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창세기

홍수 심판과 구원의 방주

이창무 2019. 4. 14.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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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창세기 제 6 강

 

홍수 심판과 구원의 방주

말씀 / 창세기 6:1-22
요절 / 창세기 6:13,14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1991년 어느 날 저는 양마가 선교사님이 인도하시는 소감 발표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평소보다 서둘러 모임을 끝내신 양마가 선교사님이 갑자기 다 함께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보게 된 영화가 ‘터미네이터 2’였습니다. 영화 내용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인류를 몰살시키려는 인공지능 컴퓨터 스카이넷이 반란군의 지도자 존 코너를 죽이기 위해 인조인간을 과거로 보냅니다. 이에 미래의 존 코너가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또 다른 인조인간을 보냅니다. 이 두 인조인간 사이에 벌어지는 액션과 그래픽이 대단했던 영화였습니다. 목자님은 Fighting Spirit를 배우기 위해 이 영화를 보자고 하셨지만 사실은 그냥 재밌는 영화가 보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인류의 미래가 존 코너 한 사람에 달려 있다는 설정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인류의 운명을 짊어진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노아였습니다. 존 코너에게는 얼마나 육체의 싸움을 잘 하는가가 중요했습니다. 반면 노아에게는 얼마나 영적인 싸움을 잘 하는가가 중요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깨닫기를 기도합니다. 그 위협에 맞서 우리가 어떻게 또 무엇으로 승리할 수 있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을 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구가 늘어난 것은 잘 된 일입니다. 문제는 ‘어떤 사람들이 늘어났느냐’였습니다. 2절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후손을,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을 가리킵니다. 셋의 후손들은 처음에는 함께 예배하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셋의 후손들 중에서 배우자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갈수록 이런 가치관이 점점 약해졌습니다. 그 대신 외모가 배우자 선택 기준이 되었습니다. 예쁘기만 하면 하나님 없이 사는 가인의 후손이어도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렇게 결혼한 셋의 후손들은 믿음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사명도 버리고 하나님께 예배도 드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결국 셋의 후손은 가인의 후손에게 동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네피림이 태어났습니다(4). 네피림은 키 크고 싸움을 잘 했습니다. 이들은 고대에 전사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이는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 잘 말해 줍니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 한 마디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일상화된 세상이었습니다.

 

