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무엘상하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

이창무 2015. 4. 30.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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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신년 사무엘서  제 4 강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


▣ 말씀  /  사무엘상 8:1-12:25

▣ 요절 /  사무엘상 12:14,15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왕정 제도를 도입하시고 초대 왕 사울을 세우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왕정 제도는 나쁜 것일까요? 좋은 것일까요? 사울은 좋은 사람일까요? 나쁜 사람일까요? 참 대답하기 애매한 질문들입니다. 애매한 것을 정해 주는 남자에게 물어보면 답을 해 줄까요? 아마 애정남도 확실하게 정해 주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입장과 기준에서 보느냐에 따라 좋기도 하고 나쁘게 보이기도 합니다. 원래 어떤 제도나 사람에 대한 평가 자체가 흑과 백을 명확하게 가르기 쉽지 않은 애매한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그렇다고 선악을 판단할 기준이 없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 기준은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성을 맺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제도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거스르는 제도와 사람은 악한 것입니다. 어떤 제도나 사람이든지 하나님 앞에 중심이 바로 서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축복해 주십니다. 우리 모임의 제도가 하나님을 섬기는 제도가 되고,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공동체를 함께 이뤄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8:1절을 보십시오. 사무엘이 어느새 나이 들어 노인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아이 사무엘을 부르신 하나님'을 공부했는데 세월이 정말 빠릅니다. 사무엘은 엘리처럼 자기 아들들을 사사로 세우고 그들에게 직무를 이양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의 아들들은 문제가 많았습니다. 재판을 할 때 뇌물을 받아 판결을 굽게 했습니다. 아마 사무엘이 워낙 청렴결백하게 살다보니 가난에 한이 맺힌 아들들이 돈을 밝히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나이 많은 사사와 그의 불량한 두 아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습니까? 백성들은 이대로 두었다가는 엘리와 두 아들 때문에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그 아픈 비극이 다시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사무엘을 찾아 와 우리도 이제 다른 나라처럼 왕정을 도입하자고 요구했습니다. 백성들은 잘 먹고 잘 사는 주변의 이방 나라들이 부러웠던 모양입니다. 애굽과 같은 선진국들을 보니 모두 다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체제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사사 제도는 구시대의 낡고 비효율적이며 불안정한 제도로 보였습니다. 왕을 세워 강한 리더십을 발휘하게 하면 우리도 그런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게 될 것 같았습니다. 나름 필요하고 정당한 요구로 들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요구는 사무엘의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다. 비록 노골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장로들의 말이 마치 사무엘이 만족스럽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하나님도 사무엘처럼 백성들의 요구를 불쾌하게 여기셨습니다. 백성들이 '왕을 달라 왕을 달라' 하는데 지금까지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왕이 계셨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시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스라엘에는 다른 왕이 전혀 필요 없었습니다.


사실 사사 제도가 겉보기엔 엉성하게 허술해 보여도 시대를 앞서 간 최첨단의 제도입니다. 일단 사사 제도는 유지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저비용 고효율의 제도입니다. 게다가 왕처럼 세습되지 않고 출신에 관계없이 능력 있는 사람이 발탁되는 제도였습니다. 요즘 조직 이론에는 조직의 분권화, 자율성, 유연성을 강조하는데 여기에 딱 맞는 제도가 사사 제도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제도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에 가장 잘 어울리는 제도입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6)는 말씀 속에 있습니다.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영광이고 자부심이고 정체성입니다.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유일한 나라! 세상에 이렇게 특별하고 존귀하고 복 받은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그들은 제사장 나라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이 나라를 부러워하고 따르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오히려 다른 나라들을 부러워하고 그 나라들의 길을 우리도 따라 가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기 싫습니다. 차라리 사람에게 다스림을 받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태도로 나온 것이 어제 오늘 일만이 아닙니다. 애굽에서 나온 날부터 지금까지 백성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를 하려고 시도해 왔습니다. 이번 일도 그런 불신과 반역의 역사의 연장선 가운데 벌어진 일입니다.


