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이창무 2017. 4. 9.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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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8 강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말씀/ 누가복음 5:27-32

요절/ 누가복음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존 브록만이 지은 '지난 2천년 동안의 위대한 발명'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인쇄술, 전기, 비행기, 컴퓨터, 인터넷 등 인류가 발명한 121가지의 위대한 발명품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단한 발명품 들 중에 의외의 물건이 하나 끼어 있습니다. 바로 지우개입니다. "그깟 지우개가 뭐?"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세상에 지우개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도,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같은 위대한 음악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실수를 해도 지울 수가 있었기 때문에 위대한 작품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 인생도 실수와 허물투성이입니다. 죄로 얼룩진 인생입니다. 만약 우리가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어도 우리 죄와 허물을 지울 수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추악한 과거를 깨끗이 지우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의 이름은 레위입니다. 자기 힘으로 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용서의 지우개로 그의 죄악을 다 없애주시고 더 나아가 제자 삼으심으로 새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오늘 말씀을 통해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자비하신 영적 의사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만남을 통해서 우리 삶이 하나님의 아름답고 위대한 작품으로 빚어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였습니다.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레위는 유대식 이름입니다. 그는 마태라는 로마식 이름도 갖고 있었습니다. 먼저 레위라는 이름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레위라는 이름이 어디서 왔을까요? 이스라엘 12지파 중에 레위 지파가 있지 않습니까? 본문의 레위는 틀림없이 레위 지파에 속한 가문에서 태어났을 것입니다. 레위 지파는 좀 특별한 지파입니다. 다른 지파와 달리 농사지을 땅이 따로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레위 사람들은 오직 제사장 직무와 성전 관리를 맡아서 수행하도록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이 지파 사람들은 대대로 성직자 집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위의 부모님들은 레위가 나중에 성장해서 훌륭한 성직자가 되라고 레위란 이름을 붙여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레위는 자라서 성직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세리가 되었습니다. 세리는 어떤 직업입니까? 영어로 보면 세리는 Tax Collector입니다. 곧 세금을 거두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레위는 지금으로 치면 동대문 세무서의 세무 공무원 쯤 되는 사람이로구나!’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시 세리와 지금의 세무 공무원과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시오노 나나미가 지은 '로마인 이야기'라는 책에 보면 로마의 세금 징수 제도에 대해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이 당시 세리는 공무원이 아니라 자영업자였습니다. 로마는 일정 지역에서 일 년 간 거두어들일 세금에 대해서 경매를 붙였습니다. 당연히 가장 높은 금액을 걷겠다고 한 세리가 징수권을 따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세리는 세금을 거둬서 로마에게 약속한 금액을 납부하고 나머지는 자기가 차지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가 아니겠습니까? 세리들은 징수권을 따내려고 무리하게 높은 금액으로 입찰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한 세액을 납부한 후 남는 자기 몫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악착같이 세금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우리나라 조선 후기에도 '백골징포, 황구첨정' 같은 세정의 문란이 있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에서도 더하면 더했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세리는 사채업자와 비슷합니다. 사채업자들 중에는 심지어 채무자에게 신체 포기 각서를 받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세리도 그에 못지않게 악랄하게 세금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사람들은 세리라면 치를 떨었습니다. 유대 속담 중에 '산 속에는 이리가 살고 산 아래에는 세리가 산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더군다나 이렇게 거둔 세금을 자기 민족을 식민 통치하고 있는 로마 정부에 모두 다 갖다 바치니 이스라엘 사람들 눈에 세리가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매국노, 민족 반역자 아니겠습니까? 세리는 사람들로부터 천하에 상종 못할 인간 말종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친구들도 하나 둘 다 떠나갔습니다. 세리의 자녀들은 학교에 가서 우리 아버지가 세리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레위는 이런 세리가 되었을까요?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이토록 철저하게 자기 이름을 배신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던 당시 대부분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루에 두 끼를 먹기도 빠듯할 정도로 만성적인 빈곤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대대로 성직을 물려받은 레위 집안의 형편도 상당히 어려웠을 것입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레위는 어느 날 짝꿍에게 방과 후에 같이 놀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짝꿍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엄마가 임대아파트에 사는 너하고는 같이 놀지 말래" 이 한 마디가 어린 레위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었습니다. 학원비가 없어서 혼자 공부하며 대입을 준비했습니다. 그래도 머리 좋은 레위는 열심히 공부해서 민족 예루살렘 대학교 경영학과에 당당히 합격했습니다. 하지만 대학의 낭만과 자유를 누릴 시간은 아주 잠깐 뿐이었습니다. 당장 살인적인 대학 등록금을 낼 길이 없어서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했습니다. 