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이창무 2017. 3. 13.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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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4 강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말씀/ 누가복음 3:1-20

요절/ 누가복음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겨울이 가고 새 봄이 오고 있습니다. 저는 봄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일용할 양식 표지에서 느꼈습니다. 이번 3,4월호 표지는 영블레싱 목자님의 작품입니다. 표지 속엔 화사한 꽃발에서 두 마리의 새들이 지저귀는 모습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습니다. 우리 삶에 이 그림 같이 화창하고 따뜻한 봄날을 맞이해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는 새 사람이 되고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방법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이자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우리 인생에 새 봄과 같은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삶을 새롭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려면 그 전에 준비 작업이 필요합니다.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알기 위해서 살펴보아야 할 사람이 바로 오늘 말씀에 나오는 세례 요한입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앞서 와서 그분의 길을 준비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마음이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또한 이 나라와 캠퍼스에 새 봄과 같은 그리스도의 계절이 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1절과 2절은 당시의 시대적 정황을 보여줍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초대 황제였던 가이사 아구스도의 양자였던 디베료였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땅은 로마에서 파견된 빌라도 총독 그리고 헤롯 대왕의 두 아들인 안디바와 빌립에 의해 분할 통치되고 있었습니다. 종교 권력은 대제사장 안나스와 안나스의 사위였던 가야바가 쥐고 있었습니다. 이들 정치 종교 지도자들은 선대로부터 지위를 물려받아 부와 권력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백성들은 삶은 아무런 변화의 기미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400년 동안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침묵 중이신 것 같았습니다. 이 긴 긴 겨울이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얼어붙은 세상 가운데 다가올 새 봄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2절 하반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빈 들은 아무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말 그대로 빈 들입니다. 이곳에서 요한은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임하였습니다. 세상은 아무도 이 사건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는 역사를 바꿀 대사건의 시작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앞서 가서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도록 부름 받은 선지자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목련 나무에 꽃이 피면 봄이 임박했다는 것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이제 곧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알리는 예고편과 같았습니다. 요한의 사명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 영접할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한 일이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회개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영접하시는 것과 회개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요즘에는 잘 안 하지만 예전 센터에서는 새봄맞이 대청소를 매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새봄학기 센터로 몰려올 새내기를 맞이할 준비를 하려고 목자님들이 2월말 토요일에 다 모여서 센터 구석구석을 청소했습니다. 평소 잘 청소하지 않던 부분들까지도 다 찾아내서 물을 뿌리고 열심히 걸레질을 했습니다. 새내기를 영접하기 위해 센터 청소를 했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마음과 영혼을 대청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회개입니다. 


집을 더럽히는 것이 먼지와 오물이라면 우리 마음을 더럽히는 것은 죄입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죄가 우리 마음을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게 만듭니다. 자연 세계는 참 정직합니다. 3월이 되면 어김없이 얼었던 물이 녹고 개구리가 깨어납니다. 얼마 후면 약속이나 한 듯이 여기저기 개나리 벚꽃 등등 봄꽃이 만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거짓됩니다. 온 국민이 지켜보는 TV 앞에서 '나는 모른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며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5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만약 사람 마음에서 냄새가 난다면 세상에 악취가 진동해서 숨을 쉬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면 어차피 너도 나도 다 죄인인데 죄인들끼리 서로 참아주며 어울려 살면 그만 아닐까요? 굳이 힘들게 회개를 해야 합니까?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서 각자 삶을 해명해야 하는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수많은 언론과  수십 명의 특별 검사가 아무리 다 뒤져봐도 밝혀내지 못하는 진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실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아무도 그 무엇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언젠가 반드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판결문이 읽히는 순간 그 즉시 효력이 발생하고 다시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이때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했던 사람은 아무리 꼼수를 써 봐도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늦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당장 마음의 대청소를 시작해야 합니다. 이렇게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모든 더러운 죄들을 다 씻겨 주시고 영생과 구원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1장 18절은 회개를 가리켜 생명 얻는 회개라고 표현했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만 회개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 받은 사람도 회개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3장에서 이미 목욕한 사람도 날마다 발을 씻을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날마다 회개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구원을 위해서 그리고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살기 위해서 회개가 정말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참된 회개가 없이는 구원도 없고, 참된 회개가 없이는 성화도 없습니다. 


그러나 죄인에게 회개만큼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차라리 심판을 받고 말지 회개만큼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 죄인의 심리입니다. 아니면 회개하는 시늉만 내고 참된 회개를 외면하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그래서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참된 회개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해야 참된 회개를 할 수 있을까요?


