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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수 됨을 소멸하시고
    설교/에베소서 2018.05.22 22:47

    에베소서 제 2 강


    원수 됨을 소멸하시고


    말씀/에베소서 2:1-22

    요절/에베소서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우리나라에 복음이 처음 들어 온 구한말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1907년 전북 김제 용화 마을에 복음이 전파된 지 2년 만에 금산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 교회를 세우는데 마을의 지주이자 양반인 조덕삼과 그의 마부였던 이자익이라는 사람이 힘을 썼습니다. 그런데 동네를 발칵 뒤집어 놓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조덕삼이 초대 장로로 자기 머슴인 이자익을 천거한 것입니다. 이런 일은 용화 마을뿐 아니라 조선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반상의 구별이 아직도 엄격하던 시대에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이 들어가고 교회가 세워지는 곳마다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던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화해와 하나님의 능력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오른손에 용서의 십자가를 들고 왼손에는 화평의 복음을 든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미움과 분열, 갈등과 반목에 지친 세상에 평화를 전하는 그리스도의 대사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초대 교회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대부분이 유대인이었습니다. 반면 고린도 교회는 대부분이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소아시아 지역에 있던 에베소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거의 반반으로 구성된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에베소 교회 내 이방인 출신 신자들에게 그들이 과거에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그들은 허물과 죄로 영적으로 죽은 상태였습니다. 허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것, 곧 불순종과 반역을 가리킵니다. 죄는 과녁을 빗나간 화살처럼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방인 신자들의 과거의 삶은 하나님과 영적으로 분리되어 영적 생명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세상 풍조를 따랐습니다. 당시 에베소 지역의 풍조는 아데미 여신의 신상을 조각하여 파는 것이었습니다. 아데미 여신을 숭배하고 신전의 여사제와 음란한 행위를 즐기는 것이 당시 시대의 풍속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이방인들의 삶은 물질과 쾌락을 극한까지 추구하는 삶이었습니다. 다음으로 그들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사탄을 따랐습니다. 뱀이 하와에게 그렇게 했듯이 탐심과 교만을 심는 사탄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누가 봐도 할 말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 출신 신자들은 어떻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유대인 출신 신자들은 의인된 심정이 많았습니다. 이방인 출신 신자들을 보며 우리는 너희와는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방인들을 기본 개념도 없는 족속이라고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없는 족보와 조상들을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에게 충격적인 선포를 합니다. “유대인들아! 너희도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것을 정말 모르느냐? 어서 착각에서 깨어나라.” 유대인의 생활과 문화는 이방인과 달랐습니다. 하지만 유대인과 이방인은 근본적으로는 다르지 않았습니다. 부패한 본성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 역시 이방인과 같이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하나님께 반발하고 불순종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 볼 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똑같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였으며 똑같이 진노와 심판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십보백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오십 보를 도망친 군인이 백보를 도망간 군인보고 비겁하다고 나무라는 모습을 보면서 생긴 말입니다. 똑같은 사람이 서로 내가 잘 났니 네가 못 났니 하면서 싸우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우스꽝스럽겠습니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같은 죄인끼리 누가 조금 덜 죄인인가를 놓고 서로 반목한다면 이 또한 우스운 꼴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현재 모습은 어떻습니까? 허물과 죄로 죽었던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다 구원을 받고 살아났습니다. 둘 다 잘나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둘 다 구원 받을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었습니다. 다만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를 심판하시는 대신 아가페의 사랑으로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들 모두를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영광의 자리에 두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크기도 똑 같고 높이도 같은 자리에 앉게 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차별 없이 동등한 은혜를 베푸셨을까요? 7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에베소 교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 사이의 갈등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런 문제가 사도 바울이 사역하던 시대 당시에만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자기를 주장하고 고집하는 한 갈등 문제는 어느 시대에나 다시 불거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만 바뀔 뿐이지 그 양상은 별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의 해결은 각자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지극히 풍성한지를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인 은혜 안에서 이 문제를 극복한다면 오는 세대도 그 모습을 보고 또한 은혜 안에서 갈등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섬기고 있는 안암 1 부 학생회에도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이 있습니다. 학생회의 유대인은 2세 출신 학생입니다. 이방인은 비2세 출신 학생입니다. 저는 이 둘 간의 갈등 때문에 고민이 많습니다. 2세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 공부를 참석해 왔기 때문에 기본 개념이 잡혀 있습니다. 센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속속 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부모님의 체면을 생각해서 방황을 하더라도 아주 막 나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비2세 출신 학생들은 그런 개념이 없습니다. 모임을 하다가 이상한 소리를 해서 분위기에 찬물을 확 끼얹기도 합니다. 2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비2세 학생들이 개념이 없다고 은근히 뒷담화를 합니다. 비2세 학생들은 자기들을 차별한다고 투덜대고 불평합니다. 작년 여름수양회에서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우연히 2세 학생 네 명이 배정 받은 방이 공사 중이어서 부득이하게 다른 방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수양관 측에서 미안하다며 더 가격이 높은 침대방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본 비2세 학생 한 명이 내막도 모르고 2세들만 침대 주고 자기들은 바닥에 자게 했다고 화를 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일대일 목자까지 덩달아 화를 내는 바람에 제가 아주 곤혹스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 두 그룹을 어떻게 하나 되게 할 것인가가 큰 숙제입니다. 