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창세기

뭇별을 보여주신 하나님

이창무 2019. 6. 2.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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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창세기 제 11 강 

 

 

뭇별을 보여주신 하나님

 


● 말씀 / 창세기 15:1-16:16
● 요절 / 창세기 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대학교 3학년 때 일대일 목자님이 어느 날 갑자기 저에게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제안을 강원도로 여행을 가자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집에 가서 짐을 챙겨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목자님은 그럴 필요 없이 당장 나만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따라가 보니 강원도가 아니라 광진구에 있는 어린이 회관에 도착했습니다. 최종 목적지는 둥근 지붕에 영사기로 별자리를 비추어 주는 ‘천체투영관’이었습니다. 목자님은 강원도 대신 이곳에서라도 저에게 뭇별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담당자가 여름휴가 중이라 결국 뭇별을 못 봤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의 눈으로 뭇별을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 눈에 실제 별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펼쳐주시는 뭇별의 비전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5장 1절을 보십시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여기서 ‘이 후’란 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출한 사건 이후를 말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이를 뒤집어 보면 현재 아브람이 두려움에 빠져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두려움이었을까요?

첫째, 하나님께서 ‘나는 너의 방패’라고 하신 말씀을 볼 때 원수의 공격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아브람은 롯을 구한 대신 그돌라오멜 동맹군이라는 큰 원수가 생겼습니다. 그돌라오멜이 지난 번 당한 일을 앙갚음 하려고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 생각만 하면 아브람은 발 뻗고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나는 너의 상급이라’ 하신 말씀을 볼 때 손해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상급은 보상(Reward)을 뜻합니다. 롯을 구하는 과정에서 얻은 전리품을 다 가지라는 소돔 왕의 솔깃한 제안이 있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그 순간에는 멋있어 보여서 괜찮았는데 뒤돌아서니 속이 쓰렸습니다. 죽도록 고생만 하고 남 좋은 일만 한 것 같아 허탈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아브람이 얼마 전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으니 아주 의기양양해 있으려니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아브람 내면의 이 같은 불안과 두려움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왜 빨리 잠들지 못하는지, 왜 아브람의 어깨가 축 늘어져 있는지를 다 아셨습니다. 이런 아브람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기 위해 친히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다. 내가 너를 지켜주는데 누가 너를 해칠 수 있겠느냐?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다. 나를 얻으면 천하를 다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그런데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아멘.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큰 위로가 됩니다. 두려움이 싹 사라졌습니다.”라고 했습니까? 아니면 지금까지 아브람이 늘 그래왔듯이 묵묵히 제단을 쌓아 믿음과 감사를 표현했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우리 아브람이 달라졌습니다. 달라지긴 했는데 안 좋은 방향으로 달라졌습니다. 지금 아브람은 하나님께 이렇게 데모하고 있습니다. “방패와 상급이요! 다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맨날 말씀만 주십니까? 십 년 동안 안 주신 아들이나 주십시오. 정 그렇게 나오시면 저도 저 나름대로 다 생각이 있습니다.” 아브람의 반응을 보면 아브람이 두려움에 빠진 원인이 단지 최근 있었던 몇몇 사건들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람의 두려움은 좀 더 심층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때는 아브람이 부르심을 쫓아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온 지 딱 1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이제까지 아브람의 삶을 견인해 온 동력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겠다.” 이 약속을 아브람은 철썩 같이 믿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 동안 부자도 되고 왕들을 상대할 정도로 저명인사도 되었지만 다 소용 없었습니다. 아브람이 정말 원한 것은 아들 하나였는데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습니다. '내 인생 이대로 가다가 그냥 끝나는 것 아닐까?’ 아브람은 초조하고 두려웠습니다. 빨리 약속을 이루어주시지 않는 하나님께 대한 불만이 쌓이다가 마침내 10주년을 맞이해서 폭발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작 사래의 태를 열어 아들을 주셨다면 이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약속의 말씀만 주시고 이때까지 아들을 주시지 않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목적과 아브람의 목적이 서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의 목적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아브람이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주실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브람이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야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시자마자 아들을 주셨다면 아브람의 인생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믿음의 조상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고상한 아버지는 될 수 있지만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장 아들을 주시는 대신 반복해서 약속의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믿도록 도전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믿음의 사람으로 키우시는 방법입니다.

