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시편

복 있는 사람

이창무 2015. 12. 1.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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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가을 바이블 아카데미 1 강


복 있는 사람


말씀 : 시편 1:1-6

요절 :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우리는 한 번 뿐인 인생인데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여러분들도 결국 행복하기 위해 대학에 들어오셨습니다. 대학 들어오려고 다들 10년이 넘게 고생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마음껏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죄송하지만, 지금부터 행복 끝 고생시작입니다. 인생이 그렇게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 삶은 광야와 같습니다. 생존을 위한 힘겨운 싸움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 생활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대학 시절 인생의 뿌리를 좋은 땅에 내리면 행복한 인생을 살수 있지만 뿌리를 엉뚱한 곳에 내리면 인생 망칩니다. 시편 1편은 우리가 대학시절 인생의 뿌리를 어디에 내려야 하는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행복한 삶을 원하십니까? 진정 행복한 삶을 원하신다면 시편 1편에 귀 기울여 주십시오. 오늘 말씀을 통해 참석하신 모두가 복 있는 대학생활, 복 있는 인생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복 있는 사람의 생을 드러내기 위해 일단 악인들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1)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사실 이 구절은 누가 복 없는 사람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악인의 꾀를 따르는 사람이고, 부귀영화를 좇아 죄인의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이고, 스스로의 성취에 도취되어 영혼이 굳어진 사람들입니다. 


순수하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악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미끄러져 들어가다가 결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따르고 서고 앉는다는 세 가지 상태로 이 과정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로 악인의 꾀를 따릅니다. ‘꾀’는 ‘일을 그럴 듯하게 꾸미는 교묘한 생각이나 수단’을 뜻합니다. 악인의 꾀는 달콤합니다. 손쉽게 부귀영화를 얻을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이처럼 달콤하기에 현혹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로 이 길이 정도가 아닌 줄 알면서도 죄인의 길에 서게 됩니다. 그 덕에 부를 얻고 명예를 얻고 쾌락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이 정도가 되면 자기가 얻은 성취에 도취되기 시작합니다. 세 번째 단계로 이 길이 잘 사는 길, 행복의 길이라고 굳게 믿으며 아예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버립니다. 


