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사도행전 제 11 장
이방의 빛
말씀:사도행전 13:1-52
요절:사도행전 13:47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얼마 전 문 닫는 교회의 12가지 특징이라는 기사를 우연히 본 적이 있습니다. 너무 길어서 다 말씀드릴 수 없고 그 중에서 1,2,3 위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문 닫는 교회의 특징 3위는 '안 된다는 핑계만 된다'였습니다. 2위는 '기도하지 않는다'였습니다. 대망의 1위는 '전도하지 않는다'였습니다. 순위는 나누어져 있지만 사실 서로 다 일맥상통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합니다. 전도하지 않으니까 기도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전도의 열정이 타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안 되는 이유를 찾아서 핑계를 삼아 자기를 정당화하게 됩니다. 유럽의 교회가 왜 죽어가고 있는가 분석해 보니 교회가 종교 다원주의에 물들어 전도하지 않고, 합리주의에 갇혀서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정확하게 이 반대로 하면 될 것입니다. 될 수 있다고 믿고 간절히 기도하고 무엇보다 힘써 전도할 때 그런 교회는 성령께서 쓰시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바로 이렇게 믿음으로 도전하고 기도하고 전도와 선교에 힘쓴 교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I부는 1-12장까지인데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개척 역사입니다. 이 역사의 중심인물은 사도 베드로이고 전도의 대상은 유대인이었습니다. II부는 13-28장까지로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와 유럽과 로마 개척 역사에 관한 기록입니다. 이 역사의 중심 인물은 사도 바울이요, 전도의 대상은 헬라인들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바울의 세 차례에 걸친 전도 여행과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잡혀가서 복음을 증언한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3장과 14장은 제 일 차 전도여행에 관한 기록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은 13장 말씀을 통해 바나바와 바울이 어떻게 첫 선교사로 안디옥교회에서 파송 받게 되었는지 그리고 바울 일행이 구브로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한 복음 전파 사역을 살펴 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안디옥 교회의 선교 신앙과 사도 바울의 개척 스피릿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 말씀에서 안디옥 교회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러면 말씀 중심, 그리스도 중심으로 모범적으로 성장한 안디옥 교회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1절을 보십시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예언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입니다. 교사는 성경 말씀을 풀어 가르치는 성경 선생을 가리킵니다. 안디옥 교회에는 다른 교회에는 한 두 명 있을까 말까한 뛰어난 말씀의 종들이 무려 다섯이나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큰 복을 받은 교회입니까? 또한 그 다섯 명의 구성이 다양하다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파송을 받아 온 사도로서 심성이 착하고 위로와 격려를 잘 하는 은사가 있었습니다. 시므온은 니게르라고 하는 별명으로 불린 것으로 볼 때 흑인이었습니다. 루기오는 현재 북아프리카 리비아 지역인 구레네에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마나엔은 분봉 왕 헤롯과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습니다. 이를 볼때 그는 사회적 신분이 상당히 높은 귀족 출신이었습니다. 사울은 다섯 중 가장 나이는 어렸지만 가장 빼어난 성경 선생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렇게 인종과 출신과 신분이 다양한 말씀의 종들이 합심하여 동역 역사를 이루면서 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갔습니다.