우리도 각자 자신만의 절실한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절실합니다. 어떤 분은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절실합니다. 어떤 분은 자녀 문제가 심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열심히 기도해 왔습니다. 그 문제가 어서 빨리 해결되기를 바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기대만큼 그렇게 빨리 응답해 주시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이때 아브람처럼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이 쌓이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축복해 주시면서 나한테만 인색하신 것 같아 화가 납니다. ‘하나님, 정 그러시면 저도 다 생각 있습니다.’ 하면서 히든카드를 만지작거립니다. 그런데 사람은 참 묘한 존재입니다. 현실 문제만 해결되면 더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주님께 충성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마음이 부요해집니다. 영적 싸움을 게을리 합니다. 문제가 해결된 뒤에는 은혜를 다 잊어버리고 현실에 안주하며 사는 모습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사람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무조건 당장에 현실 문제를 해결해주시지 않는 것은 이 같은 우리의 마음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께서 ‘아버지를 사랑하겠습니까? 아니면 아버지 가방을 사랑하겠습니까?’라고 자주 물으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버지보다 아버지 가방 안에 든 선물을 더 사랑하기 쉽습니다. 가방만 얻고 아버지를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문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의지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믿음의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세상 무엇보다 가장 귀한 선물인 방패요 상급되시는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어떤 답을 주셨습니까? 4절을 보면 하나님은 먼저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의 플랜 B는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못 박으셨습니다. 아브람에게 장차 그의 몸에서 아들이 태어날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도록 요구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이번 사태가 수습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도 한계가 있다고 보셨는지 그 다음 행동에 들어가셨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옛날에 군대에 ‘한딱가리’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후임병이 말 안 듣고 반항하면 한 밤중에 고참이 밖으로 불러냅니다. 그 자리에서 땅바닥에 엎드려뻗치게 한 후 머리를 박게 합니다. 하나님은 한 밤 중에 아브람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꼭 한딱가리를 할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바닥에 엎드려뻗쳐’가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였습니다. 오늘날 서울 밤하늘에서는 뭇별을 충분히 셀 수 있습니다. 그러나 4천 년 전의 밤하늘은 어떠했을까요? 공해도 없고 전깃불의 간섭도 없는 하늘에는 온통 별들이 가득했습니다. 별들이 모여 강물을 이룬 은하수도 보였습니다. 이 많은 별들의 수를 센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이 별들을 누가 만드셨습니까? 하나님이 창조셨습니다. 하나님은 불신에 빠진 아브람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시기 위해 뭇별을 지으셨습니다. 하늘을 황홀하게 수놓은 별들을 넋 놓고 바라보던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하늘의 뭇별 같이 셀 수 없는 많은 자손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아브람을 처음 부르셨을 때 주신 약속의 연장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늘의 뭇별이라는 언약의 표징이 더하여 졌습니다. 뭇별의 비전을 통해 하나님은 현실 문제에 코 박고 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펼치실 놀라운 미래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에 대한 아브람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돌이켰습니다. 고집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브람은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 하나님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러다가 불신에 빠져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뭇별을 보여주시며 믿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러자 다시 믿었습니다. 아브람은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원래 그런 것입니다. 변함없이 늘 잘 믿으면 좋겠지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믿었다가 안 믿었다가 다시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회의와 불신을 통과해 더 단단해진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람을 어떻게 여기셨습니까? 어떤 사람은 아브람이 줏대 없이 이랬다저랬다 한다고 놀릴지 모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별 한 번 보고 그냥 믿어버리다니!’ 하면서 아브람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고 여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신을 고집하지 않고 다시 믿음을 회복한 아브람을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양보했을 때, 롯을 구해내었을 때, 소돔 왕의 제안을 거절했을 때 의로운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원망 불평을 잔뜩 늘어놓다가 다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쑥스럽고 창피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이 영웅적인 행동을 했을 때 의롭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을 때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하시는 의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불신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임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지금 답답한 현실 때문에 마음이 어두운 분이 계십니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고 계산을 뽑아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 분이 계십니까? 제가 아는 한 형제는 만날 때마다 '살아서 뭐 하냐?’는 말을 입버릇처럼 합니다. 