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사무엘을 부르신 하나님
말씀 : 사무엘상 2:12~4:1a
요절 : 사무엘상 3: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우리는 지난 말씀을 통해 사무엘이 한나라는 기도의 여인을 통해 태어난 것을 배웠습니다. 사사시대 말기는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매우 희귀한 시대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아이 사무엘을 불러 그 시대를 밝히는 말씀의 종으로 쓰시고자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어리고 부족할지라도 우리를 어두운 이 시대를 밝힐 등불과도 같은 말씀의 종으로 쓰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소망과 비전을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엘리의 집을 버리신 하나님 (2:12 – 36)
12절을 보십시오. 2:12-17절은 당시 시대를 이끌어 가야 했던 두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의 행적에 대한 기록입니다. 성경은 엘리의 두 아들의 행실이 나빴고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모른다니 이것은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자기가 섬기고 경외해야 대상을 모른다는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상황입니다. 수학 선생님이 덧셈 뺄셈을 모르고 미적분을 가르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엘리의 아들들이 제사장 직무를 수행한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 자기 이득과 탐욕을 채우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나쁜 행실이 어떠했습니까? 원래 제물 중에 제사장에게 주어진 몫은 흔든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였습니다(레7:34). 그러나 홉니와 비느하스 이 용감한 형제들은 어느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그 부위만 먹어야 하지? 다른 부위는 더 보암직하고 먹음직도 한데.” 그들은 사환을 시켜 제물 고기를 삶는 냄비나 솥가마에 세 살 갈고리를 찌르도록 하여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고기는 아무 것이나 먹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고기의 기름을 먹고자 했습니다. 원래 제물에서 기름을 발라내고 태워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레3:16). 그런데 그들은 기름 섞인 맛있는 고기를 먹기 위해 사환을 시켜 날고기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유명 세프들을 불러서 냉장고 속에 넣어둔 날고기로 15분만에 술 안주 요리를 만들게 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제사는 백성들이 죄를 범했을 때 제물을 통해 자신들의 죄를 속량하는 거룩한 의식입니다. 그런데 이 제사를 집례하는 자로서 제사의 거룩함을 누구보다 앞서 지켜야 할 자들인 제사장들이 오히려 그 제사를 멸시하였던 것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이것만으로 죄가 심히 컸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음란의 죄도 더하였습니다.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상습적으로 동침을 했습니다. 성소의 거룩함을 지켜야 할 자가 앞장 서 성소를 부정한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홉니와 비스하스는 아내가 있는 자들이었음에도 이런 짓을 했으니 너무나도 부도덕하고 음란한 자들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런 자들은 당장 돌로 쳐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사장의 권세를 이용해 죄를 은폐하고 버젓이 활보했습니다. 백성들은 이런 종교지도자들을 보며 실망하며 분노와 탄식과 한숨이 저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라도 나서서 자녀들의 탈선을 막아야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 엘리는 어떠했습니까? 엘리는 두 아들에게 한 마디 훈계를 하기는 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솜방망이도 이런 솜방망이가 없습니다. 과연 이 일이 이렇게 넘어가도 될 일입니까? 엘리는 제사장으로서 공의의 말씀으로 분명히 질책하고 혼을 냈어야 했습니다. 또 아버지로서도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 징계를 아끼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리하지 말라. 소문이 좋지 않다.” 이래가지고 아들들이 어떻게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들은 엘리의 말을 우습게 여기고 무시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셔서 엘리의 잘못을 분명하게 지적하셨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이를 볼 때 엘리는 하나님보다 자식들을 더 소중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와 대조가 됩니다. 한나가 기도하면서 간절히 원한 것은 아들 자체보다도 하나님이었습니다. 어렵게 얻은 귀한 아들이었지만 하나님을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서원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엘리는 하나님보다 자기 아들들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참된 사랑은 죄를 책망해서라도 돌이키게 함으로서 그 영혼을 파멸에서 건져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의 자녀들에 대한 인간적인 사랑이 도리어 자녀들을 파멸로 이끌어가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엘리 집안에서 제사장 직분을 거두어 가시고 다른 사람에게 넘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엘리의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 것이라는 무서운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멸시를 받거나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시만 한편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시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를 경멸하시는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런 절망적인 시대 가운데 그 시대를 밝힌 소망의 싹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바로 한나가 기도 응답으로 얻은 아들 사무엘이었습니다. 