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시편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이창무 2015. 4. 30.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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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신년말씀 3 강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말씀 / 시편 119:129-136

요절 / 시편 119:130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2009년에 우리가 시편 119편 말씀을 총 아홉 번에 걸쳐 집중적으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지은 짤막한 표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 표어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긴급할 땐 전화 119. 갈급할 땐 시편 119.” 왜 갈급할 때 시편 119편을 찾아야 할까요? 시편 119편은 우리 갈급함을 채울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해결책은 바로 말씀입니다. 119편에 등장하는 교훈, 증거, 법도, 율례, 계명, 판단, 말씀, 약속, 이 여덟 개의 단어들은 모두 말씀을 가리킵니다. 왜 이렇게 말씀을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했을까요? 말씀이 모든 상황 속에서 모든 문제들의 해답이 되기 때문입니다. 2015년 우리가 삶의 모든 문제들 하나하나를 말씀으로 조명하고 말씀 속에서 해답을 얻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29절을 보십시오. “주의 증거들은 놀라우므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 시인은 주의 증거가 놀랍다는 말합니다. 주의 증거가 어떤 점에서 놀라울까요? 성경에는 우리가 다른 어떤 곳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놀라운 일들이 가득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말씀에 놀랐던 때는 대학교 1 학년 여름수양회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못 박은 무리들을 위해 드린 기도를 들었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원수들에게 저주문을 읊어도 시원치 않을 마당에 이렇게 대신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다니 정말 놀라웠습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제 영혼을 강타하고 존재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말씀이었습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일도 놀라운 일인데 어떻게 그런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을 주실 수 있을지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어디 이 뿐이겠습니까? 창세기를 공부하며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셨을 뿐 아니라 심히 기뻐하셨다는 사실, 나를 복의 근원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독서광이라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은 책들을 읽어 본 편이지만 이런 말씀은 이 세상 그 어떤 책에서도 들어 보질 못했습니다. 오직 성경에서만 들을 수 있는 놀라운 말씀이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성경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 구원의 경륜이 너무 놀라워 제 속에서 찬양과 경배가 저절로 흘러나왔습니다. 제가 얼마나 구원을 예정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했는지 막내딸의 이름을 예정이로 지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동역자의 격렬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성경의 이 놀라운 내용들은 절대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과 경험과는 정반대되는 말씀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늘에서부터 내려 온 이야기입니다. 곧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주의 증거가 놀랍기 때문에 내 영혼이 이를 지키겠다고 다짐합니다. 순종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경험한 사람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반응입니다. 누가 억지로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꺼이 순종합니다. 주의 말씀에서 놀라운 일을 발견하고 주님께 항복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양들은 제멋대로 살려 하고 자녀들은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억지로 따라올까요? 이는 주의 말씀에 놀라 본 경험이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내면에 말씀에 대한 생생한 체험이 없는데 어떻게 순종할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이런 상태에서 행동만 고치려고 하면 계속 잔소리만 늘어갈 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이 딱딱한 상태였다 하더라도 일단 말씀을 듣고 말씀을 체험하면 그 다음에는 행동이 바뀌고 삶이 변화됩니다. 작년에 저는 첫째와 둘째가 질풍 노도의 시기라고 불리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둘이 서로 다투기도 하고 특히 엄마에게 무례하게 험한 말을 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고민 끝에 찾은 길이 가정 예배였습니다. 2013년 9월부터 지금까지 매주 주일 저녁마다 말씀을 준비해서 가정 예배를 드렸습니다. 처음에는 가정 예배에 훈련되지 않은 아이들의 자세를 교정하느라 참 애를 먹었습니다. 매주 이번 주에 어떤 말씀을 나눌까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까지 거의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예배를 이루어 왔습니다. 그 동안 저희 가족이 받은 복과 은혜는 기대 이상으로 매우 풍성하였습니다. 제가 자녀들의 삶을 구석구석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적용이 아주 구체적이었습니다. 덕분에 말씀에 의해 섬세하게 가족의 삶이 조명되고 인도받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별 변화가 없어 보였지만 일 년 이상 꾸준하게 한 결과 자녀들의 자세가 달라지고 삶이 달라지는 모습이 보이고 있습니다. 제 동역자가 제가 전한 말씀을 매주 요약해서 카카오 스토리에 올리고 있는데 상당히 인기가 좋습니다. 김스테반 형제님이 말하기를 나중에 이것을 만화책으로 만들어 펴내면 대박 날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자녀이든 양이든 사람이 변화되는 길은 주의 말씀에서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예전에 이미 다 말씀에서 놀라운 일들을 경험한 바가 있습니다. 말씀에 의해 변화된 인생의 증거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입니다. 