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창세기

에덴동산을 창설하신 하나님

이창무 2019. 3. 24.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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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창세기 제 3 강


에덴동산을 창설하신 하나님


말씀 / 창세기 2:4-25

요절 / 창세기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이 무엇일까요? 금강산에 일만 이천 봉우리들이 펼쳐진 풍경일까요? 이른 아침 절벽 사이로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한탄강의 풍경일까요? ‘시인과 촌장’이라는 포크 그룹이 있었습니다. 이 그룹의 노래 중에 가장 유명한 곡은 ‘가시나무’라는 곡입니다. 하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풍경’이라는 곡입니다. 이 노래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계속 반복되는 단순한 곡입니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이 노랫말처럼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은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이 아닐까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본래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난 세상, 뒤틀린 세상입니다. 그렇게 된지가 너무 오래 되어서 제자리가 어디인지조차 망각해 버린 세상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창세기 2장은 세상의 본래의 모습, 우리의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서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신 인간이 본래 어떤 존재인지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에덴의 기쁨과 행복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여기서 ‘내력’은 ‘족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에는 10개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 중에 이것이 첫 번째 족보입니다. 첫 족보가 말하는 바는 인류의 기원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처음 등장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눈길을 끕니다. 성경에서 ‘여호와’는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고 말씀하시고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권능과 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그 만물 중에서 특별히 인간과의 밀접한 관계를 맺으시는 여호와이십니다. 그 관계는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을 창조하시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5,6절은 사람이 창조되기 직전에 땅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땅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들에는 초목이 없었습니다.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황무지와 같았습니다. 또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어딘가 음산한 느낌을 줍니다. 마치 주인공이 오르기 전 드라이아이스만 피어오르는 텅 빈 연극 무대처럼 세상은 사람의 첫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창조하셨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여기서 ‘짓다’라는 말은 토기장이가 진흙을 이겨 정성스레 작품을 만들 때 사용하는 동사입니다. 장인이 도자기를 만드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먼저 흙과 물을 섞어 반죽을 만듭니다. 그리고 발로 물레를 돌려서 흙가래를 회전하게 합니다. 조심스럽게 양손으로 흙가래를 만져서 우아한 곡선미를 뽐내는 도자기를 성형합니다. 이때 장인이 얼마나 집중을 하는지 숨소리조차 크게 들릴 지경입니다. 이처럼 마치 토기장이가 흙으로 항아리를 빚듯이 하나님께서 정성껏 애정을 듬뿍 담아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은 아직까지 숨을 쉬지도 전혀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차디찬 진흙덩어리에 불과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 코에 ‘후우’하고 친히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운이 인간의 육체 속에 들어오자 비로소 사람은 숨을 쉬기 시작했습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따뜻한 피가 온 몸을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야 인간은 먹고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는 살아 있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19절에 보면 하나님은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도 흙으로 빚어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오직 인간에게만 하나님께서 직접 그 코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어 살아있는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이 인간 생명의 수여자요 공급자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욥기 33:4절에 보면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살아 있는 것도 전능자의 기운이 우리 코에 불어 넣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의 것도 아닙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도로 찾으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육체는 즉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본질입니다. 시편 103편 14절은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이 먼지 같음을 기억하십니다. 우리의 한계를 잘 아십니다. 그래서 인생들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긍휼히 여겨주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인간들입니다. 파스칼이 지은 팡세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인간은 수증기나 바늘 침 하나로도 죽일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이다. 반면에 이 우주는 얼마나 광대하고 강한가? 그러나 인간은 그가 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반면에 우주는 자기가 강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여기에 인간의 위대성이 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인 것이다.” 하지만 파스칼의 말처럼 모두가 다 생각하는 갈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생각 없는 갈대, 자기의 약함을 모르는 갈대도 있습니다. 자기가 강한 줄 알고, 마치 자기가 영원할 줄 착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자기를 두르고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철부지 꼬마아이처럼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슈퍼맨도 아니고 어벤져스도 아닙니다. 그냥 사람입니다. 부서지기 쉬운 흙으로 만들어져 생명을 하나님께 의존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히 자신의 창조자를 의지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사람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생명을 선물로 주신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삶, 이것이 우리가 있어야할 제자리입니다. 