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도행전

스데반의 순교신앙

이창무 2015. 12. 1.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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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가을 사도행전 제 6 강



스데반의 순교신앙


말씀: 사도행전 6:8 - 7:60

요절 : 사도행전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좀 무겁습니다. 제목에 ‘순교신앙’이라는 말을 붙어 있어서,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을 듣고 순교를 준비해야하는가 하는 심리적 압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중 많은 분들이 예수님을 믿고 한창 은혜 받을 때는 ‘주님, 제가 순교하게 해주십시오’하고 일사 각오하며 열정적인 기도를 해보셨을 것입니다. 김모세 목자님도 한때 상당한 기간 동안 제가 순교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었다고 하십니다. 그러다가 서서히 내가 얼마나 연약하고 겁 많은 자인가를 발견하기 시작하면서 순교를 위해 기도한 것은 후회하시고 ‘주님, 제가 제 자신을 잘 알고 겸손히 신앙생활 하다가 천국가게 해주시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기도로 바꾸었다고 하셨습니다. 적지 않은 목자님들이 다 이런 과정을 밟으셨으리라 짐작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배우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하겠다고 큰 소리치기 보다는 오늘 주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에 깊이 감사하고 이 은혜를 믿음으로 감당하며 사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가 스데반의 주님께 대한 믿음을 잘 배우고 이제는 감사하므로 오직 주님 한분만을 사랑하고 섬기는 종들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도행전 6장 1-7절을 보면 교회 안에 제자들이 많아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많으면 문제도 많아집니다. 이런 만큼 사도들의 헨드폰은 쉴 새 없이 울렸고 또 ‘카톡’, ‘카톡’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습니다. 사도들은 이렇게 교회 안에 이런저런 일을 좇아다니고 접대하기에 바빴습니다. 이래서는 도저히 말씀을 준비할 수 없습니다. 사도들이라고 해서 입만 열면 명설교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고 원고를 준비하고 리허설도 하고 기도도 해야 합니다. 사도들은 이것에 대해 깊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자신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믿음과 성령에 충만한 사람 7명을 선출해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안수하여 구제 등, 교회 안에 많은 일들을 맡겼습니다. 이로서 교회는 말씀 중심의 역사를 잘 이루어갈 수 있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역할 분담을 하고 사도들은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을 전할 때 이런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세워진 일곱 사람 중에 스데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스데반은 어떤 사람입니까? 먼저 8절을 보십시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이뿐 만이 아닙니다. 그는 사도는 아니었지만 성경에 아주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9절에 보면 스데반은 구레네, 알렉산드리아, 길리기아, 아시에서 온 사람들과 회당에서 변론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정통 유대인들로서 성경에 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슨 말로 해도 스데반의 말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스데반은 성경을 많이 알고 있었고 또 올바로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그는 사람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참 구주임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종이요 교회의 주인이요 양들의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참으로 죄악됩니다. 인본주의 사상과 물질주의 가치관으로 깊이 병들어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주의 말씀과 은혜와 권능에 충만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스데반 같은 믿음의 사람들을 많이 세워주셔서 구원역사에 귀하게 사용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스데반이 이렇게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므로 사람들이 그를 능히 당하지 못하게 되자 그들은 사람들을 매수하여 거짓 증거를 하며 스데반을 공회에 고소했습니다. 스데반이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면서 나사렛 예수가 성전을 헐고 모세가 전해준 율법의 규례를 고치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스데반의 말을 사람들이 악의적으로 곡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렇게 고소했지만 스데반은 어떠합니까? 15절을 보십시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스데반은 고소되고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당해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때도 성령에 충만하여 그 얼굴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심령에 은혜와 믿음, 담대함이 충만하였던 것입니다. 충만한 사람은 어떤 위협이나 환경 가운데서도 위축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어려울 때 더욱 빛이 납니다. 


이제 7장을 보십시오. 대제사장이 ‘이것이 사실이냐?’하며 물었습니다. 이에 스데반은 그들 앞에서 아주 긴 변증적 강론을 합니다. 그의 이 강론은 복음에 대한 역사적 탐구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그의 강론 내용이 어떠합니까?


