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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
    설교/창세기 2019.05.19 13:57

    2019년 창세기 제 9 강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

     

    ● 말씀 : 창세기 11:27-12:20
    ● 요절 : 창세기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렸다고 알려진 책이 있습니다. 바로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입니다. 우리에게는 제자수양회 때마다 단골로 심포지엄 했던 책으로 익숙합니다. 이 책은 주인공이 장망성(장차 망할 성읍)을 떠나서 천성을 향해 가는 길고 긴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여정은 크리스천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믿음의 조상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누구나 길을 떠나는 사람이고 길 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디로부터 떠나 어디를 향해 가야할 것인지를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그 길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신뢰하는 믿음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1장 27절부터 32절은 셈의 9대손인 데라의 족보입니다. 데라에게는 아브람, 나홀, 하란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란이 아들 롯을 낳고 고향인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아브람은 아내 사래가 불임이어서 자식이 없었습니다. 여러모로 이 집안은 박복한 집안이라 부를만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와 아브람과 롯이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이주를 시작했습니다. 이 구절만 놓고 보면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이 데라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7장에 보면 갈대아 우르에서 영광의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은 데라가 아니라 아브람입니다. 당연히 가나안 행을 주도한 사람도 아브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창세기에 데라가 주도한 것처럼 기록된 이유는 그 시점에 집안의 가장은 아직 데라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브람 일행은 가나안으로 잘 가다가 그만 하란에서 멈추었습니다. 강 하나만 더 건너면 가나안 땅인데 왜 그랬을까요? 이는 아버지 데라가 아들의 발목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서 24장 2절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데라는 갈대아 지역의 신들을 섬기던 우상 숭배자였습니다. 아브람을 부르신 영광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데라는 아들을 따라 어쩔 수 없이 하란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익숙한 것을 떠나 낯선 땅, 낯선 사람들, 낯선 신을 만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는 효자 아브람은 경계를 넘지 못하고 아예 하란에 눌러 앉고 말았습니다.

     

    한 동안 세월이 흘러 마침내 데라가 세상을 떠났습니다(32). 이제 더 이상 아브람의 발목을 붙잡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처음 부르심 받은 대로 다시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나가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브람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제는 아브람 본인이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달리기도 쉬었다가 뛰려면 더 뛰기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르심의 여정도 중도에 멈추면 다시 출발하기가 배 이상 어렵습니다. 12장 5절에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이 언급됩니다. 이를 보면 아브람은 하란에서 꽤 큰 부자가 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겠습니까?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며 뭉그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만약 저라면 ‘내가 사람을 잘못 봤나 보다. 실망이다. 다른 사람을 찾아야겠구나.’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번 부르신 아브람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12장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또 한 번 부르셨습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아브람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셨을까요? 지금까지 보았듯이 아브람은 아버지와 조카를 살뜰하게 챙기는 가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아브람의 장점이면서 동시에 약점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아버지의 뜻이 충돌할 때 아브람은 결국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에 계속 매인 상태로는 앞으로 새 역사를 시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반드시 떠나야만 했습니다.

     