찬송가 292장 2절, “주 없이 살 수 없네 나 혼자 못 서리 힘없고 부족하며 지혜도 없도다 내 주는 나의 생명 또 나의 힘이라 주님을 의지하여 지혜를 얻으리”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길 기도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네 스스로 알아서 살아라’ 하시며 휙 던져 놓지 않으셨습니다.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거기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최대한 배려를 하셨습니다. 그 땅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현대의 대도시는 온통 회색입니다. 건물도 회색이고 거리도 회색이고 자동차도 회색이고 하늘마저 회색입니다. 그러나 에덴에는 넓고 푸른 풀밭이 융단처럼 깔려 있었습니다. 초록빛 나뭇잎 사이로 붉고 탐스러운 과실이 곧 떨어질 듯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미세먼지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이 눈이 부실 정도였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푸르고 맑은 강물이 에덴에서부터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물은 모든 생명체의 젖줄입니다. 에덴에서 갈라진 물줄기는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 이렇게 네 개의 강을 이루었습니다. 강가의 돌들이 온통 금과 보석들이었습니다. 그 덕에 비손 강가에서 아담은 순금으로 물수제비를 뜨고, 하와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로 공기놀이를 했습니다. 이런 곳에 살려면 얼마나 돈이 많아야 할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에덴동산 거주에 따르는 보증금이나 임대료를 전혀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에게 최고의 환경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주시되 후히 주시어 넘치도록 주셨습니다. 여기까지 에덴동산의 모습은 사람들이 꿈꾸는 낙원의 일반적인 모습과 거의 일치합니다. 그런데 낙원이 정말 행복과 기쁨이 충만한 낙원이 되기 위해서는 꼭 있어야 할 것들이 더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먼저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에덴동산을 관리할 청지기로서 사명을 주셨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사람들은 마음껏 게으름을 피우며 놀고먹을 수 있는 곳이 낙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보통 회사에서 부서장의 눈 밖에 나면 아무 일을 주지 않습니다. 일이 없어서 즐거울까요? 천만에요. 출근해서 아무 할 일도 없는 것만큼 고역이 없습니다. 결국 이렇게 찍힌 사람은 곧 자기 스스로 사표를 내고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할 일을 해야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일은 책임감을 개발하게 하며, 성취감을 누리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일은 사람이 하나님의 신성에 동참하게 합니다. 19절에는 하나님께서 아담으로 하여금 각 생물의 이름을 짓도록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름 짓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름 짓기는 만든 사람의 고유 권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이름을 짓도록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한 권한을 아담에게 위임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특권입니까? 이처럼 노동은 아담의 범죄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노동은 본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만족과 기쁨을 위해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제자리를 찾은 일을 통해 우리가 노동의 기쁨을 온전하게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두 나무를 통해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가게 하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동산에 있던 모든 나무들 중에 특별한 것은 중앙에 있던 두 나무입니다. 첫째 나무의 이름은 생명나무요, 둘째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습니다. 그동안 이 두 나무는 수많은 질문과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왔었습니다. 아담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보았을까요? 1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으라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이 생명나무의 실과도 먹어보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이 나무들이 어떻게 생겼을까도 참 궁금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꼭 사과처럼 생겼습니다. 왜 하필 사과인지 모르겠습니다. 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구절 때문에 어떤 사람은 왜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거기 두었냐며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 나무만 없었다면 범죄도 죽음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아담이 범죄를 저지를 때를 기다리며 함정을 파 놓은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왜 이 두 나무는 에덴동산 한 가운데 있어야만 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 두 나무의 정체는 사실 하나님 자신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나무의 이름 그대로 하나님 자신이 바로 선과 악의 기준이고 생명의 근원이시라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어떤 존재가 자신을 선과 악의 기준이라고 하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존재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 누가 선과 악의 기준이 될 수 있겠습니까? 또 어떤 존재가 스스로 생명의 근원이라고 하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존재는 하나님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요 생명의 주관자가 하나님 말고 또 누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동산 중앙에 두 나무가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 가운데 함께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선과 악의 기준이 되어 역사를 이끌어 가시고 창조 세계를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생명나무가 되어 생명을 공급하시고 생명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에덴동산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없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러면 아담이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시오 선악의 기준이 되신다는 사실을 어디서 배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동산 중앙의 나무는 함정이 아닙니다. 사람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고 자신의 위치를 알게 하는 시청각 교재였습니다. 성경의 역할을 대신하는 눈에 보이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담은 두 나무를 통해 점점 더 하나님과 교제가 깊어지고 영적인 지혜가 풍성해질 수 있었습니다. 반면 불순종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선악의 기준이 되어 자신이 또 다른 신이 되겠다는 뜻입니다. 이대로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영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경우 하나님은 사람이 더 이상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없도록 차단하셔야 했습니다. 이것은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곧 죽음입니다.


