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창무 2017. 3. 26.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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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6 강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 누가복음 4:16-44

요절/ 누가복음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지난 주 우리는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메시아로서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고자 하십니다. 대통령이 직무를 시작하려고 할 때 먼저 취임식에서 취임사부터 발표합니다. 이 취임사 속에는 재임 시에 어떤 일들을 하겠다는 선언이 담겨져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도 이사야서 61장 1, 2절 말씀을 기초로 취임사를 발표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이며 앞으로 무슨 일을 것인가를 선포하였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우리 삶에 이루고자 하시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고향인 나사렛 동네로 가셨습니다. 때는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예배를 드리러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침 이 날 회당 예배의 낭독자와 설교자로 요청을 받았습니다. 본문은 이사야서 61장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두루마리를 쭉 펼치신 후 본문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18절과 19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 말씀은 우연히 선택된 본문인 것 같지만 사실은 섭리 가운데 예수님의 취임사로 준비된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실 일이 무엇인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말씀은 먼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으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왕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실 때 그 머리 위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은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메시아이십니다. 또 성령 충만하신 가운데 마귀에게 받은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 사역의 뚜렷한 특징은 성령의 임재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첫째,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익숙한 소식이 무엇입니까? 집주인이 전세 값을 올리겠다는 소식, 채권자로부터 빚을 빨리 갚으라고 독촉장이 날아왔다는 소식, 내일부터 회사에 나오지 말라는 소식 등등 가난한 자는 슬픈 소식, 마음이 무거운 소식들에 익숙합니다. 심지어 가난한 자는 자녀가 너무 공부를 잘 하거나 예체능에 뛰어난 소질이 보여도 어떻게 뒷바라지할까 싶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이 세상의 불의와 죄악에 노출되어 가장 쉽게 상처를 입는 자들이 가난한 자들입니다. 다른 의지할 곳 하나 없이 오직 하나님 밖에 기댈 것이 없는 자들이 가난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어떤 기쁜 소식입니까? 43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전하실 기쁜 소식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 가운데 임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이며 해됨도 상함도 없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양극화도 없고 갑질도 없고 억울하고 분한 일도 다 사라질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소식만큼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나라는 35년간의 일제 강점기와 6.25 동란을 거치면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폐허 속에서 먹을 것이 없어 구걸하는 거지들이 거리에 넘쳐났었습니다. '보릿고개'라 해서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양식이 다 떨어져 산에 올라가 나무껍질을 벗기거나 풀뿌리를 캐서 먹어야 했습니다. 대학생들도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대학생들은 돈이 없으면 자기 피를 뽑아 팔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가슴 속에는 가난으로 인한 한과 슬픔이 응어리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 결과 기쁨을 모르던 사람들에게 기쁨이 생겼습니다. 희망이 없던 사람들에게 희망이 생겼습니다. 운명에 울던 사람들이 인생을 개척하고 도전하는 사람들로 변화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역사, 우리 모임이 지나 온 발자취가 바로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 복음,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되어 온 역사입니다. 이 나라와 민족을 긍휼히 여기시고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이 땅과 이 땅 캠퍼스 가운데 전파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둘째, 포로된 자,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포로는 전쟁에서 패배하여 적군에게 사로잡힌 자 또는 빚을 갚지 못하여 노예가 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포로된 자는 이런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포로된 자, 악령에게 사로잡힌 자들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이런 모습을 중독이라는 단어로 많이들 표현합니다. 