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이창무 2015. 4. 30.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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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봄학기 누가복음 제 25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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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  / 누가복음 12:1 - 21

▣ 요절 / 누가복음 12:15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미국의 명문 휘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에콰도르 아우카족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갔던 짐 엘리엇이란 선교사가 계십니다. 1956년 1월 그는 불과 29살 나이에 선교지에 나간 지 채 3개월이 못 돼 원주민들의 창에 찔려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타임지는 이 사건을 10페이지에 걸쳐 다루었는데 기사의 제목은 ‘이것이 무슨 낭비인가’였습니다. 그와 같은 해에 태어난 밥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젊어서 큰돈을 벌고 50대에 조기 은퇴하였습니다. 은퇴 후 그는 플로리다로 이주해 해변에서 보트를 타고 날마다 해변에 나가서 조개껍질을 주웠습니다. 1988년 2월 ‘리더스 다이제스트’지는 그가 미국의 꿈(American Dream)을 이룬 사람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과연 누가 인생을 낭비한 사람이고 누가 꿈을 이룬 사람입니까? 과연 누가 어리석은 사람이고 누가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주님, 제가 수집한 이 아름다운 조개들을 보십시오.” 이 말 밖에 할 말이 없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고 인생을 낭비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짐 엘리엇 선교사의 일기장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지킬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He is no fool who gives what he cannot keep to gain what he cannot lose!)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떤 삶이 진정으로 지혜로운 삶인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여느 때처럼 무리들이 예수님을 보기 위해 모였는데 그 수가 수만 명이나 되어 서로 밟힐 지경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는 얼마 전 프랑스 파리에서 수만 명의 푸른 눈 유럽 젊은이들을 열광하게 했던  K-POP 가수들에 못지않았습니다. 과거 갈릴리 촌구석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살았던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 있다가 덩달아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자 어깨가 으쓱해졌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우리도 공인이 되었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말투부터 변했습니다. 좀 전까지 ‘어이, 베드로! 뻥치지 마.’ 이러던 제자들이 ‘베드로 형제! 이제 과장된 표현은 삼가고 체통을 지키셔야 하지 않겠소.’ 이런 식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몰려드는 무리들보다도 조금씩 변해가는 제자들이 더 걱정스러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어떤 당부를 하셨습니까? “바리새인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사람들의 보는 눈이 많아지면 사람들 앞에서 내가 어떻게 보일까를 자연스럽게 먼저 생각하기 쉽습니다. 소위 말하는 이미지 관리를 하게 됩니다. 내면은 그렇지 않으면서 겉은 그럴듯하게 꾸미는 것,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문제 곧 외식입니다. 예수님은 외식을 누룩에 비유하셨습니다. 누룩은 적은 양으로도 큰 영향력을 끼칩니다. 만약 제자들이 바리새인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잘 지키지 않는다면, 그들 역시 외식하는 자로 변질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외식을 주의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2절과 3절을 보십시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대개 사람들은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잘 깨닫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금방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위선은 언젠가 반드시 드러나게 됩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어두운데서 말한 것이 인터넷에 올라 와 있고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9시 뉴스데스크에 나옵니다. 하버드 대학 신학부 학장이었던 타이먼이란 교수가 있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기독교 윤리를 가르쳤는데, 수업이 끝난 후에는 자기 방에서 몰래 컴퓨터에 저장해 둔 포르노 사진을 보았습니다. 이를 아무도 모를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컴퓨터가 고장 나 어쩔 수 없이 수리공을 불렀습니다. 그 수리공에 의해 온 세상에 이 사실이 다 알려지고 결국 그는 교수직을 사임해야만 했습니다. 때로는 이 땅에서 들키지 않고 요행히 무사하게 지나갈 수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모든 것이 백일하에 다 드러나게 됩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감출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계 2:18).