혹시 요즘에 더 이상 말씀에 놀라지 않고 계시지 않습니까? 혹시 이제는 알만큼은 알고 경험할 만큼은 경험했다 여기고 계시지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착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말씀에 대해 가진 경험과 지식은 성경이라는 바다에서 물 한 바가지 퍼낸 것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겨우 물 한 바가지 퍼낸 정도로도 이렇게 놀라운데 산소통 매고 풍덩 들어가 보면 얼마나 더 놀라운 세계가 펼쳐질까요? 말씀 속에 담긴 진기한 세계를 다 경험하려면 우리는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새해에는 우리가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말씀의 더 놀라운 세계를 체험하고 기쁨으로 말씀에 순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30절을 보십시오.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이제 시인은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춘다고 증언합니다. 말씀을 연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연다는 단어는 접히거나 닫혀 있던 것을 펼치고 여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평소에 성경책을 접힌 채로 덮어 둡니다. 그러나 덮어 놓고 성경을 읽을 수는 없습니다. 말씀을 열기 위해서는 일단 성경을 펼쳐야 합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우리가 성경을 펼쳤던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마침 성경 통독 수양회가 있는 바람에 저는 14시간 동안 성경을 펴고 로마서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를 다 읽었습니다. 그러나 평소에는 성경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유는 있습니다. 너무 할 일이 많고 바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시간이 있을 때 성경을 읽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성경을 여는 대신 스마트폰을 열고 인터넷을 열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난 주 두 분에게서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한 분은 제 아버지입니다. 일흔이 넘으신 아버지께서 지난 주 2014년에 성경 전권을 6회독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안 때문에 눈이 침침하심에도 불구하고 너무 열심히 읽으셔서 목에 병까지 생기셨습니다. 또 한 분은 안겸손 목자님이십니다. 송구영신예배 때 겸손 목자님은 지난 해 성경 전권 6회독을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직장 생활하랴 가정을 돌보랴 또 양들을 먹이랴 무척 바쁘셨을 텐데 언제 다 읽으셨는지 정말 존경합니다. 제가 이 두 분을 보면서 성경 읽기에 나이나 건강이나 시간이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 분을 생각하니 부끄럽고 2015년에 저도 성경 6회독은 해야 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안겸손 목자님이 1회독이 끝나면 또 새로운 성경을 사서 읽으신다는 말을 듣고 저도 따라서 하기로 했습니다. 연말에는 제 책꽂이에 손 때 묻은 여섯 권의 성경책이 꼽혀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임의 이름이 성경읽기 선교회입니다. 외부 사람들은 우리가 성경을 무지무지 많이 읽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우리 모두 2015년에는 우리 모임의 이름에 걸맞게 덮혀 있던 성경책을 열어 부지런히 읽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막상 목표를 세우고 성경 다독을 하자니 힘들겠구나 과연 될까 이런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듯 시동을 거는 것이 어렵지 일단 한 번 시동이 걸리고 나면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저절로 굴러 갑니다. 우리가 성경 읽기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습관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습관이 되고 나면 나도 모르게 틈이 날 때마다 성경을 펴서 읽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는 1,2월이 참 중요합니다. 이때 성경 읽는 습관이 몸에 붙으면 나머지 열 달도 계속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1,2월은 성경 읽는 습관을 만드는 달로 정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습관을 만들고 싶어도 혼자 하려면 그것이 또 쉽지가 않습니다. 사모님들은 작년에 성경 다독을 하지 않으면 서로 벌금을 내기로 해서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역시 사람은 돈이 걸려야 눈에 불을 켜고 하게 되는 모양입니다. 꼭 이런 방법이 아니라 할지라도 말씀 공부팀에서 요회에서 또는 가정에서 서로 서로 성경을 읽도록 권하고 격려해 주면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1,2월에 좀 벅차더라도 성경 읽는 습관만 제대로 형성한다면 올 한 해 동안 말씀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다 그렇게 승리하여 빛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의 말씀을 열면 어떤 일이 나게 될까요?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친다고 하였습니다. 빛이 비친다는 말은 곧이어 나오는 우둔한 자가 깨닫게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우둔함과 무지가 어둠이요 깨달음과 지혜가 빛입니다. 인간이 짐승들과 다른 점 중에 하나는 끊임없이 앎을 추구한다는 점입니다. 알아야 면장도 할 수 있다는 말이 있고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가 전자 제품을 사면 가장 먼저 매뉴얼을 열어서 읽어 봅니다. 매뉴얼을 봐야 이 제품을 어떻게 작동시키고 어떻게 가치 있게 사용할 수 있는지를 압니다. 사용법을 모르면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 할지라도 무용지물에 불과합니다. 하물며 우리의 삶에 대한 매뉴얼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주어진 삶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삶의 매뉴얼을 이리 저리 찾습니다. 누군가의 말이나 글에서 삶의 진실을 밝혀 줄 수 있는 힌트라도 얻고자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우둔해서 스스로 힘으로는 삶의 해답을 찾을 길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22절에서 인간이 범죄한 결과 스스로 지혜 있다하나 우준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지혜 있다 하는 현인들, 철학자들, 사상가들이 수많은 말들을 하지만 우리 인생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와 역사의 진실을 밝히 드러내기에는 늘 한계가 있습니다. 