무언가에 중독된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게임에 중독되면 당장 내일 시험이 있어도 오늘 밤새도록 게임을 하게 됩니다. 이건 아닌데,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계속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간음이 죄요 발각되면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죄가 주는 달콤한 쾌락을 도저히 끊을 수 없었습니다. 상습적으로 죄를 짓다가 결국 돌에 맞아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는 죄를 지를 자유는 있지만 죄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날 자유는 없습니다. 죄를 범한 후에는 죄의 짐에 눌려 신음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죄의 종노릇하는 자들을 해방시켜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하시며 사죄와 해방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또한 죄에 중독된 삶에서 벗어나도록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방향을 주셨습니다. 중독하면 생각나는 대학교 때 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는 아주 지독한 골초여서 하루 종일 줄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습니다. 여름수양회 때도 강의가 끝나자마자 재빨리 건물 뒤편으로 나가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수양회 때 십자가 말씀에서 큰 은혜를 받고 달라졌습니다. 그 순간 즉시 담배를 끊어버렸습니다. 심지어 그 후로는 담배 냄새를 맡기만 해도 역겨워서 구역질이 난다고 했습니다. 그 친구의 모습을 보며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디 담배뿐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술과 도박, 게임에 중독된 자, 정욕의 노예된 자, 죄에 매인 인생들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셋째,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바디매오를 비롯하여 많은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눈먼 자 중에는 육체적으로 앞을 볼 수 없는 사람 뿐 아니라 영적인 맹인들도 있습니다. 육체적인 눈은 멀쩡하지만 영적인 눈이 멀어서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불릴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었던 영적으로 눈 먼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또 한 명의 대표적인 영적 맹인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 교회를 박멸하고자 했던 무지와 열심으로 똘똘 뭉친 자였습니다. 보이는 것이 없으니까 막 나가던 바울을 아무도 말릴 수 없었습니다. 이런 바울을 예수님께서 직접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그제야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바울은 땅 끝까지 예수님을 전하는 빛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저도 영적인 세계를 전혀 볼 수 없었던 눈먼 자였습니다. 목자님을 변화시켜 무신론자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이상한 헛소리나 하고 다니던 자였습니다. 볼 수 없으니 이리저리 오래 방황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눈먼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말씀으로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영적인 세계를 보고 나니 인생의 목적과 의미와 방향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방황을 그치고 이제는 제가 본 영적 세계의 진리를 증거하고 가르치는 성경 선생으로 살고 있습니다. 저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주시고 저를 빛의 세계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이 전파된다는 것은 어떤 결론적인 의미가 있습니까? 19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은혜의 해란 희년을 가리킵니다. 희년은 칠년마다 오는 안식년이 일곱 번 끝나고 그 다음해인 50년째마다 한 번씩 돌아옵니다. 희년이 되면 땅이 원래의 주인에게 다 돌아갑니다. 채무자들의 모든 빚이 탕감을 받습니다. 가난 때문에 노예가 되었던 종들이 풀려나서 자유민이 됩니다. 희년은 빚진 자가 탕감 받고 포로된 자들이 자유를 누리고 눈먼 자들이 다시 보게 되고 억눌린 자들이 해방되는 날입니다. 그런데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이 희년 제도가 안타깝게도 구약시대 실제적으로 시행되었다는 기록이 전무합니다. 인간의 부패한 마음 때문에 사람들의 욕심 때문에 희년법은 실현되지 못한 미완성의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면 희년은 언제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오직 약속된 메시아가 오셔서 새 날을 여실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선지자 이사야의 희망이었고 이스라엘과 온 인류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2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책을 덮자 회당에 있는 자들이 주목하였습니다. 청중들이 과연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가? 주목하는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전혀 의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이는 곧 희년에 관한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정녕 듣는 이들이 경악할만한 놀라운 선포를 하셨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은 메시아가 이미 오셨다는 말이 됩니다. 그럼 어디에 오셨습니까? 바로 그 시간 그 자리에 메시아가 이미 와 계셨습니다. 이 말씀을 선포하고 계신 예수님이 희년을 성취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메시아였습니다. 


