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무엘상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이창무 2015. 11. 9.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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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말씀 / 사무엘상 17:1-58

요절 / 사무엘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는 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 중에 하나입니다. 이 이야기는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을 신뢰했으며 또한 어떻게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싸우는 진정한 용사 다윗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다윗의 파이팅 스피릿과 믿음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군대를 모으고 싸우고자 하여......” 당시 블레셋은 서쪽 해안가에, 유다는 산지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는 세계사적으로 청동기 문명에서 철기 문명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였습니다. 해양 민족인 블레셋은 철기 문명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고 철제 신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이스라엘은 여전히 구식 무기 밖에 없었었습니다. 이미 무기 체계에 있어서 양쪽의 객관적인 전력 차이가 큰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블레셋이 유다에 속한 소고까지 깊숙이 쳐들어왔습니다. 여기를 내어주게 되면 블레셋이 이스라엘 땅 한 가운데 교두보를 얻게 되기 때문에 사울왕은 이스라엘 군대를 이끌고 나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양쪽은 엘라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진영을 펼쳤습니다. 양 진영 사이에는 한 치도 늦출 수 없는 팽팽한 긴장과 전운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이때 블레셋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나왔습니다. 싸움을 돋우는 자란 자기 진영을 대표해서 싸우는 장수를 가리킵니다. 중국 고전인 삼국지에서도 ‘일기토’라고 해서 진영을 대표하는 장수들끼리 경합을 벌여 이기는 편이 전투의 승리를 가져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블레셋 진영을 대표해서 나온 장수는 그 유명한 골리앗이었습니다. 조선소에서 쓰는 거대한 크레인을 골리앗 크레인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 사람 때문입니다. 그의 키는 거의 3미터에 육박했습니다. 머리에는 놋 투구를 쓰고 몸에는 비늘 갑옷을 입었는데 갑옷의 무게가 55킬로그램에 달했습니다. 다리에는 놋 각반을 차고 어깨 사이에는 놋 단창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창 자루는 베틀채 같았고 창날의 무게는 6.6 킬로그램이었습니다. 게다가 전신을 보호할 수 있는 길고 거대한 방패를 든 사람이 따로 앞에 서 있었습니다. 정말 비주얼이 장난이 아니지 않습니까? 모습만으로도 압도적인 포스를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흡사 전쟁 기계 같은 그의 모습 앞에 보통 사람은 멀리서 그냥 보기만 해도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골리앗은 사십일 동안 아침저녁으로 하루 두 번씩 나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모욕하고 두려움을 심었습니다. 우리가 휴전선에 대북방송을 하듯이 이것은 블레셋이 펼치는 고도의 심리전이었습니다.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향해 사울의 신복이라고 표현한 것을 볼 때 사울왕을 향해 나와서 싸워 보라는 도발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은 나가지 않았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울 밑에 있던 이스라엘 군대는 더욱 두려워하였습니다. 사울의 용맹한 아들 요나단도 싸움에 능한 군대장관 아브넬도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아무 생각이 안 나고 손발이 마비됩니다. 제대로 싸움 한번 붙어 보지 못하고 앉은 채로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도자인 사울을 비롯하여 백성들 모두 두려움의 종이 되어 감히 골리앗에게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이때 뉴 페이스 다윗이 등장했습니다. 다윗은 베들레헴 출신으로 8형제 중 막내였습니다. 장성한 셋째까지만 군에 소집되고 다윗은 집에 남아 양을 치며 심부름을 하였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집에서조차 별 존재감이 없는 MBF 형제였습니다. 전투가 장기화되자 아버지 이새는 전쟁터에 나가 있는 아들들이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도시락 배달을 하도록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다윗은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살벌한 전쟁터를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가서 보니 엄청난 크기의 거인이 거친 목소리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골리앗이 나타나자 다 큰 어른들이 겁 많은 아이처럼 텐트 속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이런 모습에 가장 속이 타들아 가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골리앗을 죽이는 사람에게는 많은 재물을 주고 임금의 사위로 삼고 온 가족에게 면세 혜택을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흥! 죽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하며 썩은 미소만 날릴 뿐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갖은 모욕을 날마다 들으면서도 꾹 참고 또 참았습니다. 이제는 골리앗의 모욕에 익숙해져서 그 소리를 안 들으면 잠이 안 올 지경이었습니다. 스스로 보기에도 너무 비참했습니다. 자존감이 바닥을 친지는 이미 오래고 이제는 지표면을 뚫고 맨틀로 들어갈 것 같았습니다.


