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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새 사람
    설교/에베소서 2015.04.30 10:30

    2013년 신년 에베소서 제 4 강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새 사람


    말씀 / 에베소서 2:11-22

    요절 / 에베소서 2: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세상에는 두 종류의 드라마가 있습니다. 재미 있는 드라마와 재미 없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재미 없는 드라마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든 등장 인물이 다 비슷비슷하고 특징이 없습니다. 반면 재미 있는 드라마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각각의 캐릭터가 살아 있고 입체적입니다. 그런데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고 재미있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서로 다른 캐릭터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좌충우돌하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하고 하나가 되어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곳입니다. 이런 생생한 교회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TV 드라마가 시시해 집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를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새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제 우리가 이 한 새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화해의 드라마, 용서의 드라마를 함께 써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본문 11절과 12절은 원어를 보면 모두 '그 때를 기억하라'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우리 나라는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 이런 노래를 부르며 6.25 그 날을 잊지 말자고 합니다. 미국은 '진주만을 기억하라' 하면서 일본이 선전포고도 없이 진주만을 기습공격 했던 날을 잊지 말자고 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억울하고 부당하게 당했던 일들을 잊지 말자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그 때를 기억하라는 말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 과거의 삶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에베소 성도들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첫째,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육체로는 이방인이라는 말은 그들의 세포 속에 아브라함의 DNA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유대인은 이런 이방인들을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유대인이 이방인을 경멸하고 비하해서 부르는 호칭이었습니다. 다윗도 골리앗을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라 불렀습니다. 곧 사도 바울은 너희가 과거에는 다윗이 던진 돌에 맞아 죽은 골리앗과 똑 같은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없이 살았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그들은 과거 메시야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전혀 없이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요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었던 구원과 축복의 언약과는 아무 관련이 없던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될 운명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하나님이 없이 살던 소망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성도들은 이제 어떤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또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이제는(But Now)'라는 말은 대전환이 일어났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립니다. 이제는 과거 유대인들만이 누리던 복을 그대로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외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동일한 시민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섬기는 한 식구가 되었습니다.


    과거 저도 하나님 없이 살던 이방인이었습니다. 저는 가족 중 아무도 믿지 않는 불신 가정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교회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없이 살던 저의 삶은 마치 런닝 머신 위에서 달리기와 같았습니다. 열심히 산다고 살았지만 삶은 늘 제자리였습니다. 권태와 허무, 이 두 가지 그 당시 저의 삶을 관통하던 키워드였습니다. 태양에서 멀어지면 얼어 붙듯이 하나님과 멀리 떨어진 제 삶은 경직되고 활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하나님과 교제를 풍성히 누리는 삶을 살고 있다니 정말 꿈만 같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저는 얼마나 큰 복을 받은 사람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얼음은 녹고 꽃이 피듯 제 삶은 부드러워지고 생기가 돌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과거의 그 비참했던 삶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잘 떠오르질 않습니다. 애써서 기억을 되살려야 조금씩 감이 오기 시작합니다. 그때를 기억할 때마다 제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한량 없는 은혜인가 새삼 깨닫고 감사하고 찬양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이 엄청난 변화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일어난 변화입니다. 그러면 이 놀라운 변화를 가능하게 만드신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14절과 15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화평, 화해, 평화, 화목... 우리가 얼마나 사모하는 아름다운 말들입니까? 잠언 15:17에 보면 서로 사랑하며 채소를 먹고 사는 것이, 서로 미워하며 기름진 쇠고기를 먹고 사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각자 다 부유하지만 만나면 싸우기만 하는 제 외가 쪽 친척들을 보며 이 말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외가에서 명절날은 싸우는 날입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잘 모이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은 분열과 갈등, 대립과 반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나타 유키무라란 일본인은 평화란 전쟁 끝에 잠시 찾아오는 소강상태라고 정의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어떨 때는 평화는 꿈 같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도대체 평화는 어디에 있을까요? 


