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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 있는 사람
    설교/시편 2015.05.02 23:54

    2001년 새해에 전한 강해 설교입니다.



    복 있는 사람


    말씀 / 시편 1:1-6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21세기의 첫 해가 지났습니다. 드디어 2001년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새해를 맞으면서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인사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인사 받기를 참 좋아합니다. 인사하는 사람은 세뱃돈을 받아서 좋아합니다. 그러나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무조건 복을 많이 받으라고만 하면 복이 굴러 들어옵니까? 어떻게 복을 많이 받으란 말입니까? 시편 1편은 우리에게 어떤 사람이 진정 복있는 사람이며 어떻게 복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올 한해 진정으로 복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비결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의인의 길 (1-3)


    1절을 보십시오.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이 말을 원문으로 보면 "복되도다 이 사람이여!"이라는 감탄사로 시작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까?


    첫째, 세상 죄악과 타협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1).


    1절을 보십시오. 시편 기자는 복있는 자가 타협지 않고 멀리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음을 말해 줍니다. 악인,죄인,오만한 자입니다. 복있는 자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합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합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합니다.

    여기서 "악인"은 경건치 않은 자 곧, 인격이 바르지 못하고 생각이 부도덕한 자를 가리킵니다. 이런 자들은 시대 조류에 잘 편승해서 살아갑니다. 스스로 현명하다 생각하고 적당히 요령을 피우며 삽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도 매우 현명한 자 같고 자기 실속을 잘 차리는 자 같습니다. 에스더서에 나오는 하만이 이런 악인입니다. 그는 유대인 모르드개가 자기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절도하지 않자 몹시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환심을 사서 모르드개는 물론 유다 민족까지 말살할 계략을 짰습니다(에3:5,6). 다른 한 예는 신약의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송사하기 위해 안식일에 한 손 마른 자를 이용했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까지 이용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권모술수를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악인의 꾀를 좇습니다. 여기서 좇는다는 것은 어쩌다 한 번 실수로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배우고 익혀 행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악인의 꾀를 좇는 것은 현실적으로 문제 해결이 빠르기 때문입니다. 또 당장 눈앞에 보이는 자기 욕심을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도 몸은 교회에 나가고 있지만 계획하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악인의 꾀를 좇는 경우가 많습니다. 각종 비리 사건에 교회의 장로, 집사들이 연루되어 있는 것은 이를 증명합니다. 많은 세무 공무원들의 부정이나 건축업자들의 부실공사도 그렇게 해야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빨리 부자가 되고 빨리 출세하기 위해 이런 부정과 편법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악인의 꾀에 빠진 사람들은 눈앞에 있는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지 그런 행동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 당할지는 생각지 않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자로서 적극적으로 죄악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대담하게 죄를 짓습니다. 육신의 본성대로 정욕과 쾌락을 좇아 살아갑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슬프시게 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죄인의 길에 서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죄에는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순간적인 쾌락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술취하고 방탕하고 음란한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한 마디로 재미가 있어서입니다. 또한 죄를 짓는 것이 너무나 쉽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가만히 내버려두면 자연히 죄와 가까워집니다. 죄를 짓기 위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쉽고 편하게 언제 어디서든지 즐길 수 있는 것이 죄의 특징입니다. 무엇보다 오늘날은 죄가 너무나 보편화되어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죄인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오만한 자"는 원어로 <레침>인데 이는 입을 삐쭉거리며 비웃고 조롱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런 자는 하나님에 대해서 모욕적이고 극악한 발언을 일삼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비웃고 조롱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교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없어 말씀을 들어도 두렵고 떨림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 말씀을 분석하고 판단합니다.


    이상을 살펴 볼 때 복있는 자가 적극적으로 피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하나님 없이 불 경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복있는 자는 세상 사람들의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쾌락적인 가치관을 좇지 않습니다. 교만한 무신론 사상과 인본주의 철학을 좇지 않습니다. 복있는 자는 세상 사람들이 서있는 죄악되고 부도덕한 죄인의 삶에 자신의 발을 들여놓지 않습니다. 복있는 자는 또한 오만한 자의 자리에서 내려 와 겸손하고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결국 복있는 자의 특성은 한마디로 하나님 없이 사는 자들과 구별된 자입니다. 죄와 타협하며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 앞에 구별된 인생을 사는 자입니다. 이는 세상에서 말하는 복된 자의 개념과는 다른 개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악인의 꾀를 좇아서라도 잘 먹고 잘 살기만 하면 행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잘먹고 잘 살기 위해 애쓰고 수고하며 부귀 영화를 누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물질의 풍요 속에서 부족함 없이 산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떠나 죄 중에 살 때 거기에 참 행복이 없습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린 복받은 자였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백성들의 섬김과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백전백승의 군인이요 시인이요 음악가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부귀영화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과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년에 안일과 정욕에 빠져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가 죄중에 있을 때 그의 인생은 결코 복받은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뼈를 깎는 고통과 괴로움 속에 살았습니다. 그가 가진 모든 좋은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이런 그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 하나님 앞에 죄를 자복하고 눈물로 회개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사죄의 은혜를 덧입고 영혼의 행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죄사함을 받은 자의 행복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 이를 볼 때 사람의 행복은 세상적인 것을 많이 가진 데 있지 않고 죄를 떠난 거룩한 삶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있는 자는 사람의 행복과 불행이 죄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죄의 소원을 적극적으로 다스리는 자입니다(창4:7). 어떤 희생과 아픔을 치루고서라도 죄를 멀리하는 삶을 사는 자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악된 길을 갈 때도 홀로 노아처럼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환경이 너무나 죄악되어 죄의 유혹이 끊이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 내면에는 죄를 즐기고자 하는 죄의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있는 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세상 죄악과 싸우는 영적 투쟁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죄의 낙을 누리는 데서 오는 순간적인 쾌락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크고 영원한 즐거움을 맛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즐거움이 무엇입니까?


