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도행전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이창무 2016. 3. 21.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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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사도행전 제 17 강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말씀 사도행전 19:1-22

요절 사도행전 19: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한 회사를 지배하기 위해서 주식을 100% 소유할 필요가 없습니다. 딱 51%만 확보하면 자기 회사로 만들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가끔 회사에서 여러 세력들이 충돌하여 경영권 분쟁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싸움의 목표도 51%를 먼저 차지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도 경영권 분쟁 중입니다. 말씀이 세력을 얻을 것이냐 죄가 세력을 얻을 것이냐 각축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말씀이 51% 이상을 차지하면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51%를 죄에 내어주면 죄의 지배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말씀이 세력을 얻느냐 죄가 세력을 얻느냐를 두고 겨루는 각축장입니다. 우리가 전도하고 선교하고 제자 삼는 것은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세상 속에 말씀의 세력을 확장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바로 이렇게 말씀의 세력을 얻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헌신했던 초대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오늘부터 바울의 3차 전도 여행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3차 전도 여행에 관한 사도행전의 기록은 거의 다 에베소 시에서 있었던 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에베소에서의 이루어진 선교 역사가 큰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바울은 이 에베소에서 가장 모범적인 개척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를 바울 선교의 꽃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바울의 에베소 제자 양성 모델을 배워서 우리 시대를 변화시키는 하나님 나라 건설의 일꾼으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말미에 잠깐 에베소를 들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더 오래 머물기를 청하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에베소를 떠나왔던 것이 마음에 계속 걸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3차 전도 여행이 시작하자마자 부지런히 에베소로 달려왔습니다. 와서 보니 이미 예수님을 믿는다 하는 제자들 12명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그런데 막상 그들과 대화를 해 보니 뭔가 좀 이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기는 아는데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열심히 죄를 회개하고 금식 기도도 하는데 죄사함의 기쁨이 없어 보였습니다. 자기 의지로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넌지시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성령이라굽쇼? 머리털 나고 처음 들어보는 단어이지 말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너희가 받은 세례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그들은 요한의 세례의 받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제야 바울은 이들의 문제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감을 잡았습니다. 그들은 예전에 세례 요한의 제자였거나 혹은 그 추종자들이었습니다. 요한의 증언을 통해 예수님이 메시야이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미 구원의 성취를 이루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죄를 고백하는 회개의 세례는 받았지만, 죄로부터 자유케 하는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믿는 사람 안에 함께 계시면서 위로하시고 힘주시는 성령님과의 교제가 전혀 없었습니다. 바울이 보기에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즉시 그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안수하였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방언과 예언으로 성령께서 임하셨음이 외적으로 드러내는 표지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내적으로도 죄사함을 확신하게 되고, 드디어 영적인 세계가 보이고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너무 기뻐서 찬양을 불렀습니다.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내 주의 보내신 성령이 오셨네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 성령이 오셨네" 이 열두 명의 에베소 제자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에서 이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의 주춧돌이자 씨앗이 되었습니다.


성령을 받기 전 이 열두 명의 제자들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못 다 핀 꽃 한 송이 같은 제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들이 알았던 복음은 온전한 복음이 아니라 반쪽짜리 복음이었습니다. 이들은 온전한 기독교가 아니라 부족한 기독교를 경험했을 뿐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정작 십자가와 부활을 잘 모르고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캠퍼스에서 전도하다 보면 스스로 카톨릭 신자라고 칭하는 사람들을 만나곤 합니다. 요즘 들어 부쩍 이런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깊이 이야기해 보면 대개 이런 분들이 예수님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믿음보다는 선행과 구제를 많이 해서 공덕을 쌓아가는 것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카톨릭 뿐만 아니라 개신교 안에서 그런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을 마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해 가르쳐 주는 도덕 교과서처럼 이해합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죄를 뉘우치기도 하지만 죄사함의 은혜와 감격을 누리지 못합니다. 삼위 하나님 중 한분이신 성령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없습니다. 이런 신앙생활의 특징은 심령이 메마르다는 점입니다. 의지적이고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합니다. 