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시편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

이창무 2015. 10. 7.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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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


말씀 : 시편 50편

요절 : 시편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편 50편은 아삽의 시입니다. 아삽은 다윗 시대에 헤만, 에단과 함께 성막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맡았던 찬양 인도자입니다. 어쩐지 저와 친근감이 드는 인물인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하나님께 아삽이 받은 말씀을 전하는 시편입니다. 우리가 이 시편을 통해 감사의 예배와 선한 행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해 돋는 곳은 동쪽입니다. 해 지는 곳은 서쪽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동편에서부터 서편까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부르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만민을 부르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이 오사 잠잠하지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삼키는 불이 있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만민을 시온에 불러 모으신 후에 입장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과 동시에 불이 치솟아 오르고 사방에서 쉬이익하며 미친듯이 바람이 불어옵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과 경외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모습으로 등장하시는 이유는 재판관으로 이곳에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법정에서 판사가 입장할 때는 재판정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일제히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판사가 먼저 앉은 후에야 나머지 사람들이 앉을 수 있습니다. 재판장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 후에 최후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는 초림하실 때처럼 그렇게 조용하게 오지 않으실 것입니다. 삼키는 불과 사방의 광풍과 함께 오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때는 심판을 주관할 심판장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산 자와 죽은 자, 세상의 동서 남북에 있는 모든 민족과 백성들을 다 한 자리에 모으셔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때 교회에 다녔던 사람들, 세례 증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나는 심판 받지 않을거야. 나는 신자이거든"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4절과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하나님은 가장 먼저 자기 백성, 성도들을 심판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그건 구약 시대의 일이이고 신약 시대에는 다르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동일한 사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마지막 심판 때에 양과 염소를 나누어 놓을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또한 밭에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두지만 마지막 심판 때에 이 둘을 갈라 알곡은 거두어 들이고 가라지는 불에 태울 것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미국의 1차 대각성 운동의 발화점이 된 조나단 에드워즈는  교회 안에는 참된 기독교와 명목 상의 기독교가 공존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매튜 미드라는 청교도는 교회 안에는 참된 그리스도인과 더불어 그들과 닮긴 했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닌 유사 그리스도인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최후의 심판대에서 열방을 심판하시기에 앞서 자기 백성을 먼저 심판하십니다. 심판하셔서 양과 알곡, 참된 기독교인들을, 또 염소와 가라지, 유사 기독교인들을 분리해 내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심판하여 이 둘을 갈라 놓는 기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먼저는 기준으로 삼지 않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하나님은 제물이 있고 없고 여부로 심판하시지는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물의 유무는 전혀 변별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수능 시험을 보고 나면 변별력에 대한 시비가 있습니다. 문제가 너무 쉽게 나오면 누구나 다 잘 보기 때문에 우열을 가릴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제물 문제에 있어서는 별로 탓할 부분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성전에 제물이 그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항상 성전에는 제물을 태우는 연기가 타올랐고 피냄새가 났습니다. 상번제라고 해서 아침 저녁으로 하루 두 번씩 드리는 번제를 제사장들은 꼬박 꼬박 빠지지 않고 드렸습니다. 물론 이 제물은 하나님께서 드리라고 명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순종은 귀하고 값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제물을 드린 사람들이 쉽게 빠지는 오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치 제물이 필요하셔서 가져오라고 하신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필요를 채워드리고 있는 셈이 아닐까? 하는 오해였습니다. 9절에서 13절까지 하나님은 그런 오해가 얼마나 부당하냐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이 뭐가 부족해서 제물을 인간에게 요구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헌신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없으면 역사 창조가 안 되기 때문에 필요한 인재인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없어도 얼마든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역사를 이끌어가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왜 필요도 없는 제물을 나에게 가져오라고 자기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왜 예배하고 헌신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일까요? 요절 말씀인 23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이유는 감사 때문입니다. 제사 제도는 인류의 보편적인 문화 현상입니다. 고대 이집트 문명에서도 제사가 있어도 남 아메리타 마야, 잉카 문명에서도 제사가 있었습니다. 