    아브람을 향해 ‘떠나… 가라’ 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를 떠나 어디로 가야할까요? 서두에서 언급했던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은 장망성을 떠나 천성을 향해 갔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멸망의 도성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셨습니다. 마귀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죄의 열매만 맺다가 허무하게 마칠 인생을 생명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목자의 인생으로 부르셨습니다. 이처럼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죄에 물들었던 과거의 라이프 스타일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내 안에 자리 잡은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이 원하는 것을 부인해야 합니다. 주님이 제시하신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가신 생명의 길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22-2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옛 사람을 벗어 버리지 않고 어떻게 새 사람을 입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단호하게 옛 사람을 벗지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에 있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서로 조합이 안 맞는 옷을 코디해서 입으면 패션 테러리스트라고 하지 않습니까? 상의만 새 사람을, 하의는 옛 사람을 입으면 패션 테러리스트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긴 했지만 가나안에 들어가진 못하고 하란에 머뭇거리고 있는 아브람과 같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다시 한 번 더 부르심을 새롭게 하십니다. "너는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누구에게나 자기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겐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삶의 태도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겐 물질에 대한 욕심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겐 정욕에 물든 삶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적폐들을 단호하게 청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천성을 향해 거룩한 순례자의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세상적인 삶의 방식과의 결별하기로 분명한 결단을 하고, 하나님 나라로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부르실 때 하신 약속이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약속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아브람의 자손이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큰 민족이 ‘great nation’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으로부터 시작하는 큰 나라를 만드시겠다는 뜻입니다. 현재 아브람은 자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내 사래는 불임이었고, 아브람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 아브람은 대를 이을 아들 한 사람만 얻어도 세상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정도가 아니라 적어도 수백만 인구를 보유한 큰 나라를 이루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이 나라가 무조건 사람 수만 많은 나라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통해 세우시려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신명기 4장 7,8절은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진정으로 큰 나라는 그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나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나라입니다. 아브람은 이 위대한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름은 누구나 다 있습니다. 하지만 이름의 크기는 저마다 다 다릅니다. 큰 이름이란 많은 사람들에게 오래 동안 기억되는 이름입니다.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에게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이름입니다. 그 당시 아브람이란 이름의 크기는 얼마나 되었을까요? 그의 이름은 가족과 이웃 사이에서나 알려진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게 되면 그나마 알던 사람들과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듣보잡 취급을 당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큰 이름을 얻기 위해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큰 이름 대신 하나님께 반역한 자라는 오명만 얻었습니다. 큰 이름은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만들어 주셔야 큰 이름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하나님 나라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만한 큰 이름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아브람이 복이 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 무슨 말씀인지 알쏭달쏭합니다. 3절에 부연설명이 있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하늘에서 복이 쏟아지게 할까 알고자 합니다. 지구 상 대부분 종교가 여기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니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있는 단순한 방법이 있습니다. 아브람을 축복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십니다. 반대로 아브람을 저주하면 그 사람도 저주를 받습니다. 아브람은 축복과 저주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누군가를 어느 때에 축복하거나 저주합니까? 사람들은 누군가의 삶을 깊이 인정하고 기쁘게 여길 때 그를 축복합니다. 그 사람의 삶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를 저주합니다. 아브람을 축복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아브람의 삶을 흠모하여 본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을 저주한다는 것은 아브람처럼 사는 것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이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인간이 저지른 죄로 말미암아 저주 가운데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찌하든 세상에 복을 주시길 원하셨습니다. 이 저주 받은 세상에서 복 받는 길은 아브람이 갔던 길을 뒤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하늘의 복을 세상 구석구석에 퍼트리는 통로로 사용하고자 하십니다. 한 사람으로 누릴 수 있는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먼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가 있었다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사람들은 인생을 사는 동안 수없이 많은 갈림길을 만나고 어떤 선택을 할지 고민합니다. 나중에 자기의 선택을 후회하며 가지 않은 길을 아쉬워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지 않은 길이 더 좋은 길이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이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불안해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성경은 종착지가 어디인지 확실한 하나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길이 무엇입니까? 그 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길입니다. 아브람이 갔던 바로 그 길입니다. 그 길 끝에는 큰 민족과 창대한 이름과 만민을 향한 축복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브람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가로막고 사람들에게 세금을 뜯어가던 세리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마태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예수님과 길을 함께 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천국의 심장소리라 불리는 마태복음의 저자 성 마태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물고기나 낚다가 갈릴리 바다의 물거품처럼 허무하게 사라질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부르사 생명을 살리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캠퍼스 목자로, 가정과 사회 가운데 복의 근원으로 부르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응답할 차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것보다 더 크고 놀라운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신실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부도날 수 없는 약속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우리를 부르셔서 축복의 통로로 삼고자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아브람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4절을 보십시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에게 주신 약속은 모두 다 미래의 일들입니다. 현재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보장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그 어떤 보증보다 더 확실한 보증으로 여겼습니다. 이것이 아브람의 믿음입니다. 아브람은 믿음으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에 두었던 정과 미련을 부인했습니다.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했습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11장 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람은 실제로 이스라엘 민족과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공통적으로 존경하는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인류를 구원하러 세상에 오신 메시아가 아브람의 씨로 오셨습니다. 