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도행전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한 빌립

이창무 2015. 12. 5.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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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한 빌립


말씀: 사도행전 8:1-40

요절: 사도행전 8: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우리는 지난주에 순교자 스데반에 대해 배웠습니다. 이번 주는 전도자 빌립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전도만큼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또 전도만큼 보람된 일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전도를 통해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 어두움 속에서 방황하다가 구원을 얻고 빛 가운데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의 열매를 한 번 맛 본 사람은 그 동안의 모든 해산의 수고와 고통을 다 잊어버리고 또 다시 전도의 씨를 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빌립이 어떤 자세로 전도자의 사명을 다하였는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전도자 빌립을 쓰셨는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도자 빌립을 잘 배워서 복음 전파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는 전도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스데반의 순교는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본격적인 박해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이 일에 앞장 선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을 뿐 아니라 앞장서서 교회를 잔멸하고자 했습니다. '잔멸하다'는 동사는 산돼지가 포도원을 파헤칠 때 쓰는 용어로서 '씨를 말리고자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휘몰아치는 핍박으로 인해 예루살렘에 있던 성도들은 유대와 사마리아 땅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핍박으로 인해 흩어진 성도들의 삶이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갑자기 피신을 해야 했기 때문에 머물만한 거처도 없었고 당장 끼니 걱정부터 해야 했습니다. 이제까지 평생에 걸쳐 쌓아놓은 삶의 터전을 하루아침에 잃어야 했고, 사랑하는 가족과도 생이별을 해야 했습니다. 이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참 슬프고 비참합니다. 그러나 흩어진 성도들은 무엇을 하였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흩어진 성도들은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기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두루 다니며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이처럼 큰 박해를 겪고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을까요? 이는 성도들의 가슴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이 불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같은 성령의 임재 속에 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불은 그 어떤 핍박으로 도저히 꺼뜨릴 수 없는 불이었습니다. 들판에서 난 불을 끄겠다고 막대기로 휘저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도리어 불똥이 사방으로 튀어서 온 들판을 다 태워버립니다. 가슴 속에 불을 품고 있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핍박하자 불이 꺼진 것이 아니라 복음의 불똥이 유대와 사마리아와 온 세상으로 튀어서 더 큰 성령의 불길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핍박으로 인해 성도가 흩어져 교회가 무너지고 복음 역사가 망하는 줄 알았는데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방으로 흩어진 성도들은 온 세상에 뿌려져 교회로 자라날 복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신비하고 놀랍습니다.


선교 역사에는 구심력적인 선교와 원심력적인 선교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구심력적 선교란 교회가 어두운 세상 속에서 언덕 위의 도시처럼 빛을 내고 있으면 그 빛을 보고 교회로 들어오게 하는 사역을 뜻합니다. 원심력적 선교란 교회가 흩어져 세상 속으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가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을 뜻합니다. 7장까지 보면 예루살렘 교회는 주로 구심력적 선교에 의해 성장해 왔습니다. 교회 안에 말씀이 있고 사랑이 있고 은혜가 있을 때 많은 예루살렘 주민들이 제 발로 찾아와 교회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구심력적 선교만으로는 사도행전 1:8절에서 예수님께서 주신 유언적인 세계 선교 명령,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시련과 핍박을 원심력으로 삼아 교회가 흩어져서 세계 선교 사명을 감당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17세기 영국에서는 청교도들이 무자비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신대륙 미국으로 건너가서 복음의 꽃을 활짝 피웠습니다. 우리나라 교회는 해방 전에는 대부분 북한 지역에 몰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 정권이 북한 땅을 들어서면서 기독교를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순교자가 나오고 교회가 불에 탔습니다. 이때 월남한 성도들이 남한 땅 곳곳으로 흩어져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결과 남한 인구의 25%가 복음화되는 큰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또 요즘 IS 때문에 온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그 지역에 남아 있던 소수의 기독교인들마저 IS에 의해 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중동 지역에서 IS가 저지르는 막장 짓을 보고 이슬람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의 늘어나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서서히 기독교에 마음을 열면서 철벽같이 단단했던 회교권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들이 현지 선교사님들로부터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를 볼 때 시련과 핍박이 오히려 복음 역사의 진보를 이루기 위한 사인이 될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시련 가운데서도 낙심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핍박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복음의 불씨가 살아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가슴 속에 복음의 불이 타오르는 사람은 어떤 이유로 어디를 가든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의 불씨를 가슴에 품고 온 세상에 흩어져 땅 끝까지 나아가 세계 선교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박해를 피해 사마리아 땅으로 내려간 사람 중에 빌립이 있었습니다. 