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창세기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신 하나님

이창무 2019. 3. 31.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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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창세기 제 4 강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신 하나님

말씀 / 창세기 3:1-24
요절 /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973년 미국 메이저리그 시즌 막바지였습니다. 뉴욕 메츠 팀은 최하위로 처져있었습니다. 당시 메츠의 감독이었던 요기 베라가 곧 경질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한 기자가 베라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이미 끝난 것 아닙니까?” 그러자 베라가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닙니다.” 그리고 메츠는 기적처럼 승수를 쌓으며 지구 우승을 차지하고 결국 포스트시즌에까지 진출했습니다. 이후로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는 누구나 한번쯤 들었을 법한 명언으로 남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유혹, 범죄, 저주 그리고 추방이 주 내용입니다. 정말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그 약속을 발견하길 기도합니다. 또한 인간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오늘도 아름답고 평화로왔던 에덴동산에 불청객이 불쑥 등장했습니다. 바로 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뱀은 우리가 알고 있는 뱀과는 좀 달랐습니다. 짐승인데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매우 영리하기까지 했습니다. 그의 간교함은 모든 들짐승은 물론이고 사람을 능가할 수준이었습니다. 이는 배후에서 뱀을 조종하는 누군가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 배후가 누구일까요? 요한계시록 12장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이 말씀을 볼 때 사탄이 간교한 뱀을 아바타로 삼아 여자를 유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 말에서 어떤 느낌이 듭니까? “이거 진짜냐?” “이거 실화냐?” 이런 느낌입니다. 마치 사탄은 이제까지 네가 몰랐던 엄청난 비밀을 알려주러 온 것처럼 말합니다. 요즘 유튜브와 카톡방을 통해 퍼지는 가짜 뉴스들이 사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가짜 뉴스라고 모두 다 거짓말은 아닙니다. 참말과 거짓말을 교묘하게 섞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혐오와 미움을 조장해서 이간질을 시키려는 것입니다. 사탄도 역시 하나님이 주신 계명의 말씀을 교묘하게 비틀고 있습니다. 각종 나무의 열매를 임의로 먹어도 좋다는 자유를 싹 빼버렸습니다. 대신 하나님이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일체 못 먹게 금지하신 것인 양 부정적인 측면을 과장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틈이 벌어지도록 이간질을 시도했습니다.

뱀에 대한 여자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여자가 뱀의 말을 정확하게 팩트 체크했을까요? 2절과 3절을 보십시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여자의 대답은 창세기 2장 16-17절과 대조해 볼 때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달랐습니다. 여자는 ‘임의로’라는 말을 누락시켰습니다. 금지된 나무를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로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생명나무까지도 그 안에 들어가 버립니다. 게다가 있지도 않았던 '만지지도 말라’는 말씀을 첨가했습니다.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이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로 둔갑해 버렸습니다. 여자의 마음은 이미 사탄이 쏜 의심의 화살을 맞고 비틀거리고 있었습니다.

사탄이 이 틈을 놓칠 리가 없었습니다. 강력한 최후의 한 방을 가했습니다. 4절과 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사탄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거짓 확신을 심었습니다. 회의와 의심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나님의 말씀을 정반대로 뒤집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여자의 마음속에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교만과 야심을 부추겼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사람이 눈이 밝아져 자기처럼 될까 시기 질투하시는 분인 것 같은 인상을 심었습니다.

이제 여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더 이상 자유요, 행복이 아니라 억압처럼 느껴졌습니다. 앞으로 하나님 없이 내 기준대로 판단하고 내 마음대로 살고 싶어졌습니다. 그러자 선악과가 달리 보였습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습니다(6). 여자는 따 먹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강한 충동이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손을 들어 실과를 따 먹었습니다.

이때 아담은 도대체 어디서 뭐하고 있었습니까? 뱀이 계속 너희(2인칭 복수)로 말하는 것을 보면 여자 옆에 있었습니다. 그러면 선악과 금령을 집적 들은 당사자로 여자를 말렸어야 하지 않습니까? 말리기는커녕 내내 침묵만 지키고 있다가 아내가 건네 준 선악과를 받아먹고 말았습니다. 인간 타락의 책임을 여자에게 돌리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큰 책임은 남자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남자가 가정의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일을 아담의 타락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탄이 사람이 죄를 범하도록 유혹하는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 4장 2절에는 다음과 같은 엄중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뺍니다. 어떤 것을 빼버릴까요? 은혜와 사랑을 빼버립니다. 자유와 축복을 빼버립니다. 그러면 의무와 율법만 남게 됩니다. 또 어떤 것을 더할까요? 남은 의무와 율법을 크게 부풀리고 과장합니다.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측면만 극대화시켜서 보여줍니다. 그 결과 진리의 말씀이 변질되고 왜곡됩니다.