    둘째,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2).


    그러면 복있는 자의 즐거움의 대상이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여호와의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이 복있는 자의 즐거움의 대상입니다. 다윗은 시편 19:7,8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즐거움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 죄악으로 지치고 피곤하여 시들해진 우리 영혼을 소생시켜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어줍니다. 세상을 힘있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심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이 기쁨은 세상적이고 육신적이고 감각적인 기쁨이 아닙니다. 신령한 영혼의 기쁨이요 참 기쁨입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기쁨이요 영원한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보다 우리의 눈을 밝게 합니다. 영적인 눈을 뜨게 하고 영적 분별력을 갖게 합니다. 영적 분별력이 있을 때 무엇이 선하고 악한 것인지 분별하여 죄악된 길을 피하고 의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두운 우리 인생 길에 빛이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을 때 실족하여 넘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연약한 내 자신을 이기게 하고 세상을 이길 능력과 힘을 줍니다. 


    시편 기자는 복있는 자란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영혼의 행복과 즐거움을 누리는 자입니다. 시편 119편 기자도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시119:131,147,148)"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성경을 열심히 사랑하고 묵상할 때 어떤 축복이 임합니까? 3절을 보십시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첫째, 항상 살아 있게 됩니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항상 푸르고 생명력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물이 풍부하여 산에 있는 나무나 시냇가에 있는 나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가 부족한 이스라엘에서는 그 차이가 현저합니다. 마른땅에 심긴 나무는 가뭄이 올 때 잎이 마르고 심하면 죽습니다. 그러나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흐르는 시냇물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수분과 양분을 공급받아 그 잎이 항상 푸르고 마르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심령에 말씀이 있으면 영적 생명력이 있어 눈동자가 살아 있고 마음에 사랑이 풍성하여 기쁨과 감사가 넘칩니다. 그러나 말씀이 없으면 매사에 자신이 없고 무기력합니다. 자신은 물론 남을 도울 힘도 없습니다. 어떤 조그만 어려움이라도 당하면 나무가 말라지듯이 그 신앙이 말라갑니다.


    둘째, 열매를 맺게 됩니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습니다. 말씀에 뿌리 내린 인생은 이처럼 탐스러운 열매를 주렁주렁 맺습니다. 열매는 내적인 열매와 외적인 열매가 있습니다. 내적인 열매는 말씀 앞에 회개하고 순종하는 자의 내면에 성령을 통해 맺어지는 인격의 열매입니다. 이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입니다(갈5:22,23). 외적인 열매는 생명구원과 제자양성의 열매입니다(마28:18-20). 사람은 누구나 열매 없는 인생을 슬퍼하고 하나님 앞에 열매 맺는 삶을 살고자 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소원과 의지로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말씀에 뿌리 내리는 생활을 할 때 열매를 맺습니다.


    셋째, 그 행사가 다 형통하게 됩니다. 이 말은 어떤 일을 하든지 잘되고 무조건 성공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로는 인생채찍과 사람 막대기로 훈련받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 인생을 종합해 볼 때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그 인생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셨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말씀대로 사는 자가 형통합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범사에 형통케 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창39:3). 이는 한 개인뿐 아니라 한 모임이나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18세기 영국이나 20세기 미국이 말씀 안에 거했을 때 하나님은 그 나라들을 형통케 하시고 세계사와 인류 구속 역사에 크게 쓰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개인이나 모임이나 민족은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형통하게 됩니다.


    II. 악인의 길 (4-6)


    4절을 보십시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악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의인처럼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치 않습니다. 하나님 없는 인본주의 철학과 사상을 추구합니다. 죄악된 길을 갑니다. 오만한 자리에 앉아 남을 판단합니다. 이런 자의 인생은 어떠합니까?


    첫째, 방황합니다.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겨는 알맹이가 없어 속이 텅 빈 곡식입니다. 곡식을 키질할 때 겨는 속이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바람에 불려 멀리 멀리 날려 갑니다. 이처럼 악인은 인생의 중심이 없기 때문에 바람 부는 대로 날려 가는 허무한 인생, 방랑자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정욕의 바람, 탐심의 바람, 증권 바람, 춤 바람 등 시대 풍조를 따라 살아갑니다. 죄의 유혹의 바람이 불어 올 때 견디지 못하고 타협하며 이리 저리 불려 다닙니다. 사단의 종이 되어 끊임없이 방황합니다.


    둘째, 심판을 받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악인은 심판을 받습니다. 농부가 추수 후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사름과 같습니다. 이처럼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그의 모든 죄가 다 드러납니다. 알곡과 쭉정이를 가를 때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합니다. 의인의 회중이란 하나님의 교회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악인은 지은 악으로 말미암은 죄의식 때문에 의인들과 함께 어울리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올 수 도 없습니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면 너무 슬픕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서 왕따를 당하면 얼마나 슬픔이 크겠습니까? 마태복음 22:13에 보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 자는 수족을 결박당한 채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진바 되어 그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왜 이를 갑니까? 죄가운데 속아서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살아온 허무하고 열매 없는 지난날이 분하고 억울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받는 형벌의 고통이 극심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국은 영원한 멸망입니다. 그러나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십니다(6). 하나님께서 돌봐 주십니다. 그 인생의 결국이 구원이요 승리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어떤 자가 진정으로 복있는 자인가 배웠습니다. 그 것은 시대 풍조를 좇아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자입니다. 세상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가르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 생명력이 왕성케 하시고 풍성한 생명구원의 열매, 제자양성의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성경을 열성적으로 묵상하는 말씀사랑의 역사가 충만히 일어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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