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도행전

그는 나의 택한 그릇이라

이창무 2016. 1. 10.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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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사도행전 제 8 강


그는 나의 택한 그릇이라


말씀 / 사도행전 9:1-19

요절 / 사도행전 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우리 인생에는 세 가지 만남의 축복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부모님을 잘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둘째는 스승을 잘 만나는 것입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면 인생의 길이 열립니다. 셋째는 배우자를 잘 만나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남편을 잘 만나야 하고, 남자들은 아내를 잘 만나야 합니다. 그리하면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의 주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금 수저 물고 태어나고 좋은 선생을 만나고 마음에 쏙 드는 배우자를 만나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부모를 잘못 만나고, 스승을 잘못 만나고, 배우자를 잘못 만났어도, 예수님을 만나고 인생이 달라진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만남보다도 소중한 만남이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로 우리에게 더 익숙한 사울과 예수님과의 첫 만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만남은 사울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인류 역사를 바꾼 극적이고 위대한 만남이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아무 자격 없는 한 사람을 만나주시고 구속 역사에 귀한 그릇으로 택하여 쓰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섭리를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사울은 길리기아 주 다소에서 출생했습니다. 다소는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그곳에서 자란 사울은 자연스럽게 헬라 철학과 문화를 섭렵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 시민권이 있어서 로마의 통치를 받는 곳에는 어디든지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사울은 베냐민 지파 출신의 정통 히브리인이었습니다. 사울이라는 이름도 베냐민 지파 출신 이스라엘의 초대 왕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엄한 율법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청년으로 성장한 사울은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와서 바리새인이자 랍비였던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5:34 은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이런 당대 최고 학자의 수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 갈릴리 어부 출신으로 가방끈이 좀 짧았던 반면 사울은 헬라문화와 히브리 문화에 모두 정통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습니다. 사도행전 26장에서 유대 총독 베스도는 사도 바울의 언변에 놀라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구나.” 로마 총독이 이런 말까지 했을 정도면 정말 대단한 사람 아닙니까? 이렇게 사울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머리에 든 것이 많은 사람은 가슴이 차갑기 쉽지만 그는 무엇보다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한번 꽂히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헌신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잠재력과 가능성을 가진 사울이 무슨 일을 하고 있었습니까? 1,2 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도행전 7장 58절에 보면 사울은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 가해자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이 죽임 당한 것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예수 믿는 무리를 잔멸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이요, 자기의 사명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집집마다 가택 수색을 하여 성도들을 끌어다가 투옥시켰습니다.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던 제자들은 온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러자 이제 사울은 흩어진 제자들을 체포해 오기 위해 제사장에게 다메섹 회당에 보낼 공문을 청했습니다. 예루살렘부터 다메섹까지 일주일이나 걸리는 꽤 먼 길이었습니다. 사울은 자기가 마치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하는 정의의 투사라도 된 양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달려갔습니다. 그의 눈에는 살인자의 시퍼런 독기가 서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누구보다는 잘 안다는 사울이 하나님의 역사를 앞장서서 훼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하고 있다는 확신에 찬 그가 정작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요? 도대체 어쩌다가 사울은 이런 엄청난 우를 범하게 되었을까요? 이는 그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율법에 정통했지만 정작 그 율법이 가리키는 예수님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39 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다 이루고자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도리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신들의 원하는 방식의 메시야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메시야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자신들의 생각과 방식대로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복음의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울 역시 자기 생각 속에 갇힌 자였습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논리와 확신 속에서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더 나아가 열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후에 그는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이러한 열심이 무지한 열심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롬 10:2,3). 하나님께 열심은 있었지만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았습니다. 사실은 무지한데 자기는 다 안다고 생각하고 열심을 내는 사람만큼 무서운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울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폭주 기관차처럼 달리다가 결국 크나 큰 과오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사울을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그가 다메섹에 다 가까이 왔을 쯤에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 빛이 너무 강렬해서 사울이 감히 쳐다 볼 겨를도 없이 말에서 굴러 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가 두 눈을 감싸고 모래 위에서 뒹굴고 있을 때 어떤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 사울은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하늘에서 홀연히 강력한 빛으로 임하신 그 광채의 주인공은 바로 자신이 핍박해 왔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사울 자신이 그토록 미워하고 증오하고 배척했던 예수! 자신이 그토록 멸시하고 무시하고 잔멸하고자 눈에 불을 켜고 달려 들었던 그 패거리들의 우두머리 예수! 그는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이미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을 당해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예수가 다시 살아서 그의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그것도 영광스러운 부활의 광채를 입고 자기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사울은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알았던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서야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증언하는 제자들의 말이 다 옳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제자들을 처형하려고 했던 자신이 크게 잘못 되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것은, 곧 예수를 박해하는 것이었음을, 예수를 박해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빛으로 자신에게 임했을 때, 사울은 자신이 저지른 치명적인 오류와 무서운 죄를 깨닫고 그만 길바닥에 엎드려지고 말았습니다.


