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바람과 물결을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

이창무 2015. 4. 30.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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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봄학기 누가복음 제 16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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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  / 누가복음 8:22 - 25

▣ 요절 /누가복음 8:25



바람과 물결을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




최근 운전면허 시험이 크게 간소화 되었다고 합니다. 덕분에 절반을 밑돌던 합격률이 93 퍼센트까지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러자 운전에 미숙한 운전자들이 도로로 나왔다가 사고를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손해보험협회가 들고 일어나서 개선을 요구했다는 소식입니다. 운전면허가 있다고 해서 다 운전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야간 운전, 고속도로 운전, 빗길 운전, 눈길 운전까지 다 경험해 봐야 운전해 봤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면허는 있지만 운전 능력과 관계없는 면허를 우리는 장롱 면허라고 부릅니다. 장롱 면허가 있다면 장롱 믿음도 있습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는 믿음이 장롱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장롱 믿음이 아니라 능력으로 역사하는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휘몰아치는 광풍을 잠잠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있는 믿음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하루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시어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셨을까요? 어떤 사람은 무리들로 인해 지쳐 버린 제자들에게 잠깐 동안의 휴식 시간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호수 건너편 거라사 지방에 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이유가 어떤 이유였든지 제자들은 거기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그저 무리들을 떠나서 자기들끼리 여행을 간다는 것 그 자체로 마냥 즐거웠습니다. 마치 첫 엠티를 떠나는 신입생처럼 제자들의 마음은 설레었습니다. 제자들은 흥겹게 콧노래를 부르며 노를 저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에게 곧 무슨 일이 닥칠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곧 무슨 일이 벌어질지 미리 아셨을까요? 과연 예수님께서 광풍이 온다는 것을 미리 아셨는지 모르셨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호수 건너편까지 건너가자고 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 자신이 하신 그 말에 예수님께서 책임을 지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설마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을 사지로 몰아넣으시려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이 건너편에 가자 말씀하셨으면 중간에 무슨 일이 생기든 그 말씀 자체가 건너편에 도착할 것을 확실한 보증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마치 호수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가는 항해의 길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난 순간 이미 우리는 이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가야할 호수 저편은 어디일까요? 우리의 목적지는 당연히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출발했다는 사실과 목적지가 어디라는 것은 분명하게 알지만, 그 중간 과정은 어떻게 진행될지 잘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도중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반드시 호수 저편에 도착할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과 두려움에 우리는 일생 시달릴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삶은 우리가 예상하고 계획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지도 모릅니다. 갑자기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반대 방향으로 역주행을 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우리는 하나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은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신실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장차 우리 모두는 예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인생의 항해를 모두 마친 후 하나님 나라의 안전한 포구에 닻을 내리고 있을 것을 믿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배가 출발하자 곧 예수님께서 잠이 드셨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저는 잠은 평소 이동 중에 밴 승용차 안에서 토막잠을 자서 해결한다는 스타급 연예인들이 생각납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시고 많은 병자를 고치시느라 스타 연예인 못지않게 바쁘시고 쉴 틈이 없으셨습니다. 기분이 Up되어서 눈이 말똥말똥한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은 몹시 지치고 피곤하신 나머지 배 한쪽 구석에서 스르르 잠을 드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분은 완전한 사람이신 예수님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바쁘고 지치고 피곤한 삶을 깊이 이해하십니다. 어디든 머리만 닿으면 잠들어 버리며 웬만한 충격 없이는 깨지 못 하는 우리를 잘 아십니다. 우리 사모님들은 살림하랴 아이들 챙기랴 역사를 뒤에서 섬기시랴 얼마나 피곤하십니까? 우리 학사 목자님들은 직장에서 일에 치이고 퇴근해서는 양들과 자녀들을 돌보느라 얼마나 피곤하십니까? 학생들은 공부하랴 알바하랴 학생회 섬기랴 얼마나 피곤하십니까? 이럴 때 짧더라도 깊은 잠을 자면 피로가 쫙 풀리고 원기를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깊은 잠은 아무나 잘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근심과 걱정이 많은 사람은 아무리 오래 자도 계속 피곤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이 깊은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시편 127:2는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느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가 갈릴리 호수 한 가운데에 도달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기 시작했습니다. 갈릴리 호수 북쪽에는 헬몬산이 있습니다. 산과 산 사이에 있는 골짜기가 연통 역할을 하면서 강한 바람이 호수를 향해 불어올 때가 있습니다. 이 차가운 바람이 해발보다 200미터가 더 낮은 갈릴리 호수의 따듯한 공기를 만나면 갑자기 상승하면서 강한 회오리바람을 만들어 냅니다. 이 바람이 바로 광풍 말 그대로 미친바람입니다. 광풍은 언제 어디로부터 불어올지 알지 못하며 아무도 어찌할 수 없는 예측 불허, 통제 불능의 바람입니다. 거칠고 사나운 이 바람이 불어오면 갈릴리 어부들의 악몽이 시작됩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과 한 배를 타고 있지만 광풍의 위험으로부터 예외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인생길에도 광풍이 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길에서 만나게 되는 광풍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어떤 분은 갑자기 실직을 하거나 사업에 실패하여 빚더미에 앉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본인이나 배우자가 중한 질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큰 기대를 가지고 키운 자녀가 비뚤어져서 막 나가는 인생을 살기도 합니다. 목자에게는 양들이 떠나가는 것만큼 큰 광풍이 없습니다. 이런 외적인 광풍은 곧 내적인 광풍을 불게 만듭니다. 이러다가 망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되기도 하고 하나님은 나 같이 죄 많은 자는 용서하지 않으시리라는 정죄감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패배감에 사로 잡혀 무기력하게 되기도 하고 환란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에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도 있습니다. 지난 주 해병대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은 이런 미움과 복수심이란 내면의 광풍이 빚어낸 참극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도 인생에서 광풍을 겪어 보았습니다. 그런 광풍을 맞아 우리 인생이 파선할 뻔 했었습니다. 그런 위기 가운데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이니 순풍에 돛을 단 듯 우리 인생길이 아무 사건 사고도 없이 그저 평탄하게 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정말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우리 인생에는 때때로 광풍이 찾아옵니다. 새벽 기도를 안 해도 광풍이 오고 새벽 기도를 해도 광풍이 옵니다. 양이 없어도 광풍이 오고 양이 있어도 광풍이 옵니다. 어제까지 멀쩡했는데 오늘 갑자기 예고도 없이 광풍이 찾아옵니다.


