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설교/사도행전 2016.02.07 15:09

    2016년 사도행전 제 12 강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말씀:사도행전 14:1-28

    요절:사도행전 14: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최근에 대학교 때 만났던 한 친구와 다시 연락이 닿았습니다. 그는 법대를 졸업하고 SK 그룹을 다니다가 틈틈이 다녀왔던 유럽 여행기를 모아 책을 내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대박을 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아예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지금은 여행연구소를 차려서 소장을 하면서 자기처럼 여행에 푹 빠진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먹고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은 우리를 잡아끄는 묘한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의 일차 전도 여행의 후반부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 여행 중에 수없이 많은 환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바울은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사람들에게 새롭게 행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을 수없이 목격하였습니다. 바울은 전도 여행의 매력에 푹 빠져들어 앞으로 2차, 3차 여행까지 계속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우리의 인생 여정에도 고난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 길에 또한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순례의 길에 필요한 인내와 믿음, 고난에 대한 가치관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이고니온은 여러 도로가 만나는 교통의 요지로서 상업이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이곳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였고 당연히 회당도 있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그랬던 것처럼 먼저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때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복음을 믿고 영접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2절을 보면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믿는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만들었습니다. 점점 주변의 눈초리가 사나워지고 말들이 거칠어졌습니다. 양들은 단지 바울과 성경 공부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지역사회에서 왕따를 당했습니다. 


    이때 두 사도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분위기가 영 좋지 않으니 조용히 있자고 하였습니까? 아니면 더 박해가 거세어지기 전에 다른 곳으로 피신하고자 했습니까? 3절을 다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두 사도는 오래 있고자 했습니다. 악감을 품었다는 말과 오래 있었다는 말은 잘 어울리지 않는 말 같습니다. 그런데 원문에 보면 2절과 3절 사이에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형제들에 대한 악감이 팽배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도들이 오래 있었다는 말입니다. 


    어째서 사도들은 악감이 커질수록 더 오래 있고자 했을까요? 이는 이고니온의 믿는 형제들이 이제 막 복음을 듣고 영접한 초신자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초신자들을 적대적인 환경 가운데 사도들이 그냥 두고 떠나면 그들의 연약한 믿음은 곧 시들어버릴 위험이 컸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주변의 악감을 무릅쓰고 이고니온에 남아서 어린 양들을 보호하고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책임지고 양육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택한 양육의 방법은 신령한 젖에 비유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말씀 전파 때문에 악감이 생겼는데 또 말씀을 전하면 악감을 더 크게 키울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이때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주님께서 친히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게 해서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임을 증언해 주셨습니다. 이방인들이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순종하기 시작했습니다. 4절에 보면 끝까지 순종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자들도 있었지만 동시에 두 사도를 따르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복음을 믿던 신자에서 이제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때 대적자들이 두 사도를 돌로 칠 계략을 세우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사도들은 주님께 이고니온의 형제들을 맡기고 동쪽 루가오니아 지방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이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생겨서 자립할 수 있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전도해서 복음을 영접하게 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오래 동안 인내하면서 양육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상관으로 모셨던 분이 모 선교단체 리더 출신이었습니다. 종종 자신이 지금까지 거의 천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전도를 했고 그 중에 수백 명이 영접 기도를 했다고 매우 자랑스러워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제가 이런 질문을 드렸습니다. "복음을 영접한 그 수백 명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자 그분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몰라. 어디선가 잘 신앙생활하고 있겠지." 그런데 과연 정말로 잘 신앙생활하고 있을까요? 