만약 빌립이 유대 지역에서 성장한 히브리파 유대인이었다면 사마리아 지역으로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다시피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해묵은 민족적 장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빌립은 헬라 문화권에서 성장한 헬라파 유대인이었습니다. 덕분에 큰 거부감이 없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서 보니 사마리아의 상태는 심각하게 맛이 가 있었습니다. 그 땅에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들이 많았고 여기 저기 중한 병자들이 넘쳐났습니다. 마술이 횡행하고 각종 미신과 점술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소망이 없어 보이는 어두움의 땅, '헬사마리아'였습니다. 이 땅을 온 빌립은 무엇을 하였습니까? 어차피 틀려먹은 곳이니 박해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숨을 곳을 찾았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5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빌립은 그리스도를 사마리아 백성들에게 전파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빌립의 눈에는 이 어두운 땅이야말로 그 어떤 곳보다 그리스도의 밝은 빛을 필요로 하는 땅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은혜를 경험한 빌립은 사마리아 영혼들에 대한 빚진 자의 심정이 생겨 도저히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빌립이 이렇게 상한 목자의 심정으로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했을 때 어떤 역사가 있었습니까? 6-8절에 보면 무리들이 빌립의 전하는 말씀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 마음으로 그를 좇았습니다. 수 세기 동안에 걸쳐 우상과 미신숭배로 찌들어 있던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자 귀신이 나가고, 병마가 쫓겨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성에는 오랫동안 마술을 행해서 백성을 놀라게 하는 자칭 "큰 자" 시몬이 터줏대감노릇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빌립이 하나님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하자 시몬을 숭배하며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은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마술사 시몬까지 덩달아 세례를 받고 빌립을 따랐습니다. 8절을 보면 이때 그곳에 큰 기쁨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시몬의 마술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겁을 주기는 했으나 기쁨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사람을 살리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복음에는 사람을 살리는 힘, 구원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큰 기쁨을 줄 수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의 복음역사는 그 사회를 사로잡고 있던 악한 영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창조하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곳은 몰라도 사마리아만은 복음역사를 이루기가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온갖 우상과 잡신들이 판을 치고 이방의 혼합주의 문화가 뒤섞여 있는 이 곳은 정말로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빌립 한 사람이 분명한 복음신앙을 가지고 도전하고 개척했을 때 사마리아땅도 복음화가 되었습니다. 이를 볼 때 어느 곳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기만 하면 악한 영들이 물러가고 그 사회가 변혁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20세기 초 아시아 여라 나라들 중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가 파송된 나라는 1위가 중국이었고 2위는 일본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정치는 엉망이고 질병이 창궐하고 지독하게 가난하고 미신과 점술이 판치는 나라가 조선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헬조선이었습니다. 이런 땅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가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쉐핑 선교사님의 어머니의 경우는 조선땅으로 선교하러 가겠다는 딸과의 모녀의 인연을 끊어버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하여 졌을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선교사들이 오직 말씀의 권능을 믿고 복음을 전했을 때 1905년 평양대부흥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신을 버리고 거짓과 게으름을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뿐 아니라 지나친 음주와 흡연, 각종 인권 탄압과 차별과 같은 악습을 철폐하고 교육과 의료로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가는 일에 교회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 또 다시 청년들은 헬조선이라는 자조 섞인 말을 쓰면서 현실이 너무 힘들다고 아우성치고 있습니다. 반기독교 정서가 팽배해서 교회는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기만 하면 이 사회를 병들이고 있는 악한 영들이 물러가고 사회가 변혁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능력을 믿고, 믿음으로 도전하기만 하면, 변화되지 않을 사람, 변화되지 않을 나라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에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시대를 변혁시킬 수 있는 권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능력을 믿고 도전할 때 쾌락주의와 이기주의로 병들어가는 이 나라의 캠퍼스들도 능히 변화시킬 수 있음을 믿습니다. 