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창세기 제 12 강
여러 민족의 아버지 아브라함
● 말씀 / 창세기 17:1-27
● 요절 / 창세기 17: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최근 한 인터넷 업체에서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현재 당신 나이의 엄마를 만나게 된다면 엄마에게 무슨 조언을 해주고 싶습니까?” 조사 결과 2위는 ‘엄마는 엄마 인생을 살아.’이었습니다. 대망의 1위는 ‘아빠와 만나지 마.’이었습니다. 이 결과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버지가 되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로구나.’ 하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한 사람의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라고 하십니다.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려면 얼마나 수준이 높아야 될까요? 영접하기에 상당히 부담이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대와 소망을 두고 계시는가를 생각할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소원을 가슴에 품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하며 완전에 이를 때까지 분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현재 아브람의 나이가 99세가 되었습니다. 앞 장인 16장의 마지막 절은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라는 구절입니다. 1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기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무슨 일이 없었다’ 입니다. 장기하 씨의 노래 ‘별 일 없이 산다’의 가사처럼 아브람은 별 다른 걱정 없이 이렇다 할 고민 없이 살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성경의 기록도 13년을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굳이 별 일을 찾는다면 사래의 생리가 끊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노화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이었습니다. 또 이스마엘이 부쩍 성장했습니다. 아직은 중2병에 걸리기 전이어서 마냥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13년 만에 갑자기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은 왜 거두절미하고 대뜸 이 말씀부터 하셨을까요? 그 답은 현재 아브람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보면 찾을 수 있습니다. 17절에 하나님께서 사라의 태를 열어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셨을 때 아브람의 반응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나님은 진지하게 말씀하셨는데 아브라함은 웃었습니다. 왜 웃었을까요?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둘 다 자식을 생산할 수 있는 생물학적인 가능성이 1%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사라의 태는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아브라함이 농담이나 장난처럼 받아들였던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꼭 웃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웃었다는 것은 지금 마음에 여유가 있다는 뜻입니다. 마음에 여유가 있었던 것은 아브라함이 다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8절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이렇게 아룁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만약 이스마엘이 없었다면 아브라함은 웃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말씀대로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라고 아뢰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겐 이스마엘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조만간 이스마엘에게 가업을 물려준 후 요단 강가에서 낚시나 하면서 여생을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아들 문제를 대충 해결했기 때문에 크게 아쉬울 것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불가능해 보이는 최선을 갈망하기보다는 가능한 차선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이런 아브람의 모습에 만족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이 하갈을 통해 인간적인 방법으로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얻게 될 약속의 자녀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브람은 지금까지 나름 믿음으로 살아왔습니다. 크고 작은 믿음의 승리를 경험해 보았습니다. 당대에 믿음에 관해서라면 누구보다 할 말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아직 하나님 앞에서는 불완전한 믿음이었습니다. 별 다섯 개 만점에 두개 반 이상 주기 어려웠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생리가 끊어진 사라의 태를 열어 아들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사람들이 아브람을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람 스스로 자기 삶에 얼마나 만족하느냐가 최종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의 삶을 보시고 얼마나 만족하게 여기시는가가 더 중요하고 결정적입니다. 