그런데 최근 저는 한 가지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같은 나이의 두 자매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2세였고 다른 한 사람은 비2세였습니다. 두 사람 다 각각 지난 일년 동안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은혜의 지점에서 둘이 서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은혜 안에서 성장하니까 과거에 하던 비난이나 불평이 싹 사라졌습니다. 아무리 교제의 자리를 많이 만들어 봐도 잘 안 되던 것이 이제 은혜가 풍성해지니까 과거 내가 어디 출신이었는가는 아무 문제가 되질 않게 되었습니다. 각 사람이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여기에 바로 우리 학생회가 갈등을 극복하는 하나됨을 이룰 비결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어디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까? 바로 우리의 구원에서입니다. 8절과 9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당시 이방인들 중에는 자기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헬라인들은 지혜와 철학을 자랑했습니다. 로마인들은 힘을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지혜와 철학으로 또는 힘으로 구원을 얻었습니까?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요 선물입니다. 인간의 지혜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99 퍼센트의 은혜와 1 퍼센트의 행위로 된 것도 아니고 백 퍼센트 거저 주시는 은혜로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선한 일으로 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도 역시 선한 일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 때문에 창조 목적대로 선한 일을 행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재창조하십니다. 재창조의 목적 역시 선한 일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선한 일이란 무엇일까요? 선한 일이란 복음으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유대인과 이방인을 살리는 것입니다. 은혜의 복음을 오는 여러 세대에 증거하여 화목을 이루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아버지께서 저에게 알루미늄 야구 배트를 선물해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로서는 꽤 비싸고 멋진 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선물로 받은 야구 배트로 야구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로 동생을 협박하는데 썼습니다. 아버지는 너무 화가 나셔서 야구 배트를 도로 가져가 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놀랍고도 엄청난 선물을 거저 주셨습니다. 그런데 구원 받은 이후 사람들하고 갈등하고 미워하고 시기하며 살아간다면 선물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라고 구원의 선물을 주셨지 서로 싸우라고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제 아버지처럼 구원을 취소하고 다시 가져가시지는 않으시겠지만 이는 하나님의 마음을 매우 아프게 해 드리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 모임에 학생회만 갈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세대와 쉰세대 사이에 갈등이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꼰대 취급을 하고 한 쪽에서는 한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인사도 하지 않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갈등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남은 인생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기에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미워하고 싸우고 갈등하며 허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동역자들끼리 다툴 시간이 있고 에너지가 있다면 그 시간과 에너지를 가지고 한 사람을 살리는 일에 사용하는 것이 열 배 백 배는 더 의미있지 않겠습니까? 세상 사람들끼리 싸우면 그러려니 하는데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끼리 싸우면 그렇게 추접해 보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이 소중한 선물인 구원의 은혜를 헛되게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쫓아 화평과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1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바울은 에베소의 이방인 신자들이 과거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1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다윗이 골리앗을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라 불렀습니다. 곧 사도 바울은 너희가 과거에는 다윗이 던진 돌에 맞아 죽은 골리앗과 똑 같은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그들은 과거 메시야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전혀 없이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요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었던 구원과 축복의 언약과는 아무 관련이 없던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될 운명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하나님이 없이 살던 소망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성도들은 이제 어떤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또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이제는(But Now)'라는 말은 대전환이 일어났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립니다. 이제는 과거 유대인들만이 누리던 복을 그대로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외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동일한 시민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섬기는 한 식구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13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피로 대전환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이루신 역사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첫째,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무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유대인이 이방인을 얼마나 미워했을까요? 유대인의 탈무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문) 하나님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을 만드신 목적이 무엇이냐? 답) 이방인을 지옥의 불쏘시개감을 쓰시기 위해서이다." 이방인도 유대인을 혐오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 제국에게 유대인들은 반골 기질이 있어서 항상 골치 아픈 존재들이었습니다. 마침내 서기 70년 로마 장군 디도가 유대를 침략해 유대인들의 씨를 말리려는 듯 예루살렘을 초토화시켜버렸습니다. 지금까지도 유대인에게 저주 받은 민족, 탐욕스러운 수전노, 좋은 머리로 자기 민족만 위하는 이기주의자라는 꼬리표가 남아 있습니다. 이처럼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는 도저히 넘을래야 넘을 수 없는 역사적, 민족적 장벽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벽을 예수님은 자기 육체로 허무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에게 품고 있던 미움을 예수님 자신에게 돌리도록 하셨습니다. 모든 원한과 분노와 적개심을 자기 몸으로 다 받아내셨습니다. 그 결과 미움, 적대감, 반목, 대립, 원한, 차별, 분열, 이 모든 장벽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소멸되었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또한 내가 미워하는 내 형제를 위해서도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의 미움과 원한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용서를 안 할 수 없고 화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지금 우리 마음 속에 딱딱하게 응어리진 분노와 미움이 있다면 십자가라는 용서와 은혜의 용광로 속에서 다 녹여버리길 기도합니다.