아브람이 이런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잘 나서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아브람이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믿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단순하게 믿고 순종한 것이 아브람의 인생을, 더 나아가 인류의 역사를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면 믿고 순종하여 가나안에 들어온 아브람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환영 아브람 가나안 입성’이라고 쓰인 현수막을 보았습니까? 아니면 아브람을 위해 마련된 전원주택과 푸른 목장을 보았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은 거기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각자 자기 땅을 지키고 있는 가나안 주민들을 보았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실 때는 무언가 선물을 준비해 놓고 계실 줄 은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맨 땅에 헤딩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아브람의 마음이 싱숭생숭해졌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깊이 헤아리셨습니다.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7a)” 이때 아브람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수습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어요. 나 이제 비뚤어질 거예요.” 그런데 아브람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7a)” 아브람은 계속해서 가나안 땅을 북에서부터 남으로 내려가면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 제단은 무엇을 나타낸 것일까요? 이것은 아브람이 이 땅을 자손에게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표지였습니다. 말하자면 아브람이 가나안 땅을 다니며 '여기도 내 땅 저기도 내 땅' 하면서 침을 발라놓은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장 무슨 효력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보기에는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있는 그대로 믿고 영접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행동으로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아브람이 제단을 쌓았던 지역들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와서 다 차지하게 됩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희미한 것을 본 것처럼, 미래의 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는 것입니다. 금을 얻고 나서 은을 버리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금을 얻을 줄 믿고 은을 버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말하면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히11:1). 이런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 믿음은 약속이 성취를 이룰 때까지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똑똑하고 스마트한 사람입니까? 멋지고 매력이 넘치는 사람입니까? 모두에게 인정받는 사람입니까? 다 좋습니다. 그런데 주의 부르심 받은 우리가 가장 사모할 대상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 선배들 중에 믿음의 사람이 많습니다. 초창기 모스크바에 가신 선교사님들은 대부분 6개월 생활비만 들고 갔습니다. 러시아어도 잘 못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의지할 것 하나 없어도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선교를 시작하셨습니다. 선교사님들이 선교지에 가면 가장 먼저 캠퍼스를 방문합니다. 거기서 기도를 하고 어떤 선교사님은 캠퍼스 한구석에 나무를 심기도 합니다. 이 캠퍼스를 내게 주셨음을 믿고 침을 발라 놓는 것입니다. 이번 학사 수양회에서 홍갈렙 선교사님이 유럽 개척의 역사를 발표하실 예정이라고 합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어떻게 믿음의 사람들을 유럽 개척에 사용하셨는가를 증언하실 것 같아 기대가 됩니다. 자동차는 석유로 길을 갑니다. 앞으로는 수소 에너지로 길을 가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면 성도는 무엇으로 거룩한 순례의 길을 갈 수 있습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1미터도 전진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우리의 힘입니다. 우리가 아브람과 같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즉시 아멘으로 응답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이때 아브람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심한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아브람의 이 행동을 어떻게 봐야할까요? 가나안이 약속의 땅인데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을 믿고 거기서 버텼어야 할까요? 후에 이삭이 비슷한 상황에서 떠나지 않고 버텼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이삭을 축복하셔서 큰 부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반면 야곱의 가족들이 가나안에서 기근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으로 내려오게 하신 적도 있습니다. 이처럼 기근의 때에 애굽에 잠시 갈 수도 있고 떠나지 않고 버틸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아브람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판단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위기의 해결책이 아니라 더 큰 위기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위기의 원인은 65세 된 사래의 비상식적인 극강의 동안 미모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이대로 가면 애굽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아갈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이때 아브람이 생각해 낸 대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내를 누이라 속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도저히 쉴드를 칠 수 없는 비겁한 짓이었습니다. 위기를 만나자 아브람의 약점인 소심함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믿음이 있을 때 아브람은 멋진 남자였는데, 믿음을 잃어버리자 찌질한 남자로 전락했습니다. 아내인 사래 입장에서는 어떻겠습니까? 지금까지 내가 이런 남자와 살았나 싶어 깊은 자괴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남편을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 따라야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바로가 사래를 후궁 삼기 위해 데리고 가버렸습니다. 대신 아브람에게 결혼지참금 명목으로 후한 선물을 내려주었습니다. 아브람은 졸지에 아내를 팔아먹은 남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와서 바로에게 가서 사실은 내 아내였다고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아브람은 잔머리 굴리다가 꼼짝달싹할 수 없는 외통수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때 아브람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나한테 묻지도 않고 지 마음대로 하더니 쌤통이로구나.’ 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이 임했습니다. 바로는 즉시 아브람을 호출했습니다. 보자마자 대뜸 호통을 쳤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사실 잘못은 아브람이 했는데 재앙은 바로가 받았으니 바로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각별히 아끼시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아브람을 손봐줄 수도 없었습니다. 바로는 즉시 아내를 데리고 돌아가도록 명했습니다. 선물을 다 가져가도 좋으니 빨리 내 눈 앞에서 사라져달라고 했습니다. 그 덕에 아브람은 아내를 되찾고 큰 부를 챙겨서 약속의 땅으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지 않으셨다면 어쩔 뻔 했습니까? 아브람은 아내를 영영 바로에게 빼앗겼을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아들을 낳아줄 아내가 없으니 하나님과 맺은 언약도 위태로워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을 저지른 것은 아브람이나 뒷감당은 하나님이 다 해주셨습니다. 이번 사건으로 아브람은 믿음으로 살지 않고 꼼수를 쓰면 어떻게 되는지를 생생하게 경험했습니다. 자신의 한계와 바닥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에서만이 아니라 애굽에서도 크신 능력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내 편이 되어주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여행 보내실 때 꼭 두 사람씩 짝을 지어서 보내십니다. 혼자 보내신 적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행은 혼자 가면 별로 재미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여행 중에는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여러 돌발적인 위기 상황을 만나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부족한 부분을 함께 길을 가는 파트너가 채워주고 이끌어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천성을 향해 가는 순례길에도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동행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맨날 잔소리만 하는 피곤한 동행자가 아닙니다. 때론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우리를 감당해 주시고 뒤에서 밀어주십니다. 아브람이 실수하고 넘어졌을 때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셨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넘어졌을 때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자신을 바라보면 솔직히 이 순례의 길의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결정적인 실책을 범해서 도중에 낙오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믿음의 여정을 끝까지 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늘 나와 함께 하시고 지켜 주시기 때문에 든든합니다. 그래서 찬송가 430장 2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어린 아이 같은 우리 미련하고 약하나 주의 손에 이끌리어 생명 길로 가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꽃이 피는 들판이나 험한 골짜기라도 주님이 인도하는 대로 주님과 함께 가길 원합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려 올려 갈 때까지 주와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거룩한 순례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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