동시에 두 세 개의 과외를 하고 과외가 잘리면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도 변변한 직업을 얻지 못하고 놀고 있는 백수 형들과 백조 누나들을 보면서 나는 절대로 저렇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절대 아버지처럼 가난하게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찌질하지 않으려면 돈이든 권력이든 하나를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차피 권력은 로마인들이 다 쥐고 있으니 가능성이 별로 없었습니다. 고민 끝에 결국 레위는 돈을 택했습니다. 고수입 직종인 세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물론 레위도 세리가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는 직업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정과 존경이 밥을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개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쓰면 된다고 합리화했습니다. 엉덩이에 곰팡이가 피도록 열심히 공부해 드디어 세리 고시에 합격했습니다. 견습 세리 시절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무자비하게 세금을 뜯어가는 선배 세리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레위에게 양심의 가책과 마음의 갈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돈 버는 재미, 돈 쓰는 맛을 알아가면서 그런 갈등은 서서히 다 사라져 갔습니다. 레위는 어느새 동료 세리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악랄한 중견 세리가 변모해 있었습니다. 뛰어난 실적으로 로마 총독이 수여하는 올해의 세리상도 받았습니다. 바라던 대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우선 로마에서 직수입한 최신형 마차를 한 대 뽑았습니다. 수양장이 딸린 펜트하우스 와 요단강변 옆에 조용한 별장 하나도 마련했습니다. 세상의 루저들을 비웃으며 나야말로 위너라고 큰 소리 쳤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레위는 행복하지가 않았습니다. 외적인 화려함과 풍요로움이 커져갈수록 그의 내면은 더욱 공허해져 갔습니다. 자기 돈을 보고 떡고물이라도 얻을까 하여 접근하는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하지만 정말 마음을 나눌만한 친구 한 사람 없었습니다. 레위란 이름을 주셨던 아버지는 네가 주는 더러운 돈을 안 받겠다 하시며 의절하신지 오래되었습니다. 레위는 외롭고 비참했습니다. 자기 삶에 정말 중요한 그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가능하다면 이런 삶에서 어서 탈출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탈출구는 보이질 않았습니다. 세리가 앉아 있던 한 평 남짓한 세관은 이제 그에게 마치 창살 없는 감옥처럼 느껴졌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보면 세리는 차별과 냉대를 받는 소수자(Minority)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요? 현대 사회에서는 오히려 세리가 다수(Majority)가 된 것 같지 않습니까? 돌잔치를 할 때 돌잡이라는 것을 합니다. 돌잡이란 잔칫상 위에 붓, 실, 돈, 활 등을 놓아두고 아이가 무엇을 집는가를 보고 미래를 점치는 의식입니다. 요즘 대다수 부모님들은 아이가 붓을 잡으면 매우 실망합니다. 붓은 학자나 문필가가 된다는 뜻인데 이런 직업으로는 부자 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 아이가 돈을 잡으면 뛸 듯이 기뻐합니다. 장차 자라서 큰 부자가 되고 그 덕에 부모가 호강하게 될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대학교에서도 돈을 잘 벌 수 있을 것 같은 학과로 사람들이 몰립니다. 반면 많은 대학에서 철학과, 독문학과, 불문과 같은 인문학과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돈이 안 되는 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가치를 평가할 때 요즘은 주로 그 사람이 가진 소유물로 평가합니다. 연봉은 얼마를 받고 있는가?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는가? 무슨 종류의 차를 타고 다니는가? 등등이 기준이 되었습니다. 우리 시대에 세리 레위가 산다면 멸시와 천대를 받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레위는 대학생들의 롤모델이 되고 최고의 신랑감으로 인기가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너도 나도 세리처럼 되려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 길이 행복의 길일까요? 무슨 수를 쓰든 돈 많이 벌어 부자가 되면 만사 오케이일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 삶에 핵심적인 것들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진정한 우정과 사랑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존경을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 시대 많은 사람들이 돈을 얻는 대신 관계를 잃어버렸습니다. 소유를 얻는 대신 공동체를 잃어버렸습니다. 이해타산을 계산하는 능력은 발달했지만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은 잃어버렸습니다. 경쟁에서 이기는 법은 배웠지만 사랑하고 섬기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순간의 쾌락은 얻었지만 인생의 참된 의미와 목적은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삶이 허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가슴 한 가운데 무엇으로도 메꾸어지지 않는 큰 구멍이 나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안다 하여도 달리 대안이 없습니다. 꾸역꾸역 계속 이렇게 사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어 보입니다. 여기서 누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을 다시 되찾아 줄 수 있을까요? 누가 관계와 공동체를 회복시켜 줄 수 있습니까? 누가 우리에게 참된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제시해 줄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을 찾기 위해 27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이날도 레위는 세관에 출근해서 여느 날처럼 초점을 잃은 몽롱한 눈으로 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레위를 힐끗 쳐다보며 마음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저 세리 놈이 벼락 맞아 죽지도 않고 오늘도 세관에 앉아 있구먼.” 그 때 레위는 자기에게 다가오는 한 남자를 보았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뵙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그분이었습니다. 당대 누구보다도 권세 있는 말씀을 전하시고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는 선지자로 알려진 그분이었습니다. 레위도 보고 싶었지만 감히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던 그분께서 자신을 향해 오실 때 레위의 가슴은 쿵쾅쿵쾅 빠르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레위의 눈과 예수님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예수님의 눈은 허무와 고독의 심연에서 울부짖고 있는 레위의 영혼을 샅샅이 다 들여다보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레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순간 레위는 자기 귀를 의심했습니다. '세상에 도대체 나 같은 자를 제자로 삼으려는 선생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레위는 눈빛으로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 제가 제자가 되면 선생님 명성에 큰 먹칠을 하게 됩니다. 