그런데 2절에 보면 이들이 주를 섬겨 금식했다고 하였습니다. 금식하면서까지 기도한 것을 볼 때 교회에 어떤 절박한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문제는 다름 아니라 누구를 선교사로 파송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주님께서 안디옥 교회에게 큰 복을 주셔서 여기까지 성장케 하셨으니 이제는 이 복을 세상을 향해 흘러보내야 할 때가 되었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때 자기 나름대로 결정하지 않고 금식 기도하며 성령의 방향을 구하였습니다. 마침내 성령께서 응답을 주셨습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안디옥 교인들은 응답을 받아서 한 편 기쁘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성령께서 지명하신 바나바와 사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안디옥 교회의 두 기둥과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이 둘을 택하신 것을 볼 때 세계 선교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는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인들은 막상 기둥 뿌리를 뽑아서 세계 선교에 드리고 나서 혹시 안디옥 교회가 폭삭 주저앉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남는 세 사람도 훌륭한 말씀의 종이기는 했지만 과연 두 사도의 빈 자리를 메꿀 수 있을지 단언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방향에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교회는 계속 금식 기도하는 가운데 자기중심성을 극복하고 성령의 방향에 순종하였습니다. 기꺼이 두 사도를 주님께서 세계 선교에 쓰실 수 있도록 내어 드리고 안수하여 파송하였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사도행전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게 되겠지만 이후로 안디옥 교회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더욱 견고하게 세워져서 1 세기 당시 세계 선교의 베이스 캠프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였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의 안디옥 교회를 보면서 우리 안암 센터와 매우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센타는 안디옥 교회처럼 말씀의 종들을 많이 배출한 곳입니다. 개척자이신 양마가 선교사님부터 빼어난 말씀의 종이었습니다. 또 이번 학생수양회에서 주제 1 강 말씀을 전한 김여호수아 목자님도 안암 출신이고 그 외에도 서울대, 중앙대, 부산대, 고대 세종 캠퍼스 등등에 안암에서 배출한 목자님들이 말씀 역사를 섬기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센터에 이렇게 말씀의 종들을 풍성하게 허락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뿐만아니라 우리는 지금까지 세계 선교 역사에 기둥을 뽑아서 드리는 역사를 계속해 왔습니다. 안암골의 형제 자매 조상 두 분도 각각 독일 뮨헨과 미국 뉴욕에 선교사로 나가 계십니다. 중남미 개척 역사의 산파 역할을 해 오신 파블로 오 선교사님도 계시고 그 외에 전 세계 곳곳에서 우리들이 파송한 선교사님들이 헌신과 수고를 하고 계십니다. 만약 우리 센터만 잘 되기를 바랐다면 이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 선교를 진두지휘하시는 성령님의 방향에 따라 성경 선생들을 양성하여 파송하는 역사를 줄기차게 이루어왔습니다. 지금까지 안암 센타를 복주시고 세계 선교 역사에 사용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고백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실은 제가 말씀으로 도운 사람이 선교사로 나간다고 할 때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엎치락 뒤치락 하다가 이제 겨우 동역자가 되었구나 싶을 때 어떤 사람은 홍콩으로 어떤 사람은 캐나다로 파송되어 떠났습니다.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울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제가 세계 선교를 이루시고자 하시는 성령님의 방향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하여 기꺼이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함을 배웁니다. 또한 제가 세계 선교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이 직접 선교사로 나가는 길도 있지만 우리 가운데 많은 성경선생들을 세우는 길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내 곁에서 동역할 사람을 만들려고 제자 양성할 것이 아니라 세계 선교에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세우기 위해 제자 양성을 해야겠습니다. 주님께서 계속해서 우리 안암 센타에 빼어난 성경 선생, 말씀의 종들을 풍성하게 세워주시길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 센터가 그렇게 세워진 말씀의 종들을 성령의 방향에 순종하여 성서 한국과 세계 선교를 위해 기꺼이 파송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로 가서" 바울의 제 일 차 선교 여행 중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구브로였습니다. 구브로는 현재 터기 아래에 있는 키프로스라는 섬나라로서 바나바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이곳 지리에 익숙한 바나바의 길 안내를 받으며 바울은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섬을 관통하여 바보라고 불리는 구브로의 수도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에는 로마에서 파견된 서기오 바울이라는 총독의 관저가 있었습니다. 지성인으로서 열린 마음을 가졌던 총독은 바나바와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사회적 지위가 상당히 높은 사람 중에 마음밭이 좋은 양은 이제까지 없었기에 바울과 바나바는 몹시 흥분이 되었습니다. 온 힘을 다해 그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총독 곁에는 바예수 또는 엘루마라는 이름을 가진 종교 담당 특별 보좌관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이자 마술사였습니다. 그 동안 마술로 총독의 마음을 사로잡아 한 자리하고 있었는데 바울 일행이 나타나자 이러다 밥그릇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습니다. 그는 바울과 총독이 일대일을 하고 나면 즉시 달려가 갖가지 흑색 선전으로 방해 공작을 펼쳤습니다. "총독 각하! 바울이 하는 말은 다 거짓말입니다. 십자가에서 처형된 범죄자가 어떻게 구주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을 믿었다가는 자리까지 위태로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총독이 믿으려고 하다가도 엘루마의 말을 듣고 나서는 불신이 들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선교 여행을 따라왔던 마가 요한은 여기 무서운 동네 같다며 어서 떠나자고 재촉을 했습니다.
