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창세기

가인에게 표를 주신 하나님

이창무 2019. 4. 7.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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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창세기 제 5 강

가인에게 표를 주신 하나님

말씀 / 창세기 4:1-5:32
요절 / 창세기 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이번 주에 강원도 고성과 속초에서 큰 산불이 있었습니다. 이 산불로 축구장의 735배가 넘는 면적이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현재까지 조사에 따르면 이 거대한 산불은 강원 고성군 도로변에 있는 개폐기에 연결된 전선에서 일어난 불꽃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인간의 죄도 이와 흡사합니다. 처음에는 아담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은 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죄가 어떻게 산불처럼 번져 온 세상을 뒤덮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 와중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새로운 소망의 역사를 시작하셨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 어떻게 되는지 깨닫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소원을 충만히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하와는 인류 최초로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기를 낳은 후에 아담의 손을 잡고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소감을 발표했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아들의 이름을 ‘얻었다’는 뜻을 가진 ‘가인’이라고 지었습니다. 하와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습니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장남인 가인은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서 농부가 되었습니다. 둘째인 아벨은 양치기가 되었습니다. 때가 되자 두 형제는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감사의 제물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가인의 손에는 자기 밭에서 추수한 곡식 단이 들려 있었습니다. 아벨의 손에는 양의 첫 새끼에서 나온 기름진 부위가 들려 있었습니다. 잠시 후 제물이 놓인 제단 위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불이 오직 아벨의 제물만을 태웠습니다. 가인의 제물에는 그을음조차 없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음이 분명해졌습니다. 아벨은 얼굴에 살짝 미소를 머금었습니다. 반면 가인은 안색이 싹 변했습니다. “씩, 씩, 씩, 씩”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습니다.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떨기 시작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기가 바친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은 지극히 부당한 처사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속은 이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데 옆에서 혼자 은혜 다 받은 표정을 짓고 있는 해맑은 동생이 너무 얄밉게 보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는데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제물의 종류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아벨의 제물은 짐승의 피를 흘려서 얻은 고기였지만 가인의 제물은 그냥 농산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채소보다 고기를 더 좋아하실까요? 그러나 성경에는 짐승을 잡아 드리는 제사 외에도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가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약간의 힌트가 있습니다. 아벨과 그 제물을 받으셨고 가인과 그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를 통해 제물도 문제이지만 그 제물을 드린 사람이 관건이었구나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외에 다른 내용은 본문 속에 전혀 없습니다. 본문이 마치 '그 이유를 꼭 알아야할 필요는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사를 받고 안 받고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종교들은 신은 내가 정성을 다해 바치기만 하면 언제나 그 제물을 받고 복을 내려주는 그런 신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조건과 행위에 매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받기도 하시고 받지 아니하실 수도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에게는 주권적인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무엇을 선택하시든 그 선택은 언제나 선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 자유로운 선택을 아주 싫어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안색이 변합니다. 세상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면으로 봐도 저 친구보다는 나은데 왜 하나님은 저 친구만 잘 되게 하시고 내 인생만 계속 꼬이게 하시지?” “내가 기도를 안 했나? 기도 했잖아. 새벽에도 하고 수도 없이 기도했는데 왜 내 기도는 안 들어주시나? 누구는 기도 안 해도 그냥 주시던데…” 섭섭합니다. 야속합니다. 안색이 변하고 하나님을 향해 화가 납니다. 이럴 때 우리는 가인의 후예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있는지 아닌지 언제 알 수 있습니까? 거절당할 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거절하실 때 안색이 변하는 사람은 주권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주권 신앙이 없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반드시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거절하셔도 ‘주님이 옳게 행하셨습니다.’라고 인정하는 사람이 주권 신앙이 있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마리아가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문제를 알리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하시며 거절하셨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안색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하인들만 준비시켰습니다. 예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않고 전폭적으로 신뢰했습니다. 우리가 마리아처럼 거절을 통과한 진짜 믿음, 주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안색이 변한 가인에게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제라도 가인은 하나님의 거절을 기꺼이 수용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봐야 했습니다. 이것이 가인에게 최선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죄가 문에 엎드려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죄를 맹수가 먹이를 잡아먹으려고 웅크리고 있는 모습에 비유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하지 않으면 죄가 너를 집어삼키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은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죄가 너를 원한다는 말은 죄가 너를 지배하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가인의 내면에는 죄의 소욕이 꿈틀거리며 솟구쳐 오르고 있습니다. 