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다만 그를 섬기라

이창무 2017. 3. 26.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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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5 강


다만 그를 섬기라


말씀 / 누가복음 4:1-15

요절 / 누가복음 4: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봄입니다. 봄은 유혹의 계절이라고 불립니다. 봄이 오면 겨울 내내 긴장했던 몸이 이완됩니다. 마음도 덩달아 풀어지기 쉽습니다. 봄에는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고 정신이 멍해지곤 합니다. 바로 이런 시기에 사람은 유혹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신 예수님에 대해 배우게 되어 감사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마귀의 전략이 무엇인지 어떻게 우리를 유혹하는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 시험을 어떻게 물리치셨는가를 살펴보면서 우리도 어떻게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시험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 2a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 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요단강가에서 있었던 메시아의 대관식 이후 예수님은 성령충만하셨습니다. 이때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을 어디로 이끄셨습니까? 성령님은 예수님을 시험 받는 자리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왜 성령께서 예수님이 시험을 받도록 하셨을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직접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간을 늑탈하려면 강한 자 곧 집주인을 먼저 결박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강한 자는 마귀를 뜻하고 세간은 마귀의 포로된 인간들을, 세간을 늑탈하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이제 곧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은 마귀의 포로된 사람들을 그 손아귀에서 해방시키는 일을 하려 하십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마귀를 결박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마치 삼국지에서 각 진영에서 대표 장수가 한 명 씩 나와서 겨루듯이 예수님은 마귀와 진검승부를 벌여서 마귀에게 치명타를 날리고자 하셨습니다. 반면에 마귀는 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을까요? 마귀도 역시 초반부터 예수님을 유혹하여 무너뜨리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무너지시면 그 뒤에 복음 전파, 제자 양성, 십자가와 부활까지 모든 것을 다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똑같은 시험이라도 하나님 편에서 보느냐 마귀 편에서 보느냐에 따라 목적과 결과가 전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시험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Test이고, 마귀 편에서는 Temptation입니다. 성령충만한 성도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주십니다. 그 목적은 시험을 통해서 더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주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Test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성령 충만하지 못할 때 시험을 받으면 내 마음 속의 부패한 정욕이 나를 죄로 이끌어 갑니다. 이것이 Temptation입니다. 다윗의 인생을 보면 이 두 가지가 모두 다 있었습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사울에게 이러 저리 쫓겨다녀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다윗에게 Test였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합한 왕으로 빚어져 갔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왕이 되어 평안하게 되었을 때 그에게서 영적인 긴장감이 사라졌습니다. 그 순간 유혹을 받아 우리야의 아내와 간음죄를 범하게 됩니다. 이것은 다윗에게 Temptation이었습니다. 우리가 왜 항상 성령충만해야 합니까? 왜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삶을 살아야 합니까? 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시험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충만한 사람에게 임한 시험은 그를 더욱 연단되고 강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으로 빚어갑니다. 그러나 성령충만하지 못한 상태에서 시험을 받으면 정욕에 이끌려 결국 죄에 빠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통해 우리는 업그레이드될 수도 있고 다운그레이드될 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 안에 성령께서 충만하시느냐 아니면 죄의 소욕이 충만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시험 받으실 때 예수님의 상태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은 40일 동안이나 광야에 계셨고 그 기간 내내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않으셨습니다. 왜 하필이면 40일까요? 40이라는 숫자는 노아의 홍수부터 시작에서 성경 곳곳에 여러번 등장하는 의미심장한 숫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40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 광야생활했던 40년과 연관이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물이 없냐 왜 고기를 안 주냐 왜 길이 이리 험하냐 등등 끊임없이 불평만하다가 결국 죄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만회하시기 위해 그들보다도 훨씬 더 열악한 최악의 환경 속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모든 것이 풍요로웠던 에덴에 있었지만 마침내 마귀의 유혹에 넘어졌던 첫 사람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시고자 하셨습니다. 만약 두번째 아담이신 예수님마저 마귀에게 패배하신다면 인류에게 희망은 사라집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를 극복할 길이 없어집니다. 이 시험은 온 인류의 구원 문제가 달린 운명의 한판 승부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받으신 첫번째 시험이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마귀는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40일간 굶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보통 사람은 이삼일만 굶어도 모든 것이 다 먹을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하물며 사십일을 굶게 된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배부터 채우려 할 것입니다. 