이 점에서 볼 때 아브람은 아직 갈 길이 멀었습니다. 이스마엘에 만족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인간적인 가능성과 희망이 다 바닥난 바로 이 시점이야말로 아브람이 믿음의 정수를 향해 도약해야할 시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13년 동안 기다리시다가 마침내 아브람을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99세나 되었으니 이제 인생을 정리할 때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제부터가 아브람이 제 2의 인생을 시작할 때였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 본 창세기 15장 말씀은 아브람이 깊은 절망과 침체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이 찾아오신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반면 오늘 말씀에서는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낳고 안주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사람이 어떤 문제로 아픔 가운데 있을 때가 위기일까요? 아니면 별 문제 없이 안주하고 있을 때가 위기일까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별 문제 없이 안주하고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보면 이런 때가 더 무서운 위기의 때입니다. 안주하는 신앙생활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가장 큰 특징은 적당주의입니다. 아예 아무 것도 안 하지는 않습니다. 기본적인 것은 합니다. 예배도 드리고 교회에서 다 같이 참여하는 모임에도 참석합니다. 하지만 열심을 다하지는 않습니다. 절대 무리는 하지 않습니다. 결과에 크게 연연하지도 않습니다. ‘온전히’, ‘끝까지’, ‘남김없이’, ‘투쟁’, ‘결단’ 등의 단어들을 거북해 합니다. 좋아하는 단어는 ‘대충’, ‘무난하게’, ‘부담스럽지 않게’ 등등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안주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안주하는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은 이에 앞서 큰 절망과 좌절을 겪은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큰 꿈을 꾸고 원대한 비전을 붙들었던 과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깨어지고 넘어지고 엎어진 아픔도 겪었습니다. 더 이상 이런 고통을 겪고 싶지 않아서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가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 15장의 아브람과 17장의 아브람은 사실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도 목자로 부르심 받았을 때 큰 꿈과 비전이 있었습니다. 학창시절 제 주위에는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목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한때 믿음으로 과감하게 도전하고 젊음과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하지만 이내 현실의 벽에 부딪쳐 좌절과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나의 연약함과 반복되는 실수로 마음이 무너집니다. 삶의 무게에 눌려 지치고 피곤해 집니다. 이때 우리는 아브람처럼 현실에 안주하는 길을 선택하기 쉽습니다. “내 현실이 이러하니 어찌하리요” “내 자녀들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십니다. 2주 전 ‘저 지평을 넘어서’라는 책을 선물로 받고 우리에게는 박학장님으로 더 익숙한 고(故) 박 다니엘 선교사님의 삶을 다시 회상하게 되었습니다. 다니엘 선교사님은 정년퇴직을 하신 후 손주들과 놀아 주시며 안락한 노년을 보내실 나이에 멕시코 선교사로 나가셨습니다. 삼십 번 이상 반복해서 외워도 외워지지 않는 스페인어를 정복하시기 위해 무진 애를 쓰셔야 했습니다. 엘살바도르에 동역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시고 선교지를 또다시 옮겨 치안 부재, 살인적인 더위, 비자 문제 등과 씨름하시며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선교사님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주님께 드리셨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오병이어로 받으시고 멕시코와 엘살바도르 선교에 귀하게 쓰셨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들에게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에 이르고자 분투하는 삶이 무엇인지 생생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잘 아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하나님의 기준을 낮추지 않으십니다. 우리 현실에 맞춰서 기준을 낮추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완전함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그 앞에 행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현실의 장벽을 체감하고 있는 지금 이때야 말로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온전한 믿음을 배울 최적의 때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의 선한 투쟁을 하길 기도합니다.