기쁨이 별로 없습니다. 자칫하면 우리 2세들도 이런 부족한 기독교만을 경험하는 것에 그치지 쉽습니다. 부족한 기독교만을 경험한 사람들이 후에 안티 기독교인이 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는 목자가 양들의 상태에 민감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당에 다닌다, 교회에 다닌다, 나도 믿는 사람이다 하는 말만 듣고 섣불리 믿음이 있는 줄로 단정을 짓기보다는 정말 그 사람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아는지, 내주하시는 성령님과의 교제가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전도할 때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대충 넘어가지 말고 예수님과의 인격적 교제가 있는지 좀 더 대화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녀들이 머리로 말고 정말 가슴으로까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만났는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온전한 복음, 온전한 기독교를 차근차근 가르치고 전해야 합니다. 이럴 때 성경 공부가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또 교리문답을 가지고 가르치고 배우는 것도 참 좋은 길입니다. 교리문답은 기독교의 기본 진리들을 골고루 균형있게 전달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온전한 복음 진리를 알게 될 때 죄사함의 기쁨을 누리고 예수님 안에 얼마나 크고 놀라운 보화들이 있는지 발견합니다. 또한 내 안에 계신 성령님으로부터 위로와 인도와 카운셀링을 받는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참된 복음, 온전한 기독교를 풍성하게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반쪽 짜리 복음 부족한 기독교에 아직 머물고 있는 이들에게 힘써 온전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였습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서 강론한 점은 늘 그렇게 해 왔기 때문에 새로울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강론의 주제가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야이시라는 사실을 주로 강론해 왔는데 이번 강론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이번에 왜 주제가 달라졌을까요? 엄밀히 말해서 주제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폭이 더 넓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일차와 이차 전도 여행을 통해서 선교지에 교회를 개척하여 세웠습니다. 삼차 전도 여행을 시작하면서 바울은 더 큰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지역에 교회를 세울 뿐 아니라 그 교회를 통해서 지역 사회를 변화시키는 비전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본 선교지의 모습은 하나님의 통치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버리고 헛된 우상들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거짓 진리에 속임을 당하고 미신과 마술에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음란함과 탐욕에 찌들어 있었습니다. 에베소 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에베소는 아데미 여신을 수호신으로 모신 것에 큰 자부심을 가진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각종 마법과 주문이 담긴 책이 항상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고 무당과 박수들이 넘쳐나는 미신의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죄악이 지배하는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를 회복시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야 한다는 강한 열망에 사로잡혔습니다. 모든 우상들이 무너지고 오직 하나님만이 합당한 예배를 받으시는 에베소, 거짓과 미신을 버리고 진리의 말씀으로 돌아온 새롭게 된 도시 에베소를 꿈꾸었습니다.  바울은 이 열망을 담아 석 달 동안 회당에서 예수님을 통해 시작되고 완성될 하나님 나라 역사에 동참하도록 간절히 호소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9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비방을 일삼았습니다. 새삼스러울 것은 없지만 그래도 실망스럽고 낙심이 될만한 반응이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에베소 말고 내가 갈 곳이 없냐?'하면서 다른 도시로 떠나갔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9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바울은 비방하는 자들과 제자들을 분리했습니다. 이 제자들은 앞에서 성령을 받은 열두명의 제자들이 주축이 되었을 것입니다. 비방하는 자들과 말싸움하다가 정작 돌보고 키워야 할 제자들을 방치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 근처에 두란노 서원이라는 사설 학원이 있었습니다. 서늘한 아침과 저녁에만 강의가 있고 더운 낮 시간에는 강의실이 비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곳을 빌려 날마다 말씀을 강론했습니다. 강론하는 동안 이마에서 땀이 줄줄 흘렀지만 그보다 더 뜨거운 성령의 불길이 제자들 가슴 속에서 타올랐습니다. 깊고도 오묘한 말씀의 세계에 푹 빠져들어가 시간이 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무려 두 해 동안이나 계속하였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바울이 전도 여행 중에 한 지역에 머무른 평균 기간이 삼 개월이라고 합니다. 2년이 넘는 시간 에베소에 머물렀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바울이 왜 이렇게 오랫동안 에베소에 머물렀을까요? 이는 바울에게 에베소는 아시아 지역 선교의 전략적 거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에베소는 아시아의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지였습니다. 에베소를 중심으로 인근 도시들과 잘 정비된 도로들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에베소를 복음화하면 곧이어 주변 지역들로 복음이 번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역사에 모든 역량을 쏟아 부어 이곳을 하나님 나라의 전초 기지로 삼고자 했습니다. 바울의 선교 전략은 적중했습니다. 입소문이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아시아 사람들이 두란노 서원에 와서 말씀을 공부하러 왔습니다. 바로 이 사람들에 의해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의 7대 교회인 서머나, 버가모,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사데, 두아디라교회가 개척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는 마치 땅에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비유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씨앗이지만 나중에는 자라서 새들이 와서 깃들이는 큰 나무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 그대로 성령님도 모르는 초신자 12명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에베소부터 시작되어 소아시아 전체로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저는 바둑을 둘 줄 전혀 모릅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세돌과 알파고의 세기적인 바둑 대결 이벤트가 있어서 바둑 중계 방송을 잠깐 보게 되었습니다. 