오히려 서로 제각기 다른 말을 해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인간이 가진 이성도 빛이 되어 우리의 무지를 밝혀 주기는 하지만 그저 경험되는 세계에 한해 부분적으로만 밝혀 줄 뿐입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보면 가장 첫 머리에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두 가지 지식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두 가지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나를 아는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반드시 알아야 할 이 두 가지 지식을 우리는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요? 제가 회사에서 소프트웨어 매뉴얼을 만드는 작업을 한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바로 그 소프트웨어를 만든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와 이 세상에 대해 가장 잘 아는 분이 누구일까요? 바로 나와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이십니다. 역사의 시작과 종말을 가장 잘 아는 분이 누구일까요? 바로 처음이자 끝이요 알파요 오메가가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분이 누구일까요? 바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곧 성경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기록했지만 단순히 인간의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입니다. 수천년 동안 수십명의 서로 다른 저자가 기록한 66권의 책을 묶었음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과 통일성이 있다는 점에서 이 성경의 진정한 저자는 하나님 한 분이심을 증언합니다. 이 성경이 내게 열릴 때 내가 누구이며 내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온 우주와 역사가 어떤 방향으로 향해 가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으시고 만질 수 없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과 지혜와 위대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 어두운 방의 창문에 드리워진 커텐을 활짝 열어 젖히면 환한 태양빛이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이처럼 말씀을 열게 되면 어두웠던 우리 마음에 성경 속에 담긴 지혜와 지식이 빛처럼 쏟아져 들어와 밝게 합니다. 마음이 밝아지니까 얼굴도 밝아집니다. 저는 수양회에서 찬양 인도를 할 때마다 이것을 느낍니다. 수양회 첫째 날이 인도하기가 가장 힘듭니다. 사람들의 얼굴이 어둡고 썰렁합니다. 그러나 둘째날 셋째날이 되면 사람들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이 느껴집니다. 찬양할 때 신이 나고 은혜가 넘칩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들이 말씀에서 빛을 받아서 마음이 밝아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감을 쓰다가 말씀을 받을 때 이와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소감을 쓰기 전이나 소감을 쓰고 난 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나 조건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소감을 쓰면서 말씀을 깨닫게 되면 마치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난 사람처럼 마음이 밝아지고 얼굴이 환하게 변합니다. 혼란스럽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다가도 말씀이 임하면 깨닫게 되고 방향이 생깁니다. 말씀이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어둠 가운데 헤매고 있을 것입니다. 말씀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자기를 파멸의 길로 이끌어 가는 어리석은 삶을 살고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주셔서 깨닫게 하시고 빛을 비추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말씀이 주는 빛을 체험한 시인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131절을 보십시오.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시인은 말씀을 지극히 사모합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입을 열고 헐떡일 정도입니다. 이는 극심한 갈증 가운데 물을 찾는 모습입니다. 저는 군대에서 행군하다가 목이 너무 말라 시냇가에 흐르는 물을 그냥 벌컥벌컥 들이마신 적이 있었습니다. 말씀에 대해 이 정도 갈급함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목자님이 말씀을 떠먹여 주실 때를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타는 목마름으로 말씀을 간절히 찾고 구하지 않겠습니까? 문수정 사모님의 요절 심포지움을 들어보니 서초 센터의 이정륜 자매님에게는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이 분이 집에서 안암까지 오는데 두시간 반이나 걸리는데 주일 예배 뿐 아니라 9시 영어예배까지 자발적으로 참석해 말씀을 듣고자 했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이 분에게 창세기 1강 첫 말씀 공부부터 '빛이 있으라'는 말씀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저도 한 10년 전 쯤에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간절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무도 제게 말한 적이 없는데 스스로 결심을 하고 토요일에 소감을 일곱 시간 내지 여덞 시간을 들여서 쓴 적이 있었습니다. 이 때 제 동역자가 왜 토요일에 가족과 시간을 안 보내고 소감만 쓰냐고 저를 핍박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오래 붙들고 씨름한 소감이지만 사실 별 특별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제가 말씀을 붙들고 이리 저리 씨름한 그 경험이 이후에 성경을 가르치거나 메시지를 전할 때 얼마나 든든한 기초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문제는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남의 이야기나 과거의 이야기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말씀을 얼마나 사모하고 있느냐 입니다. 2015년에 주님이 재림하신다면 모를까 분명 우리 앞에 크고 작은 힘든 일들이 또 있을 것입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은 힘들다고 말씀을 놓아버리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힘드니까 더욱 더 말씀을 붙들어야 정상이 아닙니까? 안 그러면 더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이 아니면 어디에서 위로를 얻겠습니까? 말씀이 아니면 어디에서 새 힘을 얻겠습니까? 새해 우리가 좋은 때나 힘든 때나 스피릿이 충만할 때나 영적으로 바닥을 기고 있을 때든 언제든지 말씀을 간절히 사모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32절부터 135절까지는 시인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모두 말씀이 역사하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말씀 역사를 위해 기도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132절을 보십시오.