앞서 1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지만 이후 아브람이 안일과 자기만족에 빠져 살면서 언약을 잊어버렸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맺었던 언약을 새롭게 갱신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갱신된 언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4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이 무엇일까요? 나라를 세우는데 공로가 큰 위대한 지도자를 가리켜 흔히 나라의 아버지 곧 국부(國父)라고 합니다. 남아메리카의 조지 워싱턴라고 불리는 시몬 볼리바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스페인과 독립전쟁을 벌여 남미를 식민 통치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그 결과 콜롬비아, 파나마,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이렇게 여섯 개의 나라를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시몬 볼리바르 못지않은 여러 나라와 민족의 아버지로 삼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언약에 기초해서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이름의 변화는 인격과 운명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아브람은 고상한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한 사람의 아버지 노릇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고상한 아버지가 되려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자기 딴에는 열심히 노력한다 해도 잘 되질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어려운 일을 해내였습니다. 대단한 일이고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 이상의 존재로 삼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사람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이 말이 아브라함이 자식을 수백 명, 수천 명씩 낳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탤런트 김혜자 씨는 아들 딸 하나씩을 두었습니다. 사적으로 보면 이 두 사람만의 엄마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김혜자 씨를 가리켜 국민 엄마라고 부릅니다. 공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의 엄마인 셈입니다. 그 이유는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 김혜자 씨가 그들에게 이상적인 엄마의 이미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을 한 개인으로만 보면 이스마엘의 고상한 아버지로 사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저 한 개인이 아닙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은 아브라함과 맺은 사적인 언약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후손 모두와 맺은 공적인 언약이며 영원한 언약이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 모두의 하나님이 되고자 하셨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 가운데 믿음의 조상이라는 특별한 위치를 가진 사람입니다. 사과 씨를 심으면 그 씨에서 똑같은 사과가 나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아브라함의 DNA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DNA를 가진 사람들이 온 땅에 가득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자식을 낳기에 앞서 먼저 어떤 경우에나 하나님을 100% 믿고 순종하는 믿음의 조상이 되어야 합니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릴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그의 후손들도 아브라함을 닮아서 하나님을 100%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아브라함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15절과 16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사래의 이름을 사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사래는 나의 공주라는 뜻입니다. 어떤 의사도 못 고친다는 불치병인 공주병에 걸리기에 딱 좋은 이름입니다. 사라는 여러 민족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여러 민족의 아버지인 남편의 돕는 배필로서 딱 좋은 이름입니다. 구속 역사 가운데 사라 한 사람의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히브리서 11장 11, 12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우리의 삶은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 양쪽에 모두 다 걸쳐져 있습니다. 개인적으로야 군대에 가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복무를 마쳐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각자 자기만의 문제를 안고 씨름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믿음을 배우고 성장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좁게는 UBF 안암1부라는 신앙 공동체 안에, 넓게는 한국 교회 안에 속해 있습니다. 가깝게는 1961년부터 시작된 UBF를 통한 캠퍼스 선교의 물줄기 가운데, 멀게는 초대 교회 때부터 시작된 만민 구속 역사의 거대한 흐름 가운데 우리가 서 있습니다. 이 신앙의 공적인 영역 안에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지는 역할과 책무가 있습니다. 공동체의 필요와 각자 받은바 은사에 기초해서 여러 다양한 모양으로 섬기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내가 그 역할을 외면하면 그만큼의 빈자리가 생기고 결국 공동체의 힘이 약화됩니다. 반면 그 역할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면 공동체가 건강해지고 결국 내 자신에게도 유익으로 돌아옵니다. 또한 우리가 선배들로부터 또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복음 신앙, 선교 신앙을 후배들과 자녀들에게 전달해 줄 책무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이 신앙을 고스란히 잘 전달해 주면 그들은 우리를 영적인 아버지, 영적인 어머니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뿐만 아니라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여러 민족의 아버지, 여러 민족의 어머니로서 축복의 통로가 되는 길입니다. 많은 이들이 한국 교회의 신앙이 지나치게 사적인 영역에 치우쳐 있다는 염려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예외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나와 언약을 맺으시는 것은 나 한 사람을 잘 되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만이 신앙생활의 목적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뿐 아니라 내가 속한 신앙 공동체 전체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대대 후손의 하나님이 되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신앙의 공동체성, 역사성을 마음에 새기고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과 책무를 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고상한 아버지가 되는 것에서 멈추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혼식 식순에 빠지지 않는 것이 예물 교환입니다. 대부분 신랑과 신부가 귀금속이나 보석으로 만든 결혼반지를 주고받습니다. 이 반지는 영원토록 결혼 서약을 지키겠다는 의미가 담긴 언약의 표징입니다. 우리나라는 좀 다르지만, 외국에서는 기혼자가 반지를 끼고 다니지 않으면 아주 이상하게 여깁니다. 바람을 피우려는 의도로 해석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항상 결혼반지를 손에 끼고 다닙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언약에도 표징이 있었습니다. 15장에서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 표징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하늘의 뭇별이고 다른 하나는 언약 체결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언약을 지키시겠다는 의미의 표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갱신하시면서 반대로 아브라함에게 표징을 요구하십니다. 그 표징이 무엇입니까? 9절과 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할례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언약을 지키겠다는 의미의 표징입니다. 할례를 통해 내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몸에 새겨집니다. 뺏다 낄 수 있는 결혼반지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영구적인 표징이 할례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대대손손 자녀가 태어나면 팔 일만에 할례를 시행해야 합니다. 할례의 대상자 안에 이방인도 포함된 것을 보면 할례는 혈연의 표지가 아니라 믿음의 표지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후 할례는 언약 백성들로 하여금 언약 밖에 있는 사람들과 구별된 삶은 살아야 할 이유를 제공해주었습니다. 동시에 할례를 받은 사람들끼리 우리는 함께 언약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소속감과 일체감을 형성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한 주석가는 할례를 가리켜 “몸에 새긴 하나님의 브랜드”라고 표현했습니다.