    둘째,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15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예수님께서 율법 자체를 폐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나누는 식으로 적용되는 율법의 기능을 폐하셨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율법을 지키는 의인과 지키지 않는 죄인으로 나누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별과 반목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이런 차별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결과적으로 이루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첫째, 둘로 한 새 사람을 지으시고자 하셨습니다. 15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사람들은 모두 단합과 통일, 하나됨을 바랍니다. 단 자기를 중심으로 하나되길 원합니다. 남한은 흡수 통일을 원하고 북한은 적화 통일을 원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저마다 다 자기 밑으로 들어와서 하나가 되라고 하니 백날 하나됨을 부르짖어봐야 하나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 이방인처럼 되거나 이방인이 유대인처럼 되는 방식으로 하나됨을 이루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닌 한 새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한 새 사람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인종, 민족, 성별, 빈부, 지역, 학력, 나이, 외모에 관계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교회는 애초부터 하나되기 위해서 존재하는 기관입니다. 


    둘째,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셨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그리스도의 화평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평이고, 다른 하나는 나와 타인 사이에 화평입니다. 이 둘은 또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각자 하나님과 화평케 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가 하나가 되고 우리가 되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원수 된 것을 소멸하셨는데 다시 또 다른 사람과 원수 맺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원수 맺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 불신자들로 하여금 예수 믿는 것을 훼방하는 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먼저 내가 미워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가 화해부터 하고 와야 할 것입니다.


    셋째,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셨습니다. 17절과 18절을 보십시오.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누리는 영광과 특권은 성령님께서 각 사람에게 내주하신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믿으면 성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받은 성령과 이방인이 받은 성령이 다른 성령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한 성령입니다. 한 성령 안에 있기 때문에 영적인 체험과 성경 진리를 깨닫는 데 있어서 본질적인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끔 이방 목자들이 우리 센터에 와서 인생 소감을 발표하면 머리 색깔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고 말도 다른데도 진한 감동과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들은 서로 많이 다른 것 같지만 우리는 한 성령 안에서 한 하나님께 예배 드린다는 점에서 일치하는 면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새 사람인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20절부터 22절까지를 보십시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사도 바울은 여기서 교회를 집을 건축하는 과정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당시 집을 지을 때 가장 먼저 모퉁잇돌을 놓았습니다. 다음으로 이 모퉁잇돌을 기준점으로 해서 터를 잡았습니다. 기초 공사를 마친 후에는 기둥을 세우고 벽을 쌓고 마지막에 지붕을 얹었습니다. 


    이 건축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교회에 대해 가르쳐 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모퉁잇돌은 한자어로 초석이라고 합니다. 흔히 초석이 된다는 표현은 기반, 근거, 기준점이 된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기반이고 근거이고 기준점이 됩니다. 교회가 분열하는 원인을 가만히 살펴 보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모퉁잇돌을 잃어 버리고 어떤 사람을 모퉁잇돌로 삼아버렸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바울파, 아볼로파, 둘 다 싫다 그리스도파, 이런 파당이 생긴 이유도 다 이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도 파당 짓기로 하면 사모님당, 학생당, 2세당, 비2세당, 일찍왔당, 늦게왔당 등등 얼마든지 많은 당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이런 당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당이 있다면 오직 하나 예수님당 이것 하나 밖에 없습니다. 다음 단계로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습니다.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란 이들을 통해 교회에 주신 신구약 성경을 말합니다. 교회는 진리의 말씀 위에 터잡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교회 안에서 성도들은 서로 연결하여 성전이 되어갑니다. 이렇게 교회는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항상 현재 진행형입니다. 스펄젼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완전한 교회를 찾은 바로 그날에 그 교회는 우리가 거기에 있기 때문에 불완전한 교회가 된다" 지상에서 완성된 교회는 없습니다. 우리가 함께 완성시켜 나가야 할 교회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 완성은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되어서야 비로소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제 친동생들과 같이 밥 먹는 경우가 일년에 손가락에 꼽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요회 식구들하고는 매주 한 번 이상 같이 밥을 먹습니다. 얼마 전 제 딸이 입원했을 때 문병 온 친척은 아무도 없지만 사모님들이 병원을 찾아 주셨습니다. 목자님들은 제게 아버지 같고 어머니 같습니다. 우리들은 본래 서로 잘 모르던 남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떤 때 보면 가족보다 더 가깝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참 신기한 일입니다. 이는 우리의 화평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우리를 붙이셔서 한 몸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신 한 새 사람에게 속해 있습니다. 우리가 막힌 담을 허물고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와 용서의 감격을 누리게 하는 위대한 사랑의 힘, 십자가의 능력으로 하나된 교회를 완성시켜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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