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창무 2015. 4. 30.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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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봄학기 누가복음 제 10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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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  / 누가복음  5:17 - 39

▣ 요절 / 누가복음  5:32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존 브로크만이 지은 ‘지난 2000년 동안의 위대한 발명’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인쇄술, 전기, 비행기, 컴퓨터, 인터넷 등 인류가 발명한 121가지의 위대한 발명품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단한 발명품 중에는 지우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깟 지우개가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우개가 없었다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도, 베에토벤의 운명 교향곡과 같은 위대한 음악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 번 실수를 해도 지우개로 지울 수 있었기 때문에 위대한 작품들이 탄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인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수투성이인 인생을 예수님께서 죄 사함을 통해서, 용서의 지우개로 지우심으로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십니다. 만일 용서라는 지우개가 없다면 우리 인생은 고칠 수 없는 실수로 얼룩져 있을 것입니다. 죄 사함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지우시고 아름다운 인생, 예수님을 닮아가는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도우시는 사죄의 권세자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있는 한 집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계실 때였습니다. 갈릴리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들어와 앉았습니다. 그들은 은혜 받으러 온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단으로 몰아 고발할 조건을 찾으려고 온 일종의 특별 수사대였습니다. 그들은 과연 들리던 소문대로 병을 고치는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 중에 뒤늦게 한 중풍병자를 침상채 매고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침상을 매고 오려니 걸음이 더딜 수 밖에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 사람들이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집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발 디딜 틈조차 없었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 사람들은 밖에서 기다리든가 다음 기회에 다시 오자고 하며 다시 발길을 돌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은 잠시 자기들끼리 속닥속다 의논을 하더니 침상을 매고 건물 외벽에 붙어 있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붕 위에 올라가 기와를 벗겨내고 지붕에 구멍을 뚫었습니다. 현대의 가옥 구조에서는 중장비가 없으면 지붕에 구멍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의 가옥은 지붕을 나뭇가지와 진흙으로 덮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지붕을 뜯어낼 수 있었습니다. 구멍이 뚫리자 집 안으로 강렬한 중동의 햇살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이게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하는 사이 빛을 가르고 침상 하나가 줄에 매달린 채 예수님 앞으로 스르르 내려왔습니다. 그 때 누군가 소리쳤습니다. “보라구! UFO가 지구에 내려 온 것이 틀림없다구!” 그러나 그 침상에는 외계인이 아니라 중풍병자 한 사람이 누워 있었습니다.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은 평화로운 집회를 방해한 중풍병자의 친구들을 찌푸린 얼굴로 바라보았습니다. 집 밖에 있던 사람들은 순서를 지키지 않고 새치기를 했다 투덜거렸습니다. 율법교사들은 이 경우는 형법 제 319조 주거칩입죄와 제 366조 재물손괴죄에 해당하여 최소한 징역 3년형은 받을 것이라고 수군거렸습니다. 집주인은 뻥 뚤린 지붕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쳐다만 보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무엇을 보셨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20a)”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그들의 행위만을 보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속에 있는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이 주목하신 그들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이 믿음은 어떤 장애물과 방해라도 극복하고 예수님 앞에 나아오는 믿음입니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서 예수님 앞에 나아오는 믿음입니다. 사람들에게 비난 받을 위험까지도 감수하고 예수님 앞에 나아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의 전능하심과 사랑을 믿는 믿음입니다. 세상은 못 고쳐도 예수님은 고칠 수 있다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요, 일단 예수님 앞에 나가면 중풍병자를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는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양을 예수님 앞에 데려 가고자 하는 목자는 바로 이 중풍병자의 친구들 같은 사람입니다. 한 사람을 예수님 앞에 데려 가고자 할 때 어찌 장애물이 없겠습니까? 우리는 목자로서 양을 도우려 하다 보면 수 없이 많은 장애물들을 만납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교만해서 말씀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늘 비판만 합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무기력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남자 친구가 믿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습니다. 어떤 사람은 엄마가 독실한 불교 신자라서 성경 공부는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런 장애물들을 극복하려고 하니 때로는 너무 피곤한 생각이 듭니다. “자기가 싫다는데 뭐 어떻게 하겠나.. 인생은 긴데 언젠가는 기회가 또 오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은 편안해 집니다. 특히 요즘은 개신교는 공격적인 선교, 무리한 전도를 한다고 비난을 많이 받습니다. 