저는 이 1절 말씀을 보면 어린 시절 보았던 야바위 꾼이 생각납니다. 동네에 야바위꾼이 가끔 온 적이 있었습니다. 먼저 바람잡이를 풀어서 사람을 모읍니다. 바람잡이는 돈을 엄청 따고서 오늘 횡재 했다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그럼 동네 아저씨들이 모여듭니다. 야바위 꾼은 처음에는 사람들이 돈을 따도록 해 줍니다. 그러면 흥분한 어저씨들이 더 큰 돈을 걸기 시작합니다. 결과는 당연히 큰 돈을 잃습니다. 잃고나서도 본전이라도 따야겠다는 생각에 친구에게 돈을 빌려서 하다가 그것마저 털리고 맙니다.그러나 복 있는 사람은 이런 야바위꾼과 같은 이 세상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바른 길을 가고자 하며 한 눈을 팔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결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4절에서 시인은 악인은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예전에 농부들은 곡식을 추수한 후에 탈곡을 하고 바람이 부는 마당에서 키질을 했습니다. 그러면 무거운 알곡은 남고 가벼운 쭉정이는 바람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악인이 마치 이 쭉정이 같다는 것입니다. 도무지 무게감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뭐가 좋다고 하면 거기에 우르르 몰려갔다가 또 저기에 우르르 몰려갑니다. 어제는 이랬다가 오늘은 저랬다가 삶에 일관성이 없습니다. 열심히 산다고 산 것 같은데 뒤를 돌아보면 남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대에서 존재의 무게를 달아보시는 날이 옵니다. 이때 악인은 함량 미달로 탈락하고 맙니다. 내가 번 돈이 이만큼 됩니다. 내가 이룩한 업적이 이만큼이나 됩니다. 내가 부린 사람의 숫자가 이만큼이나 됩니다. 이런 항변을 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그 무엇도 그의 삶에서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생을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참 잘 살았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대학생 때는 그래도 인생에서 참 순수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패하고 타락한 기성 세대들에 대해서 분노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하지만 이것 한 가지를 아셔야 합니다. 그 기성 세대도 한 때는 여러분처럼 순수했던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보다도 불의에 분노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와 권력과 쾌락의 유혹에 이끌려서 죄인의 길에 서게 되었고 지금은 누가 뭐래도 내가 옳고 내가 잘 살고 있어라는 자부심과 오만으로 가득 찬 사람들로 변한 것입니다. 이 중에 '나는 달라. 나는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을 자신이 있어.'라고 감히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처음 얼마 동안에는 지조를 지키다가도 조금씩 허물어 지다가 결국에는 무너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악인이 판치는 세상에서 정도를 묵묵히 걷는 사람들은 도리어 어리석거나 융통성 없는 사람이라는 평을 듣게 마련입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왕따가 될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왕따가 본래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왕따란 '왕은 따로 논다'라는 뜻입니다. 제 아무리 많은 부와 권력과 쾌락을 누린다 해도 자기 영혼을 팔아 버리고 나서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결국에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는 공허한 인생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조금 손해를 보고 따돌림을 당하고 고생을 한다 하더라도 옳은 길을 똑바로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대학생 시절부터 이런 길을 가겠다는 결심을 하고 일생 그 길을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여기까지 듣고나면 이런 삶에는 아무런 재미도 없고 즐거움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여기서 여호와의 율법이란 하나님의 말씀 구체적으로 성경을 가리킵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주야로 그 말씀을 묵상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빵집 뚜레주르는 불어로 All the Day 즉 하루 종일입니다. 즉 복 있는 사람은 뚜레주르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말 성경 번역으로는 묵상한다는 말의 뉘앙스가 잘 전달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원어의 묵상하다라는 말은 짐승이 먹이를 앞에 두고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다라는 뜻입니다. 초원에서 사자가 얼룩말의 목을 붙잡고 표효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면 됩니다.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의자에 앉아서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에 잠기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말씀의 향기를 맡고 씹고 맛을 음미하고 삼키고 소화시키는 전 과정을 의미합니다. 


인생의 즐거움 중의 하나가 먹는 즐거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인지 요즘 티브이를 켜면 각종 먹방 프로그램이 넘쳐 납니다. 맛 있는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갑니다. 그런데 소문난 맛집의 그 어떤 요리보다도 더 맛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인스턴스 음식이나 패스트 푸드의 얕은 맛이 아니라 씹으면 씹을수록 깊고 진한 맛이 우러러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고 다양한 맛이 납니다. 많이 먹는다고 살이 찌거나 성인병에 걸리지 않고 먹을수록 우리의 영혼이 더 건강해 집니다. 성경은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좋은 말과는 클래스가 다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시편 19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이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보다도 더 달다고 노래하였습니다. 이렇게 맛난 하나님의 말씀을 아침 저녁으로 하루 종일 맛 보는 사람이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일대일로 성경을 공부하고 그 성경 말씀으로 메시지를 듣고 다시 소감을 쓰고 발표까지 해서 말씀의 맛을 알고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사람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요? 3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이 말씀이 기록된 배경은 유대의 광야입니다. 이곳은 연중 5-6cm의 비가 내리는 잠시의 우기를 빼고는 모두 비가 내리지 않는 건기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메마르고 거칠어 생명이 살지 못하고 폐허에 적막감이 감돕니다. 이 곳에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나무는 물이 없어 잎을 웅크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끝내 그 잎은 가시가 되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꽃에 대한 모든 기억은 사라졌습니다. 가끔씩 불어오는 모래 폭풍에 시달리다 보니 이제는 가시가 나고 독기마저 생겼습니다. 이 나무의 삶은 열매를 맺기 위한 삶이 아니라 하루하루가 그저 살아남기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습니다. 