우리도 세상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간혹 있지 않습니까? 오랜 만에 설날 고향에 내려갔더니 사촌 형이 외제 승용차를 타고 와서 세뱃돈으로 5만원권을 마구 뿌려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씁쓸합니다. 옛날엔 나보다 별로 잘 난 것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그 동안 뭐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 공부하고 소감 쓰고 기도하고 제자 양성하는 일이 부질없어 보이고 나도 저 사람들처럼 부동산이다 증권이다 쫓아다녀야 잘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목자입니다. 우리는 제사장보다 위대하고 왕보다 더 존귀한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동역자이고 하나님의 친구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부러워해야지 우리가 세상 사람들을 부러워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죽으나 사나 말씀을 붙들고 양들을 섬길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말씀에서 은혜를 받고 양들이 살아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 제일 행복합니다. 아무리 좋아 보여도 우리의 정체성에 맞지 않는 것에는 더 이상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슬그머니 들어 온 세상 것이 결과적으로 우리를 타락과 배교의 길로 이끌어 가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화려한 세상의 겉모습에 휘둘리지 않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의 정체성을 분명히 지키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왕을 세워 달라는 백성들의 요구를 거절하셨겠죠?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백성들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고 하십니다. 참 이상합니다.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시면서 왜 허락을 하셨을까요? 어쩔 수 없어서 소극적으로 타협하신 것일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후에 적극적으로 왕을 세우시는 모습을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어떤 뜻이 있었을까요?


첫째로 하나님은 왕을 세워 백성들을 훈련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제 막내딸이 뜨거운 냄비를 자꾸만 만지려고 계속 보챈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못 만지게 막다가 어느 날 안 되겠다 싶어 살짝 만지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어서 만지라고 해도 절대 만지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정의 뜨거운 맛을 보여 주셔서 잘못을 스스로 깨닫도록 하고자 하셨습니다. 11절부터 18절까지 보면 왕정의 뜨거운 맛, 쓴 맛을 미리 경고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는 영어 성경에 보면 'take'(가져가다)라는 동사입니다. 왕은 아들은 가져다가 군대에 보내고 딸을 가져다가 무수리로 만들고 노동력을 가져가고 재산을 세금으로 가져 갈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뭐든지 다 백성들에게 넉넉히 베풀어 주시는 왕이셨습니다. 그러나 사람 왕은 뭐든지 백성들에게서 다 가져가 버립니다. 한 때 바로의 노예였다가 해방된 이스라엘에게 자유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뚜렷한 표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왕이 등장하면 그들은 다시 사람의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이 백성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왕을 달라했으니 이제 그 왕에게 가서 하소연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왕이 하나님이 하셨던 것처럼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수 있겠습니까? 구원해 주기는커녕 왕은 오히려 백성들에게 걱정과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후에 정말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악한 왕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가 마구잡이로 떼를 쓰면 간혹 들어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안 들어주시면 저 삐뚤어질꺼에요.’하면 들어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받았다고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일을 꼬투리로 해서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우리는 뜨거운 맛을 보고 나서야 뒤늦게 후회를 합니다. 꼭 그렇게 훈련을 받아야만 깨달으면 너무 미련한 짓 아닙니까? 하나님이 좋지 않다고 하신 것은 정말 좋지 않은 것입니다. 경험해 보지 않았어도 말씀 그대로 믿으면 됩니다. 말씀을 믿지 않고 고집 부려 봐야 돌아오는 것은 쓰디쓴 고생과 후회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떼를 쓰고 고집을 피우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에 순종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왕을 세우시되 이방 왕들과는 다른 새로운 왕의 모델을 세우고자 하십니다. 신명기 17:14~20까지 보면 하나님은 만약 너희가 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반드시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왕으로 세우며 왕은 평생 말씀을 가까이 하고 지켜 행하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오래 전에 백성들이 왕을 세워달라는 요구를 할 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요구를 수용하시되 이스라엘의 왕은 이방 왕들과 달라야 한다고 못을 박으셨습니다. 어떻게 달라야 할까요? 이방 왕들은 스스로를 사실상 신의 위치에 올려놓고 절대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이어야 합니다. 또한 왕의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법도대로 다스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런 왕이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 다스린다면 왕의 제도 그 자체가 더 이상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9장부터 11장까지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우시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의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사울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유력한 사람인 기스의 아들이었습니다. 유력하다는 말은 부자란 말입니다. 또 현손까지 족보가 나온 것을 보면 뼈대 있는 집안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울은 이스라엘에 사울보다 더 잘 생긴 남자를 찾아볼 수 없는 극상품 미남자이었습니다. 게다가 키도 훤칠하게 커서 남들보다 어깨 위로 머리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런 조건을 다 갖춘 남자는 대개 겉멋만 들어서 인성은 엉망인 경우가 많은데 사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잃은 나귀를 찾아 전국을 찾아 돌아다닐 정도로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했습니다. 중도에 아버지가 걱정하실까봐 돌아가려고 한 것을 보면 효성도 지극합니다. 또 일개 사환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 가려고 한 것을 보면 겸손함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반드시 예물을 들고 찾아가려 한 것을 보면 예의가 바른 청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엄마 친구 아들 같은 사울을 왕으로 택하셨을까요? 그러면 그냥 엄마 아들인 우리는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는 것일까요?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시점에는 사울 같은 사람을 왕으로 세워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앞서 백성들의 요구에 의해서 왕의 제도를 세우게 되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왕도 백성들의 요구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왕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12장 13절에 보면 사울을 가리켜 너희가 구한 왕, 너희가 택한 왕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백성들은 열왕들 사이에 어디 내 놓아도 꿀리지 않고 국격을 높여 줄 왕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왕 들어줄 바에 원망이나 불평이 없도록 이런 기대까지도 다 고려하셔서 초대 왕을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시는 지도자는 조건이나 인간 기초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무엇보다 믿음의 사람이고 영적인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사울은 아직 이런 점에서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울을 어떻게 도와 주셨습니까?