희년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주의 은혜의 해'에서 은혜라는 말은 원어로 보면 받으실 만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희년의 핵심은 모든 만물이 다 제자리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다시 받으실만한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포로 되고 눈이 멀고 눌린 상태는 인간의 본래 모습이 아닙니다. 이 상태는 인간도 불행하고 하나님도 기쁘게 받으실 수 없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태의 인간을 본래의 자유롭고 건강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시키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시인과 촌장이란 가수가 부른 노래 중에 풍경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아주 단순한 가사가 반복됩니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예수님은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셨던 그 조화롭고 아름답고 풍요한 상태로 회복시키실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들 마음속에는 인간이 제자리를 벗어났다. 탈선했다. 망가졌다는 의식이 있습니다. 누구나 본래의 행복하고 자유롭고 조화롭고 아름다운 낙원에 대한 희미한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결코 이 세상에 만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제자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갈망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이 갈망을 품고 이상사회를 건설해 보고자 다양한 시도들을 해 보았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철인이 통치하는 이상 국가를 논했고 공자는 인격을 수양한 군자가 다스리는 나라를 꿈꾸었습니다. 공산주의는 모두가 평등하게 골고루 자원을 나누어 갖는 이상 사회를 이 땅 가운데 실현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다 실패했습니다. 아무리 시스템을 그럴듯하게 바꾸어 놓아도 그 시스템을 운영하는 사람이 바뀌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은 사람이 어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인간 스스로 이상 사회를 만들려는 시도가 오히려 더 큰 비극과 더 큰 억압을 낳은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그러면 누가 이 세상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천년에 이 땅에 오셔서 이 일을 시작하셨고 현재 진행 중이고 앞으로 다시 오셔서 반드시 완성하실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서도 예수님께서 이미 회복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 증거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너무 많이 망가져서 눈에 띌 정도로 회복되려면 시간이 좀 더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회복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온전히 회복되고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가 없는 우리 인생들에게 복음을 통해 참된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구원의 주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자유와 해방을 맛보고 이를 전파하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다 은혜의 혜를 체험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은혜가 임했다 하더라도 모두가 이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은혜의 해가 임하더라도 은혜를 체험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여기에는 상반된 두 가지 반응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은혜로운 말씀임을 알고 놀라는 반응이 있습니다. 그러면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러나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보아 온 예수님이 무슨 대단한 사람일 수 있겠냐고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조건을 떠올리며 마음이 열리는 듯 하다가 이내 닫히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고향사람들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있는지를 다 아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속으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는 하는 당시의 속담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이 속담의 의미는 만약 정말 의사라면 자기 병부터 고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향해 다른 동네에서만 기적을 행하지 말고 고향에서 더 큰 기적을 한번 행해 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에 호기심이 있었을 뿐이지 예수님을 존경하지 않았고 영접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모습은 처음 보는 모습이 아닙니다. 과거에도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었습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선지자인 엘리야와 엘리사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엘리야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기근이 심했습니다. 이스라엘에도 기근으로 고통 받는 과부들이 많았지만 엘리야는 시돈 땅 사렙다 과부 한 사람에게 갔습니다. 엘리사 시대 이스라엘에도 나병환자가 많았지만 치유를 받은 사람은 수리아 장군이었던 나아만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사례는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함을 고발하면서 주의 은혜가 완악한 이스라엘을 넘어 이방으로 흘러가는 예를 제시해 준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현재 나사렛 사람들이 그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완악하다는 점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래서 은혜가 고향 밖 사람들에게 흘러갈 수밖에 없음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고향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그들은 크게 화를 냈습니다. 화를 낸 것을 보면 그들은 은유적인 예수님의 말씀을 아주 정확히 이해했습니다. 알아들었으면 자신의 완악함을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기는커녕 도리어 예수님을 낭떠러지에서 떨어뜨려 죽이고자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 그냥 지나서 가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지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때가 아직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는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주의 은혜의 해가 임했지만 그들 스스로 그 은혜를 걷어차 버렸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가 은혜의 혜를 체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무엇보다 마음이 겸손하고 은혜에 대한 갈급함이 있어야 합니다. 