캄보디아에는 킬링필드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해골들이 겹겹이 묻힌 곳입니다. 이곳은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즈 정권이 무차별 살육을 벌였던 장소입니다. 그는 프랑스 유학까지 했던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는 캄보디아를 인민의 낙원으로 만들겠다는 이상이 있었습니다. 이를 실현하려면 이미 악습에 물들어 버린 기성세대를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 나이 든 사람을 가차 없이 죽였습니다. 심지어 안경을 쓰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죽여 버렸습니다. 이 학살로 무려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킬링필드는 사람이 나름대로 선악의 기준을 정하고 이를 절대시하게 될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현장입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이 부여하신 자율권은 굉장히 폭이 넓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도록 하신 것처럼 우리들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기신 것들이 참 많습니다. 짜장을 먹든 짬뽕을 먹든, 고기를 잡으러 강으로 가든 바다로 가든 좋은 대로 가면 됩니다. 그러나 선악의 문제만큼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따라야 합니다. 선악에 대해서도 임의로 하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마다 자신이 선악의 기준을 정해놓고 나름대로 살 것입니다. ‘난 이것이 선이야’ ‘난 이것은 악이 아니라고 봐’ 하면서 자기가 하나님이 되고 자기가 왕이 되어서 자기 맘대로 살게 됩니다. 그때 엄청난 혼란이 오게 됩니다. 그것은 에덴이 아닙니다. 창조질서가 깨어지고 엉망이 됩니다. 이런 파멸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계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계명의 말씀을 부담스러워 할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 계명의 말씀이 나를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그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신 후 마음에 걸리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부, 성자, 성령 세분이 하나가 되어 사랑으로 교제하고, 어우러져 동역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이 혼자 사는 모습을 보시니 마음이 안 좋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을 위해 돕는 배필을 짓고자 하셨습니다. 여자의 사명은 남자를 잘 돕는 것입니다. 혹시 이 말이 여자로서 기분 나쁘게 들린다면 큰 오해입니다. 구약 성경에 ‘돕는 자’라는 표현이 19번 등장합니다. 그 중에 16번이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도우시고 여자는 남자를 돕습니다. 돕는 사람이 도움을 받는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성숙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남자는 대체로 강하고 용기가 있고 도전적입니다. 하지만 섬세함과 예민함과 부드러움이 부족합니다. 여자가 남자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지 않으면 제대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돕는 배필로서 여자의 사명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아담은 이때까지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무엇이 부족한지, 돕는 배필이 왜 필요한지 몰랐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각 생물들의 이름을 짓도록 하셨습니다. 개, 고양이, 소, 닭, 염소, 호랑이, 낙타, 늑대 등등의 짐승이 차례로 아담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아담은 이 일을 하면서 가만 보니 다른 생물은 짝이 있는데 자기만 혼자였습니다. 갑자기 외로움이 몰려왔습니다. 이름 짓다가 아이디어가 고갈되었을 때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아담은 생각했습니다. “나도 짝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 때 하나님은 아담을 수면 마취시키시고 갈빗대 하나를 뽑았습니다.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여자를 아담에게 데리고 가셨습니다. 아담은 여자를 보고 이렇게 소감 발표를 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 말은 ‘내가 너고 네가 나니 우리는 한 몸이야.’라는 뜻입니다. 이제부터 아담은 혼자는 아니었습니다. 곁에 사랑하는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힘을 모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일생을 함께 할 동반자가 생겼습니다. 하나님도 그 모습을 보시고 심히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24절에는 결혼의 원리를 제시되어 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만을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만약 아담 가정만을 위한 말씀이라면 말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떠나야 할 부모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담 이후 모든 가정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처럼 부부는 부모를 떠나 둘이 서로 합하여 한 몸을 이루어가는 공동체입니다. 첫 단계는 부모를 떠나는 것입니다. 독립을 해야 합니다. 떠나지 못하면 마마보이, 파파걸이 되고 맙니다. 입맛도 떠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엄마표 음식과 비교하면서 맨날 반찬 투정만 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맛있는 음식은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 배우자가 만들어 준 음식입니다. 