아이 사무엘은 어떻게 자라났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사무엘은 평일 매일 에봇을 입고 경건과 말씀 지켰습니다.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윗옷을 말합니다. 아이가 입기에는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울 수 있었습니다. 저도 가끔 주일에 정장을 입고 교회에 오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편하게 슬리퍼나 간단한 면티와 알록달록한 무늬가 있는 것을 그대로 입고 나가고 싶은 경우가 있습니다. 하물며 어린 사무엘 역시 친구들이 입는 최신 유행의 옷을 싶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사무엘은 그 또래 다른 아이들과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이 때문에 때로는 놀림을 받거나 심하면 왕따를 당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사무엘은 꿋꿋하게 에봇을 입고 성전에 나아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아주 영향력이 안 좋은 형 홉니와 비느하스가 옆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삶을 살았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사무엘은 마치 더러운 연못에서 피어난 연꽃과도 같습니다.
사무엘이 어떻게 두 형제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별되어 말씀을 지키고 섬길 수 있었을까요 ? 18절, 21절, 26절을 보면 ‘여호와 앞에서’라는 말이 지속적으로 나옵니다.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 사람은 하나님의 눈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참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행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함부로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 형들이 담배 피고 술 마시고 여자를 꼬시러 다닐 때 사무엘은 그 언행을 하나님 앞에 삼갔습니다. 형들이 “너는 왜 그렇게 고리타분하냐 지금이 조선 시대인 줄 아냐?”하며 놀릴 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엄마와 목자님을 향해 “나중에 커서 할테니 지금은 내 맘대로 할래요. 좀 내버려 둬요.”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앞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바로 이점이 엘리의 두 아들과 다른 결정적 차이점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의식하며 구별된 삶을 살았던 사무엘과 어른이 되어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았던 엘리의 아들들의 인생은 이후로 복과 저주라는 두 갈래 길로 완전히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사사 시대 말기와 매우 흡사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이 살아갑니다. 죄 짓기를 물 마시듯이 합니다. 어린 아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얼마 전 고양이 집을 지어주던 한 아주머니가 떨어진 벽돌에 맞아 사망한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의 범인은 놀랍게도 초등학생이었습니다. 낙하 실험을 했을 뿐이라는 아이의 말을 과연 곧이곧대로 믿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교실 안에서 폭력, 왕따, 무분별한 이성교제, 언어폭력 등은 위험수위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 배후에는 부모의 문제, 어른의 문제가 있습니다. 요즘엔 한 두 명씩 밖에 낳지 않아서인지 자기 자녀가 너무 귀하게 여긴 나머지 제대로 훈육을 하지 않는 부모가 많습니다. 저마다 자기가 왕인줄 알고 자기 마음의 소욕대로 본성대로 사는 것에 대해 별 문제의식이 없습니다. 더구나 주변에 본 받고 배울만한 어른이 없을 때 이런 현상은 더욱 심화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죄악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엘리 시대에 사무엘과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나온 사실이 이를 입증해 줍니다. 우리 안암 1부의 양들과 2세들이 바로 그런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처음부터 세상에 만연하는 죄악된 문화를 거스르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세마포 에봇을 입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학생 리더가 나는 일학년 때부터 목자님을 만나는 바람에 못 해 본 것이 많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2세가 나는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고 하는 바람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불평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는 나를 홉니와 비느하스 같이 망하는 인생으로 가지 않게 막아주는 최소한의 안전 장치이자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준비시키는 필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대세를 따르지 않고 남들과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불편하고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나를 죄악으로부터 지켜주시고 일찍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해 주신 은혜에 깊이 감사하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이 무엇인지 좋은 본을 보여줄 수 있는 목자이자 부모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양들과 제자들, 그리고 2세들이 죄악된 시대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II. 아이 사무엘을 부르신 하나님 (3:1-4:1a)