첫째, 그는 하나님은 그들 구원을 은혜로 시작하셨지만 이스라엘 조상들은 감사하지 않고 늘 하나님을 거스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2절부터 16절까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에서 시작해 그와의 언약과 축복을 말하며 이어 나타난 이스라엘 조상들의 죄악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친히 나타나셔서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데반은 이때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을 ‘영광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메소보다미아에 있는 우상들과 구별되어 천지를 창조하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며 참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말씀을 좇아 현재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고 있는 가나안 땅으로 왔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당대에는 아직 자식도 없고 발붙일 만큼의 땅도 주지 않으셨지만 그 땅을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 되어 그 땅에서 종이 되어 400년 동안 괴롭게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조상들은 종 삼고 괴롭혔던 나라를 심판하시어 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고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시고 그가 후에 이삭을 낳았을 때 8일만에 할례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할례는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그 약속을 살에 인친 것입니다. 그 후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열 두 조상을 낳았습니다. 스데반이 이렇게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과 언약의 할례을 상기시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그들이 이 땅에 거하게 된 것이 그들이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깨닫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된 것은 모세의 율법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위대한 은혜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것은 이렇게 시작부터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은 율법을 지킨다느니 성전에서 제사들 드린다느니 자기 의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겸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이러게 그들의 시작에 무엇이 있었는가, 곧 부르심과 일방적인 은혜와 언약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음을 말했습니다.  


실제 자기들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라고 자랑하는 그들의 조상들은 이런 부르심 이후 어떠했습니까? 과연 훌륭했습니까?  스데반은 계속 말합니다. 우리 조상 야곱이 열 두 조상을 낳았는데 형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노예로 팔았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죽이려고 했는데 르우벤이 막아서 그나마 노예로 팔아버린 것입니다. 팔아버리면 그를 사랑하는 아버지 야곱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은 아버지 야곱의 고통이야 어떻튼 미운 놈 일단 없애버리고자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조상들은 이렇게 그 근본이 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의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부어주셔서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애굽과 가나안 땅에 큰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어 다 굶어죽게 되었을 때 요셉이 그들을 불러 다 먹여 살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과거 그들의 죄악을 다 용서하고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을 애굽에 들어와 살게 해주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조상들은 이런 악한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요셉을 애굽의 총리요 그들의 구원자로 삼으시고 한량없는 긍휼로 그 조상들의 생명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스데반이 이렇게 말한 것은 그들의 죄악과 함께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아무 죄 없는 에수님을 시기하여 십자가에 못박았으나 하나님께서 살리사 영화롭게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은 자랑스럽습니까? 아닙니다. 그 열두 지파 조상은 악했습니다. 그런데 다만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17-43절까지의 이야기로서 여기서 스데반은 모세를 키우시고 자기 조상들을 출애굽시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애굽으로 옮겨간 이스라엘 백승들은 크게 번성하여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의 왕이 그의 조상들을 교활한 방법을 써서 조상들을 노예로 부려먹었습니다. 그리고 사내아이들은 태어나는대로 다 나일강에 던져버리게 했습니다. 이런 때에 태어난 모세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이여서 부모들이 석달 동안 집에서 몰래 기르다가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었을 때 나일강에 띄워 보냈는데 애굽 공주가 이 아기를 보고 건져내 공주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궁중에서 지도자로서 인간 기초를 쌓게 된 것입니다. 이런 그가 나이 40이 되어 그 형제 이스라엘을 돌보고자 했습니다. 하루는 백성 중 한 사람이 애굽 사람들에게 원통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고 그 애굽 사람들을 쳐죽여 원수 갚았습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이 자기 손을 통해 자기 백성들을 구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이튿날에서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이번에는 이들을 화해시키려는데 이때 동무를 해치는 사람이 모세를 밀어뜨리면서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어제 애굽 사람 한명 죽이더니 나도 죽이려느냐’ 하면서 배척했습니다. 이에 모세는 큰 충격을 받고 도주하여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나그네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모세는 바로 공주의 아들로서의 특권을 다 버리고 동족을 돕고자 했는데 그들은 이런 모세를 인정하지 않고 배척했습니다. 이것도 그들 조상의 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모세를 광야에서 키우시고 그 백성의 인도자로 예비하셔서 모세를 불러 그를 통해 조상들을 출애굽 시키셨습니다. 