굶주린 예수님에게 마귀의 제안은 참으로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습니다. 마귀의 말이긴 하지만 진실을 일부 담고 있어 더욱 헷갈렸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 맞습니다. 돌을 떡이 되게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 맞습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누가 피해를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마귀의 말대로 해도 아무 문제가 없지 않을까요? 왜 이것이 시험이 됩니까?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능력을 어떻게 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으로 떡을 만드신 적이 있습니다. 바로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떡 다섯개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또 가나 혼인 잔치 때에는 물이 변화여 포도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아들로서의 능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쓰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외에는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한계를 가진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마귀는 그 능력을 너 자신을 위해서 쓰라고 합니다. 자기 문제 해결을 위해 사용하여 아버지의 뜻을 저버린 아들이 되라고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험을 예수님은 어떻게 물리치셨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신명기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여기서 떡은 먹고 사는 현실 문제 전체를 대표합니다. 결국 사람에게는 육체적 필요의 충족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떡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떡이 있어야 삽니다. 이슬만 먹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오직 떡만이 모든 것이라고 말합니다. 현실 문제 해결만이 절대 명제라고 주장합니다. 이 절대 명제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무엇을 해도 좋다고 부추깁니다. 하나님의 뜻도 좋고 사명도 좋고 다 좋지만 일단 너 자신의 현실 문제부터 해결하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이 단지 먹고 사는 것에 달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에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절대적인 것은 떡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현실 문제가 아무리 심각해도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붙드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섬기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지난 20세기는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대결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전 세계가 양 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했습니다. 이 둘은 모든 면에서 다 반대인 것 같지만 사실 알고보면 그 바탕은 서로 일치합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물질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점에 있어서 이 둘은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21세기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21세기의 이데올로기는 먹고사니즘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제가 직장에서 흔히 들었던 말이 있습니다. "이 일을 왜 꼭 해야 해요?"라고 누가 물으면 대개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야. 그냥 해" 캠퍼스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요즘 청년실업자가 38만명이고 졸업예정인 취업준비생까지 포함하면 80만명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제쳐두고 입학 때부터 취직 준비를 해야 할 것만 같습니다. 이런 시대에 제자 훈련, 목자 생활이라니요? 다 좋은데 일단 취업부터 하고 삶에 안정과 여유가 생긴 후에나 차근차근 생각해 볼 문제 아닐까요? 바로 이것이 마귀가 먹고사는 현실 문제, 경제 문제로 우리의 발목을 잡아 아무 것도 못하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먹고 사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두신 뜻과 부르심입니다. 지난 주 토크 콘서트에서 김현유 목자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현유 목자님은 원래 대학원을 카이스트나 포항공대로 가려고 했었다고 합니다. 이를 계기로 목자의 사명까지 다 던져버리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목자님의 권유를 계기로 서울대 대학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사명도 다시 붙들고 믿음도 성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서울대생의 따돌림 때문에 연구실에서 별 인기 없는 수소 전지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앞길에 짙은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 일을 계기로 현유 목자님은 현대자동차에 입사되었고 거기서 세계 최초의 수소전지차를 만드는 주역이 되었습니다. 장영실 상까지 수상하셨고 현재 관련 특허만도 70여개를 보유하고 계십니다. 현유 목자님이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현실 문제가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뜻을 최우선적으로 붙드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두번째 시험이 무엇입니까? 5절을 보십시오. 마귀는 예수님을 데리고 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다 보여주었습니다. 천하만국의 권위와 영광을 한 눈에 보면 기분이 어떨까요? "와"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얻는 방법은 간단하게 마귀에게 절만 하면 됩니다. 얻을 수 있는 파이는 어마어마하게 큰 반면 얻는 방법은 너무나 쉽고 간단합니다. 누구나 솔깃할 수밖에 없는 제안입니다. 너무 매력적이다 보니 흥분한 나머지 앞뒤 가리지 않고 덥석 물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들어가 보면 마귀의 말 속에는 두 가지 거짓말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천하만국을 마귀가 주겠다고 한 말은 거짓말입니다. 