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나라가 임하시오며

이창무 2015. 4. 30.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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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  / 누가복음 11:1 - 13

▣ 요절 / 누가복음 11:2 


나라가 임하시오며



과거 냉전 시대에 ‘순교자의 소리’라는 선교회를 만들어 죽음을 무릎 쓰고 공산권 선교를 하셨던 루마니아 태생의 리처드 범브란트(Richard Wurmbrand) 박사란 분이 계십니다. 예전에 목자님들이 ‘하나님의 지하운동’이라는 겉표지가 빨간 이 분의 책을 많이 보셨던 기억이 납니다. 이 분은 루마니아가 공산화된 후 지하에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체포되어 14년 동안 투옥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루마니아 정부가 그의 정신을 황폐하게 하려고 음식에 마약을 집어넣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그에게 하나둘씩 기억을 잃어버리는 증세가 나타났습니다. 어느 날 주기도문을 외우려고 했는데 하나도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이때 그는 ‘예수님께서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시려고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셨는데 내가 어떻게 주기도문을 잊어 버렸다는 말인가?’ 하면서 매우 애통해 하였다고 합니다. 2년 후 당국은 이 정도면 되었다 싶었는지 마약 투약을 중단하였습니다. 그러자 범브란트는 점차 기억을 회복하기 시작해서 마침내 잃어버렸던 주기도문을 다시 기억해내었습니다. 그는 벅찬 감격 속에서 한 구절 한 구절을 읊조리면서 주기도문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이후로 그는 날마다 다시 찾은 주기도문으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이 정성스럽게 기도하면서 감옥 생활의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 중에 주기도문을 못 외우시는 분이 계십니까? 거의 없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을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아무 생각 없이 드린다면, 그 주기도문은 잊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잊어버린 기도나 다름이 없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우리 기도가 더욱 뜨거워지고 간절해 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한 곳에서 기도를 하시고 계셨습니다. 누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 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더욱 빈번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받으실 때(눅3:21), 열 두 제자를 택하여 사도로 세우실 때(눅6:12), 제자들이 신앙 고백을 하기 전에(눅9:18) 기도하셨습니다. 또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고(눅22:41) 십자가 위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눅23:34)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중요한 사건 때만 기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평소에도 습관을 따라 기도하셨습니다.(눅22:39) 예수님은 기도의 사람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기도로 하나님을 의지하시며 사셨습니다. 기도로 새 힘을 얻으셨고 기도로 역사를 섬길 지혜를 구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연약하고 부패한 우리는 기도를 안 하고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보다 더 강하고 더 지혜로운 사람은 기도 안 해도 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특히 하나님 역사를 섬긴다는 목자가 기도 안 하면 그는 한 마디로 간 큰 목자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소홀히 하는 간 큰 목자가 되지 말고, 예수님 닮은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의 주위에서 아우라(Aura)가 느껴졌습니다. 그 얼굴에서는 광채가 났습니다. 이를 본 제자 중 하나가 나아와 청하였습니다. “주님! 요한은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다는데 우리에게도 기도를 좀 가르쳐 주십시오.” 지금까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 좀 하라고 잔소리를 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다만 기도하는 모습만을 보여주셨을 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모습에서 기도에 대한 자극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늘 스피릿이 충만하시고 능력의 역사를 이루시는 비결이 바로 기도에 있구나 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자들은 자발적으로 예수님의 기도를 배우고 싶어졌습니다. 기도를 꾸준히 하려면 기도의 자극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기도의 자극을 받을 수 있을까요?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시면 됩니다. 주위에 없으면 찾아서라도 가까이 하십시오. 무엇보다도 기도의 사람이신 예수님에게서 기도의 자극을 받아야 합니다. 내 동역자를 기도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으십니까? 내 자녀나 양을 기도하는 사람으로 양육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기도 좀 하라고 PUSH만 하지 마시고 당장 골방으로 들어가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한 시간 후에 얼굴에서 광채를 발하면서 나와 보십시오. ‘기도하더니 우리 엄마가 변했어요. 기도하시더니 우리 목자님이 변했어요.’ 이러지 않겠습니까? 때가 되면 기도하는 나의 모습에 자극을 받아 역시 기도하고 그들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2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예수님께서는 이런 날이 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려 오신 듯합니다. 