이때 다윗은 어떠했습니까? 사실 전쟁터에 처음 와 본 소년이 여기서 겁을 먹고 바지에 오줌을 지린다 하여도 누가 뭐라 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두려움 대신 영적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26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 다윗은 보는 눈이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보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냥 보통 군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였습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우는 군대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군대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군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군대가 모욕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군대가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도저히 잠자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다윗은 골리앗을 가리켜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라고 칭하였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의 어마무시한 외적 모습만을 보지 않았습니다. 골리앗을 할례 받지 않은 백성 곧 하나님께서 함께 할 수 없는 백성,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백성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골리앗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큰 형 엘리압은 옳은 말 하는 다윗에게 도리어 화를 버럭 내었습니다. "야! 이 막둥아! 네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허파에 바람이 들었구나. 일하기 싫어서 전쟁 구경하러 온 주제에 어디서 헛소리냐? 네가 중2병에 걸렸구나." 엘리압은 지금 진정으로 분노할 대상이 누구인지 전혀 분간을 못하고 있습니다. 정작 분노해야 할 골리앗에게는 찍소리 한번 못하다가 옳은 말 하는 다윗에게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화를 내고 있습니다. 무너져 내린 자존감에 힘들어 하다가 다윗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은 듯합니다. 엘리압의 책망을 들은 다윗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어찌 보면 아버지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는 큰 형 앞에서 꼬리를 내릴 수도 있었는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29절을 보면 다윗은 전혀 기죽지 않았습니다. “형님!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 이렇게 다윗이 전혀 요동함이 없었던 이유는 믿음에 기초한 내적인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가 본 영적인 현실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두 종류의 눈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들의 얼굴에 달려 있는 육신의 눈입니다. 이 눈으로 외부 세계를 관찰하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판단과 결정을 내립니다. 그런데 이 육신의 눈은 크기에 아주 민감합니다. 큰 것을 보면 기가 죽고 작은 것을 보면 업신여깁니다. 이것은 거의 본능적인 반응입니다. 그래서 어떤 동물들은 적을 만나면 최대한 자기 몸을 부풀려서 위협을 가하는 행동을 한다고 합니다. 사탄은 바로 이런 인간의 심리를 이용합니다. 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세상을 상징하는 바벨론이라는 성읍이 등장하는데 항상 그 앞에 '큰 성'이라는 말을 덧붙여 '큰 성 바벨론'으로 표현합니다. 이는 세상이 본질적으로 크기에서 나오는 힘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사탄은 골리앗처럼 크기로 위협하고 우리 마음에 두려움을 심습니다. 두려움의 종이 되게 하여서 도전의 의지를 꺾어버립니다. 이렇게 두려움에 빠진 사람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면 얼마나 큰 것들이 많이 볼 수 있습니까? 사장님은 책상도 크고 방도 크고 차도 크고 안 가봤지만 틀림없이 집도 엄청 클 것입니다. 캠퍼스도 왜 이렇게 큰지 모르겠습니다. 으리으리하고 럭셔리한 신축 건물 사이를 오가는 부티 나는 양들을 보면 다가가기가 좀 부담스럽습니다. 반면 나는 집도 작고 차도 작고 방도 작고 책상도 작고 키도 작습니다. 참 초라해 보입니다. 마음이 위축되어 감히 세상에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육신의 눈만으로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육신의 눈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영적인 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필요합니다. 영의 렌즈로 시력 교정을 해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영적인 눈이 있는 사람은 자기 앞에 놓인 현실을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풀어내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윗에게는 그런 눈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군대는 크게 보이고 골리앗은 작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영적인 눈을 뜰 수 있습니까? 26절에 보면 다윗은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라는 말을 합니다. 다윗의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죽은 하나님을 명목상 붙들고 있는 사람에게는 영적인 현실이 전혀 감지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영적인 분노도 없고 세상에 대한 도전도 없습니다. 껍데기만 남은 무기력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있고 또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사람은 영적인 현실이 생생하게 보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보이기 때문에 도저히 이를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 받는 세상에 대한 부대낌이 늘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영적인 분노가 일어납니다. 잠잠하게 있으려 해도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모험을 하고 세상에 도전을 하게 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을 보십시오. 70여명의 당대 최고 권력자들이 모인 공회 앞에서 그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죽였다. 당장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으라.' 