이런 때에는 너무 무리하지 말고 양들도 신사적으로 돕는 것이 현명한 처사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중풍병자를 메고 온 친구들의 믿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신자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책잡히는 일이 없도록 반드시 매너를 지키고 남을 배려하기에 소홀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제가 허준이나 대장금 같은 사극을 좋아합니다.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궁궐에서 살다 보니 법도가 참 엄격합니다. 주인공이 평소에 법도를 잘 지키는데 어느 순간 법도를 깨는 순간이 꼭 옵니다. 왜냐하면 법도보다 더 중요한 것 곧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법도를 깰 수밖에 없는 상황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이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결국 사람을 살려내고 그 결과로서 모든 비난을 다 잠재웁니다. 마치 앰블런스가 신호를 무시하고 중앙선을 침범해도 정당성을 인정받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어떤 모양으로든지 복음을 듣고 사람이 살아나고 변화되면 비난은 사라집니다. 저도 처음에 일대일 목자님이 너무 진드기 같다고 생각했는데, 여름 수양회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그 과정이 사랑이었음을 알게 되고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거기 목자님의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목자는 죄와 죽음 권세에 눌려 날마다 신음하는 양들이 있는 한 그저 마음 편하게 지켜 볼 수 없습니다. 열이 나는 아이를 품에 품은 엄마 같은 마음이 목자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목자는 어떻게 해서든 양이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먼저는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고 실행에 옮겨 도전해 보려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목자의 믿음을 아주 귀하게 보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렇게 하셨으면 참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갑자기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셨습니다. 참 생뚱 맞다는 느낌이 듭니다. 혹시 이 말씀이 지붕 뜯은 것을 용서해 주시겠다는 말씀이겠습니까? 그러나 뒤에서 바리새인들이 이 말을 신성 모독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왜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셨습니까? 이는 중풍병자에게 병이 걸린 것보다도 죄 문제가 더 시급하고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대다수 성경학자들은 이 중풍병자의 경우는 죄에 대한 징계로 병이 생긴 경우에 해당하고, 주변의 사람들까지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경우 병도 문제지만 죄의식이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죄의식이 얼마나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고 고통스럽게 하는지 모릅니다. 


얼마 전 MBC 무한도전을 보니 개그맨 정준하가 재수생 시절 자장면을 먹고 돈을 안 내고 튄 적이 있었는데 20년 만에 그 자장면 집 주인을 찾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유재석이 그깟 자장면 값이 얼만 된다고 왜 진작에 찾아뵙고 사과하고 보상해 드리지 않았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정준하는 근처까지 간 적도 있었는데 도저히 그 집 주인의 얼굴을 다시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방송에서 자장면집 주인아저씨가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용서를 선포하자 정준하는 어린애처럼 펑펑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장면 값을 안 내고 도망가도 이렇게 괴로운 법입니다. 세월이 지나고 성공을 했다고 해서 결코 죄책감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중풍병자도 역시 죄를 지어 저주를 받았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고통 받았습니다. 중풍병은 그의 신경 세포를 죽였지만, 죄는 그의 영혼을 갉아 먹고 있었습니다. 지구를 저울 위에 올려 놓는다 해도 한 사람의 죄의 무게를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죄사함이 필요합니다. 죄사함 받기 전까지 안식이 없습니다. 죄사함 받기 전까지 새출발은 없습니다. 죄사함 받기 전까지 자유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죄를 짓더라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사죄의 음성을 들어야만 해결이 됩니다. 사람에게 받는 죄사함는 일시적이고 한계적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죄사함은 영원하고 최종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사함의 근거를 마련해 주시기 위해 저 하늘에서 이 땅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가 무겁고 고통스러웠던 이유는 우리가 저지른 죄악의 무게가 그 십자가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내 그것을 다 담당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보시고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붉은 피가 지우개가 되어서 더럽고 추한 우리의 죄를 다 지워 버립니다. 십자가 앞에서 죄사함 받을 때 비로서 우리는 죄의식과 두려움에서 해방되고 안식과 자유를 누립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죄사함의 은혜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을 하시자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의 속이 시끄러워졌습니다.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바리새인들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하나님 외에 능히 죄를 사할 수 없다는 그들의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신성 모독했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눈치 채시고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물으셨습니다. 어느 것이 쉽습니까?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은 증거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더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네 죄사함 받았느니라’ 하는 말은 우리는 그런 말 할 자격이 안 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둘 다 사람이 할 수 없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이 사람을 일어나 걷게 하심으로 자신이 죄사함의 권세자이심을 증명하시려는 것입니다. 