예수님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시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현재 시중에는 나와 있는 기도에 관한 책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진승일 목자님의 조사에 따르면 1,200여권이나 된다고 합니다. 책도 많고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란도 많습니다. 기도할 때 소리를 내야 하나, 조용히 해야 하나? 앉아서 해야 하나, 엎드려 해야 하나? 방언으로 기도해야 하나, 안 해도 되나? 기도 음악이 필요한가, 불필요한가? 등등 서로 상반되는 주장을 펼치는데 다 그럴듯한 이유들이 있어서 헷갈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도의 폼, 억양, 스타일과 방식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으십니다. 이러한 것들은 기도의 본질에 관련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각자 자기 스타일대로 또는 때에 따라서 자유롭게 기도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기도의 형식이 아니라 기도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다른 것보다 기도의 내용이 주기도문의 주제와 순서에 일치하는지 여부에 집중해야 합니다. 주기도문은 모든 기도의 틀이며 기초입니다. 무엇을 기도해야할지 잘 몰라서 고민이 될 때가 있습니다.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주기도문을 뼈대로 해서 각자 자기가 처한 상황에 맞게 거기에 살을 잘 붙여서 기도해 보십시오. 그 기도는 가장 내용이 충실하면서도 올바른 기도라고 보증할 수 있습니다.  


2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아버지여” 예수님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신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당시로서는 이는 혁명에 버금가는 대사건이었습니다. 누가 감히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슬람교에는 하나님을 부르는 95개의 호칭이 있지만 그 중에 아버지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왜냐하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요1:12) 갈라디아서 4:6은 말합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를 수 없어 가슴에 한이 맺혔지만 우리는 감히 아버지로 부를 수 없던 분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지난 주 ‘나는 가수다’에서 1위를 한 인순이는 아버지라는 곡을 불렀습니다.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서로 사랑을 하고 서로 미워도 하고 누구보다 아껴주던 그대가 보고 싶다” 우리 육신의 아버지와의 관계는 때로 사랑을 하고 때로는 미워하기도 하는 참 묘한 관계인 것 같습니다. 누구보다 아껴주던 사랑하는 아버지를 왜 때로 미워하기도 했을까요? 이는 육신의 아버지는 한계가 있고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완전하시고 영존하시는 하늘의 아버지가 계십니다.(사9:6)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며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나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옥한흠 목사님의 ‘안아주심’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안아주심’이라는 제목은 신명기 1장 31절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모압 평지에서 한 모세의 고백에서 가져온 단어입니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신1:31) 가나안 땅을 코앞에 두고 모세는 40년 동안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광야의 모든 위험에서 지켜 주시고 모든 필요를 다 공급해 주시고(출16:35)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출13:22)은 어떤 분일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시다!’ - 하나님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자기 백성들을 안아주신 아버지시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누구든지 이 하나님 아버지의 따뜻한 품에 안기면 평안과 기쁨이 솟아나고 세상이 두렵지 않고 행복합니다. 저는 기도할 때 일단 '아버지' 이렇게 부르고 나면 푸근해지고 따뜻함을 느끼면서 나도 모르게 속에 있던 말들을 다 고하게 됩니다. 직장 상사 앞도 교수님 앞도 아니고 안아주시는 아버지 품 안에 있는데 감출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가 과묵해 보이지만 수다스러울 때가 두 경우 있습니다. 하나는 제 동역자와 대화할 때고 다음은 기도할 때입니다. 사실 동역자에게도 하지 못하던 말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는 다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대화이고 사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기도할 때 우리는 있는 모습 그대로 마치 어린 아이처럼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 맨 처음에 무엇을 놓고 기도하십니까? 대개 우리는 당장 시급한 자기 문제부터 꺼내 놓곤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장 먼저 무엇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름은 명예와 영광을 대표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먼저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자기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기도는 다른 종교에도 다 있고, 심지어 불신자도 다급할 때는 기도를 합니다. 자기를 위한 기도도 꼭 필요하지만 오직 그런 기도만 한다면 그 기도는 본능에 따른 기도, 미성숙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기도는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으로서 합당한 대접을 받으시는 것,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과 존귀와 찬송을 받으시는 것, 이것이 모든 믿는 자의 최우선적인 기도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것을 두고 만 볼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다른 일은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가슴에서 열불이 나야 정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해와 달과 바다와 같은 피조물들은 아주 성실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있습니다.