사도들이 이렇게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도 예수 그리스도는 크게 보이고 세상 권력자들이 작게 보이는 영적인 눈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전도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시간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세상이 부담스럽고 양들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가 있을 때 우리는 담대하게 세상에 도전하고 복음을 전할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크게 보고 세상을 작게 보는 믿음으로 세상과 캠퍼스에 도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1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한 말을 듣게 된 사울은 두려움에 짓눌려 있다가 드디어 숨통이 조금 트일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데려오도록 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낙담하지 말라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는데 다윗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제가 골리앗과 싸우겠습니다.'는 결심을 밝혔습니다. 그 동안 사울이 간절히 듣고 싶던 말이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에게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아직 소년이었고 상대는 어려서부터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전사 골리앗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런 사울에게 자신의 경험을 말했습니다. "제가 양을 칠 때 사자나 곰이 나타나서 양의 새끼를 물고 가면 제가 쫓아가서 그 놈의 주둥아리를 쳐서 새끼를 구해낸 적이 많습니다. 만약 그 놈이 안 내놓으면 수염을 잡고 펀치를 날려서 아작을 내버렸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소년의 힘으로 사자와 곰을 맨손으로 때려잡을 수 있었을까요? 분명한 것은 이 일은 사람의 힘으로 될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럼 누구의 힘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일상의 삶 속에서 전능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였습니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체험은 소년 다윗의 영혼 속에 깊이 각인된 비밀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체험을 통해 살아있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믿음이 다윗으로 하여금 골리앗에게 도전할 수 있는 담력을 갖게 하였습니다. 만약 골리앗이 사자와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천하의 골리앗이라도 날렵한 사자를 이기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다윗에게는 오히려 골리앗이 더 쉬운 상대일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골리앗은 하나님의 원수인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은 만용이나 허세가 아니라 지극히 논리적인 결론이었습니다. 다윗에게서 나온 믿음의 말에 크게 감동을 받은 사울은 다윗의 출전을 기꺼이 허락하였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사울왕은 다윗에게 자기 군복과 놋투구와 갑옷과 칼까지 주었습니다. 왕의 무기와 갑옷을 입었으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나 다윗은 시험적으로 걸어 보다가 곧 다 벗어 버렸습니다. 군인이 아니라 양치기였던 다윗에게는 아무리 좋아도 익숙하지 않은 것은 오히려 방해물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대신에 다윗은 자신에게 익숙했던 물매를 들고 나갔습니다. 골리앗이 비록 온 몸을 투구와 갑옷으로 감쌌다 할지라도 노출된 부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마였습니다. 다윗에게는 물매로 돌을 날려 이 지점을 정확히 맞출 수 있는 빼어난 물매 실력이 있었습니다. 매끄러운 돌 다섯 개만을 챙긴 것을 볼 때 다윗은 적어도 5번 중 한 번은 반드시 급소를 맞출 자신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평소에 얼마나 물매 연습을 많이 했을까요? 또래 아이들이 스마트폰만 보고 게임에 빠져 있을 때 다윗은 날마다 물매 실력을 갈고 닦았습니다. 전쟁터에서 써 먹게 될 줄은 몰랐겠지만 양들을 잘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연습을 했습니다. 다윗은 이런 실력이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골리앗에게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전쟁이라는 특별한 상황, 그런 상황에서 빛을 발하는 다윗의 담대함과 용기에만 집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그런 특별한 순간이 오기 이전에 다윗의 일상의 삶을 주목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다윗이 보여준 놀라운 담력과 용기는 일상의 삶 속에서 차곡차곡 쌓아온 것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다윗은 무명의 양치기 소년으로서 삶을 사는 동안 두 가지를 쌓았습니다. 하나는 믿음의 히스토리였고 다른 하나는 실력이었습니다. 사자나 곰이 어린 양을 물고 가는 상황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도전해서 작은 승리들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일상의 사건들을 통해서 다윗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체험하였습니다. 또한 열심히 평소 물매 실력을 갈고 닦았습니다. 다윗이 이런 날이 올 줄 미리 알고 이 두 가지를 준비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기가 처한 상황 속에서 믿음으로 살고 최선을 다해 살고자 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결정적인 순간 이것들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연습'이라는 책의 주인공인 로렌스 형제는 파리 갈멜 수도원의 주방에서 일하던 요리사였습니다. 로렌스는 다른 수도사들은 고상한 일을 하는데 반해 자기는 하찮은 일을 한다고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방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길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 결과 로렌스는 그 어떤 수도사들보다 기쁨이 충만하고 경건한 사람이 되어 주위에 큰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회사에서 업무를 하고 집에서 살림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 나라 역사에 쓰임 받을 수 있는 무기를 개발할 수 있습니다. 저는 회사에서 프로젝트 마감일이 다가오는데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 종종 회사 옥상에 올라가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손길을 체험하곤 했었습니다. 이런 체험이 제 믿음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해 주었습니다. 또한 요즘 저는 캠퍼스 런치 미팅을 섬기면서 사모님들의 요리 솜씨에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사모님들이 맛집보다 더 맛있는 음식을 해 주셔서 런치미팅에 온 형제들이 항상 ‘맛있다’를 연발하면서 폭풍흡입을 하고 있습니다. 