똑같은 광풍이지만 광풍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떠나 잘못된 길을 갈 때 돌이키도록 하시려는 목적에서 보내신 광풍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도망치려고 할 때 만났던 광풍이 이런 광풍입니다. 둘째는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시려고 허락하신 광풍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광풍 훈련입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이 만난 광풍은 바로 이 두 번째 종류의 광풍입니다. 현재 인생의 광풍을 만난 분이 계십니까? 내가 만난 광풍은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경고일까요? 믿음의 훈련일까요? 그 어느 쪽이든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어떤 종류의 광풍이든지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한 가지 더,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순풍의 때든 광풍의 때든 언제나 변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2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광풍 때문에 제자들이 탄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 중 적어도 네 명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는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어부 출신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광풍이 불어 올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지식과 경험이 있었습니다. 익숙한 솜씨로 서둘러 돛을 내리고 바람의 방향을 보고 키의 방향도 계속 바꾸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배 안에 들어 온 물을 퍼내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불어 닥친 광풍은 미쳐도 단단히 미친바람인지 베테랑 어부 출신 제자들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별짓을 다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파도는 더 거칠어지고 배는 점점 더 기울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벌벌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인생에서 광풍을 만나면 나름대로 자기 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노력을 기울입니다. 알고 있는 모든 인맥을 총동원해 보기도 하고, 돈으로 해결해 보려 하기도 하고, 자기의 지혜와 경험을 의지하기도 합니다. 그런 방법으로 몇 번은 사태를 어느 정도 선에서 수습할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대로 미친 광풍을 한번 만나면 모든 방법이 다 소용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 봐도 도저히 빠져 나갈 길을 찾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곧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미친바람을 만나 나도 미쳐 버릴 것 같습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다 끝장이 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소망이 끝장나는 그 끝자락에도 예수님은 여전히 바위처럼 든든하게 우리 곁에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이 계신 이상 아직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제자들이 큰 소리로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웠다는 것은 그때까지도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계속 주무실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원래 한 번 곯아떨어지면 잘 일어나지 못하는 그런 체질이셨을까요? 아니면 진작 깨셨지만 제자들이 어떻게 하나 보려고 실눈을 뜨고 자는 척 하고 계셨을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광풍 가운데 예수님이 계속 평안하게 잠을 주무실 수 있던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께 믿음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고 사명을 다 이루기 전까지는 죽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의 본이 되시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십니다. 반면 제자들은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자기들이 해볼 때까지 해 보다가 안 되니까 막바지에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제자들의 말 속에는 약간의 원망과 불평이 섞여 있습니다. 자기들이 죽을 지경이 되도록 예수님은 왜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냐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워 도움을 청하는 것은 제자들의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는 믿음이 충만한 기도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멉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예수님과의 관계성이 없이는 드릴 수 없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사실 시편의 기도 중에는 이런 기도가 많습니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 (시 44:23)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시 13:1) 