이렇게 하는 사탄의 노림수가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사탄은 슬며시 다가와 하나님이 사실은 좋으신 분이 아니라고 속삭입니다. 하나님을 율법적인 분, 잔인한 분, 속 좁은 분으로 보이게 만듭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괜찮다. 그래도 별 일 안 생긴다.’며 마귀는 끊임없이 불순종을 유도하고 부추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경외해야 합니다. 한국은행에는 위조지폐 감별사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훈련 받을 때는 위조지폐를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수년간 진짜 화폐를 계속해서 만지고 관찰하게 한다고 합니다. 진짜를 확실히 알면 가짜에 절대 속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훈련을 꾸준히 감당할 필요가 있습니다. 매일 일용할 양식을 먹고 매주 한 편의 소감을 깊이 있게 쓰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사탄의 속임수, 거짓 진리에 속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의심하게 하는 일체의 것에 대해 거부의사를 확실하게 표현해야 합니다. 사기범이 아무리 말 잘하고 노련하고 사기 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관심 없다고 딱 돌아서 버린 사람은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로 사탄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사탄이 우리보다 더 똑똑하기 때문에 안 됩니다. 어떤 말이든 어떤 생각이든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정하려 한다면 분명히 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등을 지고 돌아서야 합니다. 이렇게 보니 우리 예배 인사말에 사탄의 유혹을 이길 비결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 말씀 사랑,  Hi!  History  Makers”  “God  is  good,  All  the  time.  All the time, God is good.” 우리가 항상 말씀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습관, 하나님의 선하심에 붙드는 습관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마귀의 유혹을 이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먼저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러면 사탄의 말이 진실이었습니까? 천만에요. 눈은 밝아졌지만 하나님과 같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보지 말아야 할 것,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몰랐던 자의식, 죄의식, 수치심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죄를 알기 전에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죄 범한 후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자기 몸을 가렸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저녁 무렵 서늘해 질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산에 거니신 것이 이번이 처음일까요?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동안에는 매일의 일상처럼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때 아담과 하와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퇴근하고 돌아오는 아빠의 초인종 소리를 듣고 튀어나가는 막내딸처럼 반갑게 하나님을 맞이했었습니다. 즐거운 대화를 하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범죄 이후 변했습니다. 하나님이 다가오시는 소리를 듣고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두렵고 부담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범하고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은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하나님이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나무 뒤에 숨게 되었는지 스스로 성찰해 보길 바라셨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에 아담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은 회개하기보다는 내면의 고통을 호소하는데 급급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담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셨습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은 그래도 회개하지 않고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전에 배우자를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그 여자’라고 말합니다. 하와도 발뺌을 했습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그 여자,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뱀 때문에 죄를 지었다며 핑계대고 책임전가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만 물으신 질문만은 아닙니다. 아담 이후 모든 사람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아담이 범한 죄와 같은 죄 아래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가리켜 원죄라고 부릅니다. 원죄는 영어로 original sin이라고 합니다. 다른 모든 죄들의 근원(origin)이 되는 죄라는 뜻입니다. 원죄는 사람이 스스로 선악의 기준이 된 것입니다. 이는 자기가 곧 왕이 되고 신이 되고 창조자가 되겠다는 선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감히 하나님과 맞먹을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꿈꿉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같이 되었습니까?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기는커녕 본래의 인간성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를 가리켜 타락이라고 부릅니다. 타락하면 어려운 말 같지만 영어로 하면 fall입니다. 처음 자리에서 추락했다, 떨어졌다는 뜻입니다. 타락의 결과 사람은 죄의식과 수치심에서 헤어 나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꾸 자신을 감추려하기 때문에 늘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추궁을 당할까 두렵습니다. 왜 지옥이란 말만 꺼내도 사람들이 몸서리를 칩니까? 사실 정말 지옥에 갈까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책임전가는 세상에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도소에 가면 억울하지 않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수치심, 두려움, 책임전가라는 괴물들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 괴물들이 날뛰면 기쁨과 행복을 모두 날려버립니다. 모든 관계들이 파괴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네가 범한 죄 때문에 내면의 평안을 잃은 너의 비참한 모습을 직시해 보라.”