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던 대로 내게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간절히 찾고 구한다고 해서 무조건 말씀이 역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 역사는 궁극적으로는 내게 속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야 말씀이 열리고 빛이 임합니다. 말씀에 담긴 의미를 깨닫게 하는 일은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단지 말씀만 공부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사 성령님을 통해 말씀을 열어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133절과 134절을 보십시오. “나의 발걸음을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어떤 죄악도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소서 사람의 박해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법도들을 지키리이다” 신앙생활에는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이 있습니다. 내부의 적은 우리를 유혹하는 죄입니다. 죄의 유혹에 넘어가면 죄악이 우리를 주관하려고 합니다. 죄의 지배를 받아 이리 저리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끌려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죄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발걸음을 주의 말씀 위에 굳게 세워야 합니다. 말씀 위에 굳게 세운다는 말은 말씀이 지시하는 방향을 따라 한 발 한 발을 내딛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생길은 마치 죄라는 지뢰가 곳곳에 묻혀 있는 지뢰밭과 같습니다. 말씀은 이쪽에 지뢰가 있으니 밟지 말고 저쪽에 안전한 의의 길, 생명의 길로 가라고 지시해 줍니다. 우리는 그저 때마다 한 걸음 한 걸음 말씀의 길을 쭉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죄악이 감히 우리를 어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외부의 적은 사람의 박해입니다. 여기서 박해라는 말은 강한 압박을 뜻합니다. 우리는 말씀대로 살고 싶지만 주변에서 우리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사람들 때문에 말씀대로 살기가 참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직장 상사가 주일에 출근을 하라고 하면 참 난감합니다. 바람직하지 않은 일인줄 뻔히 아는데도 관행이니까 너도 무조건 따라와야 한다고 하면 참 쉽지가 않습니다. 크고 작은 압박을 견디기에는 우리 내면이 너무 연약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부의 압박으로부터 우리를 건져 주셔서 말씀을 준행하면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세번째 이유는 주님과의 교제를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135절을 보십시오.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서로 얼굴 한 번 보자 라고 말할 때는 만나서 밥도 먹고 대화를 하면서 교제를 나누자는 뜻입니다. 이처럼 주의 얼굴이 비추인다는 말은 주님과의 교제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 얼굴을 뵐 수가 없습니다. 또 감히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직접 뵐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교제할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 길이 무엇입니까? 바로 말씀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듯이 친밀한 교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 공부할 때 그저 몇 가지 성경 지식을 얻어 가는데 만족하지 말고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136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시인이 갑자기 시냇물 흐르듯 펑펑 눈물을 쏟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압박이 너무 힘들게 만들었기 때문일까요? 자기 처지가 너무 처량했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눈물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모하는 주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존중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오는 상한 마음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주의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아픔입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빛이 없는 어두움 가운데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떠난 시대와 양들을 향해 흘리는 목자의 눈물입니다. 이런 눈물은 자기연민의 값싼 눈물이 아닙니다. 보석처럼 귀한 눈물입니다. 말씀으로 인해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년 1 강 ‘질그릇에 담긴 보배’ 말씀을 통해 우리가 누구인지를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담고 있는 질그릇입니다. 신년 2 강 ‘십자가의 도’ 말씀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신 십자가의 도에 집중해야 합니다. 누구인지도 알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았다면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입니다. 오늘 신년 3 강을 통해 우리는 그 ‘어떻게’를 발견했습니다.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이 우리 속에 역사할 때 십자가의 도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빛을 비출 때 우리 안에 담긴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남은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실천입니다. 아무리 말씀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해도 정작 성경을 펼쳐서 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 열기를 실천한 사람의 2015년은 은혜와 진리와 놀라운 일들과 믿음의 승리가 충만한 한 해가 될 줄로 믿습니다. 시편 119편 시인의 고백이 새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의 증거들은 놀라우므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129, 130)”


(2015.1.4, 이창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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