첫째, 참된 회개를 하려면 헛된 자부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서 하필이면 왜 세례라는 의식을 베풀었을까요? 당시 세례는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치르는 입교 의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독특하게도 세례 요한은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들을 향해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 말은 곧 유대인인 너희도 이방인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이 점은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온 무리를 향해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하지 말라.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라고 외친 사실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유대인의 혈통과 족보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이미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런 자부심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난 것은 큰 복입니다.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삶에서 아브라함의 자손다운 믿음과 순종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어차피 구원 받을 것이니 아무렇게 내 맘대로 살아도 괜찮다고 여겼습니다. 이런 자부심이 헛된 자부심입니다. 참된 회개를 방해하는 해로운 자부심입니다. 회개하려면 이런 종류의 헛된 자부심이 깨어져야 합니다. 혈통이든 업적이든 인간조건이든 모두 다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홀로 서야 합니다. 그때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대학교 1학년 때 자부심이 넘치던 사람이었습니다. 친척들이 다 부러워하는 고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것이 자랑스러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때 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동서양의 고전을 많이 읽었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같은 경영대생들과는 인문학에 대한 수준차가 나서 대화가 잘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고 쓸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내 안에 앞으로 얼마든지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때 요한복음 성경 공부를 시작했는데 즐겁게 공부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서를 통해 새로운 유형의 문제 많은 사람들을 탐구하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학년 때 또 요한복음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니고데모, 38년 된 병자, 사마리아 여인 등등 모두가 다 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성경이 다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서야 제가 얼마나 마음이 깊이 병든 자인지 발견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부패하고 더러운 죄인인지를 발견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 잘난 맛에 살아왔는데 자부심이 하나둘씩 무너지고 나니 너무 힘들고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일대일 목자님에게 이렇게 따졌습니다. "아니 목자님 맨 처음 저를 피싱하실 때 성경 공부를 하면 기쁘고 행복해진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저는 하면할수록 괴롭고 힘들어요. 목자님은 왜 거짓말을 하셨어요?" 그러자 목자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저에게 이렇게 단 한 마디만 하셨습니다. "올 것이 왔군요." 저는 그때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회개를 하려면 먼저 헛된 자부심이 깨져야 합니다. 그 과정이 괴롭고 아픕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우리 중에 어떤 분은 부모님이 선교사이거나 목자이신 분들이 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예배에 나왔고 코흘리개 시절부터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부모님 눈치 목자님 눈치 보느라 세상 친구들처럼 마음대로 놀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내가 손해를 보면 봤지 뭐 그렇게 회개할 일이 많겠어? 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과연 정말 그럴까요?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을 뿐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던 적이 많지 않았습니까? 또 어떤 분은 내가 UBF 목자 경력이 몇 년인데 하면서 타이틀과 경력을 자랑하기 쉽습니다. 물론 요즘 같은 시대에 목자 생활을 오랫동안 신실하게 감당해 왔다면 존경 받아 마땅합니다. 자부심을 가져도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실한 회개를 외면하고 그 뒤로 숨어버리는 방패막이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처럼 열심히 일한 사도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많은 업적을 남긴 사도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말년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나는 죄인 중의 죄수입니다.'라는 식의 표현이 더 많이 나타납니다.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 내려놓고 있는 모습 그대로 서 보십시오. 우리는 부끄럽고 할 말 없는 죄인일 뿐입니다. 저절로 무릎을 꿇고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회개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헛된 자부심을 하나님 앞에 다 내려놓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참된 회개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무리들은 무엇을 해야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있는지 세례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세례 요한은 세 가지 케이스를 들어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맺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었습니다. 

첫째로 옷 두 벌 가진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자는 없는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였습니다. 옷 두 벌 가졌다고 죄는 아닙니다. 정정당당하게 벌어서 옷 두 벌을 가지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곁에서 옷 한 벌이 없어서 추위에 떠는 사람을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둘째로 세리들은 부과된 것 이외에는 거두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세리는 오늘날과 달리 공무원이 아니라 자영업자였습니다. 많이 거둘수록 자기 몫이 늘어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한 세 이상의 세금을 거두어 재산을 늘리는 세리들이 많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더 이상 그런 부정한 방법으로 세금을 거두어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하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셋째로 군인들은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고 하였습니다. 군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박봉이었습니다. 쥐꼬리만 한 월급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은 아무나 길 가는 사람을 아무나 불러 시비를 건 후 뒷돈을 받고 나서야 풀어주곤 했습니다. 요한은 더 이상은 이런 불의한 짓들을 하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이것들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의 예들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모두 이웃 사랑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회개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성 회복은 사람과의 관계성 속에서 열매로 반드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긍휼을 체험한 사람이 어떻게 이웃의 고통을 모른 척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한 영혼을 어떻게 무시하고 괴롭힐 수 있겠습니까? 회개했다고 하면서 이웃 사랑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면 아직 온전히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둘째는 모두 돈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 사례는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와 관련된 사례라면 두 번째와 세 번째 사례는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하는가와 관련된 사례입니다. 웨슬리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지갑이 회개해야 회개한 것이다." 사람이 정말 회개했는지 알고 싶으면 말을 보지 말고 돈을 어떻게 벌고 어떻게 쓰는지를 보면 됩니다. 돈을 벌기 위해 부정한 방법 쓰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거나, 오직 자기만을 위해 쓰는 이기적인 삶을 살 때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회개를 했어도 진정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물질을 하나님의 뜻대로 얻고 하나님의 뜻대로 쓰는 사람이 진정 회개한 사람입니다. 