알파고가 텅빈 곳에 한 점을 딱 놓았는데 이것이 승패를 가늠하는 결정적인 신의 한수였다는 해설을 들었습니다. 저는 겨우 한 점일 뿐인데 저게 무슨 대단한 일인가 싶었지만 해설자가 설명을 해주니까 또 그런 것 같았습니다. 바울의 에베소 사역은 소아시아 전체를 복음화시키는 신의 한수였습니다. 지진이 진앙지 한 지점에서 시작하지만 온 세상을 뒤흔들어 놓는 것처럼, 한 지점을 집중해서 복음으로 정복하면 그 주변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많은 무리들을 만나고 도와주셨지만 결국에 집중하신 일은 12명의 제자 양성이었습니다. 그 12명이 세상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 그대로 신의 한수입니다. 그럼 우리의 신의 한수는 무엇입니까? 바로 캠퍼스 제자 양성입니다. 우리가 동시에 모든 일을 다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지점을 선택해서 그 지점을 집중공략하는 방법을 통해 그 주변에 파급 효과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나라와 민족이 제사장 나라가 되는 꿈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우리는 캠퍼스를 전략적인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캠퍼스가 복음화가 되면 캠퍼스에서 배출된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고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한 캠퍼스만 해도 2만명이 넘는 학생들이 있는데 모두를 다 섬길 수는 없습니다. 일대일을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의 제자 양성에 집중할 때 그 한 사람을 통해서 캠퍼스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 모임의 전 세계 대표였던 전요한 목자님은 전남대 의대를 나오셨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매일 한글과 영어로 각각 한 시간 씩 두 시간 동안 성경공부를 하면서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목자의 삶을 결단하셨습니다. 당시 의대생이 전부 80명이었는데 전요한 목자님의 초청으로 60명이 센타에 나와 성경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의 변화가 이처럼 한 학과 전체의 분위기와 흐름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보내주신 제자들이 다 세상을 변화시킬 신의 한수가 될 사람들입니다. 우리 안암 센터가 이 시대 제 2의 두란노 서원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제자 양성을 더욱 힘을 모아서 캠퍼스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 한 사람이 먼저 주변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온전한 제자로 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을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심지어 바울의 몸에서 나온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대기만 해도 아픈 사람이 낫고 귀신이 물러갔습니다. 성령께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키신 까닭은 바울이 전하고 가르침 말씀이 참되고 확실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의 마술사들은 바울 자신들이 흉내낼 수 없는 큰 이적을 행하는 장면을 보고 경악을 했습니다. 슬며시 바울을 벤치마킹해 보았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새로운 마법의 주문이 그 비결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 중에 유대의 제사장 스게아의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도 바울을 따라해 보았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물러가라" 그러자 귀신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 하면서 그들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들은 귀신을 쫓으러 갔다가 귀신 들려서 돌아왔습니다. 이 일을 보고 모든 에베소 사람들이 두려워하였습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아데미 여신을 신으로 섬겼던 우상 숭배와 미신을 추종했던 죄들을 자복하고 회개했습니다. 시내의 마술사들이 각자 자기 집에 고이 모셔 놓았던 마술책을 끄집어 내어 광장 한 가운데 쌓았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거짓 사상과 헛된 미신에 속아 살아왔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책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질렀습니다. 책값이 오만 드라크마, 현재 시세로 40여억이나 되었습니다. 에베소시가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우상과 미신의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시민들은 더 이상 마술이나 미신을 의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아데미 여신의 신상을 사가는 사람이 없어 우상 판매업자의 가게에는 파리만 날리게 되었습니다. 두란노 서원에는 사도 바울에게 성경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로 미어터져서 번호표를 발급해야할 지경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변화된 에베소 시의 모습을 성경은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20절을 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에베소는 주의 말씀이 우상과 미신을 몰아내고 세력을 얻은 도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서울시가 말씀이 세력을 얻은 도시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섬기는 캠퍼스에서 말씀이 세력을 얻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에베소 시에서 말씀이 세력을 얻게 된 과정을 보면 그 원동력이 바울이 두란노 서원에서 이 년 동안 날마다 성경을 가르친 것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년과 날마다는 다른 선교지에서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부지런히 말씀을 배우고 가르쳤을 때 그때 비로소 도시 하나가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정말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닫게 해 줍니다. 한 마디로 집중적인 말씀 공부 밖에 답이 없습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스위스의 제네바 시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도시로 만들고자 하는 꿈과 목표가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칼빈이 선택한 방법은 역시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매일마다 아침 일곱시에 사람들을 모아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시민들은 한 시간 정도 칼빈의 설교를 듣고 각자 일터로 흩어졌습니다. 