만일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운다면 이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일으켜 세우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죄사함을 선포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사람이 중풍병에 걸린 것이 죄가 원인이 되어 그 징계로 생겼다면 그 죄를 용서받았으므로 이제 중풍병에서 당연히 일어서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사죄의 권세자요 하나님이심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 예수님의 말씀이 임하자 중풍병자는 완전히 그 병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일어나 자기 침상을 들고 집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갔습니다. 이 일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놀라고 심히 두려워하기까지 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예수님은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이적을 베푸는 큰 선지자 정도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엘리야나 엘리사는 물론이요 모세나 다윗도 하지 못한 놀라운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으니라”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사람들은 죄 사함을 선포한 이 분은 도대체 과연 누구신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분은 누구십니까? 골로새서 1:14절은 말합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성삼위 일체 하나님 중 한 위에 계신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27). 레위라는 이름을 가진 것을 볼 때 틀림없이 레위 지파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레위의 부모님들은 레위가 나중에 자라서 훌륭한 제사장이 되라고 런 이름을 붙여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제사장이 되지 않고 세리가 되었습니다. 요즘은 세무 공무원은 인기 직업입니다. 세무 공무원이 되었다고 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대의 세리는 “죄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공인된 죄인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세리와 매춘부가 포함되었습니다. 로마는 세리들을 동원해서 유대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받아냈습니다. 세리는 자신들의 배를 채우려고 과도하게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지금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도 이렇게 해서 자신의 부를 축적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땅이 거룩하게 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고 믿었습니다. 그 땅이 거룩하게 되려면 땅을 오염시키는 것들이 제거되어야 했습니다. 레위는 바로 거룩한 땅을 오염시키는 주범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저주를 했습니다. “저 세리 놈이 벼락 맞아 죽지도 않고 오늘도 세관에 앉아 있구만”


레위도 세리가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는 직업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정과 존경이 밥을 먹여 주는 것도 아닌데 개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쓰면 된다고 자신을 합리화시켰습니다. 견습 세리 시절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무자비하게 세금을 뜯어 가는 선배 세리들의 모습을 보고 마음의 갈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돈 버는 재미, 돈 쓰는 맛을 알아가면서 그런 갈등은 다 사라져 갔습니다. 그해 실적이 가장 좋은 세리에게 수여되는 올해의 세리상도 받았습니다. “나는 세리다”라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일 등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원하던 바대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우선 로마에서 직수입한 외제 마차를 한 대 뽑았습니다. 요단강변에 수영장이 딸린 펜트하우스 한 채를 샀습니다. 레위는 세상의 '루저'들을 비웃으며 나야말로 '위너'라고 큰소리 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상하게도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외적인 화려함과 풍요로움이 커져갈 수록 그의 내면은 공허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슬슬 피하고 이제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었습니다. 자기 돈을 보고 떡고물이라도 얻어볼까 하여 접근하는 사람은 많았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나눌 친구 한 사람 없었습니다. 날마다 포도주에 취해 동료 세리들과 낄낄 거렸지만 진정한 기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어느 날 세관의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 속에는 토가 나올 정도로 혐오스러운 속물 같은 얼굴이, 초점을 잃은 공허한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이런 그를 보시고 다가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깊은 이해와 사랑의 눈으로 그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영혼이 허무와 고독의 심연에서 울부짖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은 세리 레위에게 임한 놀라운 죄 사함의 음성이요, 구원의 음성입니다. 이는 그가 과거 어떤 삶을 살았든지 문제 삼지 않으시고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또 그의 인생 목적과 방향을 바로 잡아 주고자 하시는 말씀입니다. 레위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능력과 재능을 돈을 쫓아 가기 위해 썼습니다. 그가 불행하게 된 원인은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더 이상 돈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도록 그를 예수님의 제자로 불러 주셨습니다. 레위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주저하지 않고 결단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습니다. 세리직도 버리고 서랍 속에 짱박아 두었던 돈뭉치도 버렸습니다. 그는 이것으로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여기서 크다는 말이 원어로는 메가라고 합니다. 레위가 예수님을 위해 메가 페스티발을 벌인 것입니다. 받은바 은혜가 너무 커서 그는 자연히 이런 잔치를 베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잔치는 은혜의 잔치요, 구원의 잔치였습니다.