첫째, 하나님은 사울에게 분명한 소명의식을 갖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사울은 너무 갑작스럽게 부르심을 받아서 그런지 소명 의식이 희박했습니다. 왕을 선출하기 위해 제비를 뽑을 때 짐짝 사이에 숨었던 일과 왕으로 선출된 후에도 자기 밭에 가서 소를 몰고 있었던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왕으로 세운 이가 사무엘이나 백성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것을 확신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여러 가지 복잡하고 정교한 장치들을 사용하셨습니다. 모든 일은 '암나귀 가출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암나귀가 집을 나가지 않았다면 사울이 사무엘을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러면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 부을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암나귀는 우연히 집을 나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으로 나간 것입니다. 또한 사울이 기름 부음을 받은 후에 사무엘은 그에게 세 가지 징표가 나타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첫째는 암나귀는 찾았으나 부모들이 사울을 인하여 걱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세 사람을 만나는데 그들로부터 문안을 받게 되고 그 중에서 떡 두덩이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산에 이르러 예쓰 찬양팀을 만나게 되고 그때 하나님의 영이 크게 임하여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들이 어찌나 구체적인지 정말로 이뤄졌을 때 사울이 하나님께 부르심 받았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 신기한 것은 미스바에 백성들이 다 모여 왕을 선출하는 제비를 뽑았는데 그 수많은 사람들에 최종적으로 사울이 뽑힌 사실입니다. 여기서 사울이 뽑힐 확률은 로또 1등에 당첨될 확률보다 더 희박했는데 결국 사울이 뽑혔습니다. 이를 통해 사울은 다시금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사명을 주셨다는 것을 아는 것 즉 분명한 소명의식을 갖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소명을 발견한 사람은 목적이 분명한 삶을 살아갑니다. 소명 의식이야말로 릭 워렌의 책 제목처럼 Purpose Driven Life,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입니다. 사도바울이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도행전 20:24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에게는 '사느냐 죽느냐' 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중요한 부르심의 확신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요? 음성을 듣든지 꿈을 꾸든지 무슨 신비한 체험을 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울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께서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평범해 보이는 일들을 통해 그에게 부르심의 확신을 갖게 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연 속에 필연이 있습니다. 내가 UBF 목자님을 만나 성경 공부를 하다가 예수님을 만난 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수많은 가짓수 중에 왜 하필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도하셔서 나를 구원하셨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 소명이 어디에 있는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연인 듯 보이는 작은 일들도 스쳐 보내지 말고 기도하면서 묵상해 보십시오. 그 속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소명에 뿌리 내린 목적이 분명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심으로 왕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었을 때 주위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라고 말한 것을 보면 사울은 평소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경험도 거의 없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마치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육적으로는 훌륭하지만 영적으로는 무지했던 니고데모를 연상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크게 임하게 하셔서 새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러자 평소 소심하고 내성적이던 그가 큰 소리로 예언을 선포하는 담대한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또한 암몬 족속이 쳐들어와 길르앗 야베스를 위협하고 있을 때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임했습니다. 그러자 사울에게 거룩한 영적인 분노가 생겼습니다. 사울이 그 분노를 담아 소를 토막 내 열두 지파에 보내자 단번에 33만명 대군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 군대를 거느리고 새벽에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암몬 군대에 궤멸적인 을 입혔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충만해지니까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능력과 적진에 뛰어 들어가 싸울 수 있는 용기까지 생겼습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맡은 바 사명과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스가랴 4:6)"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성전 재건의 사명을 부여 받은 스룹바벨 총독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에서는 인간적으로 뛰어나고 능력이 있으면 지도자가 되는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지도자는 다릅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볼 때 뛰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그것만으로 영적인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내 힘과 능력만으로 되지 않고 오직 성령으로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암 1부의 학생 목자님들을 보면 다 사울 못지않게 지도자로서 기초와 조건을 다 갖추신 분들입니다. 학생회에는 미남 미녀들 밖에 없습니다. 또 하나 같이 영어도 잘 하고 학점은 일단 4.0을 깔고 들어가고 인간성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영적인 지도자가 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성령의 사람들이 되셔야 합니다. 영적인 세계를 보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고 성령충만한 담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말씀 공부를 열심히 할 뿐 아니라 기도를 배우셔야 합니다. 사울도 한때 성령을 받았지만 후에 기도를 하지 않자 성령이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학생회 목자님들이 올 한 해 기도를 배우시고 늘 성령이 충만한 영적인 리더들로 성장하시길 기도합니다.