칼빈은 이 일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죽을 때까지 하여 평생에 걸쳐 성경 전권을 강해 설교하였습니다. 당시 제네바 시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술집과 도박장이 없는 청정 도시로 유명했었다고 합니다. 어디 한 도시 뿐이겠습니까? 한 캠퍼스, 한 가정, 한 요회, 한 사람이 변화되는 길은 역시 말씀 밖에 없습니다. 왜 나는 이 모양이고 왜 세상은 이 모양이냐고 탄식한다고 해서 변화되지 않습니다. 욕을 한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보다 정말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부지런히 그리고 꾸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은 힘이 있기 때문에 점점 그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마침내 세력을 얻어서 변화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물론 여기 저기 신경 쓸 것이 너무 많다 보니 말씀에 집중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겨우 겨우 일주일에 한 번 말씀 공부 한 번 할 때도 있습니다. 남들이 보면 이것도 대단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과연 우리가 말씀이 세력을 얻을 정도로 말씀에 집중하고 있는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죄가 세력을 떨치고 있는 곳에 떨어져 말씀의 세력권을 넓히는 하나님 나라의 군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계속 말씀을 놓다 보면 우리는 결국 마귀와의 영적 전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속한 열린 요회에서는 작년 가을에 시작했던 60구절 암송을 아직도 하고 있습니다. 다들 바쁘다보니 몇 구절을 암송하는데도 2, 3주가 걸렸습니다. 그래도 중도에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주에 드디어 끝이 납니다. 끝나면 다시 처음부터 외우거나 다른 구절을 암송할 계획입니다. 어떤 목자님은 출근 시간에 전철 안에서 일용할 양식을 먹습니다. 죄의 세력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통치가 임할 때까지 우리는 이렇게 말씀을 붙들고 몸부림치며 투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 가정 안에, 우리 요회 안에, 우리 캠퍼스 안에,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이 지역 안에서 말씀이 세력을 얻는 역사를 이루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날마다 말씀에 집중하여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에베소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향후 선교 방향에 대한 영감을 얻었습니다. 우선 급한 일은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교회들을 방문하는 것이었습니다. 2차 전도 여행 중에 개척된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굳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또 다른 목적은 기근이 들어 어려움에 처해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구제 헌금을 교회들로부터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에 이 헌금을 직접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그 다음 계획은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은 말했습니다.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이때부터 사도 바울은 로마 시의 복음화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서 서두에도 여러 번 로마에 가고자 했었고 여의치 않기에 이 편지를 쓴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로마에 어떻게 하든지 빨리 가고자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콜롯세움에서 FC 로마의 축구 경기를 구경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바울이 소아시아의 중심지 에베소가 변화되자 그 주변 지역이 함께 변화되는 역사를 경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지중해 세계의 중심지가 어디입니까? 바로 로마입니다. 그러므로 로마가 변화되면 온 세상이 변화될 수 있었습니다. 로마가 변화되고 이방 세계가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으로 들어가는 그 날을 꿈꾸며 바울의 가슴은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나이가 몇 살이었습니까? 적어도 50이 넘은 나이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지금과 달리 이 당시 50대는 경로당에 갈 나이였습니다. 바울은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까지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할만큼 했습니다. 이젠 은퇴를 선언해도 될 나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가슴에 품은 바울에게 나이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한국 대표팀이 월드컵 16강에 올랐을 때 '나는 아직 배고프다'라고 말했던 히딩크 감독처럼 바울도 아직 배가 고팠습니다. 더 많은 지역과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에 동참하고 쓰임 받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바울의 육체는 더 연약해져갔지만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더 폭이 넓어지고 깊어졌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과거에 살고, 평범한 사람은 현재에 살지만, 비범한 사람은 미래에 산다." 대개 나이 드신 사람들을 보면 자기가 과거에 했던 일들을 자랑하고 회상하면서 살아갑니다. 옛날에 군대 갔다 온 이야기, 옛날에 인기 많았던 이야기, 옛날에 1등 한 이야기 등등, 대개 나이가 들수록 미래에 살기 보다는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면서 삽니다. 또 보통사람들은 코앞에 있는 현실적인 이야기만 합니다. 그러나 사명인은 미래에 대한 비전을 꿈꾸며 삽니다.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그 비전은 점점 더 뚜렷해지고 커져 갑니다. 왜냐하면 사명인이 품은 비전은 자기의 꿈이나 욕망의 실현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기 때문입니다. 날이 갈수록 세상 나라의 헛됨을 깨닫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간절해집니다. 날이 갈수록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확장해 나가는 큰 비전을 품고 한 사람의 제자 양성에 혼신의 힘을 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성령 충만함을 덧입고 날마다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가르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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