처음에는 충격이었는데 지금은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러려니 합니다. 어떤 분은 고민이 너무 많아서 불면증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우리를 절망스럽게 합니다. 불안과 두려움에 빠지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바라봅시다. 뭇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미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그날까지 결코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세상 끝날 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내려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행한 모든 수고와 희생에 대해서 결코 그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를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고 썩지 않고 더럽히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들이 성경 속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고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 약속들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별처럼 빛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낳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세상 가운데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불신에 빠져 헤매고 있었다 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만 늘어놓고 있었다 해도 괜찮습니다. 아브람도 그랬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신앙의 위기를 겪지 않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이 중요합니다. 이제부터라도 불신을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회복하면 됩니다. 더 이상 따지지 말고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영접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 것보다 이렇게 믿음으로 내 삶을 하나님께 맡길 때 가장 기뻐하십니다.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을 겨냥하라. 그리하면 땅을 덤으로 얻을 것이다. 땅을 겨냥하라. 그리하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땅의 현실만 바라보던 눈을 들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미래를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을 단순히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가나안 땅은 장차 뭇별과 같은 아브람의 후손이 차지하게 될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이 땅에는 원주민이 득시글득시글했습니다. 아브람은 땅에 관한 약속도 믿고 싶은데 자꾸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건의를 드렸습니다. “확실한 증거를 하나 주시면 안 될까요?” 이때 하나님은 ‘준다면 주는 줄 알아! 너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이 많니?’ 하고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연약한 아브람이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언약 체결 의식을 행하셨습니다. 당시 언약 체결식은 짐승을 둘로 쪼개어 놓고 언약 당사자가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는 만약 언약을 못 지키면 내가 기꺼이 이 짐승처럼 쪼개짐을 당하겠다는 뜻입니다. 살벌합니다. 언약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타는 횃불의 모습으로 쪼개진 동물 사이를 지나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횃불의 모습으로 임재하셨다 하여 이 언약을 횃불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이 장면을 보면 하나님께서 마치 연극에서 한 배역을 맡은 사람처럼 행동하십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만 했을까요? 사실 이 모든 것은 다 아브람을 위해서입니다. 연약한 아브람을 도우시려고 하나님은 이처럼 자신을 한없이 낮추셨습니다. 이후로 아브람은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이 날의 언약 체결식을 기억했습니다. 쪼개진 짐승과 연기와 횃불을 떠올리며 믿음을 다시 추스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약 체결식 사이에 보면 약간 생뚱맞아 보이는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13절부터 16절까지 나오는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왜 이 이야기를 해 주셨을까요? 언약의 실현이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는 언약의 중요한 내용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을 아브람의 후손에게 언제 어떻게 주실 것인가를 자세히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그 안에 아브람의 후손들이 사백년 간 애굽에 살고 애굽에 재앙이 내려 출애굽하고 가나안 정복 전쟁을 이룰 것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왜 안 됩니까? 아직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그 땅에 가득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부적인 일정과 시나리오와 근거가 하나님의 플랜 속에 벌써 다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 참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약속은 그저 막연한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때에 어떤 방법으로 누구에 의해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인가 구체적인 계획을 다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말을 안 하셨을 뿐입니다. 아브람은 이것도 모르고 계속 불평하고 툴툴대고 징징거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아브람을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깊이 아브람의 미래를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횃불 언약은 신약으로 와서 십자가 언약으로 계승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제자들을 모아 놓고 최후의 만찬을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받아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이 찢어지고 쪼개지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사랑의 언약입니다. 횃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사랑의 맹약입니다. 