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자를 찾아
■ 말씀 : 누가복음 19:1-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얼마 전 경기도 연천의 한 부대에서 김모 일병이 내무반에 수류탄을 던지고 총기를 난사하여 8명이 숨지는 끔찍한 사고가 있었습니다. 저는 만약 김일병 옆에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해 줄 한 사람만, 단 한 사람만이라도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과연 그래도 그가 그런 극단적인 행동을 저질렀을까요? 오늘 본문의 삭개오는 아무도 함께 하려 하지 않던 심히 부담스러운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함께 하신 단 한 사람이 되어 주셨고 그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 안에서 회복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리고라는 도시에 들어가서 지나가실 때였습니다. 그곳에는 삭개오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었고 부자였습니다. 여리고는 베레아 지방으로부터 요단강을 건너가는 상인들의 길목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세관이 있었습니다. 이 세관에서는 주로 길르앗 지방으로부터 유입되는 향유 등 여러 상품에 대한 통관세를 징수했습니다. 삭개오는 이 세관의 우두머리로 세금 징수를 지휘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세금 징수 제도는 오늘날과 많이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는 일정 지역에서 일년 간 징수할 세수 총액을 놓고 세리들을 대상으로 공개 입찰을 벌였습니다. 여기서 최고금액을 써 낸 세리에게 징수권이 부여되었습니다. 징수권을 따낸 세리는 세금을 거두어 들여 로마에 약속한 금액을 지불하고 남는 돈은 모두 자기 몫으로 하였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세리들은 징수권을 따내기 위해 무리하게 높은 금액으로 입찰에 응했습니다. 많이 거둘수록 자기 몫도 커지기 때문에 세리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 푼의 세금이라도 더 짜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결국 죽어나는 것은 힘 없는 식민지 백성들 뿐이었습니다. 백성들은 뼈빠지게 일해서 번 소득의 4할 정도를 갖가지 명목의 세금으로 착취당했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허가된 도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웠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세리는 매국노이자 탐욕의 대명사요 상종못할 죄인들이며 ‘공공의 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허가된 도둑질 덕분에 세리들은 상당한 재물을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평범한 세리도 아니고 큰 세관이 있는 여리고의 세리장이었으니 큰 부자였을터이고 그만큼 악명도 자자했습니다. 사람들은 삭개오를 멀리서라도 볼라치면 고개를 돌려버리고 오던 길을 되돌아 갔습니다. 삭개오의 싸이월드 미니홈피 게시판에는 ‘매국노 삭개오는 자결해라’, ‘이 나쁜 XX, 어디 언제까지 잘 먹고 잘 사는지 두고보자’ 등등의 비방 리플이 하루에도 수백건씩 올라왔습니다.
사람들의 또다른 조롱거리 중 하나는 바로 그의 이름이었습니다. 삭개오란 이름은 본래의 뜻은 '순결한 사람' 또는 '의로운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 이름 속에 그를 향해 두었던 부모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삭개오가 태어났을 때 삭개오의 부모는 천하를 다 얻은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삭개오의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두고 며칠을 고민했는지 모릅니다. “박주영이라고 할까? 황우석이라고 할까? 아니야 아니야… 삼식이는 어떨까… 그건 더 아니야 그럼 ..그래 바로 이거야!” 아버지는 이 아들이 장차 자라서 누구보다 깨끗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기를 기도하는 심정으로 아이의 이름을 삭개오라 지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의 현재 삶은 철저하게 자신의 이름을 배반한 삶이었습니다. 그는 그 누구보다 더럽혀진 삶, 불의한 삶의 대명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도 처음부터 이런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부모님의 바람대로 순결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의 키가 남들보다 유달리 작았는데 아마 이는 그가 성장한 환경이 충분한 영양 공급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음을 짐작케 해 줍니다. 사랑하던 어머니가 병원에 갈 몇 푼의 돈이 없어 전전긍긍하다가 고통 중에 돌아가신 사건이 계기가 되었을런지 모릅니다. 등록금을 안 냈다며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담임 선생님에게 뺨을 맞은 사건이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결심했습니다. 순결이니 정의니 다 필요없고 오직 돈을 벌겠다고. 식민지 백성으로 가장 돈을 잘 벌 수 있는 길은 세리가 되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저 놈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손가락질하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푼의 세금이라도 더 거두어 들이는 데는 인정사정 볼 것 없었습니다. 동업자인 다른 세리들마저도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집요하게 거두어 들인 결과 승승장구 어느새 세리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어느날 거울 앞에선 그는 변해도 너무 많이 변해 버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이제는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웃고 싶어도 억지 웃음과 냉소 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저택의 높은 천장에 쇳소리가 섞인 공허한 웃음 소리가 공명이 되어 돌아 왔습니다. 너무 외롭다고 느껴졌지만, 마음을 터 놓을 친구 하나 없었습니다. 부인은 오늘도 백화점에 쇼핑을 하러 갔고, 아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제 방에 틀여 박혀 있었습니다. 