할례를 행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포피를 베었으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한 치도 어김없이 순종했습니다. 그 때 마취약 같은 게 있었겠습니까? 제대로 된 수술도구가 있었겠습니까? 할례는 살을 잘라내는 큰 고통이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들이는 데 이렇게 큰 아픔을 겪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없이 사는 육적인 삶을 잘라내는 데 아픔이 있습니다. 이스마엘 한 사람이나 잘 키우고자 하는 자기중심적인 삶을 잘라내야 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소원을 영접하기 위해 내 나름대로의 꿈과 소원을 버리는 회개와 같습니다. 신명기 10장16절에서 모세는 할례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10:16). 진정한 할례는 하나님 앞에 나의 고집과 교만을 제하는 마음의 할례입니다.
구약 시대 할례는 신약시대에 세례로 대치되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1,12절은 말씀합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세례를 받을 때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나의 옛 자아가 이제는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할례를 행할 때 살을 베어내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다시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은 내가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할례 후 살에 새겨진 지울 수 없는 흔적처럼 이제부터 영원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인생을 살겠다고 공약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달라지고 싶어요, 성장하고 싶어요.’하면서 변화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달라지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를 두려워합니다. 어거스틴이 죄 가운데 방황할 때 이렇게 기도했다고 전해집니다. “오, 하나님. 저를 변화시켜 주소서. 하지만 지금은 마옵소서.”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별 변화가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만 할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능력을 의심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질문은 ‘나는 마음의 할례를 행하고 있느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마음의 할례를 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 안에서 보면 먼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을 잘라내야 합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 적당주의를 제거해야 합니다. 공적인 역할과 책무를 외면하는 병든 개인주의를 몰아내야 합니다. 물론 그 과정이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때로는 생살을 잘라내는 것 같은 아픔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아픔을 감내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해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여러 민족의 아버지,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도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 부인 없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회개 없이는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불순물을 제거해야 정금이 나올 수 있습니다.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픔이 있더라도 안일과 적당주의, 이기주의를 잘라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여러 민족의 아버지, 여러 민족의 어머니다운 사람들로 변화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브라함은 정말로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었을까요? 2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이 말씀대로 이스마엘의 후손은 후에 거대한 아랍 민족을 이루게 됩니다. 물론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21절을 더하셨습니다.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후에 이삭의 후손은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이 됩니다. 그러면 이것이 전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각 나라와 족속 중에 아브라함의 씨로 오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한 모든 사람들이 다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 중에 바로 우리들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아브라함의 DNA를 물려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이제 우리가 아브라함의 DNA를 다음 세대에게 전달할 차례입니다. 아브라함의 DNA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우리를 통해 이 믿음의 DNA를 받아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될 수많은 후손들을 허락하실 줄 믿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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