우리 죄가 사함 받는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갈 것을 어떻게 보증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의 몸을 쪼개시고 자신의 피를 흘려 인 치신 십자가 언약이 있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이 연약해 질 때, 회의와 불신에 시달려 믿음이 흔들릴 때, 우리는 십자가 앞으로 다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뭇별 언약, 횃불 언약, 십자가 언약을 굳게 붙듭시다. 하나님은 이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거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나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세상이 두 조각나는 한이 있을지라도,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대로 우리 인생을 축복하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겨우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칭얼대고 쉽게 삐치고 오두방정을 떱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 미래까지 내다보고 계십니다.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이루실지 세부적인 계획까지 이미 다 세워두셨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신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6장 1, 2절을 보십시오. 사래가 오랜 불임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여종 하갈을 남편에게 첩으로 주어 아들을 얻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불임을 해결하는 관습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사래의 말을 듣고 하갈과 동침했습니다. 그런데 하갈이 임신하고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우리 아기가 딸기가 먹고 싶다네요. 사래 마님이 가서 좀 사와 봐요.” 오만불손하게 주인 사래를 멸시했습니다. 사래는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아브람에게 바가지를 긁었습니다. 결국 하갈은 사래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습니다. 사래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을 도모한 것이 이 모든 분란의 화근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아들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아브람 가정에 큰 불화와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습을 보실 때 얼마나 안타깝고 답답하셨겠습니까? ‘뭇별을 보여준 지 얼마나 지났다고...’ 하시면서 실망이 크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나님은 그들의 실수와 허물을 감당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광야로 도망친 하갈을 만나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에게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 그 수하에 복종하라 하셨습니다. 다시 똑같은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하갈의 잘못을 교정해 주셨습니다. 또 하갈이 가진 아이는 하나님의 계획에 없었던 아이라 하여 모른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약속해 주셨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뜻을 가진 ‘이스마엘’이라 지어주셨습니다. 하갈은 애굽 여인이었고 주인을 멸시하는 개념 없는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갈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들어 주셨습니다. 하갈은 이 하나님을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불렀습니다. 하갈이 만난 하나님은 세상에서 귀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한 사람을 살피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로써 위기에 빠진 아브람의 가정을 지켜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 약속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더디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당장 무언가가 되어져야 하는데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는 것 같습니다. 기도하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은 여전히 닫혀 있고, 틀어진 관계는 잘 회복되지 않습니다. 나름 열심히 섬기는데 그만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때 우리는 조바심을 내기 쉽습니다. 미리 앞서서 걱정하다가 잔머리를 굴리기 쉽습니다. 세상의 관습과 편법을 사용하면 당장에는 괜찮고 좋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오히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 뿐입니다. 진정한 해결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시간표를 가지고 계십니다. 내 뜻대로 앞당기려고 해봐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기다림 가운데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기다림의 시간은 견디기 힘든 고통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에 얻기보다, 하나님이 내게 주기를 원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얻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입니다. 우리가 조바심 때문에 쓸데없이 인간적인 노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잠잠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사람은 참 약한 존재라는 점을 새삼 깨닫습니다. 아브람은 불신에 빠져 헤맵니다. 사래는 조급증 때문에 큰 실수를 저지릅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주셔도 끝까지 제대로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불신에 빠져 누워 있는 아브람을 찾아와 일으켜 주셨습니다. 사래가 일을 저질렀을 때 찾아와 수습해 주셨습니다. 아브람과 사래의 하나님은 마치 어린아이가 허물과 실수를 범할 때마다 묵묵히 감당해주는 아빠 엄마처럼 느껴집니다. 우리도 연약하여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고비를 만나 허덕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와 약속을 새롭게 하시고 믿음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실패하고 넘어져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사랑을 믿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의인은 안 넘어지는 자가 아니라, 넘어졌을 때 하나님이 내미신 도움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과 복과 승리를 예수님의 피로 보증한 십자가 언약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이 언약을 믿고 모든 연약함에서 떨치고 일어나 의의 길을 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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