셋째는 모두 일상적인 삶의 모습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회개는 교회에 와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회개의 열매가 나타나는 곳은 세상 속입니다. 내가 캠퍼스에 있을 때, 내가 직장에서 업무를 볼 때, 내가 집에서 자녀를 양육하고 가사를 돌볼 때 회개로 인해 변화된 삶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이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서로가 센터 밖에서 어떤 삶을 사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레포트를 남의 것을 베껴서 내는지 안 내는지 잘 모릅니다. 직장에서 업무 처리를 공의롭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센터 밖에서도 하나님이십니다. 그곳에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이 진정 회개한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찾으십니다.


셋째, 참된 회개는 예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내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여기서 요한은 자신과 예수님을 비교합니다.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 뿐이지만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라고 말합니다. 물 세례는 죄를 깨닫고 고백하는 회개의 세례를 의미합니다. 반면 성령 세례는 우리를 거듭나 새사람이 되게 합니다. 또 불 세례는 죄를 아예 태워 없애는 정화의 세례입니다. 이 성령 세례와 물 세례는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앞에서 우리가 죄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죄를 깨닫는 것에만 머물러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죄의식에 질식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나 같은 놈이 살아서 뭐해?' 한탄만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회개는 후회와 동의어가 아닙니다. 회개는 죄의 길을 떠나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이키려면 눈을 들어 길과 진리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나를 새롭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불로 나의 모든 죄를 태우시고 없애버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해야만 죄문제가 해결됩니다. 회개한다 해 놓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옷을 찢고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 물속에 열두 번을 들어갔다 나와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회개는 죄인인 자신을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완성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참된 회개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보길 기도합니다. 또한 진실한 회개로 삶에서 좋은 열매 맺는 자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다른 사람들을 회개할 수 있도록 돕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전도자의 사명이며 목자의 사명입니다. 세례 요한은 처음 오실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었다면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본질적으로는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세례 요한에게서 배울 점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빈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올 해는 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킨 지 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바꾸고 세상을 바꾼 종교 개혁의 역사는 마르틴 루터의 작은 연구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수도사였던 루터가 로마서를 묵상하고 연구하던 중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이 임했습니다. 이 한 말씀이 루터를 사로잡아 버렸습니다. 곧 이어 골방에서 나와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임으로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이 골방에서 말씀 묵상 중에 에베소서 2장 10절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한 말씀을 깊이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캠퍼스 영혼들을 위해 선한 일을 하고자 대학생 성경읽기 선교회를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너무 바쁩니다. 우리 삶은 너무 복잡합니다. 그럴수록 더욱 빈들과 같은 골방이 필요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조금 물러나서 골방에 앉아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한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매주 한 편의 소감을 쓰는 시간이 있습니다. 이 시간이 우리가 빈들로 골방으로 들어가는 시간입니다. 아무리 바쁘고 머리가 복잡해도 이 시간만큼은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침잠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말씀에 사로잡힐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우리는 요단강으로 나가 담대하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요즘에 '팩트 폭행'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팩트 폭행이란 부정할 수 없고 반박할 수도 없는 진실을 이야기해 주어서 상대방이 잘못을 깨닫도록 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왕비에게 거울이 '당신보다 백설 공주가 더 예뻐요'라고 말해주는 것 등을 사례로 들기도 합니다. 이때 제시된 팩트 때문에 폭행을 당한 것 같은 큰 충격을 받는다는 점에서 팩트 폭행이라고 불리웁니다. 죄 문제는 팩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팩트가 드러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충격과 공포를 느끼기조차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죄 문제를 말하고 회개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심히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축복의 메시지만 전하고 싶지 이런 메시지는 전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죄를 모르고 죄사함을 주시는 예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회개 없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죄 문제를 이야기하고 회개를 촉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으로 전하는 회개의 메시지에는 사람들이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아픔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마치 솜씨 좋은 외과의사가 죽어가던 환자의 암 덩어리를 수술로 제거해 살려주었을 때 감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례 요한도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나왔습니다. 돌직구 같은 메시지를 듣고 다 도망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뜨거운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우리에게 요단강은 캠퍼스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헤롯왕처럼 회개의 메시지를 팩트 폭행으로 여기고 듣기를 거부할 것입니다. 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하며 나아올 이들도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믿음을 가지고 봄학기 캠퍼스에 나아가 담대하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새로운 시도들은 끊임없이 일어나지만 세상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나도 잘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사도행전 3장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해 아래 새 것은 없지만 새롭게 될 수 있는 길이 하나 있습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는 사람에게는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임합니다. 변화는 나로부터, 나의 변화는 회개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들부터 먼저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삶으로 맺으면 우리나라도 새로워질 것입니다. 새봄학기 우리 가운데 회개의 열매들이 풍성히 맺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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