또한 그렇게 변화된 청년들에 의해서 우리나라가 새롭게 되고 다시 한 번 더 도약하는 계기가 만들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 땅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땅에 도착해보니 아직까지 한 사람도 성령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을 보면 회개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즉시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복음을 영접하고 세례까지 받았지만 성령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성령 받기를 기도하고 안수를 하자 비로소 성령이 임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사마리아 땅에 성령을 내려주셨을까요? 만일 빌립이 세례를 베풀었을 때 성령이 임했다면,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편견 때문에, 그들을 그리스도 공동체의 지체들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마리아 사람들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로서 오랫동안 반목하고 있던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합하고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때 성령의 능력을 지켜본 마술사 시몬이 베드로를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얼마면 되겠소? 내가 짭짤하게 쳐줄 테니 안수하여 성령을 내리는 노하우를 내게 파시오." 시몬은 사도들이 손을 얹기만 하면 기적이 일어나자 저 기술만 배우면 떼돈을 벌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20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베드로는 시몬의 행위가 성령님을 모독한 큰 죄임을 지적하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악독한 마음을 회개하라고 하였습니다. 빌립은 시몬이 자기가 직접 세례를 준 양이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엄하게 책망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미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경험한 바가 있기 때문에 분명하게 책망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서 사마리아 교회가 물질주의, 인본주의에 오염되는 것을 초기에 차단하고 교회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말씀 공부를 하던 도중 '여기서 빌립에게서 배울 수 있는 전도자의 자세가 무엇입니까?'라고 제가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글쎄요. 여기서 빌립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요.'라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 말은 다른 뜻이 아니라 전도는 혼자 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합심동역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땅을 개척하였지만 그는 사마리아땅을 자신만의 선교지로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이 곳은 내가 개척했으니 내 땅이다" "내 sector니까 아무도 끼어들지 마" 하면서 자기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빌립은 사도들의 도움이 필요할 때는 적극적으로 예루살렘교회에 연락을 해서 사도들의 지원을 구했습니다. 또한 사도들도 지체없이 달려가서 성령세례를 베풀고 거짓된 마술사 시몬의 계략을 철저히 차단하였습니다. 이처럼 복음전도는 서로 동역을 해야만 합니다. 서로서로 장점을 인정하고 도움을 요청하고 동역을 할 때에 양들의 생명을 구원하고 사단의 공격을 막을 수가 있습니다. 전도의 목적은 내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양들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빌립은 황무지와 같은 사마리아땅을 개척하여 지금 한창 성령의 역사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사마리아를 떠나 허허벌판인 광야길로 내려가라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방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빌립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27a절을 보십시오. 그는 즉시 일어나 갔습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방향이라며 반발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못해서 구시렁구시렁하며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성령의 방향에 절대적인 자세로 순종하였습니다. 빌립이 성령의 방향에 순종하여 광야로 왔을 때 거기에는 누가 있었습니까? 27,28절을 보십시오.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대와 사마리아로 번진 복음의 불길을 저 하늘 위에서 지켜보고 계시다가 때마침 예배보고 돌아가는 한 아프리카 양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아프리카선교역사를 이루고자 하시는 뜻 가운데 빌립을 광야길로 서둘러 보내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오묘한 선교전략을 누가 감히 예측이나 했겠습니까? 단지 성령의 방향에 겸손하게 순종한 자만이 후에 그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깨달아 알 수가 있습니다.


대개 전도하면 함께 따라오면 부사가 하나 있는데 바로 '열심히'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는 열심히 전도한 사람에게 '전도왕'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줍니다. 맞습니다. 전도는 부지런히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는데 열심히 전도하되 성령의 방향에 순종해서 전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단편적으로 평면적으로 밖에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종합적으로 입체적으로 보십니다. 성령께서 베스트의 플랜을 짜 놓으시고 거기에 우리를 전도자로 불러서 쓰시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자기 생각, 자기 고집대로만 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쓰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순종의 사람을 귀하게 쓰십니다. 사도 바울도 아시아로 가서 전도하고자 했지만 마게도냐로 건너가라는 성령의 방향에 군말 없이 순종했습니다. 아시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아쉬운 일이지만 하나님의 구속 역사 편에서는 이 길이 베스트의 길이었습니다. 성령의 방향에 민감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양을 만납니다. 빌립은 준비된 아프리카 양을 만났고 바울은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나서 빌립보 교회를 세웠습니다. 우리도 성령의 방향에 민감한 전도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금 캠퍼스 어딘가에서도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양이 길을 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양을 찾아갈 성령에 민감한 전도자를 우리 중에 찾고 계십니다.