이때 자기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 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나님은 애굽의 이스라엘 조상들은 크게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조상들이 배척한 모세를 다시 세워 그들을 인도하여 내게 하셨습니다. 애굽에서 열 재앙을 내리시고 홍해가 갈라지게 하시고 광야에서 40년간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리고 반석을 터뜨려 물을 내면서 그 백성을 보호해주셨습니다. 이 이야기도 요셉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조상들이 죄 가운데서 배척했던 모세를 통해 그들을 구원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 이스라엘 백성의 행위가 어떠했습니까? 출애굽 후 에 이때 조상들은 마음을 완악하고 하여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춤추며 기뻐하던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제대로 된 희생과 재물을 드리기는 커녕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들 등 온갖 우상을 만들어 섬기며 아주 죄악되게 하나님을 대적했음을 지적했습니다. 이랬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바벨론에게 망하고 그곳으로 다들 끌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오죽하면 이렇게까지 하셨겠습니까! 스데반의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이렇게 목이 곧고 불순종하며 우상숭배하며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원수로 갚고 제멋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역사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나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다 하고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율법을 주셨다하며 우리는 이 율법을 지키며 살고 있다며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 속에서 위대한 업적들만 기억하지 그 조상들이 얼마나 죄악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소위 말해 지우고 싶은 흑역사는 감추고 자랑스런 역사, 위대한 역사만 기억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그들은 교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상들의 죄를 안돌아보니 자기들이 얼마나 죄악된지를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잘못된 역사 인식으로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은 결국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야, 모세가 말한 ‘나와 같은 선지자’ 곧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스데반의 이야기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하시지만 옛날 조상이나 지금의 이스라엘이나 그 마음이 완악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데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역사 인식이 어떠합니까? 그가 본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어떠합니까?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구원의 은혜, 그리고 죄악된 배반의 역사를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악된 자기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긍휼히 여기시고 감당하시고 구원하시고 축복해주셨는가를 기억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런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정말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배우고 깨달은 것입니다. 

얼마전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에 이회창 전 국무총리가 방문해 방명록에 음수사원(飮水思源)이라는 말을 썼다고 합니다. 물을 마실 때는 그 물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생각해야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많은 특권을 자랑만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디서 시작한 것인지 음수사원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죄악된 자기들을 발견하고 자기들에게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러질 못해 감사는 없고 자기 주장이나 하고 완악하게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고 결국에 그리스도를 죽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구원과 영생의 축복이 어디서 왔는가를 잘 기억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성이 참 죄악됩니다. 우리가 누리는 이 모든 은혜와 축복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조상들의 죄악을 반면 교사삼고 음수사원하면서 겸손히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고 늘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셋째, 그는 참 성전되신 예수님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44-50절까지입니다. 본래 성전은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신 양식을 따라 만든 증거의 장막이었습니다. 이 장막은 텐트입니다. 이 증거의 장막은 하늘에 있는 참된 장막의 모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증거의 장막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임재해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가나안을 정복할 때 여호수아가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존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때에 성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성전은 아름답고 웅장했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이 지은 이런 곳을 집으로 삼으시겠습니까? 스데반은 이것을 성경의 선지자의 말을 인용해 지적했습니다. 4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으로서 하늘을 보좌 삼고 땅을 발등상으로 여기십니다. 이 말씀을 생각해보면 이 세상의 성전의 한계를 알 수 있고 그것에 매이기보다 성전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이 성전을 절대시 하여 어찌하든지 성전을 붙들고 여기에 못매달고 자랑하고 자긍하고자 했습니다. 결국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들의 고의적인 죄악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까지 스데반이 말한 조상들의 그 완악한 죄악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말의 결론으로 스데반은 그들에 담대하게 말합니다. 51-53절을 보십시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리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스데반의 이러한 말은 성전을 붙들고 있는 대제사장들에게는 아주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말에 의하면 그들은 이제 성전 건물에 매달리지 않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그 선지자 예수님께 관심을 가지고 그를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그들은 ‘오시리라한 의인’ 곧 예수님을 잡아 살인한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렇게 새로운 성전으로서의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54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스데반의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기는커녕 분해하며 이를 갈았습니다. 이를 가는 것은 웬만큼 분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극도의 분노 상태에서 반사적으로 생기는 현상입니다. 그들은 분노의 뚜껑이 열렸습니다.  스데반은 이런 가운데서도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보고 외쳤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56)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셔서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스데반을 영접하시고자 그 보좌에서 일어나신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감격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말을 듣기가 싫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합심하여 달려들어 돌로 쳤습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 스데반이 마지막으로 외친 말이 무엇입니까?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그는 자신의 영혼을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 맡겼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60) 그는 이 말을 하고 잤습니다. 그의 기도는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기도와 같습니다. 그가 어떻게 무서운 고통 가운데서도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이는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덧입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원수까지도 품고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스데반은 죽는 순간까지 예수님을 사모하여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갔습니다.