    아프리카에 코트디부아르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카카오 농장과 관련해 내전이 그칠 날이 없었던 나라입니다. 이곳 출신 축구 스타 디디에 드록바라는 선수가 있습니다. 그는 월드컵 예선전을 마친 후 TV 카메라 앞에서 고국의 내전 종식을 간곡히 호소하였습니다. 그러자 실제로 이후 일주일 동안 휴전이 이루어졌고, 이 년 후에는 내전이 완전히 종식되었습니다. 이 일 이후 사람들은 드록바를 '검은 예수'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세상 사람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화평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 이름은 평화의 이름입니다. 평화의 꿈은 예수님 안에서 현실이 됩니다. 예수님은 둘로 하나를 만드시는 위대한 연금술사이십니다. 우리의 화평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화평을 주시기 위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무셨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 가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이 있었습니다. 이방인은 이방인의 뜰까지만 들어올 수 있었고 그 안 쪽은 유대인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 둘 사이에는 1.5 미터 높이의 담장이 쳐져 있었습니다. 담장에는 '칩입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막힌 담들이 있습니다. 바로 서로 향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원한과 적개심이 그것입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지독하게 싫어했습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탈무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문) 하나님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을 만드신 목적이 무엇이냐? 답) 이방인을 지옥의 불쏘시개감을 쓰시기 위해서이다." 또 랍비들은 이방인 산모의 출산을 돕는 것은 율법에 어긋난다고 가르쳤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이방인이 하나라도 더 늘어나게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방인도 유대인을 혐오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 제국에게 유대인들은 반골 기질이 있어서 항상 골치 아픈 존재들이었습니다. 마침내 서기 70년 로마 장군 디도가 유대를 침략해 유대인들의 씨를 말리려는 듯 예루살렘을 초토화시켜버렸습니다. 지금까지도 유대인에게 저주 받은 민족, 탐욕스러운 수전노, 좋은 머리로 자기 민족만 위하는 이기주의자라는 꼬리표가 남아 있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는 도저히 넘을래야 넘을 수 없는 역사적, 민족적 장벽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 장벽을 예수님은 자기 육체로 허무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에게 품고 있던 미움을 예수님 자신에게 돌리도록 하셨습니다. 모든 원한과 분노와 적개심을 자기 몸으로 다 받아내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으면 얼마나 괴롭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 모든 괴롬과 고통을 십자가에서 끝까지 다 참아내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화평을 주시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미움, 적대감, 반목, 대립, 원한, 차별, 분열, 이 모든 장벽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소멸되었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또한 내가 미워하는 내 형제를 위해서도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의 미움과 원한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용서를 안 할 수 없고 화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지금 우리 마음 속에 딱딱하게 응어리진 분노와 미움이 있다면 십자가라는 용서와 은혜의 용광로 속에서 다 녹여버리길 기도합니다.


    둘째,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폐하셨다고 하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율법 자체를 폐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나누는 율법의 기능을 폐하셨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율법을 지키는 의인과 지키지 않는 죄인을 나눕니다. 율법에 속한 여러 의식법을 지키는 유대인과 지키지 않는 이방인을 나눕니다. 법에는 이렇게 사람의 등급을 매기는 기능이 있습니다. 이것이 차별과 반목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이런 차별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지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자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화평케 하셔서 결과적으로 이루고자 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첫째, 둘로 한 새 사람을 지으시고자 하셨습니다. 15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사람들은 모두 단합과 통일, 하나됨을 바랍니다. 단 자기를 중심으로 하나되길 원합니다. 남한은 흡수 통일을 원하고 북한은 적화 통일을 원합니다. 이런 식으로 저마다 다 자기 밑으로 들어와서 하나가 되라고 하니 백날 하나됨을 부르짖어봐야 하나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 이방인처럼 되거나 이방인이 유대인처럼 되는 방식으로 하나됨을 이루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닌 한 새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한 새 사람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애초부터 하나되기 위해서 존재하는 기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분열이 있다는 것은 스스로 존재 이유와 목적을 부정하는 셈이 됩니다. 교회는 인종, 민족, 성별, 빈부, 지역, 학력, 나이, 외모에 관계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둘째,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셨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그리스도의 화평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평이고, 다른 하나는 나와 타인 사이에 화평입니다. 이 둘은 또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각자 하나님과 화평케 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가 하나가 되고 우리가 되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들이 각자 자기에게 아무리 잘 해 주어도 자식들끼리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찢어집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가 아무리 헌신을 한다 하더라도 서로 싸우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간혹 자기는 죄와 싸운다고 애를 쓰는데 주위 사람들을 무시하고 계속 적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화해와 용서가 없는 경건을 바리새적 경건이라 부릅니다. 그런 바리새적 경건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지체들 가운데 담을 쌓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쪼개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원수 된 것을 소멸하셨는데 다시 또 다른 사람과 원수 맺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원수 맺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 불신자들로 하여금 예수 믿는 것을 훼방하는 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먼저 내가 미워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가 화해부터 하고 와야 할 것입니다.


    셋째,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셨습니다. 17절과 18절을 보십시오.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누리는 영광과 특권은 성령님께서 각 사람에게 내주하신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믿으면 성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받은 성령과 이방인이 받은 성령이 다른 성령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한 성령입니다. 한 성령 안에 있기 때문에 영적인 체험과 성경 진리를 깨닫는 데 있어서 본질적인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끔 이방 목자들이 우리 센터에 와서 인생 소감을 발표하면 머리 색깔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고 말도 다른데도 진한 감동과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들은 서로 많이 다른 것 같지만 우리는 한 성령 안에서 한 하나님께 예배 드린다는 점에서 일치하는 면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입니다. 