(시19:1) 그러나 인간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제쳐 놓고 우상 숭배를 하기도 하고 개독교니 뭐니 하면서 대놓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신자라는 사람들마저도 신자다운 거룩함을 보여주지 못하고 추하고 냄새 나는 모습을 보여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현실을 보며 우리는 애통히 여기며 “하나님 아버지,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길 기도합니다.”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사야 6장을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이신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옆에서 섬기던 스랍들은 날개가 여섯 개가 있었는데,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고, 그 둘로는 냄새나는 발을 가리고 그 둘로 날개 짓을 하면서 창화하였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6:3) 히브리어에서 두 번 반복하는 것은 최상급을 나타냅니다. “진실로, 진실로” 이렇게 반복해서 말하면 최고로 진실을 다하여 말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스랍들이 세 번 반복해서 거룩하다고 외친 것은 하나님은 비교할 대상이 없는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잠시라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고 이 사무엘 선교사님은 미국이 너무 죄악 되어서 이들에게 거룩이라는 말을 심기 위해 - Holy holy holy Lord, God Almighty(새찬송가 8장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 - 찬송을 모임 때마다 불렀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 안의 죄와 세상 죄와 싸워야겠습니다. 이 시간 이후로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과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교회에 대해 함부로 하는 모든 생각과 말,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던 모든 말을 버리기를 기도합니다. 다만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두 번째 기도 제목은 “나라가 임하옵시며”입니다. 여기서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 즉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첫 마디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막1:15)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이 가슴에 품으신 가장 뜨거운 열망이고 비전이었습니다. 반면 제자들의 비전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었습니다.(행1:6) 로마의 압제에 동포들이 날마다 신음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스라엘 독립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도 대한민국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나라가 평화 통일을 이루고 공의가 바로 서는 나라, 모두가 골고루 잘 사는 나라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갑자기 다시 뽑게 된 서울 시장 선거부터 내년 국회의원 선거, 대통령 선거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지도자가 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보다 더 앞세워야 할 기도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입니다. 이 세상은 어두움의 권세 아래에 놓여 있습니다.(엡6:12) 세상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짓만 골라서 하고 있습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성은 오히려 더 타락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밤늦게까지 아이들끼리 쏘다니며 놀러 다녔는데 요즘은 무서워서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질병의 공포, 죽음의 공포는 여전히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세상 나라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그 잘 살던 미국도 얼마 전 국가 부도 위기를 겪었고 국가 신용 등급이 강등되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만이 대안이고 희망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 나라가 임하면 죄가 사라지고 상함이나 해됨도 없으며(사11:9), 영원히 사망이 없고 생명이 왕노릇하게 될 것입니다.(계20:6)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속히 임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전초기지인 이 땅의 교회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41년까지 십만 명의 선교사가 파송되고 회교권과 북한 캠퍼스에도 복음이 들어가 하나님 나라가 온 세상에 확장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안암골에 100명의 학생 제자가 서고 고대 자매 제자 30명이 서서 고대에서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들이 많이 배출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여기서 양식이란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 즉 먹을 음식, 입을 옷, 거할 집, 의식주와 관계된 것들이 다 포함됩니다. 어떤 사람은 직장을 얻어야 문제가 있고 어떤 사람은 치솟아 버린 전세보증금을 마련해야 하는 문제가 있고 어떤 사람은 자녀 학원비를 감당해야 하는 문제가 있고, 사람들에게는 각자 다 나름대로의 일용할 양식 문제가 있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우리가 기도하기를 주님께서 원하십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은 가장 선한 방법으로 가장 적절한 때에 우리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런 체험을 통해서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우리가 일용직 근로자도 아닌데 날마다 일용할 것을 구하라고 하셨을까요? 