지키신 것으로 그 의미가 다가왔습니다. 노아는 허물을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때 구름 사이로 무지개가 떠올랐습니다. 빨주노초파남보, 보남파초노주빨 일곱 빛깔의 찬란한 아치가 하늘에 걸려 있었습니다. 노아는 무지개를 보면 마음에 평화가 임했습니다. 무지개는 더 이상 세상을 홍수로 멸하지 않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증거가 되어 불안과 두려움을 없애주었습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평화의 언약이 담긴 무지개를 볼 때마다 노아의 가슴은 뛰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다시는 쓸어버리시지 않으신다면 그러면 인간의 죄는 어떻게 합니까? 결국 하나님 자신의 희생을 통해 용서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범한 죄에 대해서 그 진노를 우리에게 쏟아 붓지 않으십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 진노를 쏟아 부으십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보시고 홍수를 내리시지 않겠다는 언약을 기억하셨듯이 십자가를 보시고 심판을 거두어 가십니다.

워즈워스는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은 뛴다고 노래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십자가를 바라 볼 때마다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우리 마음에 평화가 임합니다. 십자가를 바라 볼 때마다 감사와 찬양이 흘러나옵니다. 십자가를 처음 보았을 때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 삶에 근심과 두려움, 죄의식의 먹구름이 드리울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구름 속에 무지개가 떠오르듯 우리 마음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떠오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매일매일 주 달리신 십자가를 바라보며 한없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로 우리 가슴이 뜨거워지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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