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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령한 복
    설교/에베소서 2018.05.22 22:45

    에베소서 1 강


    신령한 복


    말씀/에베소서 1:1-23

    요절/에베소서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미국의 유력한 신문인 USA 투데이는 역사상 최고액의 복권에 당첨된 잭 위디커의 삶을 추적한 기사를 특집으로 내보낸 적이 있습니다. 잭 위디커는 2002년 크리스마스 저녁 복권에 당첨되어 세금을 제외하고 1억 1400만 달러(당시 환율로 약 1183억원)란 엄청난 돈을 일시불로 받았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그 후 일년 동안 위디커는 총 5 차례 도난 사건을 당했으며, 두 차례 음주 운전 사고로 면허를 박탈당했으며 , 불법 무기 소지 혐의로 1번, 성추행 혐의로 1번, 폭행과 협박 혐의로 1번 경찰에 체포되고 검찰에 의해 2번 기소되었으며, 손녀딸의 친구가 자신의 저택에서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고, 얼마 후 그 손녀딸마저도 약물 과다 복용으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잭 위디커의 삶은 복권 당첨 뒤 일년도 안 되어 엉망진창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사상 최대의 복권 당첨은 그에게는 결코 복이 아니었습니다. 치명적인 불행의 씨앗이었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의 복은 진정한 복이 될 수 없습니다. 복이 아니라 도리어 저주로 변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참된 복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는 진정한 복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늘의 신령한 복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신령한 하늘의 복을 맛보고 누리며 찬송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서신입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를 비롯한 교회들은 박해자들로부터 시련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중심을 잘 지키고 있는 성도들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형편은 그 누구보다 힘든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에베소서에는 곳곳에 갇혔다, 쇠사슬에 매였다, 여러 환난이라는 등등의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쓴 서신이기 때문입니다. 감옥은 어떤 곳입니까? 감옥에선 아무런 자유가 없습니다. 음식의 질도 형편 없고 늘 춥거나 덥고 잠자리도 매우 불편합니다. 만약 바울이 무슨 죄를 저질러서 갇혀 있는 것이라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의 복음을 전하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이때 인사를 마친 바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리라 예상하십니까? "너무 슬프고 괴롭구나. 나처럼 복이 지지리도 없는 인간이 어디 있겠느냐?" 이런 말이 저절로 나올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3절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찬송하리로다' 놀랍게도 감옥에 매인 바 된 바울의 첫 일성은 찬송이었습니다. 이 말은 마치 지표면을 뚫고 나온 화산처럼 바울이 처한 모든 고난의 현실을 뚫고 나온 열정적인 음성이었습니다. 이 편지를 읽던 에베소 교인들도 예상치 못한 바울의 첫 마디에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도대체 바울은 감옥에 갇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찬송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그 비결은 바로 바울이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데 무슨 복 받은 사람이냐구요? 이런 생각은 우리가 복을 주로 땅에 속한 복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복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복은 세상에 속한 한계적인 복입니다. 결국에는 다 사라질 허무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바울은 도리어 조용한 감옥 안에서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복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하나 둘 복이 튀어나오면서 엄청나게 많은 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복을 많이 받으면 당연히 찬송이 흘러나오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받은 복이 너무 많아서 셀 수 없어 그저 찬송만 할 따름이었습니다. 이 복은 바울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복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받은 하늘의 신령한 복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택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날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언제 우리를 선택하셨을까요? 대학교 신입생 때 택하셨을까요? 아니면 될 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본다고 초등학교 때 택하셨을까요? 아무리 멀리 가봐도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이상은 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4절을 보십시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세 전에 택하셨습니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니 이 세상이 존재하기도 전에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우리가 형체를 지니고 의지를 갖기 훨씬 오랜 전부터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 속에는 우리가 주님의 자녀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은 우리의 호박만한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러면 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나를 택하셨을까요? 이 또한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5절에서 바울은 이것을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잘한 것도 없고 아무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은혜로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이런 엄청난 특권을 거져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광스러운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고서도 어떻게 잠잠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주를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밤낮 찬송을 불러도 늘 아쉬운 마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대학교 일학년 때 벤치에 나와 앉아 있을 때 한 목자님이 다가와서 ‘진리를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때 저는 ‘진리를 알고 싶지요.’라고 대답하고 성경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목자의 삶을 결단했고 믿음의 결혼도 했습니다. 저는 제가 구도자였기에 믿음을 선택했고 주님을 따르기로 결단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 보니 이것은 저의 착각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제가 선택하고 결단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제가 그런 선택을 하고 결단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이 저를 선택하셨고 저는 다만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과 영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감격에 벅차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침 태어난 셋째 아이의 이름을 예정이라고 짓고자 했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생겼습니다. 너무 찬양을 하고 싶어 기꺼이 안암1부의 찬양 인도자가 되어 지난 십 년 동안을 섬겼습니다. 비록 지금은 찬양 인도자의 자리를 후배에게 물려 주었지만 여전히 저에게는 찬송할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저를 창세 전부터 일방적인 은혜로 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제가 이 사실 한 가지만으로 찬양할 이유가 차고 넘칩니다. 제가 진심이 담긴 진정한 찬양을 날마다 주님께 올려드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앞선 4절에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목적이 우리를 주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로 세우기 위해서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죄에 오염되었고 허물이 많은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로 주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복음이 기쁜 소식인 이유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드디어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던 하나님의 비밀 한 가지를 펼쳐 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죄는 한 사람을 망가뜨릴 뿐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만물 사이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분열과 갈등, 반목과 원수됨을 낳습니다. 예수님은 죄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이런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만유를 통일하고자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한 개인의 구원 뿐 아니라 만유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열쇠입니다. 