지난 주 추석이었는데 우리 조상들은 이 날 조상신들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다른 모든 종교의 제사와 기독교의 제사는 이 지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서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이유는 그 신에게 제물을 바쳐서 환심을 사고 원하는 것을 얻거나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조상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상님들이 잘 돌와주어서 자녀들이 잘 되고 나쁜 일이 생기지 않게 해 달라는 기원을 담아서 추석에 차례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하기 위해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똑 같이 제물을 드려도 다른 종교에서는 이 제물이 일종의 신에 바치는 뇌물이지만 기독교에서는 감사의 표시가 되는 것입니다. 제 동역자가 학교 선생님이 학부모들이 가끔 찾아 와 선물을 주고 갈 때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같은 물건이라도 학기 초에 받으면 부담이 간다고 합니다. 웬지 앞으로 잘 봐달라는 뜻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학년이 다 끝난 후에 가져오면 별 부담이 안 생긴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감사의 뜻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제물을 가져가져더 라도 그 제물에 어떤 마음을 담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똑같은 제물이더라도 어떤 사람은 감사를 담지만 어떤 사람은 요구 사항과 반대급부를 담아올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신 이유도 이와 같지 않을까 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기 원하는 제사는 감사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런 제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이유도 우리의 감사를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여 주신 은혜,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나를 지명하여 부르셔서 자녀 삼아 주신 은혜, 장차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약속하여 주신 은혜, 쓸모 없는 나를 목자 삼아 주신 은혜, 이 모든 은혜에 감사하여 작은 진심을 표현하기 위해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의 물질이 필요하셔서 헌금을 하거나 우리의 노랫 소리가 필요하셔서 찬송 드리거나 하나님이 외로우실까봐 기도하거나 우리의 노동력이 필요해서 헌신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감사로 예배 드리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까? 오늘 말씀 16절부터 22절까지는 감사로 예배 드리지 않는 자의 삶이 어떻게 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16절을 보면 이 사람의 특징은 성경을 아주 잘 안다는 것입니다. 잘 아는 정도가 아니라 심지어 전하기까지 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그런데 삶은 어떻습니까?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17)" 성경은 기가 막히게 술술 말하는데 실제 삶에서는 말씀을 무시하고 살고 있습니다.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거짓말하고 비방을 일삼습니다. 그렇게 하고나서 하는 말이 더 기가 막힙니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21)" 말씀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삶을 살고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이 사람은 도리어 하나님은 내 편이다, 나는 잘 살고 있다, 신앙 생활 잘 하고 있다. 나야 말로 세상의 지혜자다 라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내 이런 사람의 죄악을 낱낱이 드러내시겠다고 하십니다. 지금이라도 돌이켜 회개하지 않는다면 내가 집적 너를 찢어버리겠다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도 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요절말씀과  이 부분을 통해서 한 가지 놀라운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감사로 예배 드리는 것이 행위를 옳게 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서 행위를 옳게 하려고 할 때 쓰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바로 당근과 채찍입니다. 옳은 일을 하면 당근을 주고 옳지 않은 일을 하면 채찍을 때려 옳은 일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제가 경영학에서 인사 관리를 배울 때 모티베이션 이론의 핵심 역시 이 당근과 채찍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당근과 채찍 이전에 있어야 할 것, 더 근본적인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데 바로 그것은 감사입니다. 감사가 있는 사람은 마음이 부드러워집니다. 감사는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동기를 만들어냅니다. 감사는 쓴뿌리를 치유하고 마음과 영혼을 건강하게 합니다. 감사는 사람을 겸손하게 합니다. 감사는 신실한 사람을 만들어갑니다. 그러나 원망과 불평은 마음을 딱딱하게 합니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게 만들고 점점 자기 중심적이 되게 만들어 갑니다. 마음의 병이 깊어지면 아무도 제어할 수 없는 괴물로 전락하고 맙니다. 지난 추석에 제 사촌 동생이 행패를 부려서 막내딸 예나가 눈 주위를 다쳤습니다. 제 큰집은 이 한 사람 때문에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촌은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엄마가 집을 나간 이후 세상에 대한 원망과 저주를 계속 키워오다가 이제는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인간 말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그에게도 감사할 이유도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누가봐도 정말 힘들고 척박한 환경을 살아온 사람인데 그 심성 만큼은 곱고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의 특징은 감사가 살아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예전에 성경에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말씀이 나오면 약간은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알아서 감사하도록 하지 감사하라고 명령을 하는 것은 약간 좀 치사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왜 성경이 우리에게 감사를 명하는지 이유를 좀 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감사는 하나님께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사하고 또 감사를 표현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병이 들고 메마르고 딱딱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악으로 기울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로 예배하는 사람은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사람이 될 것이고 결국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올바른 삶을 살고 싶고, 내 자녀도 올바른 삶을 살게 하고 싶고, 양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길 원합니다. 그렇다면 비결은 단 한 가지입니다. 내가 먼저 감사로 예배 드리고 감사의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녀와 양들이 감사를 배우면 자연스럽게 옳은 일을 행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들로 성장할 것입니다. 당근도 좋고 채찍도 좋지만 무엇보다 감사로 예배 드리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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