천하만국의 권위와 영광은 마귀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마귀에게 전혀 아무런 권세도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가리켜 이 세상 임금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마귀가 왕노릇하고 있는 것이 맞는 것 같아 보입니다. 우리가 출세하고 성공하며 높은 자리에 이르려면 아무리 봐도 마귀적인 방법을 써야 할 것만 같습니다. 이 악한 세상 속에서는 가장 악한 자가 이기는 자가 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권세는 무제한적인 권세가 아닙니다. 절대적인 권세가 아닙니다. 마귀의 권세는 이 세상에 죄와 사망이 있기 때문에 그 어둠 속에서만 작용하는 권세입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죄가 사라지고 죽음도 없다면 마귀의 권세도 함께 사라질 것입니다. 마귀의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를 뛰어 넘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마귀가 날뛴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한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천하만국의 모든 영광과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절만하면 주겠다고 한 말은 거짓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뜻은 결국 천하만국의 영광과 권세를 얻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장차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서 천하만국을 다스리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이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의 길, 섬김의 길, 고난의 길을 통해서 부활과 영광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그런 고생스러운 길을 가지 말라고 합니다. 더 편한 길, 더 쉬운 길이 있다며 유혹합니다. 이 유혹은 이후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책망하며 결코 십자가의 길을 가면 안 된다고 말하던 순간에도 있었습니다. 이같은 마귀의 말은 너무나 달콤하지만 사실은 모두 거짓말이고 사기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말로만 유혹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천하만국의 권위와 영광을 먼저 보여주었습니다. 마귀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 마음이란 것이 별 생각이 없다가도 막상 보고 나면 마음이 동하게 되기 쉽습니다. 제가 20평 아파트에 장모님을 포함해서 여섯 식구가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분당에 60 평 아파트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마음이 힘들어졌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초라한가 하는 생각이 들고 저런 아파트에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보는 순간 있는 그대로를 보지 않고 거기에 환상이 더해집니다. 저것을 내 것으로 만들면 나는 얼마나 행복해질까? 이런 상상을 하게 만듭니다. 욕심이 생깁니다. 가지지 못하면 불행해 질 것 같습니다. 욕망에 사로잡히면 유혹에 넘어가기 쉽게 됩니다. 결국 죄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보는 것은 강력한 자극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는 것을 통해서 역사하는 유혹의 메커니즘이 알고 항상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마귀의 이 두번째 강력한 유혹을 예수님은 어떻게 물리치셨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이번에도 신명기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나님은 우리의 경배와 섬김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은 우리에게도 영광이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마귀 따위에게 절하며 경배할 수 있겠습니까? 마귀에게 절하는 순간 마귀에게 속한 자, 마귀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영혼을 판 대가로 세상 권세와 영광을 얻는다고 해 봐야 얼마나 오래갈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가져가 버리시면 단 하루 밤 사이에도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설령 이 땅에서 끝까지 권세와 영광을 누린다 해도 그 다음에는 심판과 영벌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귀에게 영혼을 저당 잡힌 사람의 내면의 곤고함와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미 이 땅에서도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마귀에게 절하고 얻은 세상 권력과 명예를 부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도 장차 왕이 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C.S.루이스가 지은 나니아 연대기는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들이 왕관을 쓰고 왕이 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납니다. 이는 모든 믿는 자들이 장차 주와 함께 왕노릇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왕이 될 수 있습니까? 빠른 길 편한 길 쉬운 길은 없습니다. 두 눈 딱 감고 마귀적인 방법, 인간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빨리 가자 편하게 가자는 마귀의 속삭임에 속으면 안 됩니다. 그 길은 내가 가장 빨리 부패하는 길, 멸망의 지름길입니다. 묵묵히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길이 알고 보면 가장 빠른 길입니다. 먼저 앞장 서 가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하나님 한 분을 얻으면 하나님이 소유하신 이 세상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을 가지려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도 잃고 세상도 잃게 됩니다. 내가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면 마귀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나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면 주님과 함께 왕노릇하게 됩니다. 누가 더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세상 영광에 한 눈 팔지 않고 바보처럼 오직 하나님 한 분만 경배하고 섬긴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우리가 마귀에게 속지 말고 일생동안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만을 섬기고 높일 수 있길 기도합니다.