이때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쉽지만 어쩔 수 없겠다며 포기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박수무당 엘루마를 향해 무섭게 책망했습니다. "기만과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악마의 자식아, 너는 나쁜 짓만 골라가면서 하는 악당이다. 언제까지 너는 주님의 길을 훼방할 셈이냐? (공동번역)" 사도 바울은 엘루마의 배후에 사탄이 역사하고 있음을 직감하였습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악령의 세력을 향해 도전했습니다. 바보를 말그대로 바보 같은 동네로 만들고 있는 악한 영의 실체를 드러내고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고자 하였습니다.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바울의 선포가 떨어지자 마자 안개와 어둠이 엘루마를 덮쳐 앞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안개와 어둠은 진리의 빛이 없이 미신과 사술에 매여 있는 이방 세계를 상징하는 것 같았습니다. 자기를 인도해 줄 사람을 찾아 버둥거리는 엘루마의 모습을 보면서 총독은 모든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누구의 말이 참이고 누구의 말이 거짓인지 확실해졌습니다. 이에 총독은 복음을 믿고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복음 역사를 훼방하는 마귀의 세력과 맞서 담대하게 싸울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바울이 원래 성격상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서 그랬을까요? 그보다는 9절에 나온대로 바울이 성령 충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엘루마는 악령의 도구로 쓰임 받았고 바울은 성령의 도구로 쓰임 받았습니다. 총독 서기오 바울 한 사람을 두고 바울과 엘루마 두 사람을 대리인으로 한 성령 대 악령의 영적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바울이 성령충만하여 도전했을 때 이 영적 전쟁에서 악령은 쫓겨나고 그 악령의 지배 하에 있던 한 영혼을 구출해 낼 수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사건 전에는 바나바의 이름이 항상 바울보다 먼저 나왔는데 이후에는 바울의 이름이 바나바보다 먼저 나온다는 점입니다. 바나바가 이 일을 계기로 선교 여행을 바울이 이끌고 가는 편이 더 좋겠다고 판단하여 그에게 리더십을 양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나바는 정말 사심이 눈꼽만큼도 없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만을 생각하는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양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보면 한 사람도 쉬운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목자가 본문의 총독처럼 문제의식이 있고 성경을 알고자 하는 양을 만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주님께서 나의 양 없는 목자라는 한을 풀어주시려나보다 하며 기뻐합니다. 그러나 양이 복음에 관심을 보이는 그 순간이 바로 악령도 함께 깨어나는 순간입니다. 사탄은 지금까지 내 손아귀에 안에 있던 내 것인데 결코 빼앗길 수 없다며 온갖 방해공작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인터넷이나 책에서 어떤 글을 통해서 확하고 불신을 심기도 하고 친구를 통해서 유혹을 하기도 하고 부모님을 통해서 심한 핍박을 하기도 합니다. 이때 양은 한 편으로는 복음이 진리인 것 같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아닌 것 같기도 하여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갈팡질팡합니다.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양을 돕다가 목자는 슬슬 지쳐가게 됩니다. 역시 이번에도 안 되나보다 하면서 운명적인 생각이 다시 고개를 쳐들기 시작합니다. 슬그머니 잡아던 손을 놓아버리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이렇게 쉽게 물러나서는 단 한 영혼도 구원하기 어렵습니다. 치열하게 영적인 싸움을 싸우지 않고서도 쉽게 이루어지는 복음 역사는 없습니다. 목자는 양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물러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되고 끝까지 싸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Ultra Bond Family라는 우리 모임의 별명이 생기기까지 했겠습니까? 저도 초강력 본드 같은 목자님이 아니었다면 중도에 나가떨어졌을 것이 틀림 없습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 지인 중에 탈북자를 돕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는 분이 계십니다. 종종 카톡으로 제게도 중보기도를 부탁해 오는데 기도 제목이 후덜덜합니다. '중국 공안 당국의 눈을 피해 다섯 명을 필리핀과 태국을 거쳐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도록', '탈북했다가 적발되어 북으로 다시 송환되었던 한 자매를 다시 꺼내올 수 있도록' 등등 마치 한 편의 영화를 찍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임에도 한 양을 구원하기까지 목자의 땀과 눈물이 담긴 드라마 같은 스토리가 많이 있습니다. 