선생님의 다른 제자들도 다 싫어할 것입니다. 암만 봐도 저는 선생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눈빛으로 레위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레위야! 아무 걱정 하지 마라. 너는 그저 나만 믿고 따라오기만 하면 된단다. 나는 이미 너의 지난 모든 죄들을 다 용서했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결코 너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너를 반드시 변화시켜 새 사람이 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레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세리직을 미련 없이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레위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29절을 보십시오.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레위는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꿈인지 생시인지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이 예수님을 소개해 주고자 알던 사람들을 다 불렀습니다. 김세리, 최세리, 박세리 등등 온갖 세리들이 다 모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단골 룸살롱의 호스티스도 왔고 팔뚝에 ‘차카게 살자’라고 문신이 새겨진 조폭 아저씨도 왔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친밀한 식탁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그들은 회개의 눈물을 떨구기도 하고 용서받은 기쁨으로 크게 웃기도 했습니다. 레위의 집에서 죄인들이 울고 웃는 천국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런데 이 자리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고 있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내 제자들에게 노골적으로 따져 물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옛말에 근묵자흑 근주자적이라 했거늘 이러다 같이 죄에 물들면 어찌하려느냐?" 어떻습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바리새인들의 말도 나름 일리가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들의 말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는 무지에서 나온 오해였습니다. 31절과 32절의 예수님의 대답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보통 사람이 병든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병이 옮지 않도록 가까이 가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의사는 어떻게 합니까? 의사는 병든 자에게 가까이 갑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의사에게는 병든 자를 치유할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고 회복하실 수 있는 영적의사이십니다. 예수님에게는 치유의 능력, 회복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들을 멀리 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죄인들을 먼저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죄인을 불러 회개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이때 용서의 지우개로 죄를 깨끗하게 다 없애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병들대로 병든 내면을 고쳐주시기 위해 24시간 365일 함께 하자고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나를 따르라'하시는 제자로의 부르심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 서기관보다 훨씬 의로운 분이시지만, 검사처럼 판단하고 정죄하려고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의사처럼 병든 사람, 죄인들을 불러서 치료하고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자신이 어떤 오해를 받던, 어떤 희생을 치르던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병든 자를 위해 오신 예수님,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이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병들고 추하게 된 우리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되십니다.


이후 레위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요? 신약 성경의 첫 머리에 마태복음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척박한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마태복음을 읽으며 이 땅에 임하는 천국의 심장 소리를 듣습니다. 이 마태복음을 기록한 사람이 한 때 세리였던 레위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이 한 마디와 레위의 즉각적인 순종이 그의 삶을 놀랍도록 아름답게 변화시켰습니다. 돈만 알던 추한 삶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가장 고상한 삶으로 변했습니다. 고독에 찌든 인생에서 친밀한 사귐인 풍성한 삶으로 변했습니다. 세관에 앉아 비자금 장부를 기록하던 더러운 손이 마태복음을 기록하는 거룩한 손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돈을 뜯어내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던 발이 사람을 살리는 복음을 전하려고 땅 끝까지 향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레위의 모든 죄를 용서의 지우개로 다 지우시고 그 자리에 자신의 아름답고 거룩한 형상을 새겨 넣으셨습니다. 그때 죄인 세리 레위가 인류의 스승 성 마태가 되었습니다.


레위 뿐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예수님은 영적인 의사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깊이 병들었는지 잘 아십니다. 우리가 어떤 죄인인지를 다 아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죄로 더러워진 우리를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배로운 피로 깨끗하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병든 우리를 고치시고 온전하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방이 꽉 막힌 세관처럼 자기만의 이기적인 세계 속에 갇혀 있는 우리들 삶 한 가운데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나를 따라오라’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의 공동체로 불러내어 교제하시며 인생의 목적을 바로 잡아 주시고 예수님을 배우도록 ‘나를 따르라’ 초청하고 계십니다. 레위처럼 우리가 이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자비로운 손길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겨 드릴 때 우리 삶은 하나님의 아름답고 위대한 작품이 되리라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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