이때 부활하신 예수님은 핍박자 사울, 제자들을 핍박하고 목숨을 빼앗은 원수 사울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그의 목을 부러뜨려 죽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서 병신이 되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사울 네 이놈! 감히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나를 괴롭히면 어떻게 되는지 뜨거운 맛을 보여주마." 하시며 하늘에서 불을 내려 태우시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사울이 아그립바왕 앞에서 이 장면을 이야기할 때 주님의 음성을 이렇게 소개하였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가시채는 당시 농부들이 소가 함부로 뒷발질하지 못하도록 수레 앞에 달아놓았던 가시가 박힌 막대기를 말합니다. 소가 성질이 나서 계속 뒷발질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가시채에 찔려 점점 더 고통스럽게 될 뿐입니다. 즉 이 말씀은 "네가 뒤돌아 보지도 않고 자꾸만 가시나무를 뒷발로 차는데 얼마나 아프냐" 하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울의 죄를 책망하시기보다도 그의 어리석은 행동을 안타까와하시고 그의 그릇된 행보를 바로잡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이 주님의 음성 속에서 교만하고 무지하고 목이 곧은 사울을 향한 우리 주님의 한없는 은혜와 자비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사울은 자기 스스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 열심히 예수 이단들을 박멸하고 하고 있다. 이 얼마나 장한 일인가. 나 아니면 누가 하겠나." 그는 자기 의로 똘똘 뭉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주님께서 보실 때는 사울이 가시나무를 향해서 열심히 뒷발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앞에서는 도끼눈을 뜨고 기세등등했지만 뒷머리에서는 이미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습니다. 철저한 율법 준수로 자기를 완성해 보려고 했지만 늘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에 실망하며 괴로워하였습니다. 임종 직전 천사와 같았던 스데반의 얼굴이 계속 떠오르며 '네가 한 일이 정말 옳은 일이냐?'하는 양심의 소리를 잠재울 수 없었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자신을 채찍질하며 다그쳤지만 마음 속의 어두움은 더욱 깊어져만 갔습니다. 주님은 이런 사울의 이름을 두 번이나 안타깝게 부르시며 찾아오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얼마나 힘드냐? 얼마나 아프냐? 너의 박해 때문에 나도 아프지만 나는 네가 더 걱정이구나. 계속 그렇게 살다가 지옥불에 떨어지면 어찌 하려고 그러느냐?" 이 주님의 음성은 영적 무지 가운데 파멸의 길을 가고 있던 사울에게 임한 주님의 구원의 음성이요, 사랑의 음성이었습니다. 이 빛되신 주님의 음성이 교만한 사울을 굴복시켰습니다. 이 주님의 사랑의 음성이 완악한 사울의 마음을 무너지게 하였습니다. 이 주님의 자비의 음성이 서슬퍼런 독기를 품고 있었던 사울의 눈에서 회개와 감사의 눈물이 흘러 나오게 하였습니다.