이 감동적이고 놀라운 스토리가 중단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들이 그 스토리를 계속 이어가는 복음 전파자요 목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고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믿음의 용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이제 바울 일행은 배를 타고 버가에 상륙했습니다. 그들은 소아시아 내륙 깊숙이 자리 잡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렀습니다. 17절부터 41절까지는 안식일에 그곳 회당에서 바울이 전한 메시지입니다. 이 바울의 메시지와 앞에서 스데반이 전한 메시지 그리고 사도 베드로가 전한 메시지를 비교해 보면 서로 유사한 점이 상당히 많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크게 세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성경에서 약속된 바로 그 메시아가 되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지만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높임을 받으셨다는 증언입니다. 셋째는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과 영생에 들어가라며 결단을 촉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표현이나 강조점이 조금씩 다 다르지만 전체적인 틀은 거의 동일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초대 교회가 어떻게 복음 전도를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복음 전도자는 복음의 주요 내용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풀 세트로 전했습니다. 언약, 십자가, 부활, 회개, 믿음, 구원 등 복음의 핵심을 압축해서 그야말로 엑기스을 모아서 전했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고 나면 항상 두 개의 상반된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반박하고 비방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만 믿지 않는 것을 넘어 다른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았습니다. 이런 반응이 나타났을 때 전도자는 얼마나 실망하고 낙심이 크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적대적인 반응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기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듣기 원하고 더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이들은 대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이런 두 가지 반응 앞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어떤 방향을 잡았습니까? 4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유대인)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유대인에게 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귀한 복음의 말씀을 스스로 걷어차 버렸습니다. 영생을 얻을 기회를 주었지만 이를 외면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기회는 이방인에게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돼지에게 진주를 계속 던져 줄 이유가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동족인 유대인이 이렇게 복음에 대해 적대적으로 반응하는 것에 대해 마음이 몹시 아팠습니다. 할수만 있다면 자기 생명을 대신해서라도 동족들을 구원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감정 때문에 미련을 두다가 하나님이 주신 선교 사명을 그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사야서 49장 6절 말씀에 기초해서 자기의 사명이 어디에 있는지를 재확인하였습니다. 47절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주께서 이 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내 나라, 내 동족의 구원도 중요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뜻은 바울이 이방의 빛이 되어 땅 끝까지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앞에 구브로에서 있었던 사건에서 보듯이 당시 이방 세계는 거짓과 미신에 사로 잡힌 어둠의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곳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비추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중에는 48절에 표현된 대로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빛을 보고 반응하여 믿고 복음을 영접했습니다. 이처럼 복음 전도란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 전부터 예비하신 양을 찾아서 예수님 앞에 나오도록 부르는 일입니다. 물론 누가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인지 전도자는 알 길이 없습니다. 알 수 있는 방법은 사람을 가리지 말고 일단 모두에게 다 전해 보고 그 반응을 보는 수 밖에 없습니다.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에게는 발에서 티끌을 떨어서 보내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을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람으로 알고 품고 섬기면 됩니다.