여기 또 다른 나무가 있습니다. 이 나무는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였습니다. 나무는 물이 넘쳐 흐르는 시냇가에 뿌리를 내리고 수분을 끌어올립니다. 충분한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활발히 하여 영양분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니 보기 좋고 맛도 좋은 열매를 풍성하게 맺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무는 넓은 잎으로 그늘을 만들어 지나는 이의 쉼터가 되어주기도 하고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여 지저귀었습니다.


여러분이 한 그루의 나무라면 어떤 나무가 되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광야와 같은 우리 인생 가운데 잔잔히 흐르는 시내와 같습니다. 요한계시록 22:1을 보면“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7:38은 말씀합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인생 광야에는 누구에게나 극복하기 힘든 악조건이 있고 고난이 닥쳐오기도 합니다. 이 가운데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 메마른 광야 그 자체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는 극명한 차이를 가릅니다. 


환난은 우리를 좌절시키고 쓰러 넘어뜨리려 합니다. 하지만 로마서 5:3-4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이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환난과 싸우면 인내, 연단을 배우고 소망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자꾸만 일이 꼬이고 불행한 일이 닥쳐올 때 ‘내 인생은 왜 이런가’ 절망하게 됩니다. 이 때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말씀을 묵상하여 보십시오. 하나님 안에 실패가 없으며 불행처럼 보여도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는 한 과정임을 알게 됩니다. 


시험이 코 앞인데 두려움과 무기력에 짓눌려 공부는 안 되고 “에라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하고 계신가요? 디모데후서 1:7을 묵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절제의 영을 덧입고 다시 책을 펼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광야와 같은 인생에서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메마르지 않아 풍성하며 모든 일이 다 형통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혹시 성경의 경 자가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성경’의 ‘經’은 베나 천의 날줄 그러니까 세로줄을 일컫는 말입니다. 옛날 어머니들이 베나 가마니를 짜던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날줄을 먼저 틀에 걸어놓은 후에 북으로 씨줄을 넣고 바디로 내리칩니다. 중심이 되는 것은 날줄입니다. 우리 삶도 그렇습니다. 세로의 중심, 수직의 중심이 바로 서야 삶도 가지런해지는 법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의 날줄입니다. 여러분들의 대학 시절이야말로 인생의 날줄을 드리울 때입니다. 


본래 대학(university)은 진리 탐구와 자유로운 학문 연구를 통해 그 시대에 필요한 지도자 양성을 위해 세워졌습니다. 지도자는 진리를 알아야 하고 진리대로 살 수 있는 역량을 키우기 위해 대학 교육이 필요했습니다. 대학생이 되면 고등학교 때와는 달리 자유로운 가운데 공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자유를 잘못 사용하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대학 생활을 낭비해버리게 됩니다. 자유는 좋은 것이지만 잘못 사용하면 방탕으로 흐르게 됩니다. 

요한복음 8:31,32절을 보면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라고 나와 있습니다. 참된 자유는 진리를 아는 사람의 것입니다. 오늘날 대학은 직업인 양성소로 전락되었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이는 대학이 참된 진리를 놓친 데서 오는 어쩔 수 없는 결과입니다. 참된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오늘 참석하신 여러분들이 성경공부를 통해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인생 광야에서 생명수를 공급받아 열매 맺는 대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지금 무엇이 가장 시급할까요? 스펙이 될만한 영어 성적, 화려한 경력 사항을 추가하는 일일까요? 올 겨울 방학 때 일할 알바 자리를 구하는 것입니까? 물론 이런 것들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우리 인생의 행복을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대학생 시절은 인생의 날줄을 드리우고 결코 마르지 않는 생수의 근원을 발견하고 거기에 뿌리 내리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 인생의 날줄이자 생수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성경을 배우고 묵상함으로 복 있는 인생, 열매 맺는 인생, 하나님께 인정 받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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