    탄생은 한 순간이지만 양육의 과정은 길고도 험난합니다. 아기는 시시때때로 젖을 먹여야 하고 똥 싼 것도 치워 주어야 하고 아프면 잠도 못 자고 간호해 주어야 합니다. 빨리 크라고 목을 잡아 뺀다고 해서 빨리 자라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참고 기다려주면서 부지런히 잘 먹여야 성장하여 자립할 수 있습니다. 양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고 일어나니 구름 위까지 자라는 재크의 콩나무가 아닙니다. 한 번의 일대일을 하기 위해서도 오랜 시간 인내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이주영 목자님은 새터 때 만난 신입생 양이 일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다가 전역할 때까지 계속 관계성을 맺어 오다가 지난 학기에 드디어 첫 일대일을 하셨습니다. 정말 대단한 인내심입니다. 또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도 오랫 동안 지속적인 양육과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소위 말하는 베이비시팅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언제까지 베이비시팅을 해야 합니까? 성경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인줄을 깊이 영접하고 스스로 말씀을 의지하며 사는 법을 터득할 때까지 해야 합니다. 목자가 주님을 의지해서 담대히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면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양의 마음에 감동을 주십니다. 또한 양이 자기 삶 속에서 말씀의 진리임을 체험하게 되는 사건을 만나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해 주십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자립적인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초신자의 허물을 벗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우리가 좋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오래 있으며 말씀으로 제자를 양육했던 바울과 바나바처럼, 시대가 어렵더라도 인내하면서 양들에게 꾸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서 말씀을 경외하고 자립적인 믿음을 가진 제자들이 많이 설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앞서 바울 일행이 이고니온을 떠나 루가오니아 지방으로 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루가오니아 지방은 어떤 곳일까요? 이곳은 주로 이방인들이 사는 곳이었고 언어도 헬라어보다는 그 지역 방언이 주로 쓰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거의 없다시피 했고 회당도 없었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유대인의 회당을 거점으로 해서 복음을 전해 왔는데 갑자기 이런 곳에 오니 모든 것이 낯설었습니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단은 조용히 분위기를 살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바울은 이고니온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이 때문에 낙심하고 의기소침해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거기서 무엇을 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바울은 모든 것이 막막한 중에도 어찌하든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회당이 없으니 그 대신 사람들이 많이 모일만한 곳을 찾아 성문 앞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복음을 듣는 사람 중에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앉은뱅이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람을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 안에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이 낯 선 땅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역사하실 줄로 확신했습니다. 바울은 그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네 발로 일어서라" 그러자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일어나 걷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아직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 땅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역사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기적이 유대 땅 안에서 일어났다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루스드라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그들은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일은 사람이 할 수 없고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저 둘은 사람으로 변장하고 내려온 신들이 틀림없다.'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둘 중에 바나바는 제우스의 화신으로, 바울은 헤르메스라고 여겼습니다. 바나바는 바울보다 키 크고 잘 생기고 풍채도 있어서 그리스 신화의 주신 제우스 같다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바울은 말을 많이 했기 때문에 신들 중에 메신저의 역할을 맡은 헤르메스라고 여겼습니다. 예로부터 이 지방에는 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제우스 신과 헤르메스 신이 아무도 모르게 변장을 하고 이 지역에 내려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들을 영접해 주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오직 늙은 농부였던 빌레몬과 그의 처 바우기라는 사람만이 자기 집으로 영접해 주고 친철하게 대접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우스 신이 분노하여 이 노부부를 제외한 그 지역의 모든 사람들을 몰살시켜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번에 또 신들을 못 알아봐서 몰살을 당하는 비극이 생길까봐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런 사정으로 두 사도는 졸지에 갓바나바, 갓바울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루가오니아 방언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어찌 돌아가는 영문인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갑자기 자기들 앞에 제사상이 차려지고 돼지머리가 놓이자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두 사도는 어떻게 했습니까? 12장에서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사람들이 헤롯의 연설이 신의 음성이라고 아첨을 하자 이를 즐겼습니다. 그러다가 벌레에 먹혀 죽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와 바울은 옷을 찢었습니다. 옷을 찢는다는 것은 신성모독적인 말을 들었을 때 유대인들의 전형적인 반응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소리쳤습니다. 다함께 1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바울은 이 사건을 통해서 루스드라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어야 할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모를 때 얼마나 어리석게 될 수 있는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떠나 얼마나 헛된 인생을 살고 있는지 똑똑히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제우스나 헤르메스 같은 신들은 어떤 신들입니까? 수틀리면 그냥 주민들을 몰살시키기나 하는 변덕스럽고 잔인하고 무서운 신들이었습니다. 숨어서 인간을 시험에 빠트리는 짖궂은 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와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자신을 인생들에게 알리시길 기뻐하시는 계시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내일은 우리 민족의 명절인 설날입니다. 설날 아침이 되면 아직도 많은 집에서 조상신들에게 차례를 지냅니다. 왜 죽은 사람들에게 음식을 차려 제사를 지냅니까? 죽은 조상들의 귀신들이 와서 잘 차려진 음식을 먹고 배부르면 복을 줄 것이지만, 섭섭하게 하면 재앙을 내릴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믿기 때문에 절을 안 한다고 하면 너 때문에 부정 탄다  하면서 모진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또 신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토정비결이라 해서 한 해 운수를 점치곤 합니다. 그래봐야 동쪽으로 가면 귀인을 만날 것이라는 둥 뜬구름 잡는 이야기 뿐입니다. 모재벌 그룹 회장은 중요한 투자 결정을 내릴 때마다 한 역술인에게 묻고 그대로 따라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엄청난 손해를 입었고 결국 감옥에도 갔다 왔습니다. 과학문명이 발달한 21세기가 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결혼할 때는 궁합을 맞춰보고 이사갈 때는 손 좋은 날을 골라서 가려고 합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사주까페, 타로점이 유행이라 합니다. 이 얼마나 답답한 현실입니까? 실재하지도 않는 초자연적인 존재들이나 비인격적인 운명을 믿고 거기에 매여 살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지금은 아무도 믿지 않는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에게 제사지냈던 루스드라 사람들처럼 다 헛된 일들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사람들은 헛된 신들을 섬기는 우상숭배자로 전락하고 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사람들은 자신을 비인격적인 운명의 주사위판에 던져진 존재처럼 여기며 불안해합니다. 