독일의 전설 속에 등장하는 ‘도플갱어’라는 것이 있습니다. 도플갱어란 자신의 모습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말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 도플갱어를 만난 사람은 곧 미쳐서 죽게 된다고 합니다. 이 전설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직면하기를 얼마나 두려워하는가 말해주는 우화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부끄럽고 두려워도 자신의 실존과 직면해야만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우리에게 묻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죄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죄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피해 숨은 나무 뒤 어두운 그늘에서 나와야 합니다. 위선과 가식의 옷을 벗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이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한일서 1장 9절이 이렇게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가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시는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의 죄, 나의 책임을 인정하고 다만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의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금까지 모든 심리와 변론이 끝이 났습니다. 안타깝게도 피고인들은 진실한 뉘우침이 없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의 선고뿐이었습니다. 첫 번째 피고인은 사탄의 똘마니 노릇을 한 뱀이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뱀이 실제적으로 흙을 먹고 살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뱀이 앞으로 수치스럽고 굴욕적인 상태에 놓이리라는 표현입니다. 사실 이런 수치와 굴욕은 한갓 미물인 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은 뱀에 대한 직접적인 저주라기보다는 뱀을 뒤에서 조종한 사탄의 운명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여자는 사탄과의 첫 번째 전투에서 여지없이 패배를 당했습니다. 사탄이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15절 말씀을 보면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결국에는 사탄이 여자의 후손에게 처절한 굴욕과 패배를 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음으로 여자에게 형벌을 내리십니다. 16절에 보면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자는 잉태와 출산을 합니다. 이것은 여자로서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1:2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해산의 고통과 자녀를 양육하는 수고를 더하게 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아내가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이 아내를 ‘다스릴 것’이라는 말 속에는 공격적인 뜻이 들어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를 지배하려고 하는 욕망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 성경에는 ‘네가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로서 여자와 남자가 서로 사랑하고 공경하는 한 몸의 조화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남자에게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17-19절을 보십시오. 처음 땅은 무척 비옥했습니다. 씨만 뿌리면 무수한 열매를 내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노동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죄로 인해서 땅은 인간이 수고한 만큼 그 효력을 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은 저주 받은 땅에서 일생동안 수고해야 겨우 하루 밥 세끼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형벌은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이 얼마나 무서운 사형선고입니까? 이 땅에서 고생을 하더라도 그 대가로 열매를 얻을 때 보람을 느끼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수고가 결국 무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라고 인생무상을 한탄했습니다.

그러나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닙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아담이 새로 지은 아내의 이름은 하와였습니다. 하와는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하와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될 것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했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방금 죽음의 선고를 들은 사람의 반응으로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담만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21절에 보면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조금 전 저주하실 때는 언제고 금방 이렇게 배려를 해주시니 의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2-24절은 실낙원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 있는 상태에서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고 영생할까 염려하셨습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천사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낙원에서 쫓겨난 것만 생각하면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왜 아예 깔끔하게 생명나무를 없애버리지 않으셨을까요? 혹시 다시 에덴동산으로 들어가 생명나무를 먹을 수 있는 소망을 남겨두신 것이 아닐까요?


미국의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에게 영감을 준 작품으로 알려진 그림이 있습니다. 19세기 영국 화가 조지 프레드릭 와츠가 그린 ‘희망’이라는 작품입니다. 그림을 보면 한 여자가 몸을 웅크리고 커다란 구 위에 앉아있습니다. 여자는 맨발에 두 눈을 천으로 가린 채 수금을 켜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수금의 줄이 다 끊어져 있고 오직 하나의 줄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 그림은 커다란 구는 지구를, 눈먼 여자는 인류를, 끊어진 현은 인류의 절망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현 하나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희망입니다.

오늘 말씀은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어둡고 절망적입니다. 사람은 분수도 모르고 감히 하나님과 같이 되려하다가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내면에는 수치심과 두려움의 어둔 그늘이 덮였습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사람에게 주어졌던 하나님 나라 건설의 사명은 없던 일이 되는 건가요? 이제 에덴동산과는 영원히 작별입니까? 그러나 인류에게는 마지막 남은 현 하나와 같은 희망이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15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구절을 가리켜 흔히 ‘원시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탄의 머리를 박살내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많은 고난과 희생을 당할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범죄 한 우리 인생들을 위해 여자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우리 가운데 보내어 주셨습니다(마 1:23).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님에게 아담 이후 모든 인류의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들을 죄와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살이 찢기시고 피를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성경대로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사탄의 머리를 박살내시고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십자가 보혈로 구속한 주님의 백성들을 통해 이 땅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가십니다. 로마서 11:32절에 보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은 그보다 훨씬 더 큽니다. 사람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세상에 흐르게 될 때 사람의 불순종으로 망쳐놓은 모든 것들을 회복될 것입니다. 이 구속 역사의 비밀 속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깊이와 부요함은 너무나 깊고 커서 도무지 측량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담이 왜 아내의 이름을 생명을 뜻하는 하와로 바꾸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은 절망과 비참 속에서 15절 말씀을 들었습니다. 비록 그 예언이 의미하는 바를 다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만은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을 통해 이루어질 구원을 약속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담은 이 약속을 믿었습니다. 비록 오늘은 죄 때문에 죽음을 경험한다 할지라도 내일은 예수님 때문에 생명을 맛보게 될 것을 소망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친히 지어 입히셨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13장 1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가죽옷은 장차 죽임 당하신 어린 양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주어질 의의 옷을 상징합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왜 생명나무를 없애지 않으시고 다만 가는 길목만을 막으셨는지에 대한 이유도 찾을 수 있습니다. 길목만 열리기만 하면 다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을 때 에덴의 축복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장차 들어가게 될 하나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생명나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계시록 22:1,2절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셨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왜 사람에게 계명의 말씀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왜 사람에게 범죄할 가능성이 있음을 알면서도 자유의지를 주셨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왜 ‘네가 어디 있느냐’하시며 범죄한 아담을 찾으셨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습니까? 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죽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왜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지으시고 사랑으로 우리의 죄악마저 끝까지 책임지시는 사랑의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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