똑같은 말씀으로 일대일 성경 공부를 하고 주일 메시지를 들어도 각 사람에게 임하는 은혜는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의 은혜를 충만히 덧입고 얼굴이 환해지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오히려 얼굴이 더 딱딱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디에서 이런 차이가 생깁니까? 결국 마음의 문제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어디 얼마나 잘 전하나 보자 이런 마음으로는 은혜를 받기 어렵습니다. 누구에게든지 겸손하게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은혜를 받습니다. 금요미팅 때 학생 형제, 자매님들이 발표하는 소감을 귀 기울여 듣다 보면 정말 놀라운 통찰과 깨달음을 줄 때가 많습니다. 백 다윗 형제님이 어눌한 한국어로 발표하는 소감도 잘 들어보면 본문을 한 마디로 요약한 묵직한 감동이 있습니다. 또한 갈급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단 한 방울이라도 땅에 흘려버리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현실 문제 해결에만 급급하고 주님이 주실 영적인 복과 은혜에는 무관심할 때 은혜 받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누구 손해입니까? 결국 은혜를 못 받은 자기 손해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주시려했던 은혜를 내가 튕겨버렸기 때문에 그 은혜가 다른 사람에게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주의 은혜의 해는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 남의 이야기가 됩니다. 은혜의 통로는 내 주위에 항상 있습니다. 좋은 프로그램이 없고 내게 딱 맞는 콘텐츠가 없어서 은혜를 못 받는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그 전에 내 마음이 얼마나 겸손하고 은혜에 갈급해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겸손하고 갈급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 주의 은혜를 충만히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1절부터 41절까지는 이사야서 61장 말씀의 실제적인 성취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과정을 통해서 세 가지 측면에서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셨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말씀의 권위를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안식일에 가르치실 때 듣는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회당에서는 유대교 랍비들이 강론을 했습니다. 그런데 랍비들은 대개 과거의 유명한 스승의 권위에 기대어 강론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누구의 권위도 의지하지 않으시고 오직 자신의 권위로 가르치셨습니다. 누구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그 권위에 압도되었습니다. 이런 권위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예수님이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저자가 예수님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저자 직강의 권위가 있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는 권위를 나타내셨습니다. 마침 회당에 와 있던 사람들 중에 귀신들린 자가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어 잠잠하라 나오라 명령하셨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의 명령이 떨어지자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까지 자기가 사로잡고 있던 사람들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의 세계에 있어서도 막강한 권위가 있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병을 쫓아내는 권위를 나타나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는데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셔서 열병을 향해 꾸짖으셨습니다. 병을 꾸짖는다는 표현이 좀 어색합니다. 그런데 이는 예수님의 권위와 권세를 나타냅니다. 보통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면 병이 회복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곧 병이 떠나고 시몬의 장모는 수종을 들 정도로 온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질병마저도 예수님의 권위 앞에서 즉시 물러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건 뿐 아니라 또 예수님은 갈릴리 여러 지역을 다니시며 말씀을 가르치시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런 일들은 당시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해야 할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외적인 권위는 있었지만 내적인 권위가 없었고, 실제적인 권세도 없었습니다. 그들에 의해서 변화되었다는 사람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겉으로 보기에 외적인 권위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적인 권위와 실제적인 권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은 마음 깊은 곳을 찔러 쪼개는 듯 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로 귀신이 도망가고 병마가 쫓겨 갔습니다. 사람들이 변화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예수님에 대한 입소문이 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누룩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니까 예수님의 권위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당연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몸된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복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예수님의 권위와 권세가 이 시대 가운데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사도들 가운데서도 나타났고 교회사 가운데 예수님 중심의 복음적인 교회를 통해서도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복음 역사를 섬기는 힘은 예수님의 권위와 권세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한 목자님이 우리 모임에는 두 가지 무기가 있는데 하나는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그 말씀에 의해 변화된 사람들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권위와 권세가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 방식입니다. 이번 동아리 박람회에서 우리 솜사탕과 풍선 터트리기가 크게 히트했습니다. 전도를 위해 이런 아이디어와 노력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하지만 솜사탕과 풍선만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말씀의 권세가 살아 있고, 말씀에 의해 변화된 사람들은 있을 때 사람들은 놀라고 우리를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와 권세가 우리를 통해 드러날 수 있다면 아무리 시대가 어려워도 우리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권세를 힘입어 이 시대 가운데 희년을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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