우리가 어떻게 하면 위선에 물들지 않고 진실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본문에 보면 감추인 것, 숨은 것, 어두운데, 골방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들은 모두 사람들이 없는 은밀한 장소를 가리킵니다. 이런 곳에서의 삶이 다르고, 사람들의 보는 앞에서의 삶이 다른 것이 위선이고 외식입니다. 센터에 와서 하는 말이 다르고 장막이나 집에 와서 하는 말이 다르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그 말들을 언젠가 모두가 다 아는 날이 옵니다. 그 날에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당장에 드러나지 않는다고 위선적인 신앙생활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혼자 있을 때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혼자 있을 때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는 사람은 외식에 빠지지 않습니다. 혼자 있을 때 조용히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사람은 외식에 빠지지 않습니다. 혼자 있을 때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영광을 돌리는 사람은 외식에 빠지지 않습니다. 은밀한 가운데 행하는 우리의 위선이 언젠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은밀한 가운데 행하는 우리의 신앙도 언젠가는 빛을 발하게 됩니다. 우리가 마음의 골방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더불어 깊은 사귐을 가지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내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사람이 외식하는 이유도 사람들의 평판과 시선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권세를 가진 사람, 내 인생을 좌지우지할 권한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을 더 두려워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면 어떻게 됩니까? 상대방이 듣기 좋은 말만 하게 됩니다. 해야 할 말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게 됩니다. 조금씩 타협하다가 때로는 양심을 속이고 거짓말도 하게 됩니다. 자유가 없고 억눌리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이 위축되고 나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전할 수 없게 됩니다. 영어 단어 ‘Martyr’는 증인과 순교자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즉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각오가 없으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증거하기가 어렵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첫째, 마땅히 두려워할 분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4절에 보면 세상 권세자들은 기껏해야 우리 몸을 죽이기 밖에 못합니다. 그러나 몸이 죽는 것보다 더 심각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 몸을 죽일 수 있는 권세자들도 예외 없이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섭니다. 이 심판대 앞에서 어떤 판결이 내려지느냐에 따라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도 있고 지옥의 유황불에 던져질 수도 있습니다. 어떤 막강한 파워를 가진 세상 권세자라도 우리의 최종적인 운명을 결정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 이후의 삶까지 모두 주관하시는 분, 우리를 지옥에 던질 권세가 있으신 하나님을 마땅히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둘째,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6절과 7절을 보십시오. “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당시에 참새가 동전 한 닢에 두 마리씩 팔렸습니다. 네 마리를 사면 한 마리를 덤으로 받았습니다. 이렇게 싼 값에 팔려가는 참새도 하나님은 한 마리 한 마리를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참새보다 사람이 얼마나 더 귀하며 더더욱 예수님께 택함 받은 제자들은 얼마나 더 귀합니까?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 하나하나까지도 다 세시는 분이십니다. 머리카락을 세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대머리에 머리를 심을 때는 머리카락 하나 당 얼마씩 돈을 받기 때문에 머리카락 하나하나를 세야합니다. 그 외에는 머리카락을 셀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마저도 일일이 다 세어서 알고 계십니다. 그 정도로 우리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섬세하게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믿음으로 압니다. 그러므로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경배의 대상이십니다. 동시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정말로 귀하게 여기시는 사랑과 신뢰의 대상이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옷깃을 여미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에 매달리는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진 다니엘(승일) 목자님은 취직해서 배치 받은 부서가 하필이면 영업 부서라 술자리가 업무의 연장인 그런 곳에서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여기서 술을 거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랬다가는 팀장에게 찍혀서 승진길이 막힐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 다니엘 목자님은 다니엘처럼 팀장님보다 하나님을 더 경외하여 술잔을 거부했습니다. 술잔 대신 대제사장처럼 팀원들을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때 오히려 남들은 몇 년 다녀도 한번 받기 힘든 성과급을 일 년에 다섯 번이나 받을 정도로 뛰어난 업무 성과를 올려 인정받은 사원이 되었습니다. 우리 중에 한 학생 목자님은 주와 복음을 위해 졸업 후 풀타임으로 살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까지 워낙 집 안의 큰 기대를 받아 온 터라 부모님께 말씀드리기 너무 겁이 났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용기를 내어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날 이 분이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긴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시작인 걸.. 힘내라 OOO!!!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앞으로 이 분은 물론이고, 우리 모든 학생 목자님들이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두려움을 이기고 담대하게 제자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8절과 9절을 보십시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시인하는 생활을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칫하면 현실적인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설사 그런 불이익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적극적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예수님께서 장차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때 나를 시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할 것입니다. 