사울은 이 사건을 통하여 에수님의 길이 참으시는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후에 그는 디모데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하심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6) 주님이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 분이신지 알고 싶다면 사울을 보면 됩니다. 사울을 오래 참으신 주님은 어떤 완악한 죄인이라도 품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사울은 평생토록 주님의 이 크신 긍휼과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 1:13-14)


주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 분이신지 안암골에서 알고 싶다면 저를 보시면 됩니다. 최근에 저를 알게 된 분들은 저의 과거를 잘 모릅니다. 제일 잘 아시는 분은 저의 일대일 목자님이셨던 이에스더 사모님이십니다. 에스더 사모님은 저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얼마나 교만하고 생각이 인본적이었는지, 얼마나 마음이 깊이 병들어 있었는지, 아직까지 저보다 더 헤맸던 사람을 보질 못했습니다. 아주 떠나버리는 것도 아니고 애매하게 붙어 있으면서 계속해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했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다는 아주 근본적인 회의와 불신에 사로잡히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내 나름대로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 중에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여기고 당당했습니다. 그러던 제가 어느 날 한 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임스 패커가 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기술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다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압도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이토록 크신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모르면서 인간의 위대함을 고집하려고 했던 저의 교만과 죄악을 눈물로 회개하였습니다. 또한 이런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지금까지 오래 참으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끔 저는 내가 만약 예수님을 못 만났으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60 펴센트 확률로 자살해서 이 세상에 없거나 40 퍼센트 확률로 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진리를 알고 싶은 열망과 하나님의 진리를 거부하는 교만 사이에서 모순을 감당하지 못하고 폭발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제 과거가 그래서인지 요즘 안티 크리스챤들을 보면 화가 나기보다는 불쌍하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 "안티야 안티야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댓글 다느라 고생이 참 많구나" 제가 이 시대 안티들을 찾아가서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들의 꽁꽁 언 마음을 녹이고 진리의 말씀으로 굴복시켜 하나님 앞에 항복을 받아내는 목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8, 9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사울은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서 겨우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이후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습니다. 선지자 요나가 불순종을 회개하며 컴컴한 물고기 뱃속에 사흘 동안 있었듯이 사울에게 이 사흘은 그의 강한 자아가 깨어지고 죽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때 다메섹의 다른 곳에서는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아나니아에게 찾아가셔서 말씀 하셨습니다.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그러나 아나니아는 이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얼마나 피도 눈물도 없는 무시무시한 핍박자인지 그 악명을 들어서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순종하기는 해야겠는데 너무 부담스러워서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아니, 주님께서 무자비한 핍박자였던 사울을 복음의 전도자로 선택하셨다니! 아나니아는 너무 놀랐고 영접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더 이상 주님께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즉시 자신의 집을 떠나 사울에게로 갔습니다. 얼마나 떨리고 두렵겠습니까? 마치 맨몸으로 호랑이가 갇혀 있는 철장으로 들어가는 것 만큼이나 떨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사울을 향해 무엇이라 불렀습니까?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아나니아는 "이 웬수 사울아!"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앞이 안 보이다고? 그동안 우리 형제들을 그렇게 괴롭히더니 꼴 보기 좋다"라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형제 사울아 Brother Saul!" 아나니아는 형제들의 원수 사울을 형제 중 하나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자신을 보내신 사실을 이야기하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 주시도록 안수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이때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그동안 교만과 편견과 자기의 로 가득찼던 사울의 눈에서 죄의 비늘이 벗겨지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눈이 뜨여져서 영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 예수님의 세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참된 주인이신 예수님을 만난 그날부터 사울은 다시 태어나 제 2의 인생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의 변화는 한 사람의 인생의 변화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사울을 선택하신 데에는 더 원대한 뜻과 계획이 있었습니다. 다같이 15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릇은 물건을 담는 용기로 어떤 내용을 담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보화를 담으면 보배합이 되고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됩니다. 전에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의 요강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가서 빵과 초콜릿을 담는 그릇으로 사용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옛날 사기 요강에는 사군자가 그려져 있어서 귀한 것을 담는 그릇으로 착각했던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든 요강에 맛있는 초콜릿을 담으니 그 그릇은 특별한 초콜릿 그릇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가치는 자신의 인간 조건이나 형편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내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지금까지 사울이라는 그릇에는 혈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유대교의 율법주의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 그릇에는 자기중심성이 담겨 있었습니다. 자기 의와 자기 자랑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지킨다고 했지만 그의 목표는 결국 자기완성이었습니다. 사울은 큰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큰 그릇, 빛나고 멋진 그릇이 되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가 그렇게 할수록 성령의 사역을 훼방하는 진노의 그릇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그릇은 당장 깨트려 버려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그릇을 버리지 않으시고 일방적인 은혜로 택하셔서 이제는 내가 귀하게 쓸 그릇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울이란 그릇에 보배로운 복음을 담게 하시고 ‘Made in Jesus’라는 이름을 새기시고 빛과 사랑과 은혜와 진리를 전하는 도구로 쓰시고자 하셨습니다. 이 주님의 뜻과 계획은 단순히 계획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뜻하셨던 대로 사울은 소아시아와 그리스와 로마에 거하는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복음 전파자로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사울이 전한 심오한 복음 진리는 고위 관리들부터 당대 지성인들까지 예수 그 이름 앞에 무릎 꿇게 만들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논란이 뜨겁습니다. 우리 같은 흙수저들은 속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는 금수저, 흙수저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말했습니다. 흙수저이면 어떻고 질그릇이면 어떻습니까? 거기에 보배를 담으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그릇으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를 이 보배로운 복음, 보배로우신 예수님을 담는 그릇으로 쓰시겠다고 하시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를 보배와 같은 복음 진리를 온 세상에 실어 나르는 택한 그릇으로 삼으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그런데 사울처럼 영적으로 무지하고 인간적인 사람이 눈을 떠서 영적인 세계를 보기까지는 성숙한 목자들의 섬세한 사랑과 도움과 기도가 있었습니다. 사울에게는 아나니아라는 영적인 목자의 도움과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눈을 떠서 주님의 세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전에 자신의 눈앞에서 천사의 얼굴로 죽어가던 스데반의 순교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서 사울이 변화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27절에 보면 바나바가 사울을 변호하며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에게 그를 적극적으로 추천해 주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울의 전력을 문제 삼아 영접하지 못하고 있을 때 바나바는 그의 진심을 믿어주었습니다. 이로서 사울이 그 회심과 변화된 것을 인정을 받고 신앙의 공동체안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를 볼 때 사울 한 사람이 변화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과 도움이 있었는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서학자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kley)는 스데반과 아나니아와 바나바를 가리켜서 "교회사속에서 잊혀진 영웅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사도행전 7장에만 나오고 순교하고 사라집니다. 아나니아는 9장에서만 잠깐 나옵니다. 바나바도 안디옥교회의 초기사역에 잠깐 나오고 사라집니다. 그러나 이들은 사울이라는 한 사도를 키워낸 위대한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많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사울의 목자들로서 영원히 기록되고 기억될 것입니다.


