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창세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

이창무 2019. 3. 17.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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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창세기 제 2 강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


말씀 / 창세기 1:26-2:3

요절 / 창세기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세계 제2차 세계대전 때 헝가리에 있던 나치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곳은 본래 공장의 오물을 처리하는 곳이었는데, 연합군이 이곳에 폭탄을 투하해 공장이 전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여기 있던 포로들은 이제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었습니다. 독일 군인들은 이 포로들에게 무너진 공장의 파편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 날은 그 파편들을 다시 제자리에 옮겨 놓으라고 했습니다. 또 그 다음 날은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했습니다. 군인들은 포로들에게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이 이런 일을 계속 반복시켰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포로들이 점점 정신 줄을 놓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포로들이 일부러 경비병들에게 달려들어서 총을 맞고 죽었습니다. 타살로 가장한 자살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매일 매일 하는 일에서 아무런 의미나 목적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 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하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인생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있다고 가정하지 않는 한, 삶의 목적에 대한 질문은 무의미하다.” 제가 한 말이 아니라 무신론 철학자로 유명한 버트란드 러셀 경이 한 말입니다.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만이 사람의 존재 의미와 목적을 밝혀주실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의 존재 의미와 목적을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26, 2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다른 피조물을 창조하실 때는 일방적인 명령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면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면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창조하실 때는 달랐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그들로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여기서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우리도 중요한 일은 같이 모여서 심사숙고를 한 후 결정합니다. 이처럼 삼위 하나님께서 인간 창조에 관하여 진지하게 논의하시고 결정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로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다른 특별한 존재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일까요? 영어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이 'the image of God'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형상 곧 image는 우리가 거울 앞에 섰을 때 우리의 모습이 거울에 반영되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원형이라면 거울에 나타나는 상이 image입니다. 결국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인간은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보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피조 세계 가운데 두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물론 자연이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를 풍성히 드러내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인격체가 아니기 때문에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비, 공의와 사랑과 같은 인격적인 속성을 드러내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직 인격적인 존재인 사람만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는 것! 이것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오직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은혜입니다.


다른 동물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털옷을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집에 삽니다. 그러나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냅니다. 자동차, 비행기, 스마트 폰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우리 스스로도 놀랍습니다. 수소로 가는 자동차가 나올 줄 누가 알았습니까? 그런데 김현유 목자님이 그런 자동차를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도 예술적이고 창조적입니다. 맹자는 모든 인간에게 네 가지 마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측은지심으로 남의 불행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둘째는 수오지심으로 자기의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입니다. 셋째는 사양지심으로 겸손히 양보하는 마음입니다. 마지막으로 시비지심으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마음입니다. 유교에서 이 네 가지를 가리켜 사단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들은 사단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에게서 온 것들입니다. 인간에게 이런 마음이 존재하는 것은 의롭고 자비하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짐승들은 등 따스하고 배부르면 만족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그럴 수 없습니다. 육적인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영원한 것, 영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J. S. 밀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배부른 돼지가 되느니 차라리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 인간이 달리기 시합을 하면 치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우사인 볼트가 뛰어도 소용없습니다. 수영 시합을 하면 돌고래를 이길 수 없습니다. 사자와 레슬링을 해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사사기의 삼손 정도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시편 8편 4,5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 만물 위에 우뚝 서서 영화와 존귀로 왕관을 쓴 존재, 인간이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모든 인간이 출신이나 재산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다 존엄합니다.