이번 전국 학생수양회에서 마지막날에 총알 전도법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여기서 총알이란 위에서 제가 말씀드린 복음의 풀 세트를 담고 있는 자기만의 복음 전도 메시지를 뜻합니다. 전도자는 먼저 갈고 닦은 이 총알 메시지를 준비해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캠퍼스에 나가서 총알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전도자를 가리켜 저격수라고 부릅니다. 총알 메시지를 전하면 두 종류의 반응이 나올 수 있습니다. 전혀 들으려하지 않고 반발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냥 '안녕히 가십시오' 정중히 인사하면서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듣고자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총알 메시지를 끝까지 다 전한 후에 계속해서 성경 공부를 하도록 초청해 보라는 것이 총알 전도법의 내용입니다. 저는 '총알'이나 '저격수'라는 단어가 사람을 죽일 때 쓰는 말이라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전도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들어보니 총알전도법에서 참고하고 배울 점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주로 캠퍼스에 나가 피싱을 했는데 이는 엄밀히 말하면 전도라기 보다는 모임이나 말씀 공부로의 초대라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이 방법은 인격적인 관계성 속에서 차근차근 복음을 설명해 가는 큰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말씀 공부로 연결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예 복음을 전할 기회가 별로 없다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또 성경 공부를 시작한다 하더라도 창세기 공부 두 세번 하다가 관계성이 끊어져 버리는 양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충분히 전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았었습니다. 그래서 총알 전도법의 좋은 점이 복음의 핵심을 첫 만남부터 일단 다 전하게 만든다는 점에 있는 것 같습니다. 꼭 총알전도가 아니더라도 처음부터 복음의 핵심을 빠짐없이 전하는 것은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창세기 1강 공부를 하면서도 너무 진화론을 물고 늘어지기보다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해 보는 것은 어떨까 합니다. 또 거부하는 사람에게 너무 집착하지 말고 쿨하게 '안녕히 가세요' 인사하고 보내라는 점도 좋은 것 같습니다. 전도하다 보면 거절의 아픔 때문에 힘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는 사람은 위대한 전도자 사도 바울도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전도하다가 거절을 당했다고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보낼 사람은 보내고 하나님께서 영생주시기로 작정한 자가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으로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됩니다. 오늘 말씀의 마지막 52절을 보시면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는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전도하는 사람에게 크고 작은 고난이 따릅니다. 때때로 새파란 후배에게 막말을 들을 때 얼마나 마음이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오직 전도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 있습니다. 전도하는 사람은 성령 충만함을 덧입고 심령이 살아 있습니다. 개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전도하는 교회는 영혼 구원의 기쁨이 있고 성령 충만한 살아 있는 교회가 됩니다. 전도가 죽으면 교회의 영적 생명도 함께 시들어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다음 주 금요일 신입생들의 새터 출발을 시작점으로 해서 본격적으로 전도 시즌이 다가옵니다. 요즘 양들의 마음은 강추위처럼 꽁꽁 얼어 있고, 뭐 좀 해보려고 하면 캠퍼스 폴리스의 눈치를 봐야 하는 각박한 현실 가운데 전도를 하자니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영생주시기로 예비하신 양들이 어디엔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양을 만들러 가는 것이 아니라 양을 부르러 가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 크게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눈물로 씨를 뿌리다 보면 기쁨으로 거두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2016년 봄학기 이 어두운 캠퍼스에 우리들을 이방의 빛으로 사용하여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가 말씀의 종들을 낳고 키워 세계 선교 역사에 드리는 21세기에 안디옥 교회와 같은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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