이때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이 찾아 왔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식사는 한 공동체, 한 가족이 되었다는 상징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 받은 레위는 오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가 초대한 친구들은 모두 사회에서 죄인으로 낙인 찍힌 자들이었습니다. 29절의 앉았다는 말은 원래 옆으로 기대어 누운 로마식 만찬의 모습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과 죄인들이 함께 누워서 함께 식사를 나누고 있는 이 모습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31,32)” 레위에게 예수님은 병든 자기를 찾아 오신 의사이시며,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구원자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검사의 눈으로 레위를 판단하고 정죄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사의 눈으로 레위를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레위가 살아온 과거만을 기억했기에 심판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미래에 소망을 두시고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사람들은 메시야가 의인을 불러 상급을 주러 오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메시야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이미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약 성경의 첫 머리에는 마태복음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마태복음에서 산 위에서 들려오는 생명의 소리를 듣습니다. 척박한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마태복음을 읽으며 근심을 잠시 멈추고 이 땅에 임하는 천국의 심장 소리를 듣습니다. 이 마태복음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한 때 세리였던 레위입니다. 세관에 앉은 레위는 돈 밖에 모르는 속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하늘의 소리를 담아낸 성자였습니다. 레위는 사람들을 괴롭혀서 거리로 내쫓았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따뜻함이 담긴 음성과 글로 방황하는 사람들을 살려 냈습니다. 레위가 내뱉는 독설을 듣는 사람들은 그 날 밤에 가위에 눌렸습니다. 그러나 마태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그 마음에 평화를 얻었습니다. 무엇이 세리 레위를 성 마태로 바꾸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입니다. “나를 따르라!”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레위가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과거 세리로서 저지른 모든 악행과 죄악을 용서의 지우개로 다 지워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참고 감당해 주시며 그 위에 예수님 자신의 아름답고 거룩한 형상과 성품을 새겨 넣으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성 마태가 되었습니다.


레위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은 의사이시고 구원자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바리새인의 서기관처럼 겉으로 강한 척, 의로운 척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병들었는지 잘 아십니다. 우리가 어떤 죄인인지 다 아십니다. 우리가 어떤 무너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인지 잘 아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고치시려고, 죄로 더러워진 우리를 자신의 피로 깨끗하게 하시고 거룩한 사람으로 빚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방이 막힌 좁은 세관처럼 자기만의 이기적인 세계 속에 갇혀 있는 우리들의 삶 한 가운데로 찾아 오십니다. 그리고 나를 따라 와서 나와 함께 하자고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의 공동체로 불러 교제하며, 인생의 목적을 바로 잡아 주시고 예수님을 배우도록 “나를 따르라” 초청하고 계십니다. 레위처럼 우리가 이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주님을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말씀으로 죄로 얼룩진 우리 인생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하시는 음성으로 병들어 못 쓰게 된 우리 인생을 치유하십니다. 믿음으로, 순종으로, 우리 삶을 주님께 맡길 때 예수님은 우리 인생을 최고의 아름다운 작품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죄사함의 권세자이시며 영혼의 의사가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아멘.



(2011.5.8 어버이날, 이창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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