    여기서 벗어나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길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 와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길 뿐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얼마나 인자와 자비가 풍성하시며 큰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신가를 발견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들에게 복음이 들려져야만 합니다. 


    우리들 중에는 부모나 형제들이 다 믿는 가족을 두신 분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상당히 많이 계십니다. 제 가족은 거의 다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동생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설날 가정 예배를 인도하면서 동생네가 듣도록 항상 복음의 메시지를 전했었습니다. 아직까지 별 변화의 조짐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계속 기도하고 틈 나는대로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우상에 매여 있던 제 할아버지도 제 어머니도 오래 동안 계속 고집을 부리시다가 결국에는 하나님께 돌아오셨습니다. 그래서 동생도 언젠가 때가 되면 하나님께 돌아오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번 설에 우리가 고향에 내려가서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복의 근원 삼으셨으니 우리를 통해서 가족들이 헛된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참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고 기도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루스드라에서 사도 바울이 한창 제자를 삼고 있을 때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반갑지 않은 손님들이 찾아 왔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대적하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니던 직장도 그만 두고 바울을 잡겠다고 여기까지 추적해 왔습니다. 다메섹까지 성도들을 박해하러 달려갔던 바울의 과거가 연상되는 한 장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당장 피신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성 밖에서만 돌로 치는 관습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유대인들은 변칙 플레이를 시도했습니다. 바울이 성 안에 혼자 있을 때를 노려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여기저기서 날라 온 짱돌을 온 몸에 맞은 바울은 피투성이가 된 채 길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대적자들은 바울의 숨이 끊어진 줄로 알고 서둘러 성 밖에 갖다 버렸습니다. 루스드라의 제자들은 실종된 바울을 찾아 헤매다가 성 밖에서 송장처럼 누워있는 그를 발견했습니다.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통곡을 하려는 그 찰라 죽은 줄 알았던 사도 바울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러더니 온 몸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내더니 성 안으로 다시 걸어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당장 도망가기에도 분초가 아까운 판국에 대적자들이 득시글득시글하는 성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바울을 보고 혀를 내둘렀습니다. 대적자들도 바울을 보고 이게 사람인가 귀신인가 혼비백산하여 감히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간신히 말려서 일차 전도 여행의 최종 목적지였던 더베로 데려갔습니다. 바울은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만 더베에서도 많은 제자를 삼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안디옥 교회로 돌아가는 일이었습니다. 더베에서 동쪽 내륙 도로를 이용하면 가장 빠르고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의외로 정반대의 길을 택해 왔던 길을 되돌아서 가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가면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아니라 바울의 대적자들을 언제 또 만날지 모르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굳이 힘들고 위험한 길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바울이 왔던 길을 되돌아갔던 이유는 자신이 개척해서 세운 신생 교회들을 방문하여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동안 바울은 두고 온 양들이 눈에 밟혀서 밤잠을 설쳤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예수님 안에 잘 뿌리를 내려야 할텐데...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 위에 굳게 서야할텐데...' 하는 걱정과 근심이 끊일 날이 없었기에 고생스럽더라도 다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기 위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제자들이 앞으로 많은 환난을 겪게 될 것을 예고하고 마음 준비를 단단히 하도록 내적인 방향을 주었습니다. 이미 바울 자신이 먼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다가 많은 환난을 겪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비방과 미움을 받고 이리저리 쫓겨 다니고 돌에 맞아 죽을 뻔했던 위기도 겨우 넘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미 처음 부르심 받을 때부터 주님으로부터 이런 고난이 있으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처음부터 마음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환란이 와도 당황하지 않고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았을 때 생긴 흉터를 내 몸에 새겨진 예수의 흔적(Stigma)이라고 부르며 도리어 자랑스러워하였습니다. 이제 그는 성도들의 마음 속에도 고난에 대한 분명한 가치관과 철학을 세워지길 바랐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고난에도 쉽게 흔들릴 수 밖에 없고 하나님 나라 전파의 사명을 감당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로 바울은 교회가 외적으로도 견고해질 수 있도록 장로를 택해 리더십을 든든히 세웠습니다. 이제까지의 사도 바울의 제 일차 전도 여행을 단 한 문장으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는 가는 길에 교회를 세웠고 오는 길에 교회를 굳게 했노라'