이런 시대를 하나님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당시에 정치계, 경제계, 학계, 예술계, 종교계 할 것 없이 사람의 죄악으로 오염되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어디를 가나 썩은 냄새가 났습니다. 보통 사람의 마음속엔 악한 생각과 선한 생각이 동시에 일어나서 갈등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늘 악한 생각만 했습니다. ‘어떻게 남을 속일까? 어떻게 남의 것을 빼앗을까?’에 골몰했습니다. 아무 주저함도 양심의 가책도 없이 죄를 저질렀습니다. 멕시코나 콜롬비아 등지의 마약 카르텔에 관해 들어보셨습니까? 이들은 사람을 파리 죽이듯이 쉽게 죽입니다. 그 수법도 너무 잔혹합니다. 뿐만 아니라 경찰, 군인, 정치인들까지 돈으로 매수해 뒤에서 조종하기까지 합니다. 만약 이런 마약 카르텔들이 현재처럼 일부 지역이 아니라 온 세계를 장악하게 된다면 얼마나 끔찍한 세상이 될까요? 당시 시대가 그런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상이 막장으로 치닫게 된 이유가 셋의 후손들이 가인의 후손들에게 동화되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언약을 계승하는 사람들이 남아있는 한 그 시대는 아직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마저 타락해서 아무도 예배하지 않고 아무도 찬송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을 때 그 시대는 소망이 사라집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들이 생기게 된 출발점이 결혼이었다는 점이 의미심장합니다. 본래 결혼은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 나라 건설이란 사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후손들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진작부터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아왔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결혼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문제는 셋의 후손들마저도 이런 식으로 결혼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결혼만큼은 나의 만족을 위해 나의 기준을 앞세워 하겠다고 고집했습니다. 결혼 전에는 가인의 후손을 회심시키겠으니 염려 말라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결혼한 후에는 하나님 없는 가인의 후손들의 가치관과 문화에 점점 물들어갔습니다. 그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이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 되자 이런 현상은 더욱 가속화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교회의 세속화 현상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불신자와 신자가 구분이 잘 되질 않는다고도 말합니다. 그 출발점에도 역시 신자들의 결혼 문제가 있습니다. 극동방송에 자주 나오던 크리스천을 위한 결혼정보회사 광고가 있습니다. 가사가 이렇습니다. ‘잘 생기고 믿음 좋은 교회 오빠는 OOO 컨설팅 기다림은 노노! 찾고 두드려요 OOO 컨설팅’ 이 광고의 압권은 마지막 멘트입니다. “저희는 믿음의 가정을 세웁니다.” 믿음이 있어야겠지만 외모가 중요하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같아 씁쓸합니다. 이 정도만 해도 양반이고 외모와 재력만 좋다면, 믿음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라는 의식까지도 팽배해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그럴 수도 있지. 이것이 무슨 큰 문제인가?’하면서 대수롭게 않게 여깁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이 문제를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홍수 심판이 여기서부터 출발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숭배 때문에 망했습니다. 그 출발점에 솔로몬의 이방 여인과의 정략결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노아 시대를 가리켜 한 마디로 시집가고 장가가던 시대라고 정의하셨습니다.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주신 언약과 사명과는 아무 관계없이 자기만족을 위해 자기 기준대로 시집가고 장가가던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앞으로 본인이 결혼해야 할 사람도 많고 자녀를 결혼시켜야 할 분들도 많습니다. 우리가 투철한 성경적인 결혼관을 가지고 말씀에 기초한 결혼 역사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과 사명을 간직한 복된 가정 교회들을 세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그 시대 사람들의 모습을 보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새번역으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 민수기 23장 19절에는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하나님은 왜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한다고 하셨을까요? “내가 저 녀석을 왜 낳아가지고 이 고생 하는지 모르겠다.” 어머니가 자식 때문에 너무 속이 상하면 이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 말은 자식을 너무 사랑했고 너무 기대가 컸기 때문에 하는 말이지 자식을 낳은 것이 잘못이란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의 인간 창조가 실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 중에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시고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에게 자기 형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지으신 사람을 보시고 심히 좋다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랬던 사람이 이렇게까지 망가진 모습을 보시니 어떠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셋의 후손들이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가는 듯 했으나 결과가 이렇게 되고 보니 실망감이 크셨습니다. 온 땅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 신음 소리에 하나님은 안식하실 수 없었습니다. “이 인간들을 어찌 해야 할꼬?” 탄식하시고 근심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어떤 결정을 내리셨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시한부 선고를 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생명을 의존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생명의 호흡을 거두어 가시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장 거두어 가시지는 않고 120년의 유예기간을 주셨습니다. 이 기간은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면 120년이 지난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7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지면에서 쓸어버리십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사람에게 다스림을 받는 동물까지 그렇게 하십니다. 너무하시나요? 그러면 만약 하나님께서 세상을 그냥 내버려 두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인류는 부패와 타락 때문에 자멸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정말 모든 것이 다 끝장나는 것입니다. 여기에 쓰인 ‘쓸어버리다’는 말은 본래 ‘씻다’ 또는 ‘청소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아예 포기하셨다면 비로 쓸고 물로 씻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버릴 집을 누가 청소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홍수를 내려 세상을 쓸어버리신 것은 다만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새로 시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철학자들은 아픔, 후회, 한탄과 같은 감정들은 하나님께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감정들은 인간의 약함을 나타내는 표지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라면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늘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과학자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 세상이 불변의 원리에 따라 스스로 움직이도록 하셨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계시고 개입하지 않으신다고 보았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그들의 말처럼 멀찍이 떨어지셔서 아무 감정 없이 세상을 관조하시는 분이실까요? 성경이 우리에게 계시하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오늘 말씀에 나타나있듯이 하나님은 죄에 분노하십니다. 동시에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한탄하십니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십니다. 우리는 죄 문제를 죄가 얼마나 나를 불행하게 하고 비참하게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곤 합니다. 물론 이것은 중요하고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죄는 우리 안에 수치심과 불안,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파괴해서 고통에 빠뜨립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공의와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게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탄식을 불러옵니다. 차라리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관심을 끊어 버리시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지으신 세상을 사랑하시고 끝까지 책임지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저는 한동안 금요일마다 고린도후서 말씀 공부를 인도했었습니다. 그때 고린도후서에서 발견한 것은 바울의 약함이었습니다. 바울은 본래 대단히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사람, 도리어 바늘이 부러질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은 늘 양들 때문에 노심초사하고 전전긍긍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고린도후서 2장 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그가 어떻게 이렇게 변했을까요? 바울이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통해 사랑하기에 약해질 수밖에 없는 마음을 알았습니다. 