    1907년 전북 김제 용화 마을에 복음이 전파된 지 2년만에 금산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 교회를 세우는데 마을의 지주이자 양반인 조덕삼과 그의 마부였던 이자익이라는 사람이 힘을 썼습니다.. 그런데 동네를 발칵 뒤집어 놓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조덕삼이 초대 장로로 자기 머슴인 이자익을 천거한 것입니다. 반상의 구별이 아직도 엄격하던 시대에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일은 용화 마을뿐 아니라 조선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거의 비슷한 시기인 1906년 미국 LA 아주사 거리에서 갑자기 성령의 강한 임재가 나타나는 부흥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부흥 운동의 여파로 오순절 운동(우리 나라 순복음 교회)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일이 두 가지 일어났는데 하나는 방언을 하는 현상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바로 한 교회에서 백인과 흑인이 함께 즐겁게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목격된 것이었습니다. 이것 역시 20세기초 미국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화평의 복음이 들어가고 교회가 세워지는 곳마다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던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제 우리도 오른손에 용서의 십자가를 들고 왼손에는 화평의 복음을 들고 미움과 분열, 갈등과 반목에 지친 세상에 평화를 전하는 그리스도의 대사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새 사람인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20절부터 22절까지를 보십시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사도 바울은 여기서 교회를 집을 건축하는 과정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당시 집을 지을 때 가장 먼저 모퉁잇돌을 놓았습니다. 다음으로 이 모퉁잇돌을 기준점으로 해서 터를 잡았습니다. 기초 공사를 마친 후에는 기둥을 세우고 벽을 쌓고 마지막에 지붕을 얹었습니다. 이 건축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교회에 대해 가르쳐 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첫째,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모퉁잇돌은 한자어로 초석이라고 합니다. 흔히 초석이 된다는 표현은 기반, 근거, 기준점이 된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기반이고 근거이고 기준점이 됩니다. 교회는 로마 카톨릭처럼 교황과 같은 특정 인물이 모퉁잇돌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을 보고 교회에 오면 또 사람을 보고 교회를 떠나기도 쉽습니다. 교회가 분열하는 원인을 가만히 살펴 보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모퉁잇돌을 잃어 버리고 어떤 사람을 모퉁잇돌로 삼아버렸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바울파, 아볼로파, 둘 다 싫다 그리스도파, 이런 파당이 생긴 이유도 다 이 때문입니다. 요즘 트위터에 보면 비슷한 사람들끼리 끼리끼리 모이는 당이 많습니다. 그 중 가입자가 많은 당을 보면 솔로들이 모이는 솔로당, 아기 엄마들이 모이는 육아당, 노래를 좋아하는 음악당, 영화를 좋아하는 영화본당 등등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도 당 짓기로 하면 사모님당, 학생당, 축구당, 농구당, 일찍왔당, 늦게왔당 등등 얼마든지 많은 당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이런 당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당이 있다면 오직 하나 예수님당 이것 하나 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모퉁잇돌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둘째,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습니다.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란 이들을 통해 교회에 주신 신구약 성경을 말합니다. 교회는 진리의 말씀 위에 터잡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또 한 가지 오류는 말씀보다는 교회의 전통 위에 실질적으로 자신의 터를 잡았다는 것입니다. 전통은 물론 소중한 것입니다. 전통이 생길 때는 나름대로 다 필요성이 있고 이유가 있어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낡은 전통은 항상 말씀에 비추어서 새롭게 개혁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인 물이 썩듯이 교회도 말씀을 벗어나 부패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6세기 위대한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셋째, 교회 안에서 성도들은 서로 연결하여 성전이 되어갑니다. 1986년 1월 28일 미국의 우주 왕복선 첼린저호가 발사 73초 후 공중에서 폭발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승무원 7명 전원이 사망하는 인명피해와 4865억원의 금전적 손실을 입었습니다. 폭발 원인은 수만개의 부품 중에 겨우 고무 바킹 하나가 잘못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도 그렇게 서로 서로가 연결되어 의지하는 관계 속에 있습니다. 나만 괜찮다고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나와 연결된 다른 지체가 망가지면 나도 함께 무너져 내립니다. 다른 지체가 괜찮아야 나도 괜찮은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항상 현재 진행형입니다. 스펄젼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완전한 교회를 찾은 바로 그날에 그 교회는 우리가 거기에 있기 때문에 불완전한 교회가 된다" 지상에서 완성된 교회는 없습니다. 우리가 함께 완성시켜 나가야 할 교회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 성삼위께서 그 안에 거하시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저는 제 친동생들과 같이 밥 먹는 경우가 일년에 손가락에 꼽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요회 식구들하고는 매주 한 번 이상 같이 밥을 먹습니다. 얼마 전 제 딸이 입원했을 때 문병 온 친척은 아무도 없지만 사모님들이 병원을 찾아 주셨습니다. 목자님들은 제게 아버지 같고 어머니 같습니다. 우리들은 본래 서로 잘 모르던 남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떤 때 보면 가족보다 더 가깝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참 신기한 일입니다. 이는 우리의 화평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우리를 붙이셔서 한 몸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신 한 새 사람에게 속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저 사람은 좀 없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없어져야 할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미움과 적대감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 미움과 적대감을 죽여야 합니다. 우리들은 서로 사랑하며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다툼은 하나님께서 한 몸 이루어 사랑하고 섬기며 살라고 주신 이 소중한 인생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막힌 담을 허물고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와 용서의 감격을 누리게 하는 위대한 사랑의 힘, 십자가의 능력으로 하나된 교회를 완성시켜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013.1.27 이창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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