문득 순수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백일몽처럼 떠올랐습니다. 아버지 무릎 위에 앉아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커서 꼭 요셉같은 사람이 될 거라고 다짐하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박하 사탕’에 나오는 설경구처럼 ‘나 지금 돌아 갈래’라고 외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돌아갈 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 가신다는 소문이 들려 왔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수 없어” 삭개오는 예수님이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하였습니다. 그가 왜 예수님을 보고자 했을까요? 예수님께 통행세를 받아 내려고 했을까요? 아니면 호기심 때문이었을까요? 이는 단순한 호기심이라기 보다는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온 영적 소원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에 대해서 많은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을 영접하시고 그들과 함께 식사 하신다는 소식,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세리 출신도 있다는 소문, 어떤 몹쓸 죄인도 회개하고 나오기만 하면 크신 사랑으로 품어주시고 모든 죄를 사해 주신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그는 이 예수님을 꼭 만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모든 죄를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고자 했으나 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주변에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설상가상으로 삭개오의 키가 너무 작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골프 경기의 갤러리들처럼 예수님 주변에 많은 무리들이 함께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까치발을 들어 보기도 점프를 해 보기도 했지만 보이는 건 앞 사람 뒤통수에 난 땜빵 자국 뿐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포기하고 그냥 돌아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삭개오 세리장님 사전에는 포기라는 단어가 없었습니다. 아니 포기란 배추를 셀 때 쓰는 단위일 뿐이다라고 적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하”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예수님이 진행하고 계시는 방향을 앞 질러 뛰어 갔습니다. 그곳에는 뽕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습니다. 이 뽕나무는 애굽 뽕나무 혹은 무화과 뽕나무로 불리우는 나무인데 가지가 옆으로 넓게 퍼지게 자라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나무를 오르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삭개오는 누가 보는지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다음 나무 가지를 잡고 기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작달만한 체구에 배가 불룩 나온 아저씨가 뽕나무에 개죽이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누군가 디카로 이 모습을 찍어 디씨인사이드에 올린다면 단 번에 엽기 갤러리에서 조회수 1위를 차지할만한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뽕나무에 엉거주춤 매달려 있는 삭개오를 주목하셨습니다. 그리고 즉시 그를 초청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예수님은 한번도 본적이 없는 삭개오의 이름과 그가 나무 위에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수많은 무리 중에서 영적소원을 가진 삭개오 한 사람을 정확히 찾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눈과 삭개오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예수님의 눈동자는 삭개오를, 삭개오의 눈동자는 예수님를 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눈 속에서 모든 것을 읽어내셨습니다. 그의 영혼이 얼마나 죄의식으로 고통하고 외로움에 지쳐 있는지 다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치료해 주고자 하십니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하듯이 “삭개오야!” 하고 부르셨습니다. 이 한마디 말 속에 한 영혼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이해와 사랑이 다 들어 있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이는 잃은 자를 찾으시는 메시아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죄인을 부르시는 자비로운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의 집에 유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아는 정도로 그치지 않으시고 그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셨습니다. 그 집에 있으면서 함께 음식을 나누고 대화하며 그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유하심으로 그에게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에게서 성육신의 은혜를 봅니다. 본래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서 모든 영광과 존귀와 섬김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시지만, 이 땅에 우리와 꼭 같은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이는 인생들을 향한 그 크신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섬기는 종이 되셔서 삭개오 같은 죄 많고 추한 인생들을 겸손히 섬기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 각자와 함께 유하기를 원하십니다. 나와 함께 먹고 마시며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삭개오 같이 예수님의 이 부르심에 마음 문을 열면, 예수님은 나와 깊은 사랑의 관계성을 맺어 가십니다. 나의 완전한 친구가 되어주십니다.