    얼마 전 인도네시아에서 가셨던 이재헌 목자님께서 안암 센터로 돌아오셨습니다. 오셔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제가 인도네시아에 가서 보니 우리 선교사님들이 많은 수고와 헌신을 하고 있었습니다. 언어를 배우고 물질 자립을 하면서 또 여러 이방양들을 섬기기 위해 고생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만나는 선교사님들마다 공통적으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냥 놀고 있어요. 제가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분명 많은 고생을 하시는 것 같은데 하나 같이 다들 놀고 있다고 하시니 어리둥절했습니다.' 왜 우리 선교사님들은 고생을 하시면서도 놀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저는 그 해답이 사도 바울의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는 말씀 속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에게 임하는 환난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고난을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할 그 무엇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깊은 바다 속을 보기 위해서 무거운 산소통을 짊어지지 않을 수 없듯이, 고난은 기본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성도의 삶과 늘 함께 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우리 선교사님들도 고난은 기본적인 것, 당연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겨우 기본을 하고 있다. 그냥 놀고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가 믿음이 흔들리는 이유 중 하나는 고난을 천국 갈 때까지 나와 함께 할 동반자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닥치면 무조건 거부하고 부정하려고만 합니다.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며 있을 수 없는 일, 있어서는 안 되는 일 취급합니다. 그러나 천국을 향해 순례길을 떠난 성도에게 고난은 친구와 같은 존재입니다. 처음 보면 거부감이 들고 별 호감이 가지 않지만 자꾸 가까이 하다 보면 내게 꼭 필요한 친구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고난이란 친구는 하나님 나라까지 순례의 길을 가는 동안 나를 죄로부터 지켜주고 겸손하게 하고 예수님을 닮게 만들어 주는 좋은 친구입니다. 제 은사이신 황병구 교수라는 분이 우리가 잘 아는 한 노래를 이렇게 바꾸어 부르신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고난받기위해 태어난 사람/당신의 삶속에서 그 고난 받고 있지요/태초부터 계획된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의 헌신을 통해 열매를 맺고/당신이 이 세상을 거스름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도전이 되는지/당신은 고난받기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고난 받고 있지요" 고난을 거부하면 할수록 더 힘들고 더 약해지고 더 무너져갈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기꺼이 흡수하면 우리는 더 생명력이 넘치고 더 강해지고 더 거룩해질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고난을 통해서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고난에 대한 성경적 가치관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바울 일행이 수리아 안디옥으로 귀환함으로서 3년 동안 계속된 사도 바울의 일차 전도 여행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푹 쉬면서 여기저기 아픈 곳을 치료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마지막으로 남은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제 1 회 세계 선교 보고 대회가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은혜의 역사, 놀라운 성령의 역사들을 들으며 안디옥 교회는 기쁨과 감사가 충만했습니다. 또한 어둠 속에 있던 이방인들이 어떻게 복음의 빛 가운데 나아오게 되었는지 들으며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가슴이 뛰고 나도 이 세계 선교 역사에 어떤 모양으로든지 동참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우리 모임도 올해 6월 5일에 장충체육관에서 세계 선교 보고 대회를 개최할 예정입니다. 메시지와 함께 네 분의 현지 목자님들의 인생 소감과 보고가 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의 현지 목자가 세워지기까지 우리 선교사님의 얼마나 많은 수고와 헌신과 눈물의 기도가 있었겠습니까? 얼마나 오래 동안이나 참고 인내해 오셨겠습니까? 우리가 이 선교 보고 대회를 통해 선교사님들의 인내와 목자의 심정, 그리고 고난에 대한 철학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전 세계 가운데 어떻게 지금도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시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시는지 들으며 우리도 그 역사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댓글 0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