그 다음 부부는 서로 합하여 한 몸을 이루도록 애써야 합니다. 한 집에 산다고 저절로 한 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는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대화와 소통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한 몸을 이룬 상태를 25절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그들은 서로에게 부끄럽게 여길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도권 다툼도 없었습니다. 감춰놓은 비자금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감춤 없이 친밀한 관계를 이루었습니다. 인격적이고 투명했습니다. 그리하여 친밀함이 주는 기쁨과 행복을 마음껏 누렸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배운 내용을 잠시 떠올려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 나라 건설의 동역자로 삼기위해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같이 고귀하고 영광스런 사명을 인생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면 가정은 무엇입니까? 가정은 인생이 받은 그 거룩한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기관입니다. 여자를 돕는 배필로 주셨다는 것에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그 짝과 연합하여 거룩한 사명을 이루어 나가도록 돕는 배필을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가정과 사명이 서로 만났을 때 행복이 그 가정에 깃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제자리를 벗어난 대표적인 풍경 중 하나가 바로 결혼 풍경입니다. 가정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분리되고 말았습니다. 가정은 내가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 사랑을 나누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제 일의 가치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자의 재산, 학력, 외모, 연령차, 성격 등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혼하는 가정이 점점 늘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배우자가 나를 기대만큼 행복하게 해주지 못 한다면 갈라서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한 몸을 다시 둘로 떼어내려고 어떻게 상처가 안 날 수 있겠습니까? 행복해지려고 결혼했으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갈라서다니 참 아이러니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그렇게 한다 해도 적어도 말씀을 따르는 우리는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보통 자기 남편이나 아내를 가리켜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밖에서 이렇게 말하면 잘 못 알아듣고 무슨 말인가 합니다. 왜 동역자라고 부릅니까? 부르심을 따라 일생 함께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 갈 사이이기 때문에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동역자의 조건은 재산이나 외모가 될 수 없습니다. 같은 믿음이 있는지, 같은 성경적인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는지가 우선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결혼입니다. 달리 말하면 믿음의 결혼이란 제자리를 찾은 결혼입니다. 그래서 이 결혼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결혼이라고 믿습니다. 말씀과 같이 순수하며 서로에게 진실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아름다운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믿음의 결혼을 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세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얼마 전 부산센터 박재근 목자님께서 제게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남길 한 마디 유훈이 있다면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 질문하셨습니다. 이때 저는 ‘분수를 알아라.’는 말을 남기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옆에서 들으신 성동센터 이모세 목자님께서 ‘이 말은 정말 심오한 말이로다.’하시며 맞장구를 쳐주셨습니다. 정말 사람은 분수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모든 피조물 중에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뛰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똑똑한데다가 창조적이기까지 합니다. 게다가 피조세계를 다스릴 권한까지 위임을 받았으니 그 지위가 보통 높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자칫 분수를 모르고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어갈 위험성이 있습니다. 청지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감히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넘보게 됩니다. 그것이 모든 불행의 씨앗이고 반드시 망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리가 어디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선악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서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초가 되는 공동체가 가정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과 바른 관계성을 맺고 그 안에서 에덴의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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