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창세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이창무 2019. 3. 10.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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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創世紀 제 1 강



天地를 創造하신 하나님


말씀 : 創世紀 1:1-25

요절 : 創世紀 1:1 "太初에 하나님이 天地를 創造하시리라"




성경 해석의 중요한 원리가 하나 있습니다. 성경이 처음 써질 당시에 그 말씀을 누가 썼으며, 누가 들었는지를 고려해서 해석해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모세입니다. 이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은 이제 막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이들은 40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그 와중에 조상들이 믿고 섬겼던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오랫동안 애굽에 살면서 애굽의 풍습과 문화와 종교에 젖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들에 대한 정체성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혼돈스럽고 공허했습니다. 깊은 흑암이 그들의 내면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모세는 과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너희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창세기를 기록했습니다. 종교 개혁자 장 칼뱅은 그의 책 '기독교 강요'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반드시 알아야만 할 두 가지 지식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요, 둘째는 나 자신을 아는 지식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서로 맞물려 있다. 하나님을 알아야만 나를 알 수 있고, 나를 아는 만큼 하나님을 알 수 있다." 


미국의 흑인 소설가 중에 알렉스 헤일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작가로서 나름대로 성공한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헤일리는 자신의 조상이 누구인가를 찾아 위로 7대조 할아버지까지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그의 선조가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 미국으로 건너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소설 '뿌리'의 주인공인 쿤타킨테입니다. 제 초등학교 때 별명이 쿤타킨테였기 때문에 저는 결코 이 이름을 잊을 수 없습니다. 알렉스 헤일리는 이 작품 속에서 쿤타킨테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나에게까지 이르게 되었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나의 뿌리, 나의 시작은 누구인가?’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 질문은 모든 사람에게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질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오래전부터 만물의 근원을 탐구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물, 불, 공기 등이 근원이라고 했습니다. 철학자 헤겔은 절대 정신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하나 명쾌한 해답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시작과 기원의 문제에 대해서 아주 분명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그분 안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전에 우리는 창세기 1장을 공부할 때는 자연 과학과 관련된 이슈들을 많이 다루었었습니다. 물리학, 천문학, 생명과학, 지구과학 등등 다루는 범위가 광범위했습니다. 문과 출신 목자들은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주워들은 말로 일대일 하느라고 고생이 많았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이과 출신도 별반 사정이 다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요즘 양들이 더 잘 알기 때문에 자칫 잘못 이야기했다가 목자가 탈탈 털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과학적인 이슈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현대 과학을 알았을 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뉴턴 역학이나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원리를 알았겠습니까? 양자 역학을 들어봤을 리도 없고 진화론 교육을 받았을 리도 없습니다. 모세가 그런 사람들에게 과학적 이슈를 가지고 논쟁하려고 이 책을 썼겠습니까? 창세기 1장은 과학 교과서가 아닙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들려주는 웅장한 선포이며 위대한 창조의 서사시입니다. 이에 대한 우리의 합당한 반응은 논쟁이나 변증이 아닙니다. 