마가복음 8:3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세상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방식은 무엇이 있을까요? 식사하기 전에 기도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술 마시기를 거부하는 것 등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아마도 가장 적극적인 방식이 전도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요즘 전도에 대한 세상의 적대감이 극에 달해 있는 상황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전도 열기가 식어 버리고, 전도하기를 부끄러워하는 신자들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심지어는 ‘나는 믿기는 하지만 절대 전도는 안 하는 신자니까 안심하세요.’ 이런 말까지 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후에 예수님 앞에 서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너는 어찌 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 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나에 대해 입도 뻥긋 한 적이 한 번도 없느냐? 그러므로 나도 너에게 할 말이 없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실까요? 반면 전도에 힘쓴 사람에게는 ‘네가 나를 자랑했으니 나도 너를 자랑스럽게 여기노라’ 하실 것입니다. 지난 번 센터에서 ‘회복’이라는 영화를 함께 보았습니다. 이 영화는 이스라엘 사람 중에 예수님을 믿는 ‘메시아닉 쥬(Messiahnic Jew)'들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영화 속에서 정통파 유대인들은 메시아닉 쥬가 사는 집에 폭탄을 던지기도 하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떼거지로 몰려 방해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닉 쥬들이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쁨으로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전하는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 시대가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메시아닉 쥬들이 처한 상황과 비교해 보면 우리는 너무 엄살이 심한 것 같습니다. 우리도 시대 환경과 분위기에 위축되지 아니하고 더욱 전도의 사명을 힘써 감당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에게 형과의 유산 분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 사람은 평소 지혜로운 분이라고 소문이 자자하신 예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청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이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예수님은 해결사가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이해관계를 조정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이런 문제는 예수님이 아니어도 판정해 줄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그 사람의 내면 깊숙이 있는 그의 영적인 문제를 보셨습니다.


그 문제가 무엇입니까? 15절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이 사람의 문제는 탐심이었습니다. 탐심은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려고 욕망입니다. 탐심은 마치 소금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해결되지 않고 더 커집니다. 한 번 지르고 나면 다음에는 더 좋은 것, 더 비싼 것, 더 큰 것을 질러야 만족을 합니다. 이 탐심은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탐심으로 쇠고랑을 차기도 하고 탐심으로 패가망신하고 탐심으로 온 가족들이 서로 원수가 되고 탐심으로 친구도 잃습니다. 금융전문가이신 이주영 목자님에게 귀동냥을 해 보니 요즘 세계 경제 위기가 오게 된 근본 원인이 탐심이었습니다. 미국, 그리스 등 이런 나라 사람들이 모두 소유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돈이 없자 그동안 빚을 내서 흥청망청 다 소비해버렸습니다. 이제 더 이상 빚을 감당할 수 없는 한계점에 도달하자 국가 부도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야고보서 1:15절에서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경계하십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왜 사람들이 이렇게 탐심에 사로잡히게 될까요? 이는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큰 착각입니다. 이 땅에서 물질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돈이 악하거나 가난이 미덕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소유가 넉넉하다고 해서 생명까지 살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생명은 영생 혹은 행복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부자 나라인 선진국의 행복지수보다 방글라데시 같은 가난한 나라의 행복 지수가 더 높습니다. 영국의 한 연구소는 18억 이상의 재산은 인간이 느끼는 행복감하고 전혀 무관하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 연구 결과가 18억이 없으면 불행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소유와 행복이 정비례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돈으로 좋은 침대를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단잠을 살 수가 없습니다. 돈으로 편안한 집을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마음의 평안은 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찾아 온 이 사람은 아버지가 남긴 유산에 욕심을 내다가 형님하고 원수가 되었습니다. ‘저 유산만 받으면 전세 신세를 면하고 아파트를 한 채 살 수 있을텐데...’ 이 생각에 골몰하느라고 잠도 못자고 있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유능한 재판관을 찾아다니느라 너무 바빠 말씀 공부도 안 하고 기도도 안 하고 사명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비유를 통해 이 사람의 문제를 드러내셨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일해서 밭에 소출이 풍성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풍년이 들었는지 그 소출을 저장할 곳간이 없을 만큼 풍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 많은 곡식을 과연 어떻게 해야 잘 보관할 수 있을까? 밤새 고민한 끝에 그는 묘안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있는 곳간을 헐고 지금보다 두 배나 큰 곳간을 새롭게 증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간에 자신의 모든 곡식과 물건을 가득가득 쌓아두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날에 자기 자신을 향해 이렇게 말하리라 생각했습니다. “내 영혼아. 내가 평생  벌어도 다 못 쓸 돈이 통장에 들어 있으니 남한강변에 별장을 사서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며 즐기자.” 이 사람은 탈세도 하지 않았고 부정 축재한 사람도 아니고 열심히 일을 해서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저 물질을 잘 쌓아 두었다가 노후에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는 어찌 보면 소박한 꿈을 가진 부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람을 ‘어리석다 자여!’ ‘이 바보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그는 어떤 점에서 어리석은 자입니까? 