예수님의 초청의 말씀에 대한 삭개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삭개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재빨리 내려 왔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춤추는 듯한 발걸음으로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인도한 다음, 난생 처음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과 세리장 사이에 일어나는 일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수군거렸습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7) 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한 사람 삭개오를 향한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삭개오는 그저 상종못할 죄인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그를 영접하시는 예수님을 판단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사랑에 그가 깊이 감동되어 마음으로부터 회개를 한 결과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의 삶 전체를 변화시켰습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는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첫째로, 그의 가치관이 변화되었습니다.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거기에다 토색한 것을 사배나 갚겠다는 결단은 그에게 더 이상 돈에 대한 애착이 없어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과거 그는 돈의 노예였습니다. 돈이 그에게 전부였습니다. 그는 돈을 위해서는 토색, 즉 속여서 빼앗는 짓도 서슴없이 했습니다. 돈은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에서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하는 우상입니다. 삭개오에게 돈은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예수님의 은혜가 임했을 때 그의 가치관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예수님이 전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인생의 의미요 목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는 것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에 예수님의 사랑이 임하자 이러한 기적과 같은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둘째로, 그의 삶의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과거 그는 생각하거나 말을 하거나 무엇을 하든지 항상 자기 혹은 자기 가족만을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조금도 생각할 줄 몰랐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모두 자신의 욕심을 채워 줄 탐욕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변화되었을 때 가장 먼저, 가난한 사람과 자기로 인해 해를 당한 사람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제 남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삭개오 속에 있던 하나님의 형상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회복된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회개한 그에게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오늘’은 그가 회개한 순간부터 정죄와 심판이 사라지고 구원의 은혜가 임한 것을 말합니다. “이 집에 이르렀다.”는 것은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식구 모두에게 구원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과거 그는 집에서 불행의 근원이었으나 이제 그는 집안의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과거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에게서 제외되었으나 이제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 곧 믿음의 자녀가 되었습니다(롬 4:11,12,16). 이 말씀은 공동체로부터 왕따당하고 배척받아 온 삭개오를 공동체로 복귀시켜 당당하게 한 형제로 살아가야 할 것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삭개오의 집에선 도무지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다 한 자리에 모여 함께 떡을 떼며 함께 포도주를 마시는 기쁨의 잔치, 죄인들의 천국의 잔치가 열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쁨의 이유에 대해 10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잃어버린 자’는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을 떠난 자가 잃어버린 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 필연적으로 삶의 의미와 목적도 잃고, 자아도 잃고, 본래의 사명도 잃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속에 있어야하는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잃습니다. 최초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은 인간은 모든 것을 잃고 유리방황하며 두려움 속에 살았던 가인이었습니다. 삭개오도 바로 이 잃어버린 자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는 안정된 직업과 부를 가졌지만 그에게는 순결도 의도 친구도 이웃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찾아 구원하셨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를 이웃과 함께 나누며 사는 존재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그를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격과 품위를 갖춘 사람으로 복권시켜 주셨습니다. 조롱받던 삭개오의 이름 그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였습니다. 잃어버린 바 되었던 삭개오를 찾아 구원하시며 회복의 역사를 이루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이 땅에 잃어 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이 시간 우리를 부르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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