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시편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이창무 2015. 4. 30.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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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말씀 : 시편 4편 1절부터 8절

요절 : 시편 4편 1절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혹시 최근 열대야 현상으로 인해 잠 못 드는 밤을 보내신 적이 없으십니까? 열대야 현상이란 한 밤의 기온이 섭씨 25도씨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잠을 설치게 됩니다. 25도만 되어도 잘만 하겠는데 요즘엔 30도가 넘는 기온이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밤에 에어컨도 없으면 지옥의 문이 열리는 셈입니다. 하지만 기온이 올라가서 잠을 못 자는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열불이 나는 일이 있으면 역시 잠을 자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시편 4편은 별명이 하나 있습니다. 그 별명은 ‘저녁의 시편’입니다. 왜냐하면 이 시편은 저녁에 잠들기 직전에 묵상하면 좋은 시편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 시의 저자는 다윗입니다. 이 시를 언제 지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이때 다윗은 마음이 너무 열 받아서, 이 마음의 열대야 현상 때문에 잠을 통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의 마지막 절에서는 그는 평안히 눕고 자리니 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이 시편을 통해서 어떤 상황 속에서 깊은 잠을 잘 수 있는 내적인 평안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다윗은 무엇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고 있습니까? 2절에 나오는 인생들 때문입니다. 여기서 인생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권력자들을 말합니다. 권력자들이 다윗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습니까? 2절을 보면 다윗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였습니다. 이를 보면 이 시편이 다윗이 영광과 치욕을 모두 맛 본 이후에 쓰여진 시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였을까요? 아마도 압살롬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라고 추측합니다.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끼던 아들이 배신을 하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하루 아침에 어제의 영광이 오늘의 치욕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요즘 ‘명량’이라는 영화가 큰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얼마전 저도 동역자와 함께 이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 초반에 이순신 장군이 고문을 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순신의 연이은 승전을 조정의 대신들이 시기했기 때문입니다. 간신들이 이순신 장군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였습니다.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의 수군은 몰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복직된 이순신 장군이 가까스로 패잔병을 수습해 보니 경우 열두척의 배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을까요? 이 시편을 쓸 때 다윗의 심정도 이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영광을 얻은 후에 받는 치욕이라 더욱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다윗의 대적들은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였습니다. NIV 성경은 거짓을 구한다는 말을 거짓된 신들을 찾는다는 말로 번역하였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반면 다윗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3절에 나오는 경건한 자는 다윗 자신을 가리킵니다. 경건하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 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경건하지 않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 사는 경건한 다윗을 모함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다윗이 아주 곤란해 졌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였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여러 사람들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가 누구뇨” 과거에 사람들은 다윗을 신뢰했었습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라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에게 의혹이 생겼습니다. “과연 다윗이 우리에 좋은 일을 가져다 줄 사람일까?” “다윗 편에 서봤자 결국 손해를 보지 않을까?” “이제 줄을 갈아탈 때가 되었는가?” 이것이 그들이 가진 의심이었습니다. 다윗은 억울하게 수치를 당하였지만 사람들은 그 사정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겉으로 나타난 결과만 보고 다윗에게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 아니냐며 뒤에서 수군거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편하게 잠이 잘 수 있겠습니까? 분하고 원통해서 속이 시끄러울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센터 안에서는 더 경건할수록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나가면 정반대가 됩니다. 더 경건할수록 더 삶이 고달픕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없이 사는 불경건한 인생들 때문입니다. 우리가 경건한데 영광까지 얻게 되면 그들은 배가 아픕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든 우리의 영광을 깎아 내리고 욕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면 이제까지 중립 지키던 대다수 사람들도 의혹의 눈길을 보냅니다. 아무도 잘못되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고 눈치를 살피다가 강자 편에 붙으려고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고립된다는 느낌이 듭니다. 서러움과 외로움이 깊어지면 밤이 되어도 잠이 오질 않습니다. 아직 그런 밤을 경험해 보신 적이 없으시다고요? 아마 그런 분은 이 시편을 깊이 이해하기 어려우실 것입니다. 역시 시편은 고난 받는 자의 위로이자 친구입니다. 그렇지만 내 인생에서 앞으로 이 같은 고난을 겪지 않으리라고 누구도 장담은 못 합니다.

이런 밤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번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이 밤에 평안한 안식을 누릴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때 다윗은 무엇을 했습니까? 1절을 보십시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다윗이 선택은 기도였습니다. 다윗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을 붙들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내 의의 하나님 다시 말하면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불의한 자가 판을 치고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 핍박을 받는 이 비뚤어진 현실을 바로 잡으실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의로우신 하나님께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을 간곡하게 호소합니다. 다윗이 진정으로 원한 것은 다만 이 곤경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신앙인으로 그보다 더 깊은 갈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소원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음성을 들어주심’과 6절에서 기도하듯이 ‘하나님께서 주의 얼굴을 다윗에게 비추어 주심’ 이 두 가지였습니다.

우리가 누구의 말을 들어 주고 반응해 주고 그를 향해 얼굴을 돌린다는 말은 그 사람을 깊이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부부가 서로 등을 돌리고 잠을 잔다는 말은 두 사람 사이가 심각하게 좋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부부는 서로 말을 귀 기울여 듣고 눈을 마주칩니다. 부부 사이에 이런 사랑이 있으면 현실이 좀 어려워도 힘든 줄 모르고 극복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주위 사람들로부터 모함과 의심을 받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유지되는 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그 안에 거할 때 2절부터 5절까지처럼 오히려 대적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향해 권면해 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유지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수단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다윗이 누리게 된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입니다. 7절에서는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 한 기쁨을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에 주셨다고 말합니다. 또 8절에서는 이제 평안히 누워서 잘 수 있겠다고 합니다. 사실 지금 당장 현실은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다윗이 기쁘고 평안할까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내 음성을 들이시고 내게 얼굴을 향하시는 분, ‘하나님은 내 편’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담대하게 외칠 수 있었습니다.

밤은 평안과 안식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인생길을 걷다 보면 고민과 염려로 가득하여 잠 못 드는 밤을 만나곤 합니다. 이때 수면제보다 더 효과가 있고 부작용도 전혀 없는 처방책이 하나 있는데 바로 기도입니다. 열대야 때문에 더워서 잠 안 온다고 치킨을 시켜서 먹어봐야 살만 찌고 인생에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어차피 잠도 안 오는 그 시간에 기도를 하면 어떻겠습니까? 기도를 통해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찾아오면 스르르 깊은 잠에 곧 빠지게 됩니다. 시편 127편은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아침에 일어나자 드리는 새벽 기도는 익숙한 반면 자기 직전에 드리는 기도는 낯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림이라든지 영화 속에서 가끔씩 등장하는 것처럼 잠자리에 들기 전 침대 맡에서 드리는 기도는 매우 오래된 기독교의 전통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자기 직전에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내게 빛 난 얼굴을 돌리실 하나님을 묵상하며 기도한 후 잠자리에 들면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꿀보다도 더 달콤하고 바다 속보다 더 깊은 잠을 잘 수 있게 되실 것입니다. 아무리 낮 시간 동안 안 좋은 일, 험한 일, 괴로운 일을 많이 겪으셨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 시간 수요 찬양 기도회가 주 안에서 평안과 기쁨을 회복하는 귀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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