믿음이 없어도 기도는 해야 합니다. 평소에는 기도를 잘 안 하다가 어려울 일이 닥쳤다고 기도하자니 염치가 없습니다. 그래도 기도해야 합니다. 감정이 잘 절제되지 못하고 말이 거칠고 투박할지라도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차라리 책망을 들을지언정 일단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멸시치 않으시고 도와주십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 50:15) 지금 나의 인생길에서 광풍을 만나셨습니까? 그렇다면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새벽기도회에서, 화요찬양기도회에서, 그리고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를 환난에서 건져 주실 것입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외침 소리에 잠을 깨셨습니다. 귀청을 찢을 듯한 천둥소리, 배를 때리는 파도 소리에도 잠을 깨지 않으시던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목소리에 반응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셨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러자 바람과 물결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갑자기 조용해 졌습니다. 마치 사납게 짖어대던 맹견이 주인의 한 마디에 ‘깨갱’하면서 조용해지듯이 그렇게 잠잠해졌습니다. 선풍기를 틀어 놓으면 강아지는 선풍기 바람을 피해 도망 다닙니다. 그러나 박철한 목자님의 아들 세 살짜리 신우는 바람을 피하지 않고 선풍기를 그냥 꺼버립니다.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광풍을 요리 조리 잘 피해 다니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광풍 그 자체를 소멸시켜 버리셨습니다. 제자들은 시간이 지나면 광풍이 서서히 사그라질 것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 번에 광풍을 사라지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기술과 경험으로 바가지로 양동이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말씀 한 마디로 광풍을 잠재우셨습니다.