애굽 제18왕조의 파라오 라호렙의 비문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신이 너를 자기의 모상으로 세웠노라."  이처럼 고대에는 오직 왕들만이 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 26절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다고 선포합니다. 이 말씀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노예로서 살아왔습니다. 수백 년 동안 개돼지 취급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선진문명을 가진 애굽 사람들에 비해서 스스로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희망도 없고 어차피 이미 버린 몸이니 아무 생각 없이 막 살았습니다. 애굽인들에게 세뇌 받은 대로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창세기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너희는 노예 백성이 아니라 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나의 아들과 같은 존재들이다. 너희가 곧 신의 아들이다.” 백성들은 처음에 자기 귀를 의심했습니다. "우리 같은 찌질이가 무슨 그런 말이 가당키나 하겠어?"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소망 가운데 부르셨습니다. 그들이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서 살아가도록 율법을 주셨습니다.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을 훈련을 받는 가운데 찌들은 노예근성을 벗게 하셨습니다. 조금씩 신의 성품을 덧입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신의 아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군 면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정당한 사유로 면제가 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소위 돈 있고 빽 있는 사람들이 온갖 편법을 다 동원해서 자식을 군대에서 빼내고 있지 않느냐는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고위 공직자의 병역 면제 비율이 일반인의 33배나 된다고 하니 그럴 법도 합니다. 반면에 현역으로 군에 갔다 온 사람은 '어둠의 자식들'이라고 불립니다. 또 부모의 재산 정도에 따라 금수저니 은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논란도 있습니다. 금수저 출신은 꼬박꼬박 빌딩에서 나오는 월세를 받습니다. 이 돈으로 ‘버닝썬’ 같은 클럽에도 다니고 흥청망청 써버립니다. 흙수저를 무시하고 갑질을 일삼습니다. 반면 나는 흙수저니 어차피 이번 생은 망했다며 자포자기한 사람도 있습니다. 가진 사람은 가진 것을 잃을까 불안해하고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미래가 없다며 절망합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이 가진 것과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비교합니다. 왜냐하면 소유만이 나의 존재 의미를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애굽과 같은 세상 나라의 가치관에 매여 종노릇하던 우리를 불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 의미와 가치가 소유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물질의 노예가 아닙니다. 창세기는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이다."  주님은 우리 각 사람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저는 ‘쿤타킨테’라는 별명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아 대인기피증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창세기를 통해서 제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고귀한 존재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후 여름 수양회 강사가 되어 단 위에 섰을 때 이렇게 자기소개를 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안암골의 흑진주입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다가 BBF 예배에 갔다가 들었던 노래 한 곡이 생각났습니다. 바로 '나는 왕자다'라는 노래입니다. "왕 왕 왕 왕 나는 왕자다 하나님 나라의 나는 왕자다 내가 비록 어릴지라도 나는 왕 나는 왕 나는 왕자다 내 앞길 가로막는 자 모두 다 물리치리라 이 세상을 앞장서가는 나는 왕 나는 왕 나는 왕자다 공 공 공 공 나는 공주다 하나님 나라의 나는 공주다 내가 비록 어릴지라도 나는 공 나는 공 나는 공주다 내 앞길 가로막는 자 모두 다 물리치리라 이 세상을 앞장서가는 나는 공 나는 공 나는 공주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왕적 존재라는 것을 깊이 영접하고 소중히 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왕적 존재라는 것을 알고 왕처럼 대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 나라 건설의 동역자로 삼기위해 창조하셨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기 위함입니다. 본래 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셔서 이 세상의 대리 통치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 땅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을 사람의 손에 붙이시고 그것들에 대한 통치와 관리와 경영을 위임하셨습니다. 요즘 기업에서는 주주들이 전문 경영인을 뽑아서 그에게 회사의 모든 관리와 경영을 맡기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권한을 위임받아 한 기업의 경영을 맡는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피조물을 다스릴 권한을 위임 받는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하나님과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와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단순히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관계가 아닙니다. 주인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소유를 위탁 받은 청지기로서의 관계입니다. 청지기는 자기 뜻대로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주인의 뜻을 따라서 맡은 역할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을 청지기로 세워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1:28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아담의 후손이 장차 큰 민족으로 번성할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둘째로 그렇게 땅 위에 흩어져 땅을 차지하여 삶의 터전으로 삼게 될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모든 피조물들을 하나님의 대리자의 권한으로 다스리게 될 것에 대한 내용이 셋째입니다. 우리가 다 학교에서 국가의 삼 요소가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국가의 삼 요소는 바로 국민, 영토, 주권입니다. 28절 안에는 하나님의 ‘백성과 땅과 통치권’이라는 국가의 삼 요소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에 내리신 명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아! 너는 나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가자. 너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역사에 나의 동역자다."  하나님 나라는 말 자체는 구약 성경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에 이르러 핵심적인 주제가 됩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첫 메시지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였습니다.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도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가 없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창세기 1장에서부터 이미 하나님께서 주도하시고 인간과 함께 이루어 나가실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기 위해 일하는 존재였습니다. 이 사명을 붙들고 도전하고 개척하는 존재였습니다. 그 결과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 갈 때 사람은 거기에서 보람을 느끼고 기쁨과 만족을 누립니다. 이렇게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참여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먹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 2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하신 말씀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무거운 노역에 시달렸습니다. 애굽 군인들의 군홧발에 채이고 채찍에 맞아가며 국고성을 건축했습니다. 이 일을 왜 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지긋지긋했습니다. 다만 굶어 죽지 않으려면 시키는 대로 일해야 했습니다. 너무 게을러서도 안 되지만 너무 열심히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열심히 해 봐야 주인만 좋은 일인데 뭐 하러 열심히 하겠습니까? 매사에 대충 대충 적당히 하는 것이 살아남는 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런 애굽 땅에서 탈출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자유민이었습니다. 막상 자유민이 되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습니다. 시키는 일만 적당히 눈치 보면서 하던 시절이 차라리 더 편했던 것 같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런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라!"  백성들은 이 말씀 속에서 위대한 사명을 발견했습니다. 말씀대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거기서 생육하고 번성했습니다. 그 땅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백성들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라는 사명을 버렸습니다. 그 대신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올인(All in)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풍요와 번영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그 결과 백성들은 흩어지고 땅은 빼앗기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다스림 받는 제국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미생’이라는 웹툰(webtoon)에 등장하는 유명한 대사가 있습니다. 퇴사한 선배가 오 차장을 만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회사 안은 전쟁터야. 그런데 말이야. 회사 밖은 지옥이야."  많은 사람들이 기가 막힌 대사라며 공감을 표시했었습니다. 그런데 선택지가 전쟁터 아니면 지옥이라니 너무 슬프지 않습니까? 그래도 사람들은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이 전쟁터이든 지옥이든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생의 전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삶은 하나님이 본래 창조하신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 죽도록 일하는 사람이 되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애굽의 노예처럼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선한 세상을 잘 관리하고 경영하기 위해서 일하길 원하십니다.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하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가는 사명을 위해 일하길 원하십니다. 이 말이 당장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풀타임 사역자가 되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다 그렇게 되면 누가 전쟁터 같은 회사 안에 하나님 나라를 심겠습니까? 누가 지옥 같은 세상 한 가운데서 천국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청지기의 자세로 감당하면 그 일의 의미가 전혀 새롭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청소한 후에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세상을 오염시키지 않기 위해 분리수거를 철저히 하는 것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회사 업무를 월급만 목적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평과 정의, 인애와 자비라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입각해서 감당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복음을 전파하여 한 영혼을 건져내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가는 일입니다. 우리가 직업과 일, 공부를 통해서 세상을 다스리는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서한국, 세계선교 사명에 동참하여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역사 가운데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창조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대로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을 무엇을 하셨습니까? 2장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왜 일곱째 날을 복주시고 쉬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느라 힘들어서 쉬셨을까요? 아닙니다. 이사야 40:28절에 보면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일로 피곤하시다면 어떻게 이 광대한 천지를 땅 끝까지 다 창조하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이유는 1장 31절에 힌트가 있습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더 이상 손 볼 곳이 없도록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으니 쉬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있을 때 쉬는 날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노예였기 때문입니다. 노예에게 안식은 사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청지기가 되었습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면 그분의 청지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함께 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출애굽기 20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을 십계명 중 제4계명으로 주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안식일은 먼저 기억하는 날입니다. 무엇을 기억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이 광대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을 청지기로 세우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엿새 동안 정신없이 살다보면 이 중요한 일들을 다 잊어버립니다. 안식일에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하나하나 다시 기억해 볼 때 우리 심령에 감사와 찬양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세상에 찌들어 피폐해졌던 심령이 새로워집니다. 