첫째로, 그는 생명이 하나님의 소유인 줄 모르는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그는 자기 생명이 자기 소유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인생 계획을 꼼꼼하게 세워두었고 또 그렇게 될 줄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영혼을 오늘 밤에 데려갈 것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내일 어찌될지 알지 못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아니 당장 오늘 밤에라도 어찌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생명은 나의 소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께 생명을 대여 받은 것입니다. 원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언제 다시 회수해 가실지 모르는 것입니다. 생명 뿐 아니라 재물도 영원히 내 것은 아닙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죽을 때 또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오늘 밤에 당장 주님이 나를 부르시더라도 주님 앞에 똑바로 설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둘째로, 그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행복의 전부인줄 아는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과 즐거움, Happiness와 Fun을 동일시합니다. 그러나 즐거움과 행복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할리우드 스타들은 날마다 파티를 쫓아다니며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 익숙해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파티 애니멀(Party Animal)'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들이 행복합니까? 만날 이혼하고 다시 결혼하고 마약에 손을 대기도 하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재미와 즐거움이 행복과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참된 행복에 눈을 뜰 수가 있습니다.


셋째로, 그는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을 줄만 알고 어떻게 쓸 줄은 모르는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그의 말 속에는 ‘나’라는 일인칭 대명사가 무려 12번이나 나옵니다. 이 사람은 오직 자기 밖에 몰랐습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좋은 땅과 비를 내려 주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그만한 소출을 할 수 있습니까? 일꾼들과 주변 사람들이 돕지 않았다면 자기 혼자서 어떻게 이 많은 일들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서 정상에 올랐다 하더라도 축복해 주신 하나님을 모르고 도움을 베풀어 준 주위 사람들을 모르고 오로지 자기 밖에 모르고 살아간다면 그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또한 그는 재물을 쌓는 법만 알았지 쌓은 재물을 어떻게 써야하는지에 대해서 가치관이나 철학이 전혀 없었습니다. 우리 주위에서 이런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이 들어 세상을 떠날 때가 다 되어 가는데도 번 돈을 움켜 쥔 채 쓸 줄을 모르고 오직 더 벌 궁리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생 전체가 돈의 노예가 되어 버린 비참한 사람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리라” 재물은 자기를 위해 쌓아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재물을 들어온 것은 하나님께 부요한 자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재물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봉사할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이렇게 섬기는 곳에 쓰는 물질은 영원히 하늘나라에 저축이 되는 것입니다. 돈 버는 연구만 많이 하지 돈쓰는 연구는 별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돈 버는 법보다 돈을 가치 있게 쓰는 법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 사모님들께서 어려운 형편의 한 선교사님을 위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서 보내드리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물질을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 쓰는 사람이 하나님께 부요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와 복음을 위해 물질을 드릴 줄 아는 하나님께 부요한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요즘 학생들이 졸업해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보면 모든 판단 기준이 ‘부’에 있는 것 같습니다. 좋은 직업이란 돈을 잘 버는 직업이고 그런 직업을 가져야 결혼도 잘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공부도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한 스펙 쌓기 수단일 뿐입니다. 2년 전 서강대 경영학과에 다니는 한 여대생이 밤새워 공부하다가 과로로 숨진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학생은 복수전공도 모자라 3과를 동시에 전공하고 거기에 로스쿨 시험 준비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학생이 공부하다 죽는 것은 영광이지만 지나친 야심 때문에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가치관도 없고 믿음도 없이 오직 ‘부’를 향해 맹목적으로 돌진하다가 만약 오늘밤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나 목표를 하나님의 영광에 두고 열심히 학과 공부도 하고 성경 공부도 하고 영적 가치관과 믿음을 잘 배우면 당장 오늘 죽어도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안암1부 학생회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는 젊은이들의 모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딤후 2:15)


루터의 말 중에 ‘코람 데오(Coram Deo)’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라틴어로 ‘하나님 앞에서’, 좀 더 엄밀한 의미로는 ‘왕이신 하나님 존전에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과 영혼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코람데오’ 즉 삶의 모든 순간순간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을 연습해야 합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사람보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며, 보이는 이 땅에 재물을 쌓기보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앞에 부요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11.9.26., 이창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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