기왕이면 일 년 동안 먹을 양식을 주시던지 적어도 월용(月用)할 양식을 주시면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텐데 왜 하루치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을까요? 이는 우리에게 쌓아 놓은 물질이 있으면 눈에 보이는 그 물질을 의지하려는 속성이 있다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장래를 걱정하며 그 대비책으로 부동산과 보험, 증권으로 믿을 구석을 만들어 놓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주기도문에 담긴 속뜻은 자녀인 우리가 눈에 보이는 물질보다 우리의 공급자시며 우리를 친히 입히시고 먹이시는 아버지를 믿고 살라는 뜻입니다. 나아가서 먹고 사는 문제에 얽매인 삶을 살기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도록 하심입니다.(마6:33) 이해인 수녀의 가난한 새의 기도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꼭 필요한 만큼만 먹고 필요한 만큼 둥지를 펴는 새처럼 당신의 하늘을 날게 해 주옵소서” 필요 이상을 잔뜩 먹어 치운 탐욕스러운 새는 무거워 하늘을 날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지도 적지도 않게 필요한 만큼 때에 따라 알맞게 양식을 공급해 주십니다. 우리가 이를 믿음으로 또한 감사함으로 받아 이 땅에서 살지만 하늘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4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사람이 육의 필요를 만족시킨다고 해서 끝이 아닙니다. 우리 영혼은 죄 사함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목욕을 했지만 발은 씻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13:10) 이 말씀은 우리가 이미 죄 사함을 받아 구원을 받았지만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나아와 죄 사함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지 못하면 우리는 죄의식과 수치심으로 고통하며 하나님과의 화평한 관계에서 오는 축복을 마음껏 누릴 수 없습니다. 죄는 채무와 같아서 탕감을 받지 못하면 계속해서 눌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이 빚을 탕감 받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 채무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 사함 간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에 대한 용서가 선행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를 얼핏 생각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한 용서를 조건으로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분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셨다는 사실과 어긋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는 우리의 용서가 죄 사함의 조건이라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의 용서라는 열매로 맺히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주님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낳는 피의 악순환이 판치는 세상 속에서 당신의 자녀들인 용서가 또 다른 용서를 낳는 선순환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간절하신 소원을 안다면 복수심과 원한을 품은 채로 하나님께 나아가 감히 어떻게 내 죄만 사함 받게 해 달라고 청할 수가 있겠습니까?(마5:24)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가 나의 내면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능력이 된다는 사실을 말로만이 아닌 우리 삶으로 입증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4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중간이나 기말 시험 기간에 간절해지는 기도 제목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시험은 테스트가 아니라 사탄에게서 오는 죄의 유혹(Temptation)을 말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탄이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돌아다닌다고 하였습니다.(벧전5:8) 우리가 허점을 보이는 순간 사탄은 바로 공격해 넘어뜨리려 할 것입니다. 세상은 곳곳에 지뢰가 묻혀 있는 지뢰밭과 같습니다. 인터넷을 열면 온갖 음란 사이트에 클릭 한 번만으로 손쉽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영화와 드라마는 온통 연애와 불륜 이야기로 넘쳐 납니다. 서점에 가면 인본적인 책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습니다. 사채업자, 도박업자가 내 핸드폰에 계속 낚시질하는 스팸 문자를 날립니다. 우리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미끼를 물고 한 방에 훅 갈지도 모릅니다. 시험을 이기기에는 우리는 너무 어리석고 연약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탄 마귀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우리는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마26:41) 기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지켜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은 말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 시험 많은 세상에서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돌보고 지켜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의 내용을 가르쳐 주신 후에 계속해서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에게 밤중에 여행하던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 친구는 여행 중 제대로 먹지 못하여 기진맥진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에게는 아무런 음식도 없었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이웃에 있는 자신의 친구 집에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초인종을 누르고 친구여 떡 세덩이만 빌려주게 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집안에 있던 그 친구는 ‘나를 제발 괴롭게 하지 말게, 지금 몇 시인 줄이나 아나, 아이들이 나와 침소에 누워있으니 일어나 줄 수가 없네.’