마귀의 세번째 시험이 무엇입니까? 9절을 보십시오. 이번에는 마귀가 예수님을 높은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려 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맞다면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여기서 마귀는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조건문을 써서 이 사실이 아직 확증되지 않은 사실인 것처럼 포장을 했습니다. 여기에 교묘한 마귀의 속임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더 이상 입증할 필요가 없는 자명한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기뻐하는 아들이라는 확실한 인증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 사실을 확인해 보고 정말 그런지 시험해 보도록 유도한 것입니다. 자명한 사실을 자꾸 흔들어서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틈을 벌려 보고자 했습니다. 만약 아내가 남편에게 날마다 정말 날 사랑한다면 이것을 해 줘 저것을 해 줘라고 요구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남편은 엄청 스트레스를 받고 짜증이 날 것입니다. 결국 그 결혼 관계에 금이 가고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정말 날 사랑하시는지 맨날 시험해 보고 눈에 보이는 증거를 요구해 보십시오. 어떻게 되겠습니까? 날이 갈수록 의심만 늘어가고 관계성이 다 깨지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귀가 유혹의 도구로 말씀을 인용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마귀도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모양입니다. 물론 은혜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험하여 넘어뜨리고자 함입니다. 마귀도 말씀을 인용하니까 더욱 이것이 시험인지를 간파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마귀가 인용한 구절은 시편 9편 11절과 12절입니다. 그런데 시편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시험해보라고 주신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말씀의 일부분을 뚝 떼어내서 마귀는 자신의 의도에 맞게 비틀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귀는 가장 거룩한 것 속에 가장 사악한 것을 숨겨 놓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 교묘한 시험을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할 수는 없습니다. 시험은 선생님이 학생에게 출제하는 것입니다. 학생이 선생님을 시험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시험하다니 얼마나 교만한 생각입니까? 하나님은 시험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종종 하나님을 시험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실까 하나님이 정말 나와 함께 하실까? 이런 의심을 합니다. 이럴 때 다른 사람의 간증을 들으면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화가 납니다. 다른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함께 하시는 것이 확실한 것 같은데 나만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의심이 들면 하나님께 이런 저런 증거들을 요구하게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정말 나를 사랑하신다면 이번 시험에 꼭 합격하게 해 주세요. 하나님께서 정말 나와 함께 하신다면 이번에 꼭 승진시켜 주세요. 이렇게 요구합니다. 막상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나에게 이러실 수 있어?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문제에 빠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나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내 소원을 들어주시고 들어주시지 않는 것에 달려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바로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들을 주셨는데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합니까? 로마서 5장 8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찬송가 563장 날 사랑하심이 성경에 써 있다고 노래합니다. 날 사랑하심이 성경에 써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자꾸 눈에 보이는 증거를 요구하며 하나님을 시험하게 되면 사소한 일에도 쉽게 흔들리게 됩니다. 무언가 눈에 보이는 좋은 일이 생기면 스피릿이 하늘을 찌를 듯이 하다가도 또 일이 잘 안 풀리면 깊은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롤로코스터를 타는 것 같은 초보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봄학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무슨 일이든 흔들리지 않고 우직하게 해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과연 내가 양을 얻을 수 있을까. 이 일이 잘 될까 하나님이 과연 나와 함께 하시고 도와주실까 등등 의심이나 갈등이 올 때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한걸음씩 전진해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과 마귀는 삼 라운드 대결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매 라운드마다 마귀가 넉다운을 당했습니다. 권투에서도 세 번 다운을 당하면 TKO패를 당합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KO패를 당하고 물러났습니다. 세 가지 시험에서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방법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기록된 말씀으로 물리치셨다는 점입니다. 우리에게도 마귀를 이길 무기는 말씀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영원히 물러난 것이 아니라 얼마동안 떠났습니다. 한 번 시험을 물리쳤다고 해서 영원히 안 오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옵니다. 평생 동안 시험은 있습니다. 다시 마귀가 돌아오기 때문에 방심하면 안 됩니다.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14, 15절을 보십시오. 이제 예수님은 집주인을 결박했으니 세간을 늑탈할 차례입니다. 거침 없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가는 곳마다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고 말씀에 권세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마귀의 시험을 받을 때는 힘들지만 이기고 나면 더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마귀의 시험은 위기이면서 동시에 기회입니다. 시험을 기회로 만들 비결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어떻게 이기셨는가를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실제적으로 우리 삶 속에 역사하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고 영적인 승리를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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