가만 두면 잠시 후 죄가 가인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면 가인은 행동으로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빨리 죄의 소욕을 잠재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파멸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들였을까요? 8절을 보십시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가인은 ‘죄를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예쁨 받는 동생 아벨을 죽여서 하나님께 복수하려는 사악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가인은 아벨에게 미세 먼지도 걷히고 날씨도 좋으니 벚꽃 구경이나 가자고 설득했습니다. 순진한 아벨은 아무 것도 모르고 형을 따라나섰습니다. 인적이 드문 들판 한 가운데 오자 가인이 돌변했습니다. 단단한 돌 하나를 집더니 아벨의 등 뒤에서 머리를 힘껏 내리쳤습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 태어난 첫 아들은 살인자가 되고 둘째는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이 일이 동시에 일어나다니!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가인은 완전범죄에 성공했다 믿고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목격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이 가인을 찾아오셔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9)?” 이 질문은 범죄한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던지셨던 “네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번에도 하나님은 죄인이 스스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난 모릅니다. 아무 것도 모릅니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며 시치미를 딱 잡아뗐습니다. 목격자가 정말 없었습니까? 아니, 있습니다. 무죄한 아벨의 피를 받은 땅이 목격자입니다. 땅에 스며든 아벨의 피가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억울하게 살해당했습니다. 저의 원한을 풀어주십시오!” 가인이 아무리 자기의 죄를 감추려 해도 온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숨길 수 없었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은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하나님은 가인의 죄에 합당한 형벌을 선고하셨습니다. 앞으로 가인이 피땀 흘려 농사를 지어도 땅은 한 톨의 밀알도 그에게 내지 않을 것입니다. 가인은 이제 어디를 가도 쉼이 없는 방랑자가 되었습니다. 이 처분에 대해 가인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가인은 죄벌이 너무 무거워서 견딜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지면에서 쫓겨나서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게 되었다고도 했습니다. 가인은 그 동안 땅을 의지해서 살아왔었습니다. 그런데 삶의 기반인 땅을 송두리째 잃어버린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인이 하나님 앞에서 센 척 강한 척 했지만 알고 보면 지극히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막상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하니 어디를 가도 불안해서 살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아벨의 동생들이 복수를 위해 언제 가인의 목숨을 빼앗으려 들지 몰랐습니다. 가인은 가볍게 죄를 저질렀지만, 죄의 짐은 너무 무거워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가인에게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네가 알아서 잘 해 보라고 하셨습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하나님은 가인의 몸 어딘가에 표식을 새겨 주셨습니다. 이 표 덕분에 아무도 가인을 해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가인의 표는 일차적으로 가인의 생명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동시에 가인은 죽을 때까지 이 표식 때문에 자기의 죄를 잊을 수도 덮어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이 표를 보며 가인이 죄를 뉘우치고 회개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이제 오롯이 가인에게 달린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객사하지 않고 적어도 자연 수명까지 살면서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창세기 4장을 모티브로 한 소설입니다. 아버지인 애덤과 아들인 칼과의 갈등과 화해의 스토리가 소설의 주 내용입니다. 주인공인 칼의 이름은 가인에서 따온 것입니다. 칼은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으로 온갖 못된 짓을 일삼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아버지께 용서를 구합니다. 이때 아버지는 칼에게 ‘팀셀’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죽습니다. ‘팀셀’은 히브리어로서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왜 아버지는 하필이면 이 말을 칼에게 유언으로 남겼을까요? 이 말은 이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네가 과거에 다른 선택을 했다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을 수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칼이 과거에 저질렀던 일들은 꼭 그래야만 했던 것들은 아니었습니다. 한 번만 더 고민하고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이 되었을 것입니다. 둘째는 이제라도 네가 올바른 선택을 한다면 앞으로 너의 삶을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칼은 무거운 죄책감에 눌려 자기 인생은 이미 파탄 났다 여기며 자포자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지금부터 칼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파탄이 날 수도 있고 행복과 평안을 회복할 수도 있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본문 속의 가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죄를 다스리라는 경고를 들었습니다. 그때 멈출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멈추지 않았고 죄에게 자기를 내주었습니다.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죄를 자백하고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난 모르는 일이라고 딱 잡아뗐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주신 표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가인은 이 표를 보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인가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오해와 원망을 풀고 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가인의 표는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주신 ‘팀셀’이었습니다. 가인은 이 마지막 기회를 붙잡아 자신의 삶을 변화시켰을까요? 아니면 지금까지의 관성대로 죄악에 자신을 맡겼을까요?