라고 대답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간청하는 친구로 인해 그는 일어나서 그가 요구하는 떡 세 덩이를 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간청이란 영어 성경에는 Boldness로 번역되어 있는데 뻔뻔함, 염치없음이란 뜻입니다. 사람들은 누가 와서 뻔뻔하게 들이대는 것을 참 싫어합니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뻔뻔하게 염치 불구 체면 불구의 기도를 드리라고 명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라고 하실까요? 하나님은 취향이 참 독특하신 분일까요? 왜냐하면 염치 불구 체면 불구의 기도가 우리 믿음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소경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큰 소리로 청했습니다.(눅18:38) 주위에서 시끄럽다고 조용히 하라고 하자 더 큰 소리를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기뻐하시고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도 이방 여인이었지만 뻔뻔하게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십시오!’ 라고 간구하자 예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마7:28-29) 하나님은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구요. 부담 갖지 마세요.’ 이런 식의 기도를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체면 예의 격식을 따지지 않고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9절과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여기서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모두 현재형으로 지속적으로 행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계속해서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알아서 다 챙겨 주실 것이니 우리는 굳이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이는 정말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지 않으면 안 주십니다. 기도해야 주십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 것도 받지 못합니다. 왜 그렇게 하실까요? 이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우리를 기도로 동참시키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만 했으면 다 얻을 수 있는 것이었는데 기도를 안 한 바람에 얻지 못한 것이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지금까지는 어찌되었든 이제 앞으로라도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세상에 어떤 아버지가 생선 먹고 싶다고 보채는 자식에게 독사를 갖다 주겠습니까? 계란 먹고 싶다고 애원하는 아이에게 전갈을 주면서 먹으라고 하는 그런 아버지는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악한 부모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어떠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항상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때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이 지연되는가에 대한 간접적인 답변이 얻을 수 있습니다. 응답이 지연되거나 내가 구하지 않았던 다른 것으로 응답되는 것은 그것이 더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르고 뱀이나 전갈을 달라고 했지만 대신 하나님은 생선과 알을 주십니다. 1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우리가 거듭날 때 동시에 가장 좋은 선물인 성령을 주셨습니다.(딛3:5)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내 안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위해 간구해야 합니다.(롬15:13)


미국의 화학자인 프랭클린 로어(Franklin Loehr)라는 사람이 한 실험을 했습니다. 화분 두 개를 놓고 각각 보리를 심었습니다. 한 화분에는 기도하고 다른 화분에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놀랍게도 두 화분은 성장 속도가 서로 달랐습니다. 혹시 우연일까 해서 이후로 5년간 실험을 거듭해 본 결과 기도를 드린 씨앗은 그렇지 않은 씨앗보다 52.7% 더 빠른 성장을 보였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 결과를 정리해서 1969년 식물에 대한 기도의 능력('The Power of Prayer on Plants)이란 책으로 펴냈습니다. 기도가 식물에만 능력을 발휘하겠습니까? 기도는 나라를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키고 양들을 변화시키고 나를 변화시킵니다. 기도는 이 세상을 바꾸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제가 기도에 관해 책을 읽던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한 마디가 있습니다. “기도에 관한 책은 이제 그만 읽고 지금 당장 기도하세요.”  이 말은 정말 기도에 관해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배우고 난 후에는 반드시 기도의 삶이 뒤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기도의 내용과 자세에 대해 배웠습니다. 이후로는 배운 바대로 기도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본을 따라 기도하는 가운데 기도의 사람들로 성장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가 기도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011.8.28., 이창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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