양들을 위해 흘리는 목자의 눈물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죄를 벌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하지만 심판하시는 것이 하나님께 가장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그 마음을 안다면 함부로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큼 아파해 보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에 대해서 감히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비옵는 것은 우리가 바울처럼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과 같이 죄를 미워하고 죄인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로부터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는 ‘아담의 후손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겠다.’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간직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했습니다. 다들 아내를 두세씩 둘 때 믿음 있는 한 여인과 결혼하였습니다. 세 아들을 낳아 언약과 믿음의 계승자가 될 수 있도록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노아는 성경에서 최초로 의인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흠잡은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에녹에 이어서 하나님과 동행한 두 번째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에 이 정도로 칭찬과 인정을 한 몸에 받은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게다가 그가 살던 시대를 염두에 두면 경이로운 일입니다. 마치 쓰레기 더미들 사이에서 백합화 한 송이가 피어난 것 같습니다. 노아는 어떻게 이런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그가 시대 분위기 물들지 않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앞 절인 8절에 답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답은 노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구절을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이 ‘노아가 하나님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눈으로 말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정말 주의 깊게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면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기쁜지 슬픈지 알 수 있습니다. 눈은 진심을 담고 있습니다. 노아 시대를 향해 하나님께서 선포하셨던 말씀들을 들으면 좀 무섭습니다. 120년 시한부 선고를 하시고 다 쓸어버리겠다고 하시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예배 가운데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눈 안에서 그 시대를 향한 슬픔과 안타까운 마음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눈 안에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진심을 알게 된 노아는 함부로 죄 짓고 살 수 없었습니다. 은혜를 알게 된 노아는 의롭고 온전한 삶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애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눈 안에서 발견한 은혜가 죄악의 거센 탁류로부터 노아를 지켜주었습니다. 노아는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영화 ‘아픈 만큼 사랑한다’의 주인공 박 누가 선교사는 의대를 졸업한 외과 전문의였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존경 받으며 충분히 여유롭게 살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필리핀에 의료 봉사를 갔다가 현지 주민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고나서는 아예 선교사가 되어 눌러앉아 버렸습니다. 필리핀 오지 곳곳을 순회하면서 병든 자를 고치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위암에 걸려 죽을 뻔 하였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픈 만큼 사랑하고, 아플수록 더 사랑하게 하소서” 계속 의료 선교를 하다가 위암이 재발하고 췌장암까지 걸리고 말았습니다. 영화를 보면 박 누가 선교사는 복수가 차오르는 배를 부여잡고 또 오지의 주민들을 찾아 나섭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이 모습 뒤로 우리가 잘 아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곡이 흐릅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 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박 누가 선교사의 그런 희생적인 삶을 가능하게 한 힘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시골처녀 마리아가 성모가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말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눅1:28), 마리아가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했을 때 그를 통해 구원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이 사도 바울로 변화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했습니다. 이는 바울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증거 합니다. 죄악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노아를 지탱해 준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어두워진 시대에 소수의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구원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은혜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의인이 되고 싶고 완전한 자가 되고 싶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 원동력은 우리 안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눈과 마주칠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 죄로 인한 하나님의 슬픔, 하나님의 아픔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사랑을 발견합니다. 그 은혜가 우리를 붙들어 주고 그 은혜가 우리를 지켜줍니다. 우리도 노아처럼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은혜 입은 노아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노아가 할 일은 방주 짓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지을 방주의 규격과 재료를 소상하게 일러주셨습니다. 방주의 재료는 고페르 나무였습니다. 이 나무가 정확히 어떤 나무인지 몰라서 원어 그대로 고페르 나무라고 부릅니다. 내부에는 칸막이를 만든 후 역청 곧 타르로 방수 공사를 합니다. 방주의 크기는 길이가 135미터, 넓이가 23미터, 높이가 14미터였습니다. 오늘날 대형 선박이라고 해도 길이가 90 미터 정도입니다. 당시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크기였습니다. 방주는 상중하 삼층으로 되어 있고 창은 꼭대기 천정에 딱 하나만 있었습니다. 방향키도 없고 노도 없습니다. 이것은 배가 아닙니다. 방주는 초대형 나무 상자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노아는 이런 방주를 왜 만들어야 했습니까? 18-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하나님은 노아와 일방적으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방주를 만들어서 그 안에 들어가면 생명을 보존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과 모든 종류의 동물을 보존하여 새로운 인류 역사를 시작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노아를 제 2의 아담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노아는 언약의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다 준행했습니다. 노아가 속했던 요회는 분명 ‘말씀 준행’ 요회였을 것입니다. 노아는 날마다 세 아들 셈, 함, 야벳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도끼로 나무를 패고 톱으로 썰어서 날랐습니다. 매일 “쾅~ 쾅~” 도끼질하는 소리가 온 산을 진동했습니다. 이 작업을 무려 120년 동안 반복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이때 방주 만드는 일이 너무 고되어 노아가 포도주를 자꾸 마시다가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입니다. 주위 사람들은 뭐라고 했겠습니까? 노아가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쳤다고 저마다 한 마디 씩 했을 것입니다. 오늘도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이는데 무슨 홍수냐며 조롱했습니다. 아들과 며느리도 지쳐서 이제 더 이상 못하겠다며 나가떨어지려고 한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럴 때 얼마든지 중도에 방주 짓는 일을 접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노아가 어떻게 말씀을 다 준행할 수 있었을까요? 히브리서 11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노아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120년이 지나면 홍수 심판이 있을 것을 믿고 방주를 지었습니다. 이런 그의 소망의 인내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로 인해서 그와 그의 가족이 구원을 받고 모든 동물들이 종족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노아 한 사람으로 인해서 세상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최후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각자 자기의 인생을 산후에 죽으면 선악 간에 행한 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듣고 롯의 사위들처럼 비웃습니다.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노아처럼 장차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방주를 짓고자 결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방주 안에 나 뿐만 아니라 가족들과 온 세상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구원의 복음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한 영혼, 한 영혼이 일대일 말씀공부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런 일을 일생동안 감당할 때 나 한 사람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런 축복이 우리 각 사람에게 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 모임이 캠퍼스 영혼들을 구원하는 방주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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