스데반은 영광스럽게 순교하였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순교는 그것으로 무의미하게 끝난 것이 아닙니다. 역사 속의 교회는 그의 순교를 늘 기억하며 그의 뜨거운 신앙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의 순교에 이어진 대대적인 교회 핍박으로 인해 교회는 세계 각지로 흩어지기 시작했고 이로서 복음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퍼져 나가는 세계선교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또한 안디옥 교회가 개척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11:19). 뿐만 아니라 박해자 사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쳐 그가 후에 바울로 거듭나는데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순교를 받으시고 복음 역사에 귀하게 쓰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많은 은혜를 기억하면서 스데반의 순교 신앙을 마음으로 잘 배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터툴리안은 ‘순교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졌습니다. 우리 나라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토마스 목사는 조선 땅을 밟자마자 대동강변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끝까지 신사 참배를 거부하시다가 감옥에서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 피신할 기회가 있었지만 끝까지 양떼들을 지키려 하시다가 순교하신 손양원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다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순교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신앙을 지키기 위해 피흘려 목숨을 바치는 순교를 가리켜 ‘적색 순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순교 신앙이란 꼭 피를 흘리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어려움과 환란이 있어도 그 믿음을 지켜나가는 신앙이 순교 신앙입니다. 이렇게 평소에 순교자적 삶의 자세로 사는 신앙을 가리켜 ‘백색 순교’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고 해서 돌에 맞을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감옥에 갇히는 일도 없습니다. 오히려 국회의원들이 표를 얻기 위해서 앞다투어 교회에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얼마나 좋아졌습니까? 그러나 이처럼 안정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으로 느슨해져서 사단의 유혹에 넘어지기 쉽습니다. 지금은 스데반 시대와 같이 비난과 핍박의 돌맹이가 아니라 안일과 쾌락주의, 물질주의가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대적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자신 안에 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안락을 추구하고 편함을 추구하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순교적 결단과 순교적 자세가 아니면 이러한 시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 시대는 우리에게 백색순교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나를 끊어버리고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하루하루의 삶을 순교하는 마음으로 살 때, 그 삶이 바로 순교의 삶입니다. 

사도바울도 친히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킴으로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바울에게 이런 백색순교신앙이 있었을 때 주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도 드리게 한 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느닷없이 뜬금없이 순교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백색순교자의 삶을 산 사람만이  적색순교자로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순교는 우리에게 먼 단어가 아닙니다. 순교는 우리가 사는 문화이며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음란하고 죄많은 세상에서 믿음의 순결을 지키며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우리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에 깊은 감사가 있을 때 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가를 알고 이런 나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알 때 가능합니다. 이를 위해서 내 인생에 대한 역사 해석을 스데반처럼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제대로 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 은혜에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는 믿음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래서 참된 사랑을 알고 자기를 부인을 배워 하나님의 뜻을 섬겨가면서 참된 순교 신앙을 우리의 삶속에서 조금 조금씩 구현해나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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