3:1절을 보십시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그때는 제사장들이 말씀의 종으로 자기의 소임을 다하지 못하여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였습니다. 인생길을 비춰주는 말씀의 등불이 희귀하자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삶의 길을 찾지 못하고 희망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농사짓고 양치며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른 채 살아갔습니다. 진리와 절대적인 가치기준을 갖지 못해 방황했습니다. 방황하다가 의지할 대상으로 붙든 것이 바알과 아스다롯 같은 헛된 우상이었습니다. 공허한 내면을 채우기 위해 점점 더 쾌락의 노예가 되어 갔습니다. 말씀이 없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세계,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없는 영적 소경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2절에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했다는 말씀은 이런 시대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씀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살던 시대는 말씀이 희귀한 시대였습니다. 오늘날도 점점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곳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는 ‘성경기독교’라 칭해질 정도로 말씀을 소중히 하고 열심히 공부하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오늘날 수많은 정보들이 매일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정보화시대에서 정보는 곧 사람들의 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서 정보사회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합니다. 책과 신문을 읽고, TV를 보고, 인터넷을 뒤지며, 스마트폰을 터치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시간과 노력을 통해 얻은 정보들이 우리에게 삶에 희망이 넘치게 하였습니까? 매일 쉬지 않고 스마트폰을 들여다 봤더니 비전이 충만해지더라는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런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말씀은 들어도 비전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들으면 들을수록 비관적이 되고 답답해지고 어두워지기 마련입니다. 매스컴에는 성경에 대한 공격, 교회에 대한 공격이 끊이지 않습니다. 일부 지도자들과 교회의 허물로 인해 결과적으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귀를 막고 아예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정보는 넘치지만 점점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가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가 OECD 가입국 중에서 수년 째 부동의 일 위를 지키고 있는 항목이 있습니다. 바로 자살율입니다. 특히 10대와 20대의 사망 원인 1위는 압도적으로 자살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희귀해진 시대, 비전을 잃어버린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 바로 성경 선생입니다. 말씀의 우물에서 은혜의 샘물을 퍼 올려서 갈한 영혼들의 목을 축이게 할 성경 선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세계, 영적 세계에 눈을 뜨게 해 줄 성경 선생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런 성경 선생이 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이 말은 성전 휘장 앞에 두는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문자적인 의미와 함께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희망은 아직 꺼지지 않았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희망의 등불을 켜고자 하셨습니까? 바로 아이 사무엘을 불러 말씀의 종으로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에서 잠을 자던 사무엘을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은 즉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에게 달려갔는데 이는 엘리가 그를 부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 했습니다. 이처럼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은 아직 그가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않았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사무엘이 달려오자 엘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인 줄 알고 이번에는 잘 대답하도록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이에 사무엘이 대답했습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사무엘이 부르심을 받을 당시에는 어린 아이에 불과했습니다. 7절 말씀에 보면 그는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였습니다. 그는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다 어린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실 때 세 번이나 엘리가 부르는 줄 알았습니다. 또 부르심을 받았을 때 어떻게 응답해야 될 줄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사무엘에게 임하사 그를 부르셨습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께서 너무 조급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애타는 목자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시대를 볼 때 절망하셨습니다. 엘리와 같은 인본주의적 지도자를 볼 때 분노하셨습니다. 특히 홉니와 비느하스와 같이 음란하고 죄악된 자들을 보실 때 더 이상 참으실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땅에 떨어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 나라로서의 비전을 상실하고 현실에 얽매여 신음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은 심히 슬퍼하셨습니다. 그 시대에 대해 절망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은 어린 사무엘을 보셨습니다. 영육간에 어리지만 순수하게 하나님의 전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아이 사무엘을 보았습니다. 