온 우주와 나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권능과 지혜를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창세기 1장이 노래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1절을 보십시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는 우주 만물의 시작점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개시함으로 시간과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천지는 우주 공간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창조하다’라는 말은 이전에는 아예 없던 전혀 새로운 것들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오직 하나님을 주어로 쓰이는 동사입니다. 종합해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심으로 시간과 공간과 물질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물질과 공간을 초월해 계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유일한 수단은 말씀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부터 2장 3절 사이에는 '하나님이 이르시되'라는 말이 10번, '~이 있으라'가 7번, '그대로 되니라'가 6번이나 반복됩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어두운 허공을 가르며 한줄기 찬란한 빛이 비추었습니다. “땅에는 각종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 퍼졌습니다. 그러자 황무했던 대지가 초록색 캔버스로 변하고 그 위에 원색의 물감이 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순결한 백합화, 정열의 장미꽃, 일편단심 민들레, 수선화, 팬지, 데이지, 달리아, 나팔꽃이 피어났습니다. 제 동역자가 집에서 공기를 정화한다고 키우는 스킨답서스, 아이비, 호야, 파키라도 자라났습니다. 여섯째 날에 하나님께서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소, 돼지, 개, 고양이와 같은 가축이 나타났습니다. 90만 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곤충들이 온 땅을 뒤덮었습니다. 사자, 얼룩말, 치타, 임팔라, 하이에나, 코끼리와 같은 짐승들이 넓은 초원 위를 뛰어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말씀이 곧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에서 유를 창조했습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기적이 등장합니다. 홍해가 갈라져 마른 땅이 되었습니다. 마른 막대기에서 꽃이 피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일어나 걷고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동정녀인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무덤에 묻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뛰어넘는 이런 일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이런 내용들을 영접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일들을 일으키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자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받아들일 때 성경에 기록된 모든 역사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성경에 기록된 모든 약속들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기초가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들어간 곳은 광야였습니다. 텅 빈 광야에는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제대로 먹을 음식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의 입에서는 원망과 불평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백성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가기는커녕 가는 도중에 다 굶어죽게 생겼다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차라리 애굽에서 노예로 사는 편이 더 나았다며 가시 돋친 말들을 뱉어내었습니다. 어느새 그들은 출애굽의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신 하나님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그들은 하나님이 계신지 아니 계신지 시험했다고 하였습니다. 현실의 어려움에 부딪치자 근원적인 회의와 불신에 빠져버렸습니다. 믿음이 없어 원망하는 백성들을 향해 모세는 이렇게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말씀하시자 모든 것이 그대로 되었다. 창조 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느냐? 하나님이 있으라 하면 있고, 나뉘라 하시면 나뉘고, 모이라 하시면 모여지고, 내라 하시면 나왔느니라." 모세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샘물이 나오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날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렸습니다. 동풍으로 모은 메추라기가 진영 안으로 떨어졌습니다. 약속하신 대로 200만이 넘는 사람들이 광야를 통과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그 말씀대로 이루는 권능이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이념이나 사상도 근본적으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사람은 고쳐 쓰는 법이 아니라는 격언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쓸모없는 자라도 변하여 새 사람 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우리 영혼이 소생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5)"