평소 갈고 닦으신 요리 솜씨가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일관된 원리는 하나님께서는 작은 일에 충성된 사람을 쓰신다는 사실입니다. 그야말로 일상 속에서 평소 삶 속에서 믿음과 실력을 키울 때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준비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소소한 일상 속에서 믿음을 배우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각자 열심히 갈고 닦은 주무기 하나씩을 준비하여 이를 오병이어로 드림으로 하나님 나라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다윗을 본 골리앗의 반응이 어떻했습니까? 골리앗은 다윗의 용모를 보고 업신여기고 무시했습니다. 다윗의 용모가 아름다웠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칭찬의 말이 아닙니다. 요즘 꽃미남 스타일이 여인들에게 인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남자들은 보통 이런 남자를 기생오라비 같다고 하면서 싫어합니다. 골리앗의 눈에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설치는 모습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다윗이 아무 무기도 없이 지팡이 하나 들고 나온 것에 더욱 화가 났습니다. 자신을 희롱하는 것 같아 뚜껑이 열렸습니다. 다윗을 죽이고 그 시체도 거두지 못하게 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이때 다윗은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골리앗은 자기의 몸집과 칼과 창과 단창을 믿었습니다. 우월한 조건을 가진 자기가 절대 질 수가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칼과 창과 단창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골리앗에게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나와 함께 하시고 그 능력을 베푸시며 승리하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다윗은 전쟁의 승패가 군사력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라는 이 신앙 고백은 구약 시대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을 많이 기르지 말고 병거도 만들지 말고 많은 군대도 두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은 무기와 숫자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우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재 모든 성도들은 영적 전쟁 중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 복음의 원수들과 주님 오실 때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지상의 교회를 가리켜서 전투하는 교회라고 부릅니다. 세상은 골리앗처럼 거대해 보이고 물량 공세를 퍼부어서 성도들을 정신 차리지 못하게 합니다. 세상은 돈과 권력과 숫자의 힘으로 밀어붙이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무기는 돈이나 권력이나 숫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무기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서면 하나님께서 내 편이 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이길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 토요일 10월 31일은 종교 개혁 기념일이었습니다. 이 날은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11개조의 반박문을 붙인 그 날입니다. 우리 찬송가에는 마르틴 루터가 지은 찬송가가 하나 들어 있습니다. 바로 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입니다. 이 찬송가의 가사는 마르틴 루터가 카톨릭 교회가 소집한 종교 재판에 불려 나갈 때 썼다고 합니다. 상대는 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각국의 왕들도 호령하던 교황 세력이었습니다. 반면 루터는 혈혈단신 혼자였습니다.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그런데 이때 루터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만군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싸우신다고 노래하였습니다. 한사람 루터에게 이 믿음에서 나온 용기가 있었기에 복음 진리가 다시 회복되고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이 믿음의 고백을 한 성도들에 의해 하나님 나라는 지금까지 전진해 오고 확장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고백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음의 원수들과 맞서 싸우는 하나님의 용맹스러운 군사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큰 소리 치던 골리앗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윗은 물매를 던져 한 방에 골리앗의 이마에 명중시켰습니다. 돌이 이마에 맞고 땅에 떨어지지 않고 아예 박혀버렸습니다. 물체의 질량이 작아도 속도가 빠르면 큰 에너지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던진 물맷돌에 엄청난 가속도가 붙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이 이마에 박히고 두개골이 파열된 골리앗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결과가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목베임을 당하고 새와 짐승의 먹잇감이 된 쪽은 소년 다윗이 아니라 거인 골리앗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승리 덕분에 이스라엘은 사기가 충천했습니다. 반면 블레셋은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도시 국가 코앞에까지 진격해 들어가고 진영을 노략하였습니다. 다윗의 승리 덕분에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다윗은 무명의 양치기 소년에서 이스라엘의 떠오르는 별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야성을 잃었다는 말을 많이들 합니다. 세상의 도전 앞에 무기력한 교회의 모습을 목격하곤 합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야성을 회복할 때입니다. 파이팅 스피릿을 회복할 때입니다. 야성이란 거칠고 무례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믿음의 야성이란 하나님으로 이름으로 두려움 없이 거침없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믿음을 말합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이런 믿음의 야성을 가진 사도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우리 모임의 역사도 이런 믿음의 야성과 파이팅 스피릿으로 이루어 온 역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 싸우는 믿음의 용사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가을학기 우리에게 살아있는 믿음과 파이팅 스피릿을 부어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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