아이 사무엘이 있을 때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은 아이 사무엘에게서 그 시대를 구원할 놀라운 희망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비록 어리지만 그를 불러 쓰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아이 사무엘을 부르신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시대가 아무리 어둡고 절망적일지라도 사람을 부르시고 그 부르신 사람을 통해 그 시대를 구원코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사무엘과 같은 우리를 부르사 이 시대를 구원코자 하십니다. 우리는 학생회 형제 자매님들은 어떻습니까? 유능한 성경 선생, 멋진 목자의 인생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다들 전공도 승리하고 전도도 열심히 하여 양도 치고 싶을 것입니다. 새벽을 깨워 기도하고 싶고 파워풀한 메신저가 되고도 싶습니다. 세상 죄악과 구별되어 거룩한 삶을 살고도 싶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 생각합니다. 전공과 사명을 동시에 감당하자니 전공이 무너질 것 같습니다. 전공 하나 감당하기에도 벅찹니다. 요즘 양들은 전도하러 나온 사람을 무서운 눈빛으로 째려보면서 거부한다는데, 캠퍼스 폴리스도 있다는데 ‘그럼 그렇지 내 주제에 무슨 피싱... 피싱은 사모님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이지... 나는 아직 아니야’ 아예 포기합니다. 새해 여러 가지 결단을 하였지만 돌아보면 지키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반복해서 죄에 넘어지는 모습에 ‘이런 내가 무슨 목자가 되겠는가?’하면서 슬퍼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셔도 이렇게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곤란하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서른살 마흔살 쉰 살이 되면 준비가 끝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실상 우리는 늘 부족합니다. 늘 연약합니다. 저는 서른 살이 넘었지만 여전히 아이 같습니다. 제 동역자가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아이처럼 부족하고 연약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유명한 설교자인 찰스 스펄전은 16살에 설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언더우드는 4살 때 선교사로 살기를 결단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들 보다 다 나이도 많습니다. 충분히 하나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UBF 개척사에서 들을 수 있는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개척을 시작했던 나이가 바로 20대 초반이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희귀해져 가고 점점 어두어져 가는 이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애타는 심정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을 반드시 귀하게 쓰실 것입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소망을 두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아이처럼 부족한 우리를 부르셔서라도 이 시대에 말씀의 빛을 비추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바로 이 세상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에 인격적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주신 첫 메시지는 엘리 집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큰 죄를 범했고, 엘리는 이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않았습니다.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할 것이며, 결국 그의 집이 영원토록 심판 받게 될 것입니다. 어린 사무엘로서는 이런 무서운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가 무슨 말을 들었냐고 추궁하자 자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대로 가감 없이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그가 자라자 여호와께서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실로에서 사무엘에게 말씀으로 자기를 나타내시고 사무엘은 그 말씀을 온 이스라엘에 전파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무엘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말씀으로 다스리셨습니다.
이상에서 사무엘을 부르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자기 백성 가운데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이 백성들 가운데 풍성하며 흥왕하여 세력 얻기를 원하십니다.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인 가치기준으로 삼고 말씀에 순종하여 축복된 삶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운 종들이 게으름에 빠져 자기 소임을 버렸을 때 그 시대는 말씀이 희귀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며 우상숭배자들이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을 불러 새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어리지만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순수한 영적 소원이 있는 그를 불러 당신의 말씀을 백성들 가운데 전하시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러한 말씀의 종을 부르십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며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종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음성을 듣고 일어서는 주의 청년들 되기를 기도합니다. UBF는 말씀의 모임입니다. UBF는 이사무엘 선교사님 한 분이 자신의 정체성을 말씀의 종으로 인식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말씀이 희귀한 시대에 말씀으로 시대를 살리고자 했던 한 청년의 비전, 그것이 우리 모임의 시작이요 본질입니다. 이것이 UBF입니다. 우리가 이 정신을 잘 계승하여 성경으로 살아가는 한국교회와 우리 모임의 참된 계승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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