1800년대 중엽 미국 보스톤의 한 교회에 에드워드 킴볼(Edward Kimball)이란 이름을 가진 주일 학교 교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자기 반에 한 소년이 등록을 했습니다. 킴볼 선생은 그에게 성경을 가르치고자 했으나 그는 성경도 없었고 글자를 모르는 문맹이었고, 구두방에서 일하는 소년이었습니다. 킴볼은 그에게 성경을 사주고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만날 때마다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자주 그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했습니다. 그가 바로 세계적인 전도자로 백만 명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 드와이트 무디(Dwight Moody)였습니다. 우리가 무디가 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킴볼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바울은 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바울을 축복하고 그의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하던 아나니아는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아나니아와 같은 스데반과 같은 바나바와 같은 인생을 살아서 많은 바울들을 키워 낼 수 있길 기도합니다. 우리가운데 가능성 있는 주님의 종들을 키우는 일에 전심전력하는 많은 잊혀진 영웅들이 나올 수 있길 기도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시대 세게 선교와 성서 한국, 캠퍼스 지성인 복음화 역사에 우리들을 택한 그릇으로 삼으셨습니다. 먼저 우리가 이 그릇 안에 남아 있는 자기 의와 자기중심성을 버리고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보배로운 구원의 복음을 담아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온 세상에 힘써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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