지난 1월말에 전국 학생 수양회가 있었습니다. 부산 교대 출신의 한 자매님의 소감 발표가 있었습니다. 이 자매는 무엇이든지 대충 쉽게 하려는 고질병이 있었습니다. 전공인 간호학 공부를 제대로 한 적이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저녁에 나가서 불만 끄고 들어오면 되는 쉬운 알바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마저도 안 가고 간 것처럼 서류를 꾸며 냈다가 걸려서 잘렸습니다. 병원에 취업을 했으나 아무 의욕이 없었습니다. 또 대충 일을 했습니다. 주위에서 아무리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충고를 해 주었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스스로 보기에도 너무 한심해서 나 같은 인생이 살아서 뭐하겠느냐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차들이 씽씽 달리는 도로 앞에서 길에 뛰어들려 하였습니다. 5분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일단 학생 수양회 갔다 와서 결정하기로 하고 수양회에 왔습니다. 그런데 주제 1 강에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중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살리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말씀에서 열심히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이제는 과거 자기처럼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자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처럼 영혼을 소생시키는 창조의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봄학기 창세기 말씀을 통해 우리를 새 사람 되게 하는 말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영적으로 죽어가는 캠퍼스 영혼들에게 말씀이 들어가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둘째, 하나님만이 모든 피조물로부터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넷째 날 하늘의 궁창에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 그리고 별들을 만드셨습니다. 여기서 큰 광명체는 해를 가리키고 작은 광명체는 달을 가리킵니다. 출애굽 당시 사람들은 해와 달을 가장 중요한 신으로 여기고 섬겼습니다. 애굽의 주신은 태양신입니다. 애굽의 왕을 가리키는 파라오라는 호칭은 태양신 라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달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가 결정된다고 믿고 달을 주신으로 섬겼습니다. 또한 별들이 인간의 운명을 지배한다는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점성술이 발달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각 나라의 국기에 해와 달과 별들이 많이 그려져 있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다섯째 날 만들어진 새와 물고기, 여섯째 날 지어진 짐승들도 신으로 섬겼습니다. 아론이 괜히 금송아지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이 애굽 땅에 있을 때 소를 숭배하는 모습을 익숙하게 보아 왔었습니다. 애굽에서 소는 강력한 힘을 상징하는 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소가 너희를 인도한 하나님이다'이라는 말이 통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정도로 백성들의 영적 무지가 심각했습니다. 그러면 창세기 1장이 그들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이 섬기는 각종 우상들은 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이런 메시지는 창세기 이외에서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놀라운 메시지였습니다. 창세기 1장에는 헛된 우상들을 버리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 돌아와 그분만 예배하고 섬기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21절부터 23절까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인간의 무의식 깊은 곳에는 나를 지으신 창조주가 계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접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되어 자기 맘대로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었으나 그럴 능력이 없는 인간은 무엇인가를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숭배하기 시작한 대상이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이었습니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짓입니까?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인간들이 이 무지몽매함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창세기 1장 말씀이 필요했습니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와 과학이 서로 대립하는 관계로 있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오해입니다. 과학을 낳은 어머니는 기독교입니다. 옛날에는 피조 세계를 신성시했기 때문에 감히 탐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었습니다. 달의 신의 노여움을 살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거기에 우주선을 보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 선조들은 불과 100년 전만 해도 고목나무를 보기만 해도 벌벌 떨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들어가면서 온갖 우상숭배와 미신들이 타파되었습니다. 헛되고 거짓된 신화들이 벗겨졌습니다. 그 결과 자연 과학을 연구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졌습니다. 사실은 과학이 기독교에 빚을 많이 졌습니다. 자연 과학뿐만이 아닙니다. 인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장 칼뱅은 하나님을 모르면 나 자신을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을 탐구하는 것이 인문학인데 하나님을 모르고서 어떻게 사람을 알 수 있겠습니까? 어느 정도는 알 수 있겠지만 곧 한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인문학보다도 사람에 관한 더 깊이 있고 정확한 통찰을 우리는 성경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만이 사람이 누구인지를 깨우쳐 주실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3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이 만물의 근원이시요 뿌리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우주 만물과 나는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 창조 질서가 잡힙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서 우리는 가장 영화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창조질서를 깨뜨릴 때 죄가 들어오고 모든 불행의 씨앗이 됩니다. 우리를 헛된 우상 숭배로부터 건져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찬송하고 예배하는 가운데 온전히 그를 아는 백성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하나님은 그 지으신 만물을 통해 그분의 능력과 지혜를 나타내셨습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이 7번이나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저는 중학교 때 미술 시간이 있는 날에는 항상 새로운 스케치북을 사가지고 가야했습니다. 왜냐하면 미술 시간 때마다 한 권을 다 썼기 때문입니다. 그리다가 마음에 좀 안 들면 한 장을 '북' 찢어서 버렸습니다. 끝나면 쓰레기통에 구겨진 제 그림들이 한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제가 좀 병이 있었던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후에 잘못되었다고 쓰레기통에 버리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창조하신 후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충분히 흡족하실 정도로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작품마다 예술가의 혼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피조 세계에는 하나님의 성품과 뜻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만드신 하나님의 걸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을 보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장 칼뱅은 '자연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잉크로 쓴 성경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려주는 두 개의 책이 있는 셈입니다. 하나는 성경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연 만물입니다. 조선시대 시인 송강 정철이 있습니다. 그는 관동별곡에서 금강산 일만 이천 봉 기암괴석을 바라보며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여산의 참모습이 여기서 뵈는구나. 어와! 조물주가 야단스럽기도 야단스럽구나.” 그는 성리학자였지만 아름다운 자연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창조주께 올리는 찬미의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편 기자도 어느 날 밤하늘의 별들을 보며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8:1)" 