우리의 인생도 팀셀입니다. 우리를 집어 삼키려는 죄가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한편 너는 죄를 다스릴지라는 하나님의 말씀도 우리 곁에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어느 쪽에 우리 마음을 여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은 전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죄에게 문을 열며 우리 인생은 파멸로 향해 치달아 가게 됩니다. 하지만 말씀에 순종하여 죄를 다스리면 거룩함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시며 범죄한 인간을 찾으십니다. 이때 죄를 범하고도 모른 척하고 시치미를 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양심이 마비되고 인격이 파탄 납니다. 반면 하나님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 죄를 고백하게 되면 사죄의 은혜를 덧입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은혜롭고 자비하신 하나님은 더 이상 고칠 수 없는 것 같은 사람에게까지 한 번 더 기회를 주시기도 합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이 오해와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제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습니다. 과거에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인데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가끔 뉴스에 나오는데 그때마다 분노 게이지가 급상승합니다. “주님! 왜 이런 인간을 빨리 지옥으로 안 데려 가십니까?” 저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가인에게 표를 주시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죽기 전에 회개할 기회를 주고 계신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받아서 먼 곳으로 떠납니다. 그곳에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모든 것을 탕진하고 거지 신세가 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집이 얼마나 은혜롭고 풍족하였던가? 기억하고 돌아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집을 떠난 후부터 매일 마을 어귀에서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범죄 한 인간들에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에덴의 동쪽으로 집나간 아들, 방황하는 가인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 아직 기회가 있을 때 하나님께 돌이켜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죄에게 지배당하고 사탄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순간순간 죄의 길을 선택하지 말고 의와 믿음과 회개의 길을 선택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뿐만 아니라 죄 가운데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고 돌이키고자 수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6, 17절을 보십시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범죄한 아담은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났습니다. 그의 아들 가인은 그보다 더 먼 동쪽 놋 땅으로 떠나갔습니다. 거기에서 가인은 결혼하여 에녹을 낳았습니다. 처자식까지 생기고 나자 가인은 더욱 불안해졌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신 표가 있었지만 그 표가 나를 온전히 지켜줄 수 있을지 못미더웠습니다. 나와 내 가정은 내 힘으로 내가 지킬 수밖에 없다며 시작한 일이 성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성을 다 짓고 보니 그 모습이 꽤 근사했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대를 이어 성주 자리를 물려받게 될 아들의 이름을 따서 이 성의 이름을 에녹 성(城)이라고 붙였습니다. 가인이 세운 에녹 성은 하나님 없는 인간 중심의 세상 나라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이후로 가인의 후손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하나님 없는 세속 문명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그 중에 독보적인 인물이 6대손인 라멕이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라멕은 두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일부일처의 혼인제도가 파괴되기 시작했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가정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정욕을 따라 이 여자와 저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라멕의 첫째 아내 아다는 야발을 낳았습니다. 야발은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곧 대규모 축산업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었습니다.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가 이런 다양한 악기를 만든 것은 한만석, 장장군 목자님처럼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자신들이 즐길 수 있는 향락문화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둘째 아내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습니다.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로 모든 공대생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두발가인에게는 나아마라는 누이가 있었습니다. 나아마란 아름다움이라는 뜻입니다. 그녀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당대 최고의 미녀였습니다. 이로서 나아마는 연예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가인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떠나 자신들의 향락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문화와 문명을 화려하게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그런데 발전한 것은 문화와 문명만이 아니었습니다. 