    지금 한반도는 남북 정상 회담의 열기로 뜨겁습니다. 또 얼마 후 개최될 북미 정상 회담에 거는 기대도 큰 상황입니다. 생중계로 본 화면 속에서 남과 북의 정상이 군사 분계선을 가볍게 넘다드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오랜 세월 서로 미워하고 반목하며 대치해 오던 지난 과거를 묻고 새로운 평화의 시대, 화해와 협력의 시대가 성큼 다가오고있는 것 같은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습니다. 남북 화해, 북미 화해는 정말 기뻐하고 축하할만 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정말 마음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화해와 통일을 이룰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전이 되고 평화 협정이 체결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 마음 속에는 이기심과 자기 중심성, 탐욕과 시기의 죄 문제가 남아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진정한 화해와 통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화해와 통일은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당장 남한 안에서도 여와 야, 보수와 진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나누어서 분열과 갈등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조차 하나가 되질 못하는데 어떻게 남과 북이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방법은 단 하나 모두가 그리스도에게도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그분 안에서 형제요 자매가 될 때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화평의 복음이 북한 땅에서 전파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남한 땅에도 복음으로 새롭게 돌아가고 회개하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되는 새 시대를 열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 없이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기업하면 우리는 중소기업, 대기업을 먼저 떠오르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기업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당연히 또한 상속자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문제는 누가 하나님의 기업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우리는 유대인, 너희는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에베소 교회 안에는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도 있었고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도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이미 수천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왔습니다. 반면 이방인들은 오랫동안 하나님 없이 살아왔습니다.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보다 무언가 더 많은 혜택을 누리고 상속도 더 많이 받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 역시 아무런 차별이 없이 유대인들과 똑같은 지위를 가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그 사실을 어떻게 보증할 수 있습니까? 그 사실을 성령께서 인치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받은 성령과 이방인이 받은 성령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 차별 없이 성령님의 내주가 이루어졌습니다. 서부 영화 같은 것을 보면 목장에서는 자기 말이나 소에 불로 된 인장을 찍습니다. 특정한 인장이 찍힌 가축은 그 목장의 소유임을 나타냅니다. 인장이 찍힌 가축은 누가 훔쳐가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쫓아가서 되찾아 옵니다. 목장 주인은 내 가축이기 때문에 함부로 다루지 않고 아끼고 보호합니다. 이처럼 성령님께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 안에 거하십니다. 영원토록 함께 계시고 떠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삼으시고 귀하게 여기고 보호하십니다. 


    제 큰 딸이 영훈 국제 중학교를 다닌 적이 있습니다. 몇 해 전 삼성 이재용 부회장의 아들이 사회적 배려 대상자로 입학해서 물의를 빚었던 바로 그 학교입니다. 제 딸도 그 아이와 같은 학년으로 입학했습니다. 학교 안에서 삼성가의 후계자의 아들이 입학했다고 해서 학생들끼리 설왕설래가 많았습니다. 제 딸이 몇 번 보기는 했는데 특별할 것이 하나 없는 평범한 아이였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 아이를 특별하게 본 것이 그 아이가 장차 엄청난 재산을 상속 받을 것이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주변에서 보면 누군가 부모님으로부터 집이나 땅을 물려 받으면 그렇게 부러움을 삽니다. 제 아버지는 저에게 물려 줄 재산이 없기 때문에 저는 낭패를 당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육신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계십니다. 삼성 회장 아버지가 물려 줄 유산이 더 클까요? 아니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물려줄 유산이 더 클까요? 당연히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물려주실 유산이 훨씬 더 큽니다. 비교가 불가입니다. 우리는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받게 됩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 분명하고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건물주의 아들을 부러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삼성가의 후계자를 부러워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우리를 부러워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이제 목에 힘을 주고 다녀야 하겠습니다. 상속자면 상속자답게 당당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15절부터 19절을 보십시오. 여기에는 에베소 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감사와 기도 제목이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듯이 에베소는 본래 우상 숭배의 도시였습니다. 또한 상업 도시로서 물질주의 문화가 팽배한 곳이었습니다. 바울은 이곳 두란노 서원에서 이 년동안이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러자 도시가 뒤집어졌습니다. 수많은 마술책이 불태워졌고 더 이상 우상은 팔리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우상 제조업자들에게 박해를 받아 에베소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남은 성도들은 목자 바울이 없는 상태에서 자립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예수님을 전파했습니다. 그 결과 믿음과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에베소 교회를 위한 기도 제목이 있었습니다. 17절부터 19절까지 바울의 기도를 보면 많이 나오는 핵심 단어가 바로 ‘알게 하시고’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알기 원하는 네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기를 원했습니다. 이론적으로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체험적으로 하나님을 알기 원했습니다. 둘째로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기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것 자체가 소망이 됩니다. 하나님이 부르셨기 떄문에  겉 사람은 낡아지더라도 속사람은 계속 성장할 소망이 있습니다. 부르셨기 때문에 열매 맺을 소망이 있습니다. 아무리 현실이 어려워도 위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기 원했습니다. 에베소는 물질적인 도시였습니다. 자칫하면 돈에 유혹에 눈이 멀 위험이 있었습니다. 이런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약속된 것이 얼마나 크고 영광스럽고 풍성한지를 안다면 세상 풍조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넷째,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기 원했습니다. 크신 하나님의 능력은 불신하고 의심하는 자에게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합니다.