또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야 합니다. 거룩히 지킨다는 것은 구별한다는 뜻입니다. 앞선 엿새 동안과 안식일은 확실하게 달라야 합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사람으로서 마땅히 할 일들을 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축구에서 종료 휘슬이 울리면 하던 동작을 일제히 멈추는 것처럼 안식일에는 하던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쉬어야 합니다. 몸이 쉬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몸과 함께 마음도 쉬어야 합니다. 엿새 동안은 이런 저런 일로 걱정 근심 고민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염려와 근심을 그치는 날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에 확실하게 쉬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선하게 인도하실 것을 믿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날입니다. 이와 같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우리 영혼과 믿음을 지키는 생명선입니다. 마르바 던(Marva Dawn)이라는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우리를 지켜줍니다.” 신약 시대의 교회는 주일을 안식일로 지킵니다. 우리가 주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경륜을 기억하고 감사와 찬양이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6일 동안 땀 흘려 열심히 일하고 주일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렇게 7일 동안 하나님의 창조는 모두 끝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현재진행형입니다. 구속 역사와 창조 역사는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재창조의 역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죄로 인해 망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제대로 하나님의 반영할 수 있는 존재가 되도록 빚어가고 계십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를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청지기요, 하나님 나라를 함께 세워나갈 동역자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영향력 있는 목자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전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캠퍼스에 복음을 전하고 땅 끝까지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에 헌신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갈 수 있기를 때문입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이 완성되는 그 날에 우리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날까지 우리가 날마다 새 사람을 입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힘써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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