23, 24절을 보십시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여기서 라멕이 부른 노래를 가리켜 ‘칼의 노래’라고 부릅니다. 라멕은 이 노래를 자랑삼아 자손들에게 대대로 부르게 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참혹하기 그지없습니다. 나를 조금이라도 다치게만 해도 살해해 버리겠다는 내용입니다. 심지어 아이가 그랬다 할지라도 가차 없이 죽이겠다고 합니다. 죄책감이나 양심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조상 가인을 긍휼히 여기시고 보호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표를 가지고 조롱합니다. 가인을 죽이려한 자에게 일곱 배의 벌이 내려졌다면 자신을 죽이려 하는 자에게는 칠십칠 배로 보복하겠다고 큰 소리를 칩니다. 이 얼마나 오만방자한 노래입니까? 이런 노래가 널리 알려졌다는 것은 그 당시 시대상이 어떠했는지를 말해줍니다. 가인의 후손을 통해 문명이 발전함과 동시에 죄도 함께 발전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스스로의 힘과 자기 욕망을 추구한 결과 그 종착지는 음란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이었습니다.

가인의 후예들만 보면 세상의 종말을 보는 듯합니다. 그러나 25절을 보십시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하나님은 순교자 아벨 대신 ‘셋’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셋으로부터 여자의 후손을 통한 구속 역사를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셨습니다. 26절에 보면 셋의 아들인 에노스 때부터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공적 예배를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5장에 나오는 아담의 족보 중에 셋의 5대손 에녹이 있습니다. 에녹은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또 에녹의 증손자가 노아입니다. 셋의 후손들은 가인의 후손들처럼 강해보이지도 않고 화려하게 명성을 떨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을 통해 구속을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과 함께 계승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다음 둘 중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잘 나가는 것이 인생의 목적입니까? 아니면 일생 하나님 앞에서 예배자로 살겠습니까? 가인의 후손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셋의 후손이 되겠습니까? 오늘날에도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 가인의 후손들처럼 도시를 세우고 화려한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자신들을 지켜주고 자신들에게 힘을 실어줄 어떤 것을 만들어 그것을 의지하려 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기에 문명 건설에 목을 맵니다. 문명 건설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문화와 문명 건설은 하나님께서 창조 때 인간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문제는 그 목적이 하나님 나라 건설이냐 아니면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려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또한 가인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함께 잃어버렸습니다.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향락에 몰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세속 도시 가운데 쾌락과 즐거움을 주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발전하게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와 동시에 죄도 발전하고 번성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가 산업화되기 전에는 연쇄 살인범 같은 범죄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진국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연쇄 살인, 묻지마 범죄와 같은 잔혹한 범죄도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김학의 사건, 장자연 사건, 버닝썬 사건 등을 통해 보듯이 변태적이고 반인륜적인 음란 문화가 사회에 만연해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고 안티 기독교의 영향력은 커져갑니다. 이 추세가 계속 된다면 우리 다음 세대가 살아갈 세상이 어떤 모습이 될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시대 가운데에서도 셋의 후손과 같은 언약의 계승자요 참된 예배자들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이들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유명하지도 않습니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묵묵히 하나님 앞에서 예배합니다. 말초적인 쾌락을 자극하는 노래 대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담긴 말씀을 소중히 간직하고 어떻게 해서든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고자 합니다. 저는 우리 안암 1부의 학생 목자들이 바로 이런 셋의 후손들이 아닐까 합니다. 지난겨울 목자선서식 때 저는 사회를 보다가 남몰래 눈물을 훔쳤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시대에 목자로 살겠다고 스스로 서약하는 이렇게 귀한 사람들을 세우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학생 리더들이 학생회는 물론이고 영어 예배와 2세 예배에 실질적인 주역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있는 한 우리 시대는 아직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계보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과 같은 사람, 당대에 의인이었던 노아와 같은 이들을 친히 세워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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