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가을 특강 / 이창무
내 아들 압살롬아
말씀 / 사무엘하 18: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서론 : 가족의 빛과 그림자
이번 주는 민족의 큰 명절, 추석입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안부를 나누고, 한 해의 수고를 위로하며, 감사의 마음을 나누는 아름다운 절기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명절은 우리의 가정과 관계를 깊이 돌아보게 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오랜만에 만난 가족 사이에 반가움만큼이나 서운함이 스며들고, 밝은 웃음 뒤에는 쉽게 풀리지 않는 오해와 상처가 자리하기도 합니다.
이런 인간관계의 복잡함과 아픔은 성경 속에서도 낯설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의 가정에서 일어난 비극을 보여줍니다.
세상 누구보다 성공했고,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처럼 보였던 다윗.
그러나 그 화려한 왕궁 안에도 눈물과 상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지만 다가갈 수 없었던 아버지와 아들, 이해하고 싶었으나 끝내 닿지 못한 마음—그 결과는 참혹한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윗은 아들의 죽음 앞에 무너져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이 통곡은 단지 한 왕의 슬픔이 아니라, 사랑하지만 붙잡을 수 없는 모든 인간의 울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의 눈물을 통해 사랑의 한계와 하나님의 자비를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추석을 맞이한 이 시간, 우리의 관계 속에 남아 있는 상처를 돌아보며,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위로와 회복을 누리시기를 소망합니다.
1. 화려함 뒤에 가려진 깊은 상처와 비극
다윗의 가정은 겉으로 보기에 화려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하 13장을 보면, 다윗의 아들 암논이 이복 누이 다말을 강간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다말은 압살롬의 친누이였습니다.
성경은 다윗이 이 소식을 듣고 “심히 노하였으나”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자신이 밧세바와 범한 죄 때문일 것입니다.
간음죄를 범한 자신이 어떻게 아들의 성범죄를 엄하게 다룰 수 있었겠습니까?
압살롬은 2년을 기다렸습니다.
아버지가 정의를 세워주기를, 누이의 수치를 씻어주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압살롬은 직접 형 암논을 죽이고 3년간 도피 생활을 합니다.
3년 후, 요압의 중재로 압살롬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다윗은 2년 동안 그를 만나주지 않습니다.
같은 도시에 살면서도, 추석이 되어도 설날이 되어도 압살롬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합니다.
그가 얼마나 답답하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마침내 압살롬은 반역을 일으킵니다.
단순한 권력욕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깊은 실망과 분노, 그리고 인정받지 못한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사무엘하 15장부터 18장까지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내전을 기록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칼을 겨누는 참혹한 전쟁입니다.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 다윗은 군대 지휘관들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하니”(사무엘하 18:5a)
“나라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정의를 위해서”도 아닙니다.
오직 “나를 위하여”입니다.
왕으로서가 아니라 한 아들의 아버지로서 부하들에게 간곡히 부탁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압은 다윗의 명령을 어기고 압살롬을 죽입니다.
압살롬이 나귀를 타고 가다가 머리카락이 상수리나무에 걸려 매달려 있을 때, 요압은 창 세 개를 그의 심장에 찔러 넣습니다.
전령이 다윗에게 소식을 전합니다.
“왕이여,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반란은 진압되고 우리가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가장 먼저 묻는 말은 이것입니다.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전령은 말합니다.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왕의 원수, 내란 우두머리가 죽었습니다.”
다윗의 귀에 남은 단어는 단 하나였습니다.
“압살롬이 죽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펼쳐집니다.
함께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사무엘하 18:33)
다윗의 외침에는 세 겹의 울림이 있습니다.
첫째, “마음이 심히 아파” 입니다.
아프다는 말은 원어로 흔들린다는 동사입니다. 다윗은 심히 흔들렸습니다. 더 이상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무너진 한 아버지였습니다.
둘째, “내 아들아” 입니다.
그는 다섯 번이나 “내 아들”이라 부릅니다.
반역자도, 배신자도 아니라 끝까지 아들입니다.
셋째,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입니다.
다윗은 압살롬 대신 차라리 자신이 죽기를 갈망합니다.
2. 사랑 안에 남겨진 인간의 한계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를 돌아보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도 얼마나 많은 오해와 상처가 있을 수 있는지를 봅니다.
압살롬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압살롬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암논이 내 여동생 다말에게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정의롭지 못하시다.
아버지는 나와 다말을 사랑하지 않으신다.”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도망간 후 3년, 돌아온 후 2년, 총 5년 동안 아버지와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나누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미워하고 거부한다고 단정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왜 아버지가 암논을 처벌하지 못했는지, 왜 자신을 만나주지 않았는지, 그 복잡한 내면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다윗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다윗은 암논과 압살롬 두 아들 모두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왕으로서의 공의와 아버지로서의 사랑 사이에서 갈등했습니다.
암논을 어떻게 처벌해야 할까?
압살롬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다윗 자신도 밧세바 사건으로 인해 깊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우리아를 죽게 한 자신이 어떻게 아들의 살인죄를 엄하게 다룰 수 있겠습니까?
다윗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권위를 잃은 상태였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을 만나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만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도무지 무슨 얼굴로, 무슨 말로 아들을 대해야 할지 몰랐을 것입니다.
다윗도 아들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압살롬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그 분노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얼마나 아버지의 사랑을 갈망했는지 깊이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서로가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 관계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습니다.
부모의 잠 못 이루는 밤과 수많은 기도가 자녀의 인생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자녀에게는 때로 간섭처럼, 부담처럼 느껴집니다.