그러면 빌립이 만난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를 가진 내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머나먼 예루살렘까지 올 정도로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내시는 덜커덕거리는 수레에 앉아서도 열심히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는 검은 피부의 이방인이었고, 한 나라의 재무장관을 맡은 고위직 인사였지만 영적 소원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성령께서는 빌립에게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고 명하셨습니다. 빌립은 이번에도 지체하지 않고 성령의 방향에 순종하여 그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내시가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읽는 것을 깨닫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내시는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하며 빌립을 청하여 좀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빌립은 수레에 올라 내시와 함께 뒷좌석에서 일대일을 하였습니다. 내시가 읽고 있었던 말씀은 이사야 53:7,8절이었습니다.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내시는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자기를 가리킴인지, 타인을 가리킴인지 알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빌립은 미리 준비한 강의안이 없다며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미소를 띠며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리켜 복음을 전했습니다. 빌립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을 담대히 증거했습니다. 마침내 내시는 빌립과의 1:1 성경공부를 통해 큰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말씀들이 속시원하게 다 풀리게 되자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과 감격을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즉시 빌립에게 요청하여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정말 이렇게 소원 많고 빨리 영접하는 양만 있으면 목자생활 해 볼 만 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선생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내시는 영적 소원이 충만했지만, 성경말씀의 뜻을 깨달을 수 없어 답답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영적인 곳에 관심이 없는 것 같지만, 대화를 해보면 그 마음 깊은 곳에서는 말씀을 공부하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소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을 섬세하게 도와주고, 말씀을 적절하게 요리해서 먹여줄 수 있는 성경선생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틈새를 노려서 요즘 신천지라는 이단이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특히 교회에서 잘 다루지 않는 요한계시록을 가르쳐 준다는 미끼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전 성도의 성경선생화’를 지향하는 우리 모임이야말로 이 시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전도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떤 본문이 주어지던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실력 있는 성경 선생으로 준비된다면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성서한국, 세계 선교 역사에 귀하게 사용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힘써 성경을 배우고 익혀서 하나님께서 어느 장소, 어느 때에든 쓰실 수 있는 성경 선생으로 준비되어 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세례를 마치고 두 사람이 물에서 나올 때에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갔습니다. 빌립은 과거 블레셋 족속의 땅이었던 아소도 지방으로 가서 지중해 연안의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후에 가이사랴 지방으로 왔습니다. 빌립은 예루살렘 교회가 전도하기 힘들어하는 이방땅만을 골라서 다니며 열심히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한편 이디오피아 내시는 기쁨이 충만하여 마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구전에 따르면 그 내시는 에디오피아의 최초의 전도자가 되었고, 간다게 여왕까지 믿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에디오피아는 지구 상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독교국가가 되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사마리아 땅과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빌립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전도자 빌립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첫째로 빌립은 복음은 어떤 지역, 어떤 사람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둘째로 빌립은 복음 역사를 혼자서 독차지하려 하지않고 합심동역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셋째로 빌립은 성령의 방향에 겸손하게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넷째로 빌립은 준비된 유능한 성경 선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빌립을 쓰셔서 사마리아 성을 복음화하셨고, 에디오피아 내시에게로 인도하셔서 아프리카 선교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한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우리가 전도하기에 앞서 성령께서 먼저 계획하시고 먼저 사람의 마음을 준비시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를 믿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뿐만 아니라 빌립처럼 어떤 사람에게도 성경 말씀을 가르쳐줄 수 있는 성경 선생으로서 우리 자신을 준비해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에디오피아 내시처럼 영적인 소원을 가진 영혼들을 만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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