12장에서 사무엘은 왕을 세운 후 고별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고별 메시지의 전반부에서 사무엘은  자신과 하나님을 변호하고 왕을 구한 백성들의 죄악을 고발합니다. 여기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내리치고 건기에 폭우가 쏟아지는 이변까지 곁들여지자 백성들은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보통 어떤 사람이든 고별사를 남길 때는 지금까지 도와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과 좋은 말로 덕담을 주고받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의 고별사는 좀 살벌합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사무엘도 화기애애한 분위기 가운데 퇴장하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사무엘은 왕을 구하는 것에서 나타난 백성들의 불신과 반역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요구대로 하나님께서 왕을 세워 주시고 게다가 자기들이 바라던 왕의 이미지에 쏙 들어맞는 왕까지 주시자 왕을 구한 것이 옳은 일이었고 참 잘한 일이라고 합리화하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이런 분위기에 급브레이크를 걸고 진실을 바라보고 죄를 회개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무엘이 이제 와서 다시 왕의 제도를 무르고 사사 시대로 돌아가자고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과거는 과거고 앞으로가 중요합니다. 왕이 있다고 해서 그들의 장래가 보장된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왕이 있다고 해서 꼭 망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미래는 왕의 존재 여부나 그들의 능력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들의 장래는 하나님께 대한 자세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만일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의 목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지 아니하며 또 너희와 너희를 다스리는 왕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면 좋겠지마는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조상들을 치신 것 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 왕을 세우기 전이나 왕을 세운 후에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면 형통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불순종하게 되면 조상들을 치신 것처럼 치실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한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은 역사상 가장 강대하고 부강하고 영광스러운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왕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강대국을 의지하며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랬을 때 점점 국력이 쇠퇴하여 마침내 멸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의 장래도 하나님께 대한 자세, 하나님께 대한 순종 여부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사람들은 장래를 위해서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돈을 모으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축복하지 않으면 이런 노력은 물거품이 됩니다. 축복된 인생을 살려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축복해주십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자손들까지도 아름다운 장래가 보장됩니다. 우리의 장래가 보장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방패요 상급되시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든 생사화복의 주관자시며 온 맘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에게 넘치도록 축복을 내리시는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려 드립니다.





(2012.1.29 이창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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