종종 자녀는 부모의 기대와 바램과는 정반대의 길로 가곤 합니다.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도대체 왜 저럴까?”
부모는 탄식합니다.
자녀 역시 부모를 향해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칩니다.
“왜 부모님은 항상 이러실까? 왜 나를 믿어주지 않으실까? 나를 이해하지 못하시는 걸까?”
그들의 말 속에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 사랑받고 싶은 갈망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서로 엇갈립니다.
서로 사랑하지만, 서로의 마음이 닿지를 않습니다.
배우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십 년을 함께 살아도 상대의 마음을 완전히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함께 식탁에 앉아도, 같은 집에 살아도,
때로는 마음의 거리가 지구 반 바퀴보다 멀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미묘한 침묵 속에 오해가 쌓입니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가족의 말을 듣고 행동을 관찰하고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그 마음의 전부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끝까지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의 남아 있습니다.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은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느니라”(잠언14:10)
잠언의 이 말씀은 안타깝게도 사랑하는 가족 사이에서도 여전히 진실입니다.
또한 다윗은 아들을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단순한 부모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절대 권력을 가진 자였습니다.
한마디면 천 명의 군대가 움직이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혜로운 왕이었으며
수많은 전쟁과 위기를 겪으며 쌓은 풍부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권력과 지혜와 경험으로도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람의 마음은 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왕이라도, 아무리 지혜로워도,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사람의 마음을 강제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압살롬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분노와 상처, 복수심과 야망을 다윗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구원할 수 업습니다.
오히려 바꾸려 하면 할수록 관계가 더 힘들어지고 사이는 더 벌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 길로 가면 안 되는데, 자기 인생을 망칠 것이 뻔한데 하면서도
선뜻 나서지 못합니다.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3. 사랑, 그리고 대속의 복음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압살롬이 아버지를 배신했다고 해서 다윗의 사랑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윗은 “내 아들 압살롬아”라고 다섯 번이나 외칩니다.
‘반역자 압살롬’이 아닙니다. ‘배신자 압살롬’이 아닙니다. ‘원수 압살롬’이 아닙니다.
끝까지 “내 아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의 본질을 봅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이 나를 배신하고 상처를 줄지라도 끝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를 떠올려 보십시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달라고 했을 때 주었습니다. 막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먼 나라로 떠날 때도 붙잡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통제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먼 곳을 바라보며 혹시 아들이 오는지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달려가 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내 아들아!”
이것이 참된 사랑입니다.
통제하지 않되 포기하지 않는 사랑.
자유를 주되 기다리는 사랑.
돌아올 자리를 항상 비워두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계속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조건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에 조건을 붙입니다.
“네가 이렇게 하면 사랑해 주겠다.”
“네가 저렇게 하지 않으면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
“네가 바뀌면 다시 사랑하겠다.”
이것을 조건적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바뀌지 않아도 네 곁에 있겠다”는 것입니다.
“네가 바뀌면 사랑하겠다”가 아니라,
“네가 바뀌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행동이나 선택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배신하고 등을 돌릴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이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이 말 속에는 깊은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랑입니다.
모든 참된 사랑은 대속적 사랑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죽을 수 없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대신해서 죽는다고 해서 압살롬이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압살롬이 구원받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후손이,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실제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압살롬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배신하고 반역한 자들이었습니다.
우리의 뜻대로, 우리의 욕심대로 살면서 하나님을 멀리했던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다윗이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이라고 바랐던 그 소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로 성취되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
십자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바뀌면 사랑하겠다”가 아니라,
“네가 여전히 죄인일 때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결론: 사랑하고, 그리고 맡기라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을 아십니까?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한 가족의 사랑과 비극을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맥클레인 목사는 은퇴 설교에서 도박에 빠졌다가 시비가 붙어 살해 당한 자신의 둘째 아들 폴의 비극적인 죽음을 기억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진실은, 우리는 결코 그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가족 안에서도, 가장 깊은 유대 안에서도 여전히 신비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재능과 고통과 심지어는 파괴를 볼 수 있지만, 그들의 마음 전체를 다 보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그들을 바꾸거나 구하고 싶어 하지만, 종종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사랑하라’는 부르심입니다.
충분히 알지 못해도, 통제할 수 없어도, 사랑이 침묵으로 돌아와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해하지 못하고 붙잡지 못하면서도 사랑하는 그 행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다가갑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완전히 아시고,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서로를 사랑하고, 나머지는 하나님의 자비에 맡깁시다.
하나님의 자비 안에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상실과 신비로 물들어 있을 때조차도 말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 중에, 혹시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자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부모님이 계십니까?
배우자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분이 계십니까?
친구나 가족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지켜보며 무력감을 느끼는 분이 계십니까?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그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완전히 아십니다.
우리는 그들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만지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조건 없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의 사랑보다 크고, 하나님의 이해는 우리의 이해보다 깊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향해 쏟은 사랑보다도 하나님이 압살롬을 향한 사랑이 더 컸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우리의 마음보다도 하나님의 마음이 더 간절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상실과 신비로 물들어 있을 때조차도 하나님의 자비 안에 소망이 있습니다.
다윗은 “내 아들 압살롬아”라고 다섯 번을 외쳤습니다.
그 사랑이 결국 압살롬을 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향해 “내 아들아, 내 딸아”라고 부르십니다.
우리가 반역할 때도, 우리가 등을 돌릴 때도,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갈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내 아들, 내 딸”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은 실제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이라는 다윗의 절규가 십자가에서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사랑을 배워가며, 하나님의 자비 안에서 참된 소망을 발견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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