    제가 속한 안암 1 부의 모습을 보면 에베소 교회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예전에 고려대 곳곳에는 장승이 서 있었습니다. 민족 고대라는 말이 대변해 주듯이 기독교와는 거리가 먼 학교였습니다. 이런 척박한 땅에도 복음의 씨앗이 심겨졌습니다. 그렇게 탄생하고 성장한 곳이 안암 1 부입니다. 지금까지 세계 곳곳에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말씀의 종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양성했습니다. 믿음과 사랑이 흐르는 공동체가 세워졌습니다. 너무나 하나님께 감사한 일입니다. 제가 이런 공동체 속에서 양육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또 하나의 감사 제목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얼마나 경험해 보았을까요? 아마도 태평양에서 물 한 바가지 건져 올린 것 정도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세계는 넓고 깊고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히딩크 감독이 목표로 했던 16강을 통과하고 나서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아직 배고프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아직 배고픕니다. 이미 맛본 것만으로 놀랍도록 삶이 변화되고 새로워졌지만 아직 멀었습니다. 더 깊이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지식적으로 배운다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하사 우리의 눈을 밝혀 주셔야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번 봄학기에 마가복음을 배우고 있는데 많이 배운 말씀인데도 참 새롭습니다. 이런 면이 있었나 싶어 깜짝 놀랄 때도 있습니다. 저는 매주 금요일 저녁에 고린도후서 말씀을 리더 모임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먼저 너무 은혜가 되어서 두 세 번 꼭 눈물이 나곤 합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 이것이 목자의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이 행복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목자 생활을 계속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 외에 신앙의 열정이 어디에서 흘러나올 수 있겠습니까? 요한계시록에서 보면 주님께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칭찬도 하시고 책망도 하시는데 그 중에 에베소 교회도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거짓 선생들을 용납하지 않은 것에 대해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첫 사랑을 버린 것에 대해서 책망을 받았습니다. 왜 주님께 대한 첫 사랑을 잃어버렸을까 생각해 보니 오늘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잘 하다가 어느 순간 만족해 버리고 더 이상 하나님 알아가기를 멈춘 것이 문제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끊임 없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알아가지 않으면 이미 알고 있는 것 까지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첫 사랑도 식고 냉랭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우리 안암 1부의 동역자들과 함께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자 하는 열망을 품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더 깊어지고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 안에서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20절부터 22절을 보십시오. 크신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또한 크신 그 능력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승천하게 하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야만 했을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만유의 주로서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만물 가운데 교회는 특별히 세우신 기관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는 몸인 교회 안에 충만히 거하시고 또한 교회를 통하여 만유를 다스리시고 통일하고자 하십니다.


    요즘 교회를 우습게 보는 풍조가 대세입니다. 그도 그럴 법 한 것이 교회를 둘러싼 갖가지 추문들이 연이어서 터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의 숫자도 줄어가고 있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주일 학교에 올 아이들이 없어 문을 닫는 교회가 늘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포털 사이트에 가면 교회에 대한 조롱과 희화화가 극에 달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믿는 사람들마저 교회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마저 생겼습니다. 가나안 성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나안 성도란 믿기는 하지만 교회에 나가지는 않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가나안을 거꾸로 하면 안나가가 됩니다. 교회에 안 나가도 믿음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식입니다. 심지어 마트를 이러저리 옮겨 다니듯이 교회를 이러저리 옮겨다니며 쇼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볼 때 교회는 그렇게 가볍게 볼 대상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 안에 그리스도께서 충만히 거하십니다. 이런 교회를 우리가 어떻게 우습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교회를 우습게 여긴다는 것은 머리되신 그리스도도 우습게 여긴다는 뜻이 됩니다. 교회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교회다운 교회를 이루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어 섬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는 교회다운 교회를 이룰 때 떨어진 교회의 명예를 다시 회복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찬송가 438장 3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함께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마치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불렀음직한 찬송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찬송은 우리의 찬송이 되었습니다. 하늘 나라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죄사함을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는 삶을 사는 이곳이 곧 하늘 나라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을 누리는 이곳이 하늘 나라입니다. 척박한 캠퍼스이든 스트레스가 쌓이는 직장이든 할 일 많은 가정이든 바로 오늘 이곳에서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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