얼마 전에 서요한 선교사님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요한 선교사님의 장인어른께서는 좀처럼 하나님을 믿으려 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이 일로 오랫동안 고심을 하셨는데 한 방에 해결이 되었다고 합니다. 서요한 선교사님의 초청으로 장인어른께서 베네수엘라에 오셔서 엔젤 폭포를 보시고 창조주 하나님을 믿게 되셨다고 합니다. 엔젤 폭포는 높이가 979m인 세계에서 가장 높은 폭포입니다. 그 웅장한 모습에 압도가 되어 도저히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할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광대한 우주 만물과 살아 숨 쉬는 생명체를 지으신 하나님은 얼마나 대단하신 분이십니까? 그 가운데 나타난 주님의 위엄과 능력과 지혜를 어떻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주를 관측하는 천체 물리학자들 중에 그리스도인들이 많다고 합니다. 생명을 다루는 의사들 중에 신자들이 많습니다. 인체의 신비 앞에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최근 인류는 자연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비약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이를 활용해서 고도의 기술 문명을 이룩해 왔습니다. 덕분에 우리의 삶이 편리해지고 윤택해 진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자연이라는 책은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산의 바위는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고 새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노래하고 들의 백합화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신 목적은,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실로 최고의 예술가이시며 그 지혜가 무궁무진합니다. 창세기 1장 말씀을 붙들고 자연을 바라볼 때 우리는 벅찬 감격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찬79장)” 이제 곧 새싹이 돋아나고, 나무는 푸른 옷을 입고, 개나리, 철쭉, 진달래 등과 같은 봄꽃들이 여기저기서 피어오를 것입니다. 봄이 오는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설렙니다. 곧 저는 사진기를 들고 쭈그려 앉아 솔로몬의 모든 영화보다도 더 아름다운 봄꽃을 프레임에 담고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럴 때 아름다운 세상을 보러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최악의 미세 먼지가 우리의 앞길을 가로 막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건강을 위해서 또 주님 지으신 세계를 바라보며 찬미하기 위해서 미세 먼지 문제가 속히 해결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보며 찬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금까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암시해 주는 구절이 본문 속에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처음 땅의 모습은 혼돈하고 공허했습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고 캄캄한 가운데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6일 중에 처음 3일 동안에 혼돈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빛을 만드시고 궁창과 땅과 바다의 구획을 정하셔서 질서가 잡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후반부 3일 동안에는 공허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텅 비어 있는 하늘에는 해와 달과 별이 빛나게 하셨고 새가 날게 하셨습니다. 넓은 바다 속에는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니게 하셨습니다. 또 땅 위에는 각종 짐승들이 뛰어 다니게 하셨습니다. 이 지구 위에 살아 있는 것들로 가득 채워질 수 있도록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 살게 되면 창조의 질서가 무너집니다. 다시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로 전락하고 맙니다. 내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내가 누구인지 몰라 혼돈스럽습니다. 누굴 믿고 무엇을 의지해야 할지 몰라 방황합니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암흑 상태입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그 영혼에 빛이 비추게 됩니다. 삶의 질서와 체계가 잡힙니다. 하루하루 의미가 충만한 인생, 창조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전능하신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복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전도서 12:1절에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라고 했습니다. 인생의 말년에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큰 복이고 은혜입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방황했던 수많은 시절들, 허비해 버린 세월들이 너무 안타깝지 않습니까? 창세기 말씀은 모든 사람들에게, 특히 청년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야 나를 알고 삶의 든든한 기초를 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창세기 말씀으로 인생의 기초를 새롭게 다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혼돈하고 공허한 삶에서 질서가 있고 충만한 삶, 조화와 균형을 이룬 아름다운 삶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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