문제는 광풍이 아닙니다. 우리 문제는 말씀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말씀만 있으면 우리에게 불어 닥친 두려움과 의심의 광풍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단숨에 물러갑니다. 지난 번 놀러와 미팅에서 찬송가 ‘내 평생에 가는 길’이 탄생한 사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작사자 호레이시오 게이츠 스패포드 교수는 1873년 대화재로 모든 재산을 잃었습니다. 주치의는 사고 충격으로 지쳐있던 아내를 위해 여행을 권했습니다. 그런데 사고 뒷수습 때문에 그는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나지 못하고 우선 아내와 네 딸만 먼저 떠나보내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 가족이 탄 배는 대서양에서 영국 선박과 충돌하여 12분 만에 침몰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스패포드 부인만 구조되고 네 딸들은 모두 익사했습니다. 부인은 홀로 웨일즈의 카디프에 도착했고 "혼자 구조됨"이라는 전보를 남편에게 보냈습니다. 그때 구조된 아내를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가던 길에 비극의 사고 해역을 지나면서 찬송시를 하나 지었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찬 413장) 어떻게 그 순간 이런 찬송이 흘러나올 수 있었을까요? 우리 말 가사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영어 원 가사를 보면 주님께서 나에게 그렇게 말씀하여 가르치셨기 때문이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최악의 광풍을 맞은 그 순간에 스패포드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말씀은 그의 내면에 휘몰아친 광풍을 잠재우고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늘의 평안으로 가득 채워 놓았던 것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우선 광풍부터 잠재우신 후 예수님은 가장 먼저 제자들의 믿음에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제자들에게서 믿음을 발견하실 수 없었습니다. 제자이지만 광풍 앞에서 믿지 않는 사람과 별반 다른 것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바람과 함께 믿음도 함께 날라 갔습니다. 광풍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이라는 그 실상을 적나라하게 노출시켰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겐 믿음이 있습니까? 혹시 믿음을 장롱 속에 두고 다니십니까? 어떤 학자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역사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 정의에 기초해 보면 풍랑 앞에서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주지 못한 제자들의 믿음은 제대로 된 믿음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광풍을 넉넉히 이길만한 믿음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환란이 올 때 우리는 쉽게 흔들립니다. 평안할 때는 믿음이 있는 것 같은데 막상 광풍 앞에서 믿음이 잘 작동을 안 합니다. 믿음의 능력이 없습니다. 어떤 때는 불신자보다도 못한 것 같습니다. 물에 젖어 못 쓰게 된 성냥 같은 믿음이 무슨 믿음입니까? 이런 우리를 보시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까우시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제자들의 믿음이 잘못된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고 믿고 따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신앙 고백은 잘 했지만 문제는 믿음에 능력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머리로서 긍정하는 것으로 끝나는 믿음은 아직 참된 믿음의 단계에 이르지 못한 미완성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능력으로 행동으로 결단으로 나타나야 그 믿음이 살아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막상 믿음이 그 능력을 발휘해야 할 순간에 믿음을 보여 드리지 못한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제 가정이 섬기는 법대 양이 한 명 있는데 사법고시를 준비 중입니다. 해마다 여름 수양회에 이 양을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는 해마다 수양회에 가고 싶지만 사법 시험을 망친 바람에 부모님의 허락을 받을 수 없어서 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봄 학기에 만났을 때는 사시 2차 시험을 잘 보면 올해는 확실하게 갈 수 있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얼마 전 사시 2차 시험이 있었습니다.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시험을 잘 봤느냐고 물었습니다. 기대 이상으로 아주 잘 봤다고 했습니다. 저는 곧바로 여름수양회 등록하고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가 이제는 가고 싶은 소원이 사라져서 수양회에 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날을 위해 3년을 기다려 주었는데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입니까? 순풍을 만나 잘 가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광풍을 만났습니다. 저는 허탈한 마음에 다 포기하고 ‘앞으로 잘 사세요’ 하면서 그냥 보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저에게 ‘네 믿음이 어디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으로 실제적인 믿음이 없는 제 자신을 발견하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형제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초청하여 살아있는 믿음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여름 수양회에 양들을 초청하다가 보면 갑자기 소원을 잃기도 하고, 의심을 품기도 하고, 다른 일정과 겹쳐 어려워지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광풍을 잠잠케 하실 수 있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끝까지 믿음으로 초청 역사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믿음 없는 사람이 되지 않고 믿음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을 이미 다 가르쳐 주셨습니다. 최근에 배운 말씀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하며 말씀에 뿌리를 내리면 핍박이 있어도 이를 견디고 백배의 결실을 맺는다고도 하셨습니다. 우리는 평소 작은 일에서부터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작은 일에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사람이 큰일을 만나다고 갑자기 없던 믿음이 생길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순풍의 시기를 어떻게 보냈느냐가 광풍의 시기를 극복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합니다. 목동 다윗은 평소 자기가 지키던 양떼를 맹수가 와서 물고 가면 믿음으로 맹수에게 도전하여 양을 구출해 내었습니다. 똑같은 원리에 근거해서 다윗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골리앗에게 도전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 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는 비결이 무엇이냐! 지금부터 날마다 한계 상황 앞에 조금씩 조금씩 믿음으로 도전하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꾸준하게 믿음의 훈련을 한 사람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광풍이 와도 요동하지 않는 믿음의 용사로 성장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믿음으로 한계에 도전하는 훈련을 통해 예수님이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5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제자들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제자들은 너무 놀랍고 두려워서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조금 전까지 광풍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을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람과 파도보다 더 크신 분이심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더 큰 두려움으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다른 모든 두려움이 물러갑니다.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신 이 분은 누구이십니까? 이 분은 본체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예수님은 바람과 물결과 모든 자연 만물을 다스리시는 통치자이십니다. 예수님은 광풍보다 더 크시며 사탄보다 더 강하시며 바위보다 더 든든하시며 믿음 